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 판옵티콘(Panopticon)이라는 말이 있다. 미셸 푸코가 19세기의 지배구조를 가리켜 설명한 것으로 원래의 의미는 원형감옥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죄수들이 스스로 감시자의 감시를 받고 있다는 데서 느끼는 쇄뇌 효과로 감시자의 뜻대로 길들여지게 하는 결과를 갖는다. 이 얘기를 꺼낸 것은 이 소설의 염소가 판옵티콘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염소는 힘이 세다. 그러나 염소는 오늘 아침에 죽었다. 이제 우리 집에 힘센 것은 하나도 없다……. 어린 화자를 등장시킨 이 소설은 서민들의 삶을 보여주면서 당시 사회의 힘의 구조를 느끼게 한다. 위의 말대로라면 집안에서 죽은 염소를 제외하고 힘이 있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약해빠진 힘의 하부구조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프고, 누나는 겁탈을 당하고, 할머니의 장사엔 걸림돌이 많다. 어린 아이인 화자 역시 힘이 있을 리 없다. 화자가 느끼기에 세상의 모든 것은 화자의 가족들보다 힘이 세다. 힘이란 강한 곳에서 약한 곳으로 흐른다. 힘이 없는 사람들은 힘이 강한 사람들에게 끌려 다닐 수 밖에 없다. 60년대의 삶이 그렇고 지금 역시 변한 바 없다. 염소 고깃국을 파는 할머니의 장사에서도 어린 화자는 염소의 힘을 느낀다 . 죽어서도 우락부락한 사람들을 집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염소가 선망의 대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아이는 염소가 그립다. 힘센 염소가 있을 때는 지금처럼 삶이 힘들지 않았다. 비록 염소보다 더 큰 힘에 염소가 희생 당했지만 염소만큼의 힘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힘이 없는 이들에게는 그들을 지켜줄 작은 힘이 필요하다. 그것은 권력에 의한 피해의식 때문이지만, 보이지 않는 힘이란 죽은 염소를 떠올리는 아이처럼 현대의 우리에게도 따라다닌다. 그러나 느끼지 못할 만큼 삶에 침투해 있을 뿐이다. 난장이~~~ 향해 자꾸만 쏘아댔던 것이다. 그의 작은 공은 종이비행기와도 같다. 종이비행기처럼, 잠깐은 하늘에 떠도 결국은 떨어지지만 그는 매일 밤 날린다. 천국에 사는 우리들은 왜 그의 비행기를 보지 못했을까? 혹시 그의 비행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외면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TV에 나오는 무허가 주택의 사람들을 볼 때는 불쌍히 여기지만 그 프로그램이 끝나고 오락프로를 보면서 '저 옷 예쁘다..." 했던 게 너무도 부끄러웠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내 맘 깊숙한 곳에서 그들과 나를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으로 구분 지었던 것일지도... 아버지 난장이는 그렇게 희망을 자꾸만 쏘다가는, 그 어디에도 없을 이상적 세계로 떠나고 만다.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세상,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마을 마을마다 웃음소리가 넘쳐나는 세상. 하늘 위에 떠 있는 별을 마음껏 볼 수 있는 그런 세상. 존재하지 않는 그 세상으로 난장이는 조용히 떠났다. 그는 지금 어디에 도착해 있을까? 그가 바란다는 순수한 세계 '달'에서 천문대 렌즈를 지키고 있을까... 하지만 지섭이 빌려준 그 '일 만년 후의 세계'에서 순수한 세계 속의 또 다른 황무지를 그는 느끼지 못했다. 그곳, 달의 환경은 '어두운 밤은 14일 동안이나 계속되고 거추장스러운 우주복을 항상 입어야 하며 조금이라도 찢어지면 죽고 시계를 잘못보아도 산소가 떨어진 줄 몰라 죽는'다. 아무리 난장이에게 달이 황금색의 별세계요 행복한 '천문대의 땅'일 지라도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결국, 그가 사랑하던 세계 달에도 현실은 있었던 것이다. 실현 불가능한 그 만의 유토피아. 이 '죽은땅'과는 단절된 그의 사랑을 받는 세계는 현실과 영원한 대립을 갖는 이루어 질 수 없는 꿈이 었다. 이렇게 영원한 대립을 이루는 것은 이 소설에서 '난장이의 세계'와 '현실'만이 아니다. 영수와 명희는 굳어버린 시멘트 위의 낙서를 부끄러워하면서 명희의 허락 아래 수줍게 작은 가슴을 만진다. 반면,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쌓은 신애의 앞집 딸은 처녀인데도 항상 배가 불러있고, 윤호의 누나는 동생에게 창녀라 불린다. 윤호 자신도 여자친구와 호텔을 들랑거린다. 이들 두 부류는 '가난한 자-부유한 자'로 분리되며 性에서 조차 상반된 세계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양립의 세게는 영호가 '공장 폐수 속에 팬지꽃을 던지는 영희'의 꿈을 꾸었을 때도 나타난다. 그 꿈을 꾸었던 따스한 햇살 속 잠과 허물어진 집. 팬지꽃과 공장 폐수. 이들은 영원한 대립으로, 현실과 꿈으로, 또 한번 갈라지게 만들었다. 결국 이 소설은 다시 '뫼비우스의 띠'로 돌아온다. 여러 시점을 가진 이 소설은 프롤로그.'뫼비우스의 띠'에서 예고했던 것 처럼, 화해가 불가능한 양립된 세계를 통해서 도시빈민의 궁핍함과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담아낸다. 직사각형의 종이는 앞뒤 두개의 평면을 갖지만, 그것을 '꼬아'으로 '안팎이 없는 상상의 세계-현실의 세계'을 연결한 뫼비우스의 띠가 된다. 작가는 이 뫼비우스의 띠로 모순된 사회의 해결점을 제시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의 결말은 비극으로 끝나고 해결점은 전혀 찾을 수 없지만, 영원한 대립을 가진 직사각형 종이는 '꼬아'서 상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연결한다. 우리 사회가 종이라면 한번 꼬아 붙여서 연결하면 되겠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얄팍한 종이 한 장이 아니다. 언젠가 tv에서 한 장의 종이는 20번 이상 접을 수 없다는 걸 본 적이 있다. 아무리 얇은 종이라도 19번 접으면 두꺼워져서 더 이상 구부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얇은 종이도 19번 접으면 구부리기도 힘든데 미움,기쁨,사랑,평화,공평,불만,시기,행복에 대한 욕망들로 뭉쳐있는 현실을 구부려 꼬아 붙인다? 결코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그럼 작가가 제시한 해결점은 실현 불가능한 이상적인 해결방법일 뿐일까? 이제 더 이상 내 머리가 굴러가질 않는다. 어떻게 풀어야만 어려운 이 소설을 잘 이해할 수 있을지... 작가가 이런 소설을 왜 썼을 지 생각해 본다. 소설 속 뿐만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또 다른 난장이들에게 동정을 쏟으라는 것인지...난장이 처럼 모두들 미쳐버리기 전에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찾아보라는 것인지... 결론은, '사랑'이었다. 상식과 이해관계를 뛰어넘고,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부터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작은 싹을 키워오던 사랑. 어쩌면 정말 뻔한 답일 지도 모르겠다. 무척이나 느끼한 답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두터운 현실을 '꼬을'수 없다면, '꼬는 것'의 다른 대안을 생각해야 한다. 아무리 두껍고 단단한 벽도 허물 수 있으며 현실에선 불가능한 일을 종종 가능하게 만들어,'신비한 TV surprise' 에 등장하는 것. '사랑'이다. 지섭이 왜 지구를 죽은 땅이라고 했는가? 지섭은 말했다.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욕망만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만 사는 땅은 죽은 땅 입니다." 지섭은 사랑이 없는 욕망만 갖고 있는 사람들이 사는 땅을 죽은 땅이라고 했고, 소설 속에서 그 죽은 땅은 지구였다. 지섭은 말한 것이다. 사랑을 갖게 되면 죽은 땅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걸, 사랑이 없기 때문에 죽은 땅이라고 말한 것이다. 어쩌면 세상을 꼬아 붙이는 일이 종이를 꼬아 붙이는 것 보다 쉬울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은 붙이는 '풀'도 필요하지 않고 종이를 꼴 손도 필요하지 않다. 그냥 뛰는 심장과 눈물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내가 누구를, 세상을,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본다. 세뱃돈을 받자마자 인터넷 쇼핑몰로 오디오를 산 내가 떡국 한 그릇 못 먹었을 2평 남짓한 방의 주인할머니를 사랑해 본 적이 있었나? 어릴 적 기억이 난다. 난 서울 잠원동. 흔히들 강남이라고 부르며 뉴스에 부동산 투기로 자주 비춰지는 그 동네에서 살았다. 하지만 그 동네에는 투기자들만 살지 않았다. 뽑기와 쫀드기가 있는 덤블링 가게 뒤에 작은 집 몇 채가 있었다. 거기에 내 친구 하나가 살았다. 그 친구는 할머니와 단 둘이 산다고 했다. 내 다른 친구가 그 친구 집에 가본 적이 있다며 그 친구의 집을 설명해 주었다. 벽과 바닥에는 신문지가 붙어있고, 방은 하나에다, 그 애가 항상 입는 바지 2개 이외엔 아무 옷도 걸려있지 않다고...이상한 냄새가 나고, 집에는 쉬어버린 김치로 만든 찌게와 멸치 밖에 없다고...난, 그 친구와 놀지 않았다. 가끔 우리집에서 인형놀이를 하면 옷을 많이도 가져가선 열심히 갈아 입혔던 그 친구와 지나가면서 인사를 받아주었을 뿐, 인형놀이를 하는 일 따윈 다시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친구가 한 말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겐 내 친구의 상상 속 집이라도 그런 냄새나는 곳에 사는 사람과는 같이 있으면 무언가가 내게 옮겨 붙을 것이란 생각을...그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 애를 생각할 때마다 너무 미안하고, 속상하다. 생각해 보면 그 애의 집에 갔었다는 그 친구보다 그 애가 훨씬 더 착했다. 볼을 항상 붉었고 언제나 웃었다. 난 왜 그런 아이를 사랑하지 못했을까? 왜 그 친구에게 인형 옷 한 벌도 나눠주지 못했을까? 나 역시 사랑이 없는 욕망만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 친구네 집에 놀러가도 만두나 과자는 얻어먹지 못할 것이다. 불쾌한 냄새만 얻어올 것이다. 고작 유치원생이었던 난 그렇게 이기적이였고 '죽은 땅'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럼 지금의 난 죽은 땅의 사람이 아닌 양 옛 일을 회상하고 있는 것일까?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참 부끄럽다. 사람을 사랑하지 못했던 것이 너무나도 부끄럽다. 7살때 이미 '그들과 나는 다른 사람이다'라고 단정지어 버린 난, 현실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또 현실을 사랑하지 못하는 그들과 등을 지고 살아왔다. 난 소설 속의 천국 사람들처럼 난장이가 날리는 종이비행기를 외면했고, 난장이의 작은 공을 돌려보내기만 했다. 이제와서 그들에게, 난장이들에게 용서 받을 수 있을까? 그들에게 다른 세계의 사람이 돼 버린 내가, 난장이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난 사랑해보기로 한다. 용서 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해도 한 번 사랑해 보기로 했다.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에서 영수는 말한다. [...]아버지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사랑에 기대를 걸었었다. 아버지가 꿈꾼 세상은 모두에게 할 일을 주고, 일한 대가로 먹고 입고, 누구나 다 자식을 공부시키며 이웃을 사랑하는 세계였다... 난장이가 원한 것은 사랑이라지 않아? 내가 난장이들을 사랑하면, 내 이웃이라 여기지 않던 이웃을 사랑하면, 현실은 꼬아 붙여지고 안팎이 없는 상상의 세계. 난장이들이 바라던 세상이 될 것이다. 작가는 프롤로그에 뫼비우스의 띠를 이야기 하는 한 선생님을 소개하고, 에필로그 역시 그 선생님이 작은 혹성으로 우주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로 끝이 난다. 결국, 선생님은 또 다른 난장이가 되어 김불이 처럼 우주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하지만 김불이와 선생님은 다른 인물이었다. 김불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세계를 꿈꾸는 것으로 그쳤지만, 선생님은 뫼비우스의 띠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해결책을 던저주고는 떠난다. 난 그 해결책을 찾았다고 확신한다. 난장이를 사랑하면 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내 친구를 대했던 것처럼. 지금 만약에 내가 그 친구를 만난다면 쉽게 인사할 수 있을 지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하지만,'사랑'이면 되지 않을까? 난장이는 죽은땅이 '시간을 터무니 없이 낭비하고, 약속과 맹세는 깨어지고, 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눈물도 보람 없이 흘려야 하고, 마음은 억눌리고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는 세계다' 라고 말했다. 하지만 난 이런 타락한 세계만이 그 속의 진정한 가치를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진정한 가치는..."사랑"이다. |
철학/인문과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