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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문화와 순기능과 역기능

by 랭님 2009. 11. 13.

3. 사이버 문화와 순기능과 역기능

어떠한 문화든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기 마련이다. 철기문명의 등장을 예를 들어 보자. 철기의 사용은 인류의 삶의 질을 높힌 긍정적인 점이 있다. 바늘과 화살과 창검은 사냥을 용이하게 하여 생물학적 결정력이 약한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의 지배로 군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철기문명을 동시에 살육과 전쟁의 도구로서의 역기능을 수행하였다. 어떠한 문화와 문명도 그 자체로서는 가치 중립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칼이라도 강도가 악한 의지로 악하게 사용하면 멀쩡한 사람을 죽이는 살인무기가 되지만, 의사가 선한 의지로 선하게 사용하면 죽어 가는 환자를 살려내는 수술도구가 된다.

사이버 문화도 마찮가지이다. 그 순기능을 이룬다 말할 수 없지만, 그 역기능 역시 적지 않은 것이다. 이 글에서는 사이버 문화의 역기능을 집중적으로 관찰해 보려고 한다.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가상현실을 만들어 낸 업체에서는 “가상현실은 물리적 세계처럼 공유되고 객관적으로 현존하며, 예술작품처럼 구성할 수 있고, 꿈처럼 무제한하고 무해하다.”고 하였으나 사실 그렇치 않다. 사이버 문화도 여러 유해한 역기능이 지적되고 있다. 이를 종합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 사이버 스페이스는 인간이 컴퓨터 속에서(in silico) 창조하여 통치하는 세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이버 공간에서는 환상과 현실의 구분이 불가능하여 진다. 보들리야르는 사이버 스페이스를 “시물라크”로 칭하였다. 시물라크(simulacr)란 실재하지 않으면서도 실재하는 것처럼 다가 오는 인공 이미지, 즉 사이버 스페이스를 말한다. 따라서 실재와 비실재의 혼돈은 인간의 의식의 혼란을 야기 시키게 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참이며 정당하고 아름답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들은 무성(nothingness)으로서 거짓되고 악하고 추하다는 전통적인 가치와 규범의 혼란을 가져온다.
하임(Michael Heim)은 사이버 공간이 플라톤이 주장한 이데아 세계의 구현이라고 하였으며, 테일러(Mark C. Talyer)는 헤겔이 주장한 절대정신 실현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가상공간의 무계중심은 정신계(noosphere)이며, 물질계는 배제되어 있다. 이러한 가상공간은 현실세계의 경계로부터 벗어나 있어 현실 세계와의 건너 뛸 수 없는 간격과 깊은 틈을 만들어 놓았다. 이제는 ‘세계-내-존재’라는 실존적 인간이 ‘가상 세계-내-존재’라는 가상적 인간으로 실존의 양식이 바뀌게 된 것이다. 세속적인 공간에서 거룩한 공간을 추구한 전통문화와 달리 이제는 가상공간을 거룩한 공간으로 추종하게 된 것이다. 세속사회에서 사라진 거룩한 공간이 가상공간으로 부활 한 것이다.

2) 사이버 공간의 무규범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전통적인 현실 공간에서는 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규범과 전통 그리고 모범적인 행동 양식이 존재한다. 사이버 스페이스에서도 이러한 요소를 개발하자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사이브 스페이스가 갖고 있는 ‘탈영역화’와 ‘다층성’의 기조에 전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현실공간에서처럼 개별적인 인간에 대한 가시적인 규범적 통제가 불가능하고 단지 사이버 공간에 등장하는 익명적인 존재에 대한 기술적인 통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각종 범죄는 최근 Y2K 문제처럼 현실세계의 범죄보다는 범세계적이고 치명적인 것이 분명하다.    

3) 사이버 공간에 제공하는 익명성의 문제이다. 가상 세계의 이용자들은 이름이나 얼굴 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폭력적이고 음란하고 범죄적인 행위들은 수행하고 익명적 정체성의 안락한 안전을 오히려 즐기게 된다. 그리고 남성이 여성처럼 위장하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듯이, 모든 개인적인 정체성의 위장이 가능해진다.
사이버 문화의 익명성은 사회구성원의 개인화를 더욱 부추길 것이다. 사회적 연속은 곧 개인용 컴퓨터의 영역안에 저장됨으로써 개인적 단절의 단위로 변경된다. 인터넷 사용자들이 모두 익명의 존재가 되어서 이른바 육체성을 결여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결과 사람들이 자기 연출된 ‘단편인격’으로 전락한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그러므로 사이버 스페이스에서는 인간 사회의 공동체성이 여지없이 붕괴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익명성의 전자 미디어야말로 사회규범이 해체되어 있는 집합적 무의식을 가장 효과적으로 들추어낼 수 있다는 것이고, 이로서 일상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심층의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남으로서 결국 ‘미개성’으로 회귀한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4) 인간의 육체성 경시이다. “사이버펑크”라는 유명한 만화의 주인공 토포는 삼차원 공간의 가상현실의 유희장(Playing Field)에 들어 가면서 이렇게 탄식한다.

“내가 나의 고깃덩어리를 뒤에 남겨 두고 그냥 여기서 살 수 있다면. 만일 내가 순수한 의식이기만 하다면 행복해 질 수 있을 텐데”

여기서 고깃덩이는 인간의 육체성을 가리키는데 육체성을 협오하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사실상 사이버 공간상의 사이버 인간의 육체는 과장되어 있다. 남성들은 잘 발달된 근육을 지니고 있고 여성들은 거대한 가슴을 자랑한다. 그들은 현실적 육체보다 환상 속의 가상적 육체를 통한 상상적인 섹스를 탐닉하는 것이다. 상상적인 섹스가 육체적인 섹스보다 선호된다. 그래서 컴퓨터 구성물이 육체에 대해서 우위를 점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것은 가상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육체 없는 에로스로서 사이버섹스이다. 육체를 초극한 채 육체와 관계를 맺어나간다는 사실은 어쩌면 저 오래된 영지주의의 부활을 알리는 소식인지도 모른다. 옛 영지주의가 새로운 기술영지(Tech-Gnosis)로 부활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5) 사이버 공간이 음란하게 활용된다는 점이다. 인터넷 검색 프로그렘이 상용화 되면서 검색 빈도수가 가장 많은 단어가 ‘성’ 또는 ‘sex’라는 통계가 몇 년 전에 발표된 적이 있다. 테크놀로지는 중성적인 것으로서 성(性)을 결여하고 있지만 테크놀로지의 표상은 종종 성을 지니고 있으며, 역사상 새로운 발명이 성적 충동을 동반해왔다거나, 거의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그 통제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항상 에로틱한 것이 새로운 매체의 첫 번째 용법이곤 하였다. 그러나 사이버 공간에서의 육체성을 배재한 성적 탐닉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그 통제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6) 가상현실은 인간의 경험을 상품화하려는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경향을 더욱 확장시킬 것이다. 소비자들을 단조로운 현실적 경험에서 벗어 날 수 있는 다양한 사이버 문화상품들이 흥분과 참여를 미끼로 호객할 것이다. 희소가치가 있고 독점적인 고부가 가치를 창출하는 사이버 문화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날 것이며, 이를 향유하기 위해 부유한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에 접근하기 위한 하드웨어를 갖추고 비싼 분당 사용료를 지급하기 위해 호주머니를 털어야 할 것이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림의 떡이 될 것이다. 따라서 “사이버 문화는 현재의 불평등을 더욱 강화하는 경향을 가질 것이며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널리 전파 할 것이다.”

7) 그러므로 사회적 계급은 사회적 현실에서와 마찮가지로 가상현실에서도 똑같이 구획될 가능성이 있다. 맑스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으로 지적한 ‘노동의 소외’가 이제는 ‘정보의 소외’라는 현상으로  재현될 것이다. 누구나 가상공간에서는 동일하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사이버 공간에 접근할 수 있는 경제력과 기술적 숙련도에 따라 가상공간에서도 계층적 구분이 확연하여 지기 때문이다. 문맹률 보다 컴맹률이 더 높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바버룩(R. Barbrook)과 카메론(A. Cameron)은 이 새로운 계급을 가상계급(vitual class)이라고 하고, 인지과학자, 엔지니어, 컴퓨터 과학자, 게임개발자, 기술 인텔리겐차, 그리고 각종 컴퓨터 접속 전문가들이 속한다고 하였다.

8) 가상 현실의 주장자들은 무한한 가상공간을 먼저 차지하는 개척자가 소유하고 통제하는 식민지로 비유한다. 이러한 발상은 미국의 서부 개척사에서 나타난 것처럼, 아메리카 원주민의 권리상실과 전멸로 이어졌다. 경제력과 기술력을 집약시켜 사이버 공간의 주도하는 집단들의 등장으로 다양한 소수 민족의 여러 하위문화들이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신문화식민지 쟁탈전이 전개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9) 사이버 공간에서는 언어적 장벽을 넘어 설 수 없다. 비영어권 사람들은 영어가 지배적인 언어로 구축된 세계적인 사이버 망 내에서 전개되는 문화 활동에서 대부분 배제될 수 밖에 없다. 가상현실의 화상적 본성과 실시간 번역의 등장으로 언어의 장벽을 극복할 것이라는 주장은 기술력에 관한 소박한 가정이다. 언어는 언제나 분리자일 것이며, 지배적 언어는 언제나 유리할 것이다.

10) 사이버 문화의 경우 모든 정보를 문서(letter), 오디오, 비디오를 통합하고 디지털 방식의 삼차원적인 영상으로 처리하지만 인간의 모든 지식과 경험을 표현하는 문화활동이 이러한 형태에 적합한 것은 아니다. “약호화 할 수 없고 디지털화할 수 없는 지식의 유형은 가상 공간에서 드러나지 않게 될 것이다.”    

11) 사이버 생명체의 문제이다. 가상 인간에게는 유기체적 생명(Bio)의 외적 질서와 가치가 배제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생명(Joe)의 내적 인격적 질서와 가치가 무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현실적 생명체인 인간보다 기계적 가상적 인간을 이상적이고 완벽한 인간으로 추종하게 함으로서 인간의 정체감에 혼돈을 일으키고 가상의 자아를 추구하게 하여 자아 성숙과 자아실현에 차질을 준다. 사이버 인간관계는 현실적으로 만나야 하는 고난을 담지한 육체성을 지닌 가족과 이웃 인간의 고통에 무관심하게 만들어 몰인정하고 비인도적인 인간상을 부추긴다. 그리고 다양한 인간관계를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는 통로를 차단하여 반사회적인 인간성을 추구하게 한다. 사이버 인간이 살아있는 인간과의 교감을 대치할 수 있으리란 근거 없는 믿음은 인간을 더 소외시킬 뿐이다.

결과적으로 사이버 인간을 추종하는 사이버 인간관계는 인간이 자기 자신과의 관계, 동료 인간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인간 생명의 영적 가치와 질서를 훼손시키고 마침내 영적 생명의 오염(Joe-pollution)과 영적 생명의 재난(Joe-hazard)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따라서 가상 생명체는 인공 생명체 이상으로 하나님이 창조한 생명의 질서와 생명의 가치에 대한 혼란을 야기시킨다.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 인간 이상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은 우상적인 것이요 사탄적인 것이다.  


4. 사이버 문화와 기독교

사이버 문화에 대한 기독교의 반응도 대체로 크게 두 가지로 양분되어 있다.  
컴퓨터가 666이라고 주장하는 논리처럼 ‘사이버 문화’는 ‘사이비 문화’로서 그 자체가 사악한 것이라는 태도이다. “사이버문화는 신자와 비신자 모두를 가상공간에 범람하는 사이버 음란물이나 사탄주의나 뉴에이즈 등 사이비 종교에 노출시키고 현실을 왜곡하거나 가상과 뒤바꿈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영적 관계를 마비시키고 선교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본다”.
그리고 사이버 문화가 교회에 도입될 때 생길 수 있는 영적 이완이나 신앙적인 위험을 경고한다. 더욱이 가상교회와 같은 새로운 교회의 형태는 교회의 본래의 기능인 말씀의 선포와 신앙의 교제와 섬김과 나눔의 봉사가 약화되고 철저하게 멀티미디어에 탐닉하는 개인주의적 신자를 양산하게 된다. 그리고 사이버 예배나 사이버 성례전은 현재의 교회 공동체에 파괴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본다.

다른 한편에서는 사이버 문화를 목회와 선교에 적극 활용할 것을 역설하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은 첨단 문화가 가져올 변화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이를 적극적으로 선교적인 목적에 활용할 것을 주장한다. 새로운 정보교환 방식과 현실경험을 대신하는 가상체험을 교회가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으면 미래사회에서 교회가 설 자리를 잃게 되리라고 예언하기도 한다. 이러한 입장에 한국에서도 많은 교회들이 적극적으로 개교회의 홈페이지를 만들고, 여러 기독교 문화단체들이 기독교 관련 사이트를 개설하고 선교단체들도 적극적으로 인터넷의 가상공간을 선교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4,000여개의 인터넷 공간상의 사이버 처치가 개설되어 있는데 이러한 가상교회는 교회출석이 어려운 장애자가 오거나 근무자들에게 재택예배의 기회를 부여하고, 신자들로 하여금 다양한 설교자와 다양한 예배를 손 쉽게 선택할 수 있게 하며, 대화식의 설교 등 다양한 방식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장점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화에 대한 기독교의 태도가 일정한 것은 아니다.  리차드 니버는 현대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세속 문화에 대한 기독교의 태도를 다섯 가지 다원적 유형으로 구분하였다.

1) 문화를 사악한 것으로 여기는 반문화주의(Christ against Culture)
2) 문화를 선한 것으로 여겨 문화적인 활동과 기독교 신앙적인 활동을 일치 시키려는 문화주의(Christ of Culture)
3) 문화에 비해 신앙이 우월하므로 기독교 신앙을 통해 문화활동을 통제하여야 한다는 신앙우월주의(Christ above Culture)    
4) 문화는 사악한 것이지만 믿음 안에서만 선하게 된다는 역설주의       (Christ and Culture in Paradox)
5) 문화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므로 기독교 신앙을 통해 선한 방향으로 변혁되어야 한다는 변혁주의(Christ as the Transformer of Culture)

니버는 이 다섯 유형중에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변혁주의라고 하였다. 따라서 사이버 문화에 대해서도 변혁주의적 입장을 취하여야 될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