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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의 특성

by 랭님 2009. 12. 17.

이은구

 



(1)
힌두교는 다신교이다. 신관념에 있어서 베다의 종교적인 전통을 이어온 힌두교는 기본적으로 다신교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힌두교는 그 집단의 특정한 신을 믿도록 강요받지도 않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인도에서 힌두들이 신봉하는 신들은 매우 다양하다. 힌두교에는 쉬바 신, 비쉬누 신과 같이 전인도에서 신봉하는 신이 있는가 하면, 특정한 촌락에서만 공양되는 촌락의 신도 있다. 남신도 있으며, 사라스바띠(Sarasvati;辯才天), 락쉬미(Laksmi;吉祥天)와 같은 아름다운 여신도 있다. 동시에 깔리(Kali) 여신과 같이 인간의 해골을 목에 걸고 붉은 피로 물? 혀를 내밀고 있는 추악한 공포의 여신도 있다. 많은 신화적 전승에 따라 방위를 나타내는 방위의 신들로부터 귀령(鬼靈)에 이르기까지 힌두교의 신전(神殿)은 매우 복잡다양하다. 도시, 농촌할 것 없이 크고 작은 온갖 종류의 신전이 있으며, 갖가지 이름과 기능을 지닌 신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

(2)
힌두교는 범신론적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힌두교는 다신교적이지만, 여러 신의 배후에 '최고신(最高神)'의 존재를 상정하고 있다. 이에 근거하여 창조의 신 브라흐마를 중심으로 비쉬누 신, 쉬바 신이라고 하는 삼신관(三神觀,三神一體說)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다신교적 형태에서도 일신교적 경향이 언제나 잠재해 있다. 힌두교의 특성 (1)에서 본 바대로 힌두교도는 많은 신들 가운데 어느 신을 신봉하여도 무방하다. 특정의 어느 신을 신봉하는 사람이 자신의 집안과 촌락에서 거행되는 다른 신들에 대한 제례나 의식에 참여해도 상관이 없다. 오히려 이러한 일들이 예사처럼 되어 있다. 이처럼 힌두교가 다신교라고 하지만, 그 다양한 신들의 배후에는 절대유일자의 존재가 상정되어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 절대유일자의 모습이나 성격 등을 구체적으로 나타낼 수는 없으며, 어떠한 언어적 표현도 초월한다. 모든 신들은 이 절대유일자의 무한한 기능, 즉 활동의 다른 국면을 대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이 위에서 말한 삼신관(三神觀,三神一體說)으로 이른바 역할분담을 하고 있다. 즉 우주창조는 브라흐마 신이, 그 유지는 비쉬누 신이, 창조를 위한 파괴는 쉬바 신(Mahesh)이 담당한다. 이것은 다신교적 힌두교를 일신교적으로 통합하는 것으로 어떤 신을 신봉해도 결국은 하나의 절대자에 귀의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힌두교가 다양하게 발전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관념은 '진실은 하나', '그 하나'라는 범신론적 사상으로 힌두교의 종교적 포용성을 동시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

(3)
힌두교의 특정 신에는 여러 화신이 있다. 힌두교의 신 관념 가운데 화신(化身;avatara)이라는 관념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것은 특히 비쉬누 신이 신격 인격 동물 등 다양한 모습으로 이 세계에 현현(顯現)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화신이라는 신관념을 통해 토속적인 성격의 여러 신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쉬바 신의 경우에는 여러 개의 별칭(異名)으로 불려지며 각각의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는 실질적으로는 비쉬누 신의 화신 개념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러한 화신 개념은 여러 지방 부족 카스트의 신들을 비쉬누 신과 쉬바 신으로 통합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

(4)
힌두교의 신은 인간적인 측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 힌두교의 신이 모두 쉬바나 비쉬누처럼 '위대한 신'인 것은 아니다. 이들보다 힘도 약하고 기능도 제한되어 있지만, 인간적인 친근감을 주는 신들이 많이 있다. 파괴의 신으로서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인 쉬바 신도 자비를 베푸는 자혜로운 신이기도 하다. 비쉬누 신의 화신인 끄리쉬나는 어린 아이로서의 끄리쉬나, 소치는 여인(gopi)과 즐기는 끄리쉬나, 인드라 신과 싸워서 소를 지키는 목동으로서의 끄리쉬나, 『바가바드기따』(Bhagavadgita)에 나오는 영웅으로서의 끄리쉬나,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 라다(Radha)와의 사랑의 유희(lila)에 흠뻑 빠진 끄리쉬나 등으로 등장한다. 그리하여 그 신에게 절대적인 신앙(bhakti)을 바치면 어떠한 사람도 구제를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

(5)
힌두교는 다양성을 인정한다. 힌두교에서는 일신교적 신관념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이단(異端)의 문제는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 브라흐만교의 전통에서 새로운 사상적 운동을 전개한 불교나 자이나교는 이단시되어 배척되기는 커녕 오히려 힌두교라는 거대한 흐름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중세에 일어난 쩨이딴여(chaitanya) ()나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은 까비르(Kabir)의 개혁파, 그리고 시크교를 연 나나크(Nanak)등은 분명히 이단적인 종교개혁 운동이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이단 취급을 받은 적이 없었다. 다양성을 인정함으로써 혁신적인 사상을 주창하고 나온 자이나교나 불교도 힌두교라는 도도한 큰 흐름에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

(6)
힌두교는 다양성 가운데 통합성이 있다. 힌두교는 실로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래서 힌두교의 세계에는 다양한 현상이 혼재한다. 그래서 힌두교도들에게는 신념과 행위에 있어서 선택할 수 있는 범위가 대단히 넓다. 서구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범신론자도 있고 다신론자도 있다. 유일신론자, 불가지론자, 심지어 무신론자일 수도 있는가 하면, 이원론자도 있고 다원론자, 일원론자도 있다. 생활의 도덕적인 면에서도 엄격한 행위규범을 지키려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다. 또는 도덕을 초월하여 신비주의적인 행법을 택하는 자들도 있다. 적극적인 행위(karma)를 통해 종교생활을 하는 자들도 있고, 명상이나 요가 등 정적인 수扇「? 몰두하는 자들도 있다. 가정의 종교 의식에 철저한 자도 있고, 그렇지 안은 자도 있다. 정기적으로 사원에 가서 예배하는 자도 있고, 전혀 가지 않는 자도 있다
.
인종과 언어의 계통을 달리하는 사람들 사이에 문화의 차이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같은 문화권 안에서도 불살생을 존중해 육식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닭이나 양의 희생을 바치는 사람들도 있다. 어느 것이 올바른 힌두교도인가를 문제삼을 만한 확정적인 종교적 준거 내지는 규범이 없다. 시시비비를 가리기 이전에 이들 모두다 힌두교도이다. 그렇다고 인도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다 힌두교도인 것은 아니다. 어떤 기준에 따라 결과적으로 힌두교도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즉 다양한 가운데에도 힌두교도임을 확증하는 하나의 근거 내지는 기준이 있다. 그 메카니즘은 주로 카스트제도(caste system)와 업(karma) 윤회(samsara)사상과 다르마(dharma;)라고 하는 사고방식이다. 이와같은 온갖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하나의 의무는 각자의 카스트에 따른 규칙과 의식을 충실하게 준수하려 하는 것이다. 또 그렇게 행위함으로써 좋은 내생을 기대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결국 사상적인 면에서의 다르마(dharma;)의 가치관과 까르마(karma;)사상, 그리고 사회적인 면에서는 이에 따라 형성 유지되어 온 카스트제도, 그리고 신앙적인 면에서는 신과 신화의 공유라는 점이 인도 대륙에서 그 다양한 문화를 하나로 통일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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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힌두교에는 다양한 종파(sect)가 있다. 힌두교는 수 천년 동안 계속되면서 여러 종파적 교리를 모두 받아들여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힌두교는 인도에서 생겨나고 성장한 여러가지 교리나 학설 등을 포함하는 매우 방대하고 복잡한 종교적, 문화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힌두교에는 사상이 서로 다른 종파는 물론이고, 거대한 신도가 있는가 하면 극소수의 신도가 있는 종파, 옛날부터 그 전통을 이어 온 종파가 있는가 하면 최근의 성자들에 의하여 새로이 성립된 종파 등 다양한 종류의 종단이 있다. 그 중 어떤 종단은 뚜렷한 교의나 교설도 없고, 어떤 종교적 사유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 경우가 있다. 여러 신을 동시에 숭배하는 종파도 있고, 한 신만을 믿는 종파도 있으며, 어느 신도 믿지 않는 종파도 있다. 그리고 같은 종파 내에서도 각자 서로 다른 신을 믿는 경우가 있다. 힌두교는 그 모든 종파들의 교리나 학설들을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힌두교를 어느 한 종파적인 입장에서 파악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알아둘 필요가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힌두교에서 공통적으로 숭배하는 신은 비쉬누와 쉬바이다. 그러므로 비쉬누를 주신(主神)으로 하는 비쉬누 파와 쉬바를 주신으로 하는 쉬바 파로 대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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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힌두교는 사상적으로 포용적이다. 힌두교 내의 여러가지 서로 다른 사상들 뿐만 아니라, 그 이외의 다른 종교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힌두교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힌두교는 자기의 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타종교를 박해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공존을 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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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에서는 (5)에서 본 바와 같이 이단이란 것이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힌두교 스스로가 사상적으로 관용적이었고, 다른 종교나 사상에 대해서도 관용의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힌두교와 대립 관계에 있거나 이에 반발했던 자이나교, 불교, 이슬람교, 그리고 근대에 와서 기독교와 서구의 근대사상 등과 정면으로 대립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항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틀과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것을 고수하며 그들을 자기 안으로 흡수 동화시켰다. 예를들면 사회적인 신분제도와 종교적 의례주의에 저항했던 불교도 실제로 힌두교의 한 파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붓다는 비쉬누 신의 아홉번째 화신으로서 힌두교 내의 한 신적인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이와같이 불교, 자이나교, 이슬람교 그리고 기타 토속적인 모든 종교적 신앙형태가 힌두교 안에 한데 어우러져 있다
.
베다 성전에 바탕을 둔 베다의 신앙적 전통이 브라흐만교를 거쳐 힌두교로 이어지 그 명맥을 유지해 나감으로써 그와같은 전조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브라흐만이라고 하는 사제 계급들은 불교에서의 상가(sanga)와 같은 어떤 조직을 갖춘 적도 없었다. 또한 그들이 단합하여 다른 종교에 대처해 본 적도 없었다. 그들이 다른 종교를 도외시하고 배척함으로써 힌두교의 최상의 사제 계급으로 주체적인 힘을 얻고 이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포용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가능하였던 것이다. 브라흐만 사제들이나 힌두 성자들조차도 자이나교와 불교의 종교적, 철학적 사상 가운데 많은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와같이 힌두교도들은 새로운 사상에 대해 언제나 대체로 포용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

(9)
힌두교는 신앙행위에 있어서 관용적이다. 힌두교에서 공통적으로 숭배되는 신은 대개 쉬바와 비쉬누라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 인도 전역에서는 이들 두 신 외에도 수 많은 남신과 여신들에 대한 숭배가 행해지고 있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여러 이유 중의 하나가 신관념에 대한 관용적 태도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힌두교도에게는 하나의 신을 믿는 것이 반드시 다른 신을 부정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유일신으로 비쉬누를 숭배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쉬바는 배척되어야 할 신이 아니라 비쉬누 신 다음으로 중요한 신이란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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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이유는 범신론적인 사유방식이다. 인도에는 많은 신이 있지만 모든 신들은 사실상 그 모습이나 형태조차 알 수 없는 절대유일의 신 브라흐마의 다른 면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한다. 어느 신을 믿든지 결국에는 브라흐마에게로 귀착되게 된다. 蕙撰? 쉬바 신자와 비쉬누 신자가 서로 싸울 이유가 없다. 서로가 배타적일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힌두교가 갖고 있는 신앙행위의 관용적인 면을 발견하게 된다
.
따라서 (7)에서 본 바와 같이 인도에는 신들에 따른 종파라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 쉬바 파, 비쉬누 파같은 것이 있지만 이들은 특히 그 신을 믿으면서 공양을 바치며 기원을 한다는 것 뿐이다. 쉬바 파의 신자가 비쉬누 파의 사원에 가서 예배하고 기도하는 일 등은 전혀 문제시되지 않는다. 사실상 그러한 일들이 흔히 행해지고 있다. 예를들면 바라나시(옛 베나레스)의 거리는 쉬바의 거리라고도 할만큼 쉬바신의 색채가 짙은 곳이지만, 이곳에는 모든 종파의 힌두교도가 모여 목욕을 하고 사원에 참배한다. 그러므로 다른 나라의 불교나 기독교에서 볼 수 있는 종파와 힌두교의 종파와는 그 성격이 다른 것이며, 그 큰 이유를 신앙행위의 관용성에서 찾을 수 있다
.

(10)
힌두교는 출생종교이며, 그런 면에서 배타성이 강하다. 힌두교도의 부모에게서 출생했다는 사실에 의해서만 힌두교의 구성원이 된다는 점에서 힌두교는 엄격한 출생종교이다. 그리고 힌두교는 한번 추방된 자를 영원히 공동체와의 모든 관계로부터 배척해 버리는 종교모독죄를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배타적이기도 하다. 힌두교도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자는 최소한 원칙적으로는 힌두교의 신성한 여러 가치에 접근하는 것이 거부된 자로 남게 될 것이다. 이와 더불어 힌두교는 다른 종교사상에서 보여주는 평등과 사랑과 자혜와 같은 정신으로 인류를 포용하려는 의지가 비교적 약한 것처럼 비춰지고 있다
.

(11)
힌두교의 이론적 바탕이 인도철학이고, 인도철학의 실천이 곧 힌두교이다. 인도철학은 깨달음과 해탈을 위한 방법으로서의 역할을 해왔기 때문? 인도철학은 종교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
이 점에 있어서는 길희성 교수의 글이 이를 아주 적절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인도철학을 연구하는 거의 모든 학자들은 인도철학의 지배적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해탈의 추구에 있다고 의견을 모으고 있다. , 어떻게 보면 인간이 고통스럽고 유한하고 속박된 삶을 초월하여 절대적이고 영원한 자유를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인도인의 철학적 사유의 배후에 깔려있는 최대의 관심사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인도철학은 강한 종교적 색채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무방한 것이다. 여기서 종교적이라고 하는 말은, 서양의 전통에서처럼 어떤 초월적인 신에 의하여 주어지는 초이성적인 계시에 근거한 신앙활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활동을 하는 궁극적 목표가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서양에 있어서는 철학은 희랍의 문화전통에서 유래하였으며, 종교는 히브리적 성서적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서양에서는 철학과 종교 사이에 항시 긴장관계가 존속하여 왔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전통의 근본적 이중성을 지니지 않는 인도에서는 철학과 종교 사이에 그러한 대립관계가 성립하지 않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도의 종교는 그 근본성격상 어떤 초이성적 신의 계시에 근거를 둔 신앙의 종교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지혜와 신비적 체험에 바탕을 둔 경향이 강하므로, 서양에서 말하는 소위 신앙과 이성의 대립이라는 문제는 제기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할 것 같으면 인도의 종교는 철학적 종교요, 인도의 철학은 종교적 철학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길희성
p12)"

(12)
힌두교는 점진적이고 온건한 변화를 추구한다. 힌두교는 수 천년에 걸친 과정을 통해 급진적인 개혁과 변화를 용납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개혁을 주도했던 인물이나 사상도 거대한 힌두교의 테두리 안에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붓다같은 위대한 인물이 나와 사유방식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을 때도 일반 대중으로부터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대중의 생활습관이나 종교관습에 변화가 일어났다 해도 급속도로 전파되지는 못하였다. 대중은 옛날부터 그들에게 익숙해온 종교적 의례를 오랫동안 지켜 왔다. 오늘날까지도 방법이나 형태는 조금 변했을지 몰라도 거의 그대로 고수해 오고 있다
.

(13)
힌두교의 신들은 다양한 신화 속에서 발전해 왔다. (4)에서 본대로 힌두교의 신들은 매우 인간적이다.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고, 여인을 사랑하고 질투하기도 하고, 화가 나면 저주를 행하기도 한다. 온갖 종류의 다양한 신들이 각각의 특성을 갖게 된 것은 신들이 다양한 신화의 전승 속에서 인간생활의 모든 면과 관련해 발전해 나갔기 때문이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신들의 모습과 행동과 특성은 신화적 전승을 통해서 힌두교도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있다. 신들이 다양성을 보이는 만큼 신화의 내용도 풍성하고 다채롭다. 힌두교의 세계에는 사회, 언어, 인종, 그리고 생활문화까지에도 다양한 면이 존재한다. 이처럼 놀랄만한 다양성 속에서도 신을 바탕으로 하는 힌두 신화는 힌두교도로서의 일체감을 갖게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13)
힌두교는 종교상의 교리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8)에서 본 바와 같이 힌두교는 다른 종교를 박해한 적도 없고, 자신의 종교를 믿도록 강요하 적도 없다.그것은 아마도 종교적 진리를 하나의 교리로 받아들여 언어적으로 정의하지 않으려는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힌두교에서도 윤회나 업, 그리고 재생 등에 관한 교리가 있으나 그것은 계시된 교리라기 보다는 존재에 대한 탐구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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