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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이런사람↑

역사가 된 인생 수업 ‘보도지침사건’

by 랭님 2010. 1. 31.

반 백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살아 오면서 수많은 풍상을 겪었다. 한국전쟁 직후 태어나 시골 농촌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 세상의 이치를 깨닫기 시작한 시절부터 군사독재의 강압통치 하에서 청년 시절을 보낸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학시절 정의감에 휩싸여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가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된 이후 수차례에 걸쳐 감옥을 드나 들었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젊은이들처럼 인고의 세월을 겪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세 차례의 투옥과 1차례의 기나긴 법정투쟁을 치렀다. 대학시절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서대문 구치소에서 감방생활을 했으며 대학 졸업 직후엔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서빙고 보안사에 끌려가 무시무시한 공포를 경험했다. 한국일보에 들어가 기자생활을 하던 중 1986년에는 ‘보도지침’을 폭로해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구속 기소돼 재판을 받았다.

87년 민주항쟁 기폭제 되다

보도지침 재판은 9년여를 끌다가 지난 1995년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신문사를 그만둔 뒤 언론개혁시민연대를 창립해 언론운동을 했다. 이후 ‘이승복 오보 사건’으로 10년 가까이 법정에 서야 했다. 결국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이들 사건 중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아무래도 ‘보도지침’ 사건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보도지침 사건은 당시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다음해 있었던 6.10시민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개인적으로도 보도지침 사건은 나를 언론운동에 나서도록 했다. 1992년과 1993년 한국기자협회장을 맡아 언론 자정과 편집권 독립 운동에 나섰다. 18년의 기자 생활을 끝내고 시민단체인 언론개혁시민연대를 만들어 시민언론운동에 나선 것도 보도지침 사건의 영향이었다.

보도지침 사건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 사건이다. 보도지침 사건을 겪으면서 인생의 항로가 바뀌었으니 ‘내 인생의 첫수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보도지침 사건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신문사에서 평범한 언론인 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향인 천안에서 중학교까지 마친 뒤 서울로 유학해 남부럽지 않은 고등학교(서울고)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주위에선 ‘공부벌레’라는 별명을 들었다. 서울대에 입학하여 한 해가 지나기도 전에 박정희 정권이 유신을 선포했다. 혹독한 ‘겨울공화국’이 시작된 것이다. 게다가 휴교조치가 내려져 학교에 갈 수도 없었다. 다음해 동숭동에서 시작된 대학생활은 박정희 정권 성토장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집회가 금지되고 정보기관의 사찰이 심했으므로 친구 몇몇이 술집에 모여 떠드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공부벌레는 감방을 드나들고

그해 10월 유신이후 첫 시위가 문리대에서 있었다. 교정에 모여 구호를 외치는 수준이었지만 경찰은 강의실은 물론 도서관에까지 들어가 학생들을 연행했다. 나는 학교 담을 넘어 법대 이발소로 숨었다. 시위에 참여했던 수많은 친구들이 연행돼 구류를 살아야 했다. 그렇게 대학생활 2년이 지나고 있었다.

나는 문리대 교지였던 ‘형성’ 편집위원으로 일했다. 다음해 4월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다. 중심인물은 아니었지만 이 사건에 연루돼 난생 처음으로 서대문 서울구치소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많은 선배 동료들은 사형 또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나는 그해 8월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그리곤 군대로 끌려갔다.

제대한 뒤 곧바로 복학해 관악캠퍼스에서 대학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1979년 8월 졸업장을 받고 난 뒤에는 친구들과 함께 출판사를 차려 일을 하다가 1980년 4월 한국일보사에 입사했다. 독재자 박정희가 측근에 의해 암살된 뒤 대한민국 사회는 민주화의 열풍에 휩싸여 ‘서울의 봄’이 찾아온 듯했다. 그러나 전두환이 주도하는 신군부는 이미 권력을 장악한 뒤였다. 신문사에 입사해 1개월여 동안 견습생활을 하던 5월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전두환 신군부는 선량한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민주세력을 말살했다.

언론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권의 정통성이 없는 전두환 정권은 ‘언론을 잡아야 정권이 산다’며 언론을 장악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언론인 강제해직, 언론사 통폐합, 언론기본법 제정 등 일련의 강압 조치가 시행됐다.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일련의 조치가 성공을 거두고 언론이 정권에 순치된 이후, 전두환 정권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보도지침을 시달했다.

보도지침은 말 그대로 정권이 언론에 내려 보낸 지침으로, 당시 문공부 홍보 조정실에서 매일 언론사 편집국(보도국)에 은밀하게 시달하는 보도통제 가이드라인이었다.

“언론과 권력 모두 구원 받길”


보도지침은 해직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민주언론운동협의회가 발간한 ‘말’지 1986년 9월 특집호를 통해 1985년 10월부터 1986년 8월까지 보도지침 내용이 공개됨으로써 일반에 알려졌다. 해직기자들로 구성된 민주언론운동협의회는 1986년 9월 6일 기관지였던 ‘말’ 특집호에 ‘권력과 언론의 음모-권력이 언론에 보내는 비밀통신문’이라는 제목으로 보도지침을 세상에 폭로했다. 보도지침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전두환 정권의 실체를 그대로 보여주는 내용들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보도지침은 당시 신문사 편집국 간부를 비롯해 일부 편집부 기자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져 있었다. 한국일보사 내에서는 많은 기자들이 이른바 ‘홍보조정’으로 불리는 보도지침 사본을 본 적이 있다. 한국일보 기자들은 언젠가 보도지침을 공개해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제 실상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며 편집국에 나도는 보도지침 사본을 모았다. 그러나 보도지침 전부를 수집할 수는 없었다. 당시 편집부 기자였던 나는 보도지침 사본이 편집국 서무 책상 위에 검정색 표지로 철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를 세상에 알리게 된 것이다.

나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에게 맡겨 놓았던 양심선언을 통해 “여러 가지 언론통제 방식 가운데 빙산의 일각일 수밖에 없는 보도지침의 자료가 구체적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무엇보다 통제를 하는 정부나 통제를 받는 언론이 다 같이 언론탄압과 통제라는 치욕으로부터 마침내 해방되고 구원되어야 한다는 확신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보도지침이 공개되자 권력당국은 ‘말’ 특집호의 발행 및 배포와 관련하여 김태홍 선배를 전국에 지명 수배하고, 보도지침의 내용이 더 이상 국민에게 알려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곳곳에서 압수수색을 더욱 강화했다. 또한 정보수사능력을 총동원하여 보도지침이 어떠한 경로로 누출되었는지를 탐지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1986년 12월10일 그동안 도피 중이던 김태홍 선배가 체포되어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됐고, 12일에는 신홍범 선배, 15일에는 내가 연행돼 구속됐다.

보도지침과 구속 언론인에 대한 석방촉구운동은 국내는 물론 국외로 파급됐다. 1987년 1월 5일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이 ‘말’지 사건으로 구속된 3명의 언론인 즉각 석방을 촉구한 것을 시작으로 1987년 1월 9일에는 미국 언론인보호위원회, 1월 12일에는 국제 자유출판 위원회, 1월 14일 미국과 캐나다 신문협회, 1월 22일 국제기자연맹(IFJ) 등에서 한국의 언론현실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구속자 석방을 촉구하는 공한을 보내거나 운동을 벌이자고 촉구했다. 특히 미국 상원은 1987년 3월 18일 한국관계 청문회를 개최하고 보도지침 사건을 자세히 청취했다.  

보도지침의 공개로 만천하에 웃음거리가 된 데 대한 정치보복으로 전두환 정권은 이들에게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를 적용했다. 국가보안법상의 국가기밀누설죄와 외교상기밀누설죄, 그리고 집에서 찾아낸 영문서적을 걸고 넘어져 이적표현물 소지죄가 뒤집어 씌워졌다. 여기에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과 외신기자들과 회견했다는 이유로 국가 모독죄가 추가됐다. 이들은 연말에 서대문 구치소로 송치되었다.

1987 6월3일 상오 10시 113호 법정. 선고공판이 있던 날이었다. 박태범 재판장은 3명 모두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김태홍 선배는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신홍범 선배는 선고유예, 나는 징역 8개월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1년이었다. 피고인들은 일단 풀려났다. 곧바로 항소했다. 그리고 6.10시민항쟁이 일어났다. 보도지침 사건은 6월 시민항쟁을 예고하는 전조등이었던 것이다.

9년 만에 마무리 된 첫 수업

1심 재판은 마무리되었지만 지방법원 합의부 항소심은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늘어지기만 했다. 그동안 세상도 많이 변했다. 정권이 두 차례나 바뀌었다. 전두환 정권이 물러난 뒤 노태우 정권의 뒤를 이어 김영삼 정권이 탄생했다. 그래도 재판은 종결될 줄 몰랐다. 항소심 결심공판이 끝난 뒤에도 재판부가 변경되어 다시 재판을 열었다. 그동안 재판부는 네 번이나 변경됐다. 검사도 세 번이나 바뀌었다.

1995년 12월5일. ‘보도지침 삼총사’가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대법원 법정이었다. 천경송 재판장은 “상고를 기각한다”고 짧게 선고했다. 9년여에 걸친 보도지침사건 재판이 무죄로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9년여에 걸친 내 인생의 첫 수업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많은 사람들은 나를 보면 ‘보도지침’을 떠올린다고 한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은 거의 이 사건을 모른다. 5.18광주민주화운동과 6.10시민민주화운동 조차도 모르는 데 하물며 보도지침 사건을 배우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보도지침 사건은 한국 언론사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내 인생의 첫 수업이 이제는 역사가 되었다.

김주언 시민사회신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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