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말 이탈리아공산당 지도자 엔리코 베를링게르는 이탈리아 좌우 정파의 “역사적 화해”를 들고 나왔다.
칠레 쿠데타에서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칠레 국민이 민주적 절차를 통해 뽑은 아옌데 사회주의 정부가 미국의 사주를 받은 칠레 군인들에게 몇 달 전 사살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베를링게르는 몇 편의 글을 써서 이탈리아에서 칠레의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으려면 좌파와 우파의 역사적 화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칠레에서 기득권을 가진 반공 세력은 국민이 뽑은 정부를 미국을 등에 업고 무너뜨렸다. 베를링게르는 산술적 우위만을 믿고 설령 이탈리아공산당이 자력으로 집권한다 하더라도 보수 진영과의 화해 없이는 미국이 사주하는 쿠데타로 아옌데 정부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이탈리아공산당은 전후 유럽에서 가장 성공한 좌파 정당이었다. 이탈리아공산당이 높은 지지율을 얻은 것은 유연한 전략을 추구해서였다. 그것은 이탈리아공산당을 세운 그람시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무솔리니 파시즘과 싸우다가 1937년 옥사한 그람시는 헤게모니라는 개념으로 좌파의 전략을 잡았다. 자본가는 언론을 장악하여 노동자를 끊임없이 세뇌하면서 사회의 패권을 쥐려고 하니까 좌파 정당도 여기에 맞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문화 운동이 중요했다. 실제로 공산당은 전후 이탈리아의 문화계를 주름잡았다. 문화의 주도권을 잡으니까 여유가 생겨서 더욱 유연하게 나갔고 지지율은 더욱 높아졌다.
이탈리아공산당이 유연하게 나간 것은 소련의 꼭두각시라는 딱지를 떼어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베를링게르는 60년대 말부터 소련의 체코 민주화 운동 탄압을 비판하면서 모스크바와 거리를 두었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소련식 공산주의와는 다른 유로코뮤니즘의 길을 걸으려다가 소련에게 밉보였다. 이탈리아공산당은 국내 정치에서도 왕따를 당했다. 사민당과 기민당은 공산당이 제1당이어도 따돌리고 늘 자기들끼리만 연정을 이루었다.
중앙 정치에서는 푸대접을 받았지만, 이탈리아공산당은 지방정부를 잘 이끌었다. 베를링게르는 공산당이 집권한 움브리아, 토스카나 같은 지방에서는 기차가 칼같이 정확하게 운영된다는 점을 유권자에게 각인시켰다.
이런 노력이 주효하여 1976년 총선에서는 34.4%의 지지율로 제1당이 되었다.
그렇지만, 좌우 화해의 기반 위에 안정된 집권을 하기 위해 기민당에게 연정을 제의했고 여기에 화답한 정치인이 기민당 당수 알도 모로였다. 그러나 새 내각이 출범하는 날, 총리로 내정된 모로는 납치당했다.
모로를 납치한 세력은 붉은여단이라는 극좌파 조직이었다. 베를링게르의 타협 정책을 야합으로 비판해온 붉은여단은 감옥에 수감된 동료 조직원들을 모로와 맞바꾸자고 요구했다.
이탈리아공산당은 폭력 혁명을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므로 타협불가론을 고수했다.
기민당도 타협불가론을 내세웠지만 속사정은 달랐다. 기민당 안에서도 보수 세력에게는 공산당의 역사적 화해 제안을 받아들인 모로가 눈엣가시였다. 결국 모로는 좌우 양쪽으로부터 버림받고 납치된 지 55일 만에 살해당했다.
이탈리아는 다시 분열의 길을 걸었다. 통합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베를링게르도 몇 년 뒤 선거 유세를 하다가 뇌출혈로 죽었다. 백만이 넘는 이탈리아 국민이 거리로 나와 울면서 이탈리아의 내부 분열을 극복하려고 이념의 벽을 넘어서려던 노정치가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런데 알도 모로 제거를 주도한 것은 붉은여단이 아니라 미국 CIA라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은 나토 산하에 글라디오라는 비공식 반공 극우 무장 조직을 유럽 각국에서 운영했는데 바로 이 조직이 극좌 조직 붉은여단에 모로 납치와 조직원 석방 방안을 제안하면서 안전한 퇴로를 보장해주기로 했다는 것이 수감 중인 붉은여단 조직원의 증언으로 밝혀졌다.
당시 이런 의혹을 제기한 기자는 이런 내막을 아는 이탈리아 고위 장성의 목숨이 위태롭다고 경고했는데 아니나다를까 그 장성은 얼마 뒤 살해당했고 문제의 기자도 역시 살해당했다. 모로 살해만이 아니라 수십 명이 목숨을 잃은 1968년의 밀라노 폰타나 광장 폭발 사건도 좌파가 아니라 미국이 사주한 이탈리아 극우파의 소행으로 최근에 밝혀졌다.
국경을 넘어서는 공산주의 이념을 가진 베를링게르가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과 척을 지면서까지 자기 한 나라의 이념 대립 극복에 혼신의 힘을 쏟은 것은 내부 분열로 수백 년 동안 외세에게 유린당한 뼈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탈리아는 서기 5세기 말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이후 19세기 말 겨우 통일을 하기까지 1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뿔뿔이 갈라져서 외세의 각축장이 되었다. 프랑스나 영국 같은 강대국의 우익 엘리트는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맹수의 “등뼈” 역할을 했는데 이탈리아는 그런 등뼈 노릇을 하는 우익 엘리트가 멸종했다. 베를링게르는 공산주의자이기 이전에 이탈리아의 엘리트였고 자기라도 등뼈 노릇을 해야겠다고 역사적 화해를 부르짖고 나선 지도자였다. 그러나 미국은 여기에 찬물을 끼얹으면서 이탈리아를 이념 대립의 수렁으로 디밀어 넣었다. 보수 진영을 비판하면 무조건 빨갱이로 모는 전략이 이탈리아에서는 먹혀들었다. 역사 청산을 우익의 손으로 하지 못한 나라의 비애였다.
프랑스가 이탈리아와는 달리 극렬한 이념 대립에 휩쓸리지 않은 것은 드골 같은 진짜 우익이 친독 사이비 우익을 응징했기 때문이었다. 드골은 이념과는 거리가 먼 보수 직업 군인이었지만 히틀러에게 협력한 매국 우파보다는 항독 전선에서 함께 싸운 좌파 엘리트를 더 아꼈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드골 같은 우익이 부역 친독 우익을 단죄하니까 이념 대립으로 몰아갈 명분이 없었다. 프랑스에는 나라를 지탱하는 우익 등뼈가 있었다.
한국에도 상해 임시정부를 이끈 김구 같은 등뼈가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남한에 바란 것은 척추동물이 아니라 연체동물이었다. 김구는 알도 모로처럼 미국의 사주를 받은 사이비 극우파에게 살해당했다.
김구만이 아니라 여운형처럼 단합을 부르짖던 척추 있는 지도자는 하나 둘 제거되었다. 반공 이념을 부르짖던 이승만과 그 밑으로 기어든 연체동물 친일파만이 미국의 비호를 받았다.
이탈리아에서 베를루스코니가 정권을 잡은 것도, 한국에서 이명박이 정권을 잡은 것도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이탈리아와 한국은 아직 독립국이 아니다. 한국은 아직도 독립전쟁을 벌이고 있다. 한국의 독립전쟁이 어려운 것은 외국과의 싸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외국 군대와의 싸움은 이기든 패하든 국민을 결속시킨다.
핀란드는 1차대전 이후 이념 대립으로 인한 내전으로 극심한 내부 분열을 겪었지만 2차대전 때는 처음에는 소련군, 나중에는 독일군과 싸우면서 내분을 극복했다.
그러나 자국민끼리 싸우는 내전은 큰 상처만을 남긴다. 그래서 피를 부르는 유혈극은 어떻게든 피해야 한다. 적어도 진정한 우파는 그렇게 생각한다.
노무현이 한나라당에 연정 제의를 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물론 한나라당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나라당은 사이비 우파이기 때문이다. 나라와 민족이 결딴나도 자기만 살아남으면 된다. 언제든지 튈 수 있는 종주국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주국은 늘 이런 사이비 우파에게 힘을 실어준다. 제국주의가 나쁜 것은 항구적인 분열의 씨앗을 타국에 심어놓는다는 것이다.
이탈리아는 유럽연합이라는 커다란 등뼈에 얹히기라도 하지만 한국은 기댈 언덕이 없다. 자력으로 일어서야 한다.
노무현이 난자당하는 것은 그가 한국의 등뼈가 되었기 때문이다. 외세에 유린당하면서 분열과 반목으로 세월을 지새우던 나라에서 이념을 넘어서고 지역을 넘어서는 통합을 부르짖으면서 한국을 등뼈 있는 나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노무현을 죽이려는 것은 등뼈 없는 나라로 되돌리기 위해서다. 그러나 한번 만들어진 등뼈는 사라지지 않는다. 등뼈가 바수어져도 등뼈의 기억은 남아 또 다른 등뼈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바수어져도 노무현의 기억은 휘날려 새로운 노무현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