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해제
비반복성의 이해
구조론은 새로운 학문이다. 수학이 수(數)에 관한 학문이듯이 구조론은 구조(構造)에 관한 학문이다. 수는 셀 수 있고 구조는 셀 수 없다. 셀 수 있는 것은 반복되고 셀 수 없는 것은 반복되지 않는다.
수학이 자연의 반복성을 탐구하는 학문이라면 구조론은 자연의 비반복성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구조론은 수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수학의 반대편에서 대칭된다. 구조론은 수학의 자궁이다. 수학을 낳는다.
비반복성은 대칭성에서 비롯된다. 하늘과 땅은 대칭된다. 여자와 남자, 음과 양, 낮과 밤, 앞과 뒤, 겉과 속은 대칭된다. 모든 대칭되는 것은 짝을 가지며 둘이 어울려 쌍을 이루고 더 높은 차원의 동그라미로 비약한다.
하늘과 땅의 대칭은 지구로 상승하고, 여자와 남자의 대칭은 인간으로 상승하고, 낮과 밤의 대칭은 하루로 상승한다. 질적인 비약을 이루어 더 높은 단계의 동그라미로 상승한다. 세상은 무수한 동그라미들의 집적이다.
┣┣는 수학의 반복이고 ┣┫는 구조론의 비반복이다. ┣┣가 반복인 이유는 붙어있기 때문이고 ┣┫가 비반복인 이유는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은 떨어져 있다. 산과 강은 멀찍이 떨어져 있다.
떨어져 있는 이유는 일하기 위해서다. 젓가락 두 짝이 떨어져 있는 이유는 그 사이에 반찬을 집기 위해서다. 떨어져서 마주보고 일하며 그것으로 독립적인 하나의 단위를 이룬다. 동그라미를 이룬다.
수학은 집합에 대해 원소로 설명하고 구조론은 날에 대해 심으로 설명한다. 집합과 원소에서 반복되는 것은 원소다. 기존의 수학은 원소의 반복성에 주목할 뿐 집합의 비반복성을 해명하지 못한다.
● 구조의 대칭성 - 반복되는 날에서 반복되지 않는 심을 본다.
● 수학의 집합론 - 반복되지 않는 집합에서 반복되는 원소를 본다.
집합론이야 말로 수학의 출발점이다. 수학의 첫 단추가 된다. 그러나 첫 단추를 잘못 꿰고 있다. 기존의 수학은 집합에서 원소를 바라볼 뿐 원소에서 집합을 바라보지 않는다. 비반복성을 포착하지 못한다.
대칭구조 ┻는 날 2가 심 1을 공유하는 형태다. 구조에 일이 주어지면 날은 무한히 복제되어 숫자가 증가한다. 그러나 심은 여전히 하나다. 식구가 늘어나도 부부는 하나다. 바퀴의 톱니가 늘어나도 바퀴축은 하나다.
우리는 원이 둥글다고 믿지만 피상적인 관찰이다. 구조로 보면 원은 콤파스다. center 하나에 arm이 둘이다. 콤파스를 회전시키면 무수히 많은 점들의 집합이 만들어진다. 외부의 작용에 대응하여 일하기 때문이다.
일을 시켜서 그러할 뿐 원의 본질은 ┻다. 구조로 보면 원은 거리가 같은 점들의 집합이 아니다. 집합은 원소를 모은 것이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구조로 보면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거꾸로 쪼개놓은 것이다.
지렛대는 축을 중심으로 좌우에 두 날이 있다. 하나는 손잡이고 하나는 물체를 들어올린다. 천칭저울이 축의 좌우에 두 접시를 거느린 바와 같다. 원은 지렛대를 일시켜서 날의 숫자를 늘려놓은 것이다.
날의 숫자가 늘어나도 애초에 심이 정한 바운더리를 넘어 증가하지 못한다. 집합이면 모은 것이다. 모으면 숫자가 늘어나야 한다. 그런데 늘어날 수 없다면 모순이다. 그러므로 늘어난 것이 아니라 쪼개진 것이다.
수정란의 세포분열과 같다. 명목상으로 세포의 숫자가 증가했지만 실제로는 증가하지 않았다. 원은 점들이 집합이 아니라 날들의 분할이다. 없는 것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 복제된 것이다.
반복성과 비반복성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다. 산은 반복된다. 산 너머에 또 산이 있다. 강도 반복된다. 강 건너 또 강을 만난다. 그러나 대칭은 반복되지 않는다. 산은 강과 대칭되어 산하를 이룬다. 산하는 반복되지 않는다.
진리는 불변한다. 왜 불변하는가? 구조론의 비반복성 때문이다. 복제되어 증가한 날들은 결코 원본의 곁을 떠날 수 없다. 내부에 독립적인 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의 정한 바운더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의 빛이 온갖 모양의 그림자를 만들어 내지만 빛이 사라지면 무수한 그림자들도 홀연히 사라진다. 그림자는 빛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날은 심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불변한다.
쪼개지는 것과 쪼개지지 않는 것
어원으로 보면 구조의 구(構)는 목재를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켜켜이 쌓아올린 것이고, 조(造)는 감독이 노동자들에게 알려서(告) 일을 진행한다(辶)는 뜻이다. 구조는 켜켜이 쌓는 것이며 그 쌓기를 진행하는 것이다.
구조(構造)는 쌓기와 일하기다. 재료를 쌓아 일을 진행한다. 여기서 과연 진행할 수 있느냐가 문제로 된다. 쌓을 수 있어야 진행할 수 있다. 그러나 모래성은 쌓을 수 없다. 쌓으려 해도 진행이 안 된다.
물로 쌓을 수 없고 바람으로도 쌓을 수 없다. 빛으로 쌓을 수 없고 냄새로도 쌓을 수 없다. 만약 지구 중력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면 돌이나 나무로도 쌓을 수도 없다. 오직 구조로만 쌓을 수 있다.
원자론에서 원자의 의미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왜 쪼갠다는 개념이 문제로 되는가? 원자론의 쪼갠다는 개념과 구조론의 얽힌다는 개념이 정확히 대칭된다는 데 주목할 일이다.
만약 쪼개진다면 쌓을 수 없다. 물은 쪼개져서 쌓을 수 없고 바람도 쪼개져서 쌓을 수 없다. 쌓아올린 건축이 무너지지 않는 것은 거기에 쪼개지지 않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자 개념은 피상적인 관찰이다.
우주(宇宙)는 큰 집이다. 집은 쌓여서 이루어졌다. 지구도 쌓여서 이루어졌다. 나무는 가지가 쌓여서 이루어졌고 인간은 세포가 쌓여서 이루어졌다. 원자가 쪼개지면 쌓이지 않으니 우주의 건축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전혀 쪼개지지 않는다면 어떨까? 역시 쌓을 수 없다. 큰 바위 덩어리를 정으로 쪼아서 작은 벽돌로 쪼개야 쌓을 수 있다. 큰 통나무를 톱으로 켜고 대패로 깎아서 작은 목재로 쪼개야 쌓을 수 있다.
쪼개져도 쌓을 수 없고 쪼개지지 않아도 쌓을 수 없다. 원자는 작다. 잘게 쪼개져 있다. 원자는 쪼개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원자는 쪼개지는 성질과 쪼개지지 않는 성질을 동시에 가진듯 하다. 쌓을 수 있을듯 하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원자를 쌓을 수 있을까? 원자는 구슬과 같다. 구슬을 쌓아서 집을 지을 수 있을까?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쓴다. 꿰려면 뚫어야 하는데 원자는 뚫을 수 없으니 꿸 수 없다. 원자로 쌓을 수 없다.
벽돌을 쌓아 집을 지을 수 있을까? 중력이 없으면 쌓을 수 없다. 모래성과 같다. 그 집은 곧 무너진다. 원자론으로는 우주를 건축할 수 없다. 원자론으로는 세포를 건축할 수 없고 생명을 건축할 수도 없다.
구조란 쪼개지면서 쪼개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야 쌓을 수 있다. 그렇다. 세상은, 우주는, 존재는, 만유는 쪼개지면서도 동시에 쪼개지지 않는 것으로 건축되어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구조다.
날은 쪼개지고 심은 합쳐진다. 대칭은 쪼개진 둘의 만남이요 평형은 그 대칭의 얽힘이다. 점≫선≫각≫입체≫밀도로 집적된다. 선은 점으로 쪼개지고 각으로 합쳐진다. 각은 선으로 쪼개지고 입체로 합쳐진다.
구조는 반복성에 의해 쪼개지고 비반복성에 의해 합쳐진다. 수(數)는 구조가 쪼개진 것이요 집합은 원소가 합쳐진 것이다. 구조는 자유자재로 쪼갤 수 있고 다시 합쳐질 수도 있다. 쪼개지면 양이고 합쳐지면 질이다.
쪼개지는데 쪼개지지 않는다? 그것은 제어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구조다. 구조는 제어다. 어떤 대상을 장악하고 통제하여 마침내 쪼개짐과 쪼개지지 않음을 자유자재로 지시하고 결정하는 그것이 구조다.
수(數)는 자연의 반복성에서 쪼개짐을 탐구하고 구조(構造)는 자연의 비반복성에서 쪼개지지 않음을 탐구한다. 쪼개지지 않는 것은 자연의 비반복성, 불연속성, 비가역성, 비분할성, 비순환성이다.
쪼개지지 않으므로 얽혀서 구조를 이룬다. 비로소 존재의 뼈대가 된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내부에 뼈대가 있다. 쪼개지지 않는 심이 있다. 그리고 그 뼈에 붙은 살이 있다. 쪼개지는 날이 있다.
세상은 구조다. 구조는 쪼개지지 않는 심 1과 쪼개지는 날 2다. 심은 원본이고 날은 복제된 것이다. 원본은 쪼개지지 않으니 뼈를 이루고 복제본은 쪼개지니 살을 이루어 비로소 세상은 크게 이룩되었다.
● 질서의 수(數).. 연속성, 반복성, 분할성, 순환성, 가역성
● 무질서 구조.. 불연속, 비반복, 비분할, 비순환, 비가역
쪼개지는 날의 성질은 반복성, 연속성, 가역성, 분할성, 순환성이다. 집합에 대해 원소의 성질이다. 쪼개지지 않는 심의 성질은 비반복, 불연속, 비가역, 비분할, 비순환성이다. 평형계의 날에 대해 심의 성질이다.
각각 질량보존의 법칙과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성립시킨다. 존재는 변한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다. 전자는 변하는 성질을 나타내고 후자는 변하지 않는 성질을 나타낸다. 변하지 않음에 의해 변하고 변함에 의해 변하지 않는다.
질량보존의 변하지 않음에 의해 만유는 변한다. 변하면서도 궤도를 이탈하지 않는다. 엔트로피의 변함에 의해 만유는 보존된다. 보존되면서도 성장한다. 나무처럼 자라고 문명처럼 진보한다. 비로소 우주는 건축된다.
사건이 알맹이다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세상은 딱딱한 하드웨어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무른 소프트웨어로 이루어졌다. 물질이 아니라 정보로 이루어졌다. 무릇 깨달을 일이다. 그것은 일(work)이다. 사건(event)이다.
일은 값≫포지션≫평형계≫구조체≫시스템으로 고도화 된다. 앞의 값이나 포지션은 비교적 무른 편이고 뒤의 구조체나 시스템은 비교적 단단한 편이다. 그러나 내부에 무른 값과 포지션을 품었으므로 역시 무르다.
원자론은 요소가 원래부터 단단하다는 것이다. 틀렸다. 원래 무른데 얽혀서 단단해진 것이며 그러면서도 여전히 내부에 무른 성질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일찍이 노자는 유(柔)가 강(剛)을 이긴다고 했다. 존재는 무르다.
어떤 같은 것이 반복될 때 그 반복의 1 단위를 ‘사건(event)’이라 한다. 그 사건 안에서 반복되지 않는 다섯 성질을 구조(structure)라 한다. 에너지 순환 1 사이클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사건 내부에는 다섯 구조가 들어있다.
구조는 그 사건 안에서 반복되지 않는다. 어떤 반복되는 것 하나에는 반드시 반복되지 않는 다섯이 들어 있다. 이러한 반복성과 비반복성의 조합이 자연의 패턴을 낳는다. 그 패턴을 관찰하여 인간은 인식한다.
● 순환성(선수의 등장) - 선수들은 한 바퀴 돌아 원위치로 돌아온다.
● 분할성(출발선 집결) - 선수들은 결합되어 있다가 출발직후 분할된다.
● 가역성(출발의 신호) - 선수들은 앞으로 혹은 방향바꿔 뒤로 달려간다.
● 연속성(선수의 질주) - 백 미터의 거리는 연결되거나 끊어져 있다.
● 반복성(결승점 골인) - 승부는 반복되거나 혹은 반복되지 않는다.
백 미터 달리기 경주를 예로 들 수 있다. 하나의 사건 속에는 반드시 다섯 개의 대칭이 비반복성을 이루고 있다. 다섯 가지 대칭은 순환, 분할, 가역, 연속, 반복의 가부(可否)를 결정하는 지점이다.
비반복성이 YES로 판정되면 대칭은 평형을 이루어 위로 한 단계 이동하여 판정되고, 비반복성이 NO로 판정되면 대칭은 해체되어 아래로 한 단계 이동하여 판정된다. 구조를 이해한다는 것은 이 순서를 이해하는 것이다.
반복과 연속은 손가락과 같다. 엄지 다음에 검지가 또 나오는 것이 반복이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연속이다. 구조는 손과 같다. 손은 그 손가락들의 반복성을 끊는다. 손가락에서 손으로 비약한다.
손가락에서 손으로, 손에서 팔로, 팔에서 어깨로 구조는 비반복에 의해 상승한다. 가역과 분할은 걸음걸이와 같다. 왼 발이 앞으로 가기 위해서는 오른 발이 뒤로 가주어야 하는 것이 가역이다.
왼발은 앞으로 가고 오른발은 뒤로 갔는데 사람은 앞으로 간다. 그것이 분할이다. 분할은 하나가 다른 하나에 붙잡혀 종속되는 것이다. 왼발과 오른발은 대칭되어 앞뒤가 반반이지만 몸통은 평형이니 앞으로 간다.
왼발과 오른발은 몸통에 종속되어 있다. 날은 심에 종속되어 있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 의해 총과 총알이 반대방향으로 움직여야 하지만 항상 총알만 앞으로 가고 총은 제자리다. 종속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총과 총알을 통일하는 사건은 다시 하나가 된다. 그것이 순환이다. 손가락 하나는 손 하나에 숨고, 손 하나는 팔 하나에 숨고, 팔 하나는 몸 하나에 숨어서 언제나 하나로 존재하며 하나가 전체를 대표한다. 순환이다.
● 반복 - 왼발과 오른발이 나온다.
● 연속 - 왼발과 오른발은 중간에 끊김없이 잇달아 나온다.
● 가역 - 왼발과 오른발 중 하나가 뒤로 가면 하나는 반드시 앞으로 간다.
● 분할 - 한쪽 발이 뒤로 물러나도 몸 전체는 항상 앞으로 간다.
● 순환 - 왼발 오른발을 거쳐 다시 처음 상태로 되돌아온다.
피스톤의 운동은 엔진에 숨고, 엔진의 운동은 바퀴에 숨고, 바퀴의 운동은 자동차에 숨고, 자동차는 부산까지 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언제나 부분은 전체에 숨으니 다시 하나가 된다. 순환이다.
사람의 하루는, 일생에 숨고, 인간의 일생은 자연의 생태계에 숨고, 자연의 생태계는 우주의 순환구조에 숨는다. 물은 하늘로 올라갔다가 다시 바다로 되돌아간다. 그 순환고리 속에 숨는다. 이로써 사건은 완성된다.
세상은 원자 알갱이가 아니라 사건과 그 사건의 완성형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해함에 있어서 완전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은 알맹이와 껍데기로 된 것이 아니라 완전성과 불완전성으로 되어 있다.
일치와 연동의 법칙
구조의 이해는 1의 정의를 이해함과 같다. 2나 3의 의미는 ‘1의 정의’로부터 연역된다. 1이 어떻게 정의되느냐에 연동되어 결정된다. 다른 모든 수도 마찬가지다. 자연수는 1 뿐이다. 나머지는 복제된 것이다.
1은 무엇인가? 1의 의미를 인식하는 것이 구조론 이해의 출발점이다. 1은 ‘가장 작은 것’이 아니라 ‘일치하는 것’이다. 대칭되는 것이다. 사과 하나와 숫자 하나를 대응시켜서 둘이 일치할 때 그것이 곧 1이다.
1이라 하면 가장 작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이는 2나 3과 비교된 것이다. 그러나 2와 3은 1이 복제된 것이다. 1이 2에 선행한다. 2가 탄생하기 전에 1이 있었다. 애초에 1의 탄생시점에는 비교될 2가 없다.
반복/비반복성을 판정하는 단위로서의 자연의 대칭성이 있다. 자연계의 모든 원리는 작용 반작용의 법칙으로 부터 출발한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 의해 자연은 기본적으로 대칭성을 가진다. 숫자 1은 그 대칭의 일치다.
세상의 모든 크기는 인간의 몸과 비교한 크기다. 아기 때는 마을의 고샅길이 넓어보이고 어른이 되면 작아 보인다. 모든 크기는 상대적인 크기이고 절대적인 크기는 없다. 그러므로 가장 작은 수는 없다.
가장 작은 원자 또한 없다. 원자가 없으므로 인식의 출발점은 작은 것이 아니라 ‘일치하는 것‘이다. 원자론의 ‘작다, 쪼갤 수 없다’ 개념을 구조론의 대칭과 그에 따른 일치개념으로 대체해야 한다.
세상은 가장 작은 것이 모여서 크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원본과 그 원본으로 부터 무한히 복제된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본은 1이고 2나 3은 1로부터 복제된 것이며 무한히 복제될 수 있다. 자연의 수는 무한대다.
복제본은 원본과 접점을 유지해야 한다. 원본 1로부터 동떨어진 채로 있을 수는 없다. 2는 1과 붙었고 3은 2와 붙었다. 어떻게든 접점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주는 유지된다. 복제본은 원본에 의해 통제되기 때문이다.
원자론은 폐기되고 그 자리에 일치 개념을 두어야 한다. 세상은 일치와 연동으로 조직된다. 일치는 자연의 대칭성이 하나의 쌍을 이루는 두 짝의 일치다. 일치가 원본을 만든다. 연동은 복제본이 원본을 따름이다.
두 점이 일치하면 선이다. 두 선이 일치하면 각이다. 두 각이 일치하면 입체다. 두 입체가 일치하면 밀도다. 반면 많은 점들, 긴 선, 넓은 각, 큰 입체, 높은 밀도는 그 일치로부터 복제된 연동이다.
● 점 - ◎
● 선 - ◎◎
● 각 - ∠
● 입체 - ×
● 밀도 - ↔●↔
구조론의 점≫선≫각≫입체≫밀도는 기존의 점, 선, 면, 입체와 다르다. 기존의 점, 선, 면, 입체는 어떤 크기가 있다. 그 크기는 최초의 원본으로부터 복제된 것이다. 즉 값이 지정된 것이다. 그 만큼 일한 것이다.
그러나 원본은 크기가 없다. 값이 지정되어 있지 않다. 일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포지션이 있을 뿐 크기는 없다. 선은 길이가 없고 면은 너비가 없고 입체는 부피가 없고 밀도는 질량이 없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구조는 일치와 연동의 교차점이다. 여기서 반복성/비반복성의 판정이 이루어지며 그 판정의 결과로 존재는 제어된다. 그 제어로 하여 세상은 장악되고 통제되니 그것이 우주의 질서다. 그 질서의 불변성이 진리다.
하나의 존재에는 다섯 일치점이 있다. 다섯은 인과율에 의해 서로 연동된다. 그러므로 연역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체를 한 줄에 꿸 수 있다. 밀도≫입체≫각≫선≫점의 순으로 꿰어지며 후자가 전자에 연동된다.
구조론으로 보면 점이 모여서 선이 된 것이 아니라 선이 해체되어 점이 된 것이다. 밀도가 모든 것의 자궁이며 그 밀도의 복제과정에서 입체, 각, 선, 점들이 딸려나오는 것이다.
수학의 기초는 정의다. 점과 선과 각이 별도로 정의될 수 없다. 밀도를 정의하면 입체가 연동되어 정의되고, 입체를 정의하면 각이 연동되어 정의되고 각의 정의에 선이, 선의 정의로부터 점이 유도된다.
그 각각의 내부에는 짝의 대칭이 있다. 쌍이 있다. 두 바퀴의 대칭은 하나의 축을 이루고 두 바퀴축의 대칭은 하나의 엔진을 이룬다. 보디와 섀시의 대칭은 하나의 자동차를 이루고 자동차와 운전자의 대칭은 운행을 낳는다.
운전자≫자동차≫엔진≫바퀴축≫바퀴로 가는 것이 연동이다. 언제라도 엔진이 바퀴를 굴리지 바퀴가 엔진을 굴리지는 않는다. 존재의 비가역성이다. 항상 밀도≫입체≫각≫선≫점의 순서대로다.
데카르트는 의심하라고 했다. 의심은 출발점 찾기다. 만유의 출발점은 어디인가? 제 1 철학의, 제 1이론의, 제 1 원인의, 제 1 출발점은 1이다. 1은 일치와 연동의 교차점이다. 작용과 반작용의 일치다. 일과 사건의 1이다.
구글 검색은 일치와 연동의 원리를 활용한다. 구글은 먼저 검색어와 일치하는 단어를 찾는다. 그리고 그 페이지에 딸린 하위 링크를 검색한다. 여기에 우선순위가 있다. 선 일치 후 연동이다. 그것이 알고리즘이다.
존재는 알고리즘을 가진다. 우선순위를 가진다. 컴퓨터는 알고리즘을 활용하여 연산을 수행한다. 알고리즘은 항상 입력에서 출력이라는 하나의 방향으로 성립하며 예외는 없다. 항상 일치가 먼저고 연동은 나중이다.
미터자와 피트자를 비교해 보자. 센티와 인치의 눈금은 안 맞다. 그러나 많은 눈금들 중 하나는 우연히 일치한다. 다음 눈금도 잇달아 일치한다면 두 자가 같은 눈금을 가진 미터자 혹은 피트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눈금들 중 하나의 일치가 두 번째 일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두 눈금이 연속하여 일치할 때 세 번째 눈금의 일치는 명백하다. 이 원리를 이용해서 새로운 지식을 연이어 창출할 수 있다. 그것이 연동의 법칙이다.
하나를 알면 열을 안다. 열은 하나에 연동되어 있다. 자연에서 지식을 구하는 방법은 패턴찾기다. 무작정 비교하다가 색이든 냄새든 소리든 크기든 맛이든 어떤 일치점을 찾으면 연동시켜 지식을 대량생산한다.
인간이 지식을 얻는 방법은 포드 시스템과 같다. 일치와 연동의 법칙을 활용하여 최초 자연의 패턴에서 얻은 지식을 대량복제 한이다. 지식은 최초의 일치점에서 연동되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얻어진다.
구조는 건축이다. 아파트와 같다. 최초 한 동의 설계도가 일치하면 이에 연동시켜 대량복제할 수 있다. 무수히 지을 수 있다. 인간은 일치와 연동의 방법으로 인생의 항로를 잡을 수 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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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멀(normal)과 같은 개념으로 규구(規矩)가 있다. 규구는 목수의 상징이다. 목수의 상징은 콤파스와 곱자다. 노멀(normal)은 규구 중에서 곱자를 의미한다. 콤파스가 규(規)고 곱자가 구(矩)다.
중국의 창조신화에 등장하는 여왜(女媧)씨와 복희(伏羲)씨가 들고 있는 물건이 규구다. 여왜씨는 규를 들었고 복희씨는 구를 들었다. 곧 천하의 질서다. 규는 규칙이다. 규범이고 규율이고 규정이고 규제다.
왜 콤파스가 규칙이나 규율을 의미하는가? 콤파스는 원을 그리는 도구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콤파스는 같은 거리의 점들을 복제하는 수단이다. 같은 크기의 간격을 대량으로 복제할 수 있다. 존재의 반복성이다. 연동이다.
원은 같은 거리의 점들의 집합이다. 무수한 점들이 같은 거리로 반복하여 복제된 것이 원이다. 원은 콤파스를 사용하는 여러 방법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콤파스의 진정한 의미는 존재의 반복성을 나타내는 데 있다.
조상들은 규구로 천하의 질서를 두루 해명했다. 콤파스의 반복성과 곱자의 비반복성으로 우주의 질서를 설명한 것이다. 반복성과 비반복성을 하나로 담아낸 것이 구조다. 하나의 반복 안에는 다섯 비반복이 숨어 있다.
● 일치 - 존재의 비반복성(기준찾기)
● 연동 - 존재의 반복성(대량복제하기)
운동장에 흩어진 사람을 모으려면 먼저 기준을 세워야 한다. 한 명을 지목하여 팔을 높이 들고 ‘기준!’을 구령으로 외치게 한 후 그 기준에 연동시켜 양팔간격으로 정렬하게 한다. 기준이 일치고 기준에 맞추는 것이 연동이다.
곱자 구(矩)는 ┓자 모양으로 꺾여 있다. 존재의 비반복성, 불연속성, 비가역성, 비분할성, 비순환성을 나타낸다. 꺾이는 지점이 기준점이다. 하나의 사건에는 다섯 기준점이 있다. 다섯 일치점이 있다. 이에 연동시킬 수 있다.
배경 ┳ 응용
실체 ┳ 종합
연관 ┳ 분석
이행 ┳ 수용
귀결 ┳ 지각
┳는 구조를 나타낸다. 구조는 일치와 연동을 판정한다. 하나의 사건에 다섯 일치와 연동을 판정하는 지점이 있다. ┳에서 가로 ━와 ━는 일치 (→←)를 나타내고 세로선 ┃는 연동을 나타낸다.
존재의 알고리즘은 순서와 방향이다. 순서는 연동되어 반복되고 방향은 일치되어 반복되지 않는다. 어떤 하나가 반복되기 위해서는 다섯번에 걸쳐 방향이 다시 지정되어야 한다. 다섯 일치점을 찾아서 연동시켜야 한다. 구조다.
구조란 무엇인가?
구조는 근본되는 세 가지 법칙에 기반한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 질량보존의 법칙,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다. 구조는 작용 반작용에 의해 탄생하고 질량보존에 의해 고도화 되며 엔트로피에 의해 해체된다.
◎ 작용 반작용의 법칙
세상을 규율하는 근본은 작용 반작용법칙이다. 모든 법칙을 낳는 어머니 법칙이라 하겠다. 작용과 반작용이 얽히면 질량보존의 법칙으로 나타나고 해체되면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으로 나타난다.
◎ 질량보존의 법칙
작용측과 반작용측은 마주보고 대칭된다. 대칭이 평형을 성립시킬 때 서로 얽혀서 구조체와 시스템을 이루어 보존되는 것이 질량보존의 법칙이다. 이로써 물질을 이루어 세상의 존재를 크게 구축한다.
◎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
작용 반작용의 대칭이 평형이 아닐 때 계가 해체되면서 더 낮은 단계의 평형으로 이행한다. 시간 상의 운동이 일어나고 이는 변화로 나타난다. 구조의 해체에 따라 점차 포지션을 잃어 더 이상 변화할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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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조는 작용 반작용이다
세상은 구조다. 구조는 얽힘이다. 얽힘은 만남으로 시작된다. 두 개체가 만나서 서로 맞물리고, 맞서고, 하나되고, 마침내 소통함에 따라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적용되는 정도가 단계적으로 고도화 된다.
이는 외부에서의 작용에 맞서 어느 수준까지 반작용할 것인가다. 작용이 표피에 살짝 걸쳤는가 아니면 원자 단위로 깊숙히 맞물려 들어와서 내부의 본질을 건드리는 물리, 화학적 반응을 끌어내는가이다.
◎ 구조는 밸런스다
밸런스는 구조의 안정된 형태다. 구조가 불안정하면 변화가 일어나 더 낮은 단계의 안정상태로 이행한다. 그러므로 존재는 어떤 경우에도 밸런스를 나타낸다. 세상은 다섯가지 패턴의 밸런스로 이루어졌다.
밸런스는 대칭과 평형이다. 대칭은 천칭저울의 두 날개가 맞물림이며 평형은 천칭저울의 축이 두 날개를 동시에 통제함이다. 두 날개의 대칭이 평형에 이르면 한 차원 더 높은 단계의 밸런스로 이동한다.
◎ 구조는 포지션이다
포지션은 밸런스를 이루는 대칭구조 내에서의 위상이다. 서로 마주보고 대칭되는 지점이 ‘날’의 포지션이고 둘이 가운데서 교차되는 지점이 ‘심’의 포지션이다. 계급 차이가 있다. 심이 날에 앞선다.
두 날이 따로 떨어져 있을 때 짝이다. 떨어져서 함께 다니면 쌍이다. 젓가락 두 짝이 떨어져 있지만 반찬을 집어올려 일을 할 때는 사람의 손에 의해서 붙는다. 겉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실제로는 언제나 통일되어 있다.
◎ 구조는 발전한다
구조는 낮은 단계에서 아날로그 구조로 나타나며 외부의 작용에 대해 1회의 일을 한다. 구조가 고도화 되면 디지털 구조로 세팅되어 구조적 안정을 이루며 외부의 작용을 반복적으로 처리하여 일하고 에너지를 순환시킨다.
구조가 일하면 잉여를 낳고 잉여가 축적되며 이를 바탕으로 구조를 복제한다. 복제본은 원본의 주변에 자리잡고 원본과 소통의 접점을 유지하며 점점 자라난다. 구조가 진보하고 성장하는 것이 시스템이다.
◎ 구조는 패턴이다.
구조는 포지션의 고도화 된 정도에 따라 ‘점, 선, 각, 입자, 밀도’의 다섯 패턴을 나타낸다. 패턴들은 각각의 밸런스를 가진다. 점의 밸런스, 선의, 각의, 입체의, 밀도의 밸런스를 각각 이룬다. 세상은 패턴 5로 이루어져 있다.
패턴들은 포함관계를 가진다. 점은 선에 포함되고 선은 각에, 각은 입체에, 입체는 밀도에 포함된다. 구조의 작용은 밀도≫입체≫각≫선≫점의 순서로 나타난다. 구조론은 그 작동의 순서와 방향을 해명한다.
구조는 일을 한다
계에 작용을 가하면 밀도가 걸린다. 계는 불안정해진다. 요소들은 불안정≫안정의 방향으로 움직이며 심과 날로 짝을 짓는다. 질≫입자≫힘≫운동≫량으로 전개되며 각 단계의 밸런스를 이룬다.
차례로 포지션이 세팅되어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의 한 사이클이 갖추어지면 구조체를 이룬다. 구조체는 일을 한다. 일을 통하여 외부에서의 작용을 처리하며 에너지를 순환시킨다.
일은 포지션과 순서를 가진다. 일은 입력에서 시작되어 출력으로 끝난다. 입력이 원인이면 출력은 결과다. 인과율에 따라 입력과 출력 포지션 중 하나가 빠지거나 그 순서가 바뀔 수는 없으니 이에 우주의 질서를 이룬다.
※ 인과율의 공간성과 시간성
● 공간의 인과율 - 입력과 출력 중 하나가 없을 수는 없다. 원인(결과)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원인)가 있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 시간의 인과율 - 입력에서 시작되어 출력으로 끝나며 그 반대는 없다. 시간의 비가역성에 따라 과거≫미래의 일방향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구조체는 일의 진행에 따라 입력측의 대칭과 출력측의 대칭을 성립시킨다. 두 대칭구조가 제어에서 만나 더 큰 단위의 전체적인 밸런스를 성립시킨다. 그러므로 구조체는 요소 5로 동그라미가 완성된다.
대칭 1 대칭 2
입력●저장 (제어) 연산●출력
대칭 3
구조는 질서를 가진다. 시간의 질서와 공간의 질서다. 시간의 질서는 일의 진행순서를 나타낸다. 곧 우선순위다. 입력≫출력의 일방향성이다. 원인≫결과로 가고 시작≫끝으로 간다. 비가역성에 따라 순서는 절대 바뀔 수 없다.
공간의 질서는 일의 진행방향을 나타낸다. 곧 접근경로다. 심≫날로 가고 높은 질서≫낮은 질서로 가고 질≫양으로 간다. 공간의 방향성 역시 비가역성을 갖는다. 절대 바뀔 수 없다. 그러므로 믿을 수 있다. 그래서 진리다.
◎ 구조 - 지진은 1회의 일처리로 에너지를 소모한다.
◎ 구조체 - 피드백을 통한 반복적인 일처리로 에너지를 순환시킨다.
◎ 시스템 - 생물의 진화는 자신을 복제하여 거느리고 성장한다.
구조는 일을 한다. 구조는 피드백을 통한 반복적인 일처리에 의해 구조체로 발전한다. 구조체는 잉여를 획득하며 그 잉여를 토대로 자신을 복제하여 주변에 거느리고 시스템으로 발전한다.
구조는 세상을 잇는다
세상은 크다. 크기가 존재한다. 우주는 모눈종이처럼 일정한 크기의 칸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틀렸다. 일정한 크기는 무한히 쪼개진다. 쪼개져서 무한히 작아진 점들을 무한히 더해도 조금도 커지지 않는다.
무엇인가? 절대적인 크기는 없다. ‘세상은 크다. 그런데 크기는 없다’는 딜레마다. 모순이다. 점은 위치가 있을 뿐 크기가 없다. 무한히 작은 점을 무한히 더해도 일정한 길이의 선이 되지 않는다.
일정한 길이의 선을 무한히 더해도 단지 긴 선이 될 뿐 면이 되지 않는다. 선은 너비가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면을 더해서 넓은 면이 될 뿐 입체가 되지 않는다. 이런 식이라면 우주는 지탱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크기는 실상 포지션이 연출한 것이다. 상대적인 크기다. 모든 크기는 비교된 크기이며 따라서 비례가 존재한다. 문제는 그 비례를 어떤 방법으로 탄생시킬 것인가이다. 구조론은 그 비례를 유도하는 절차다.
역발상이 필요하다. 점을 더해서 선이 되지 않지만 거꾸로 선을 쪼개면 점이 된다. 점을 더해서 선이 되지 않는데 왜 선을 쪼개면 점이 되는가? 포지션 때문이다. 선은 점+점이 아니라 점+포지션이다.
1점+1점=2점이 될 뿐이지만 점+포지션=짝을 이루어 선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선은 점을 더한 것이 아니라 짝 지은 것이다. 짝짓기가 포지션이다. 점에는 포지션이 없으므로 점을 더해도 선이 되지 않는다.
존재는 점≫선≫각≫입체≫밀도의 순으로 귀납된 것이 아니라 실은 그 반대다. 밀도≫입체≫각≫선≫점의 순으로 연역되었다. 점+점=선은 불성립이다. 포지션이 빠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반대는 가능하다.
밀도를 쪼개면 두 입체가 되고, 입체를 쪼개면 두 각이 되고, 각을 쪼개면 두 선이 되고, 선을 쪼개면 두 점이 된다. 밀도가 출발점이며 입체의 정의는 밀도로부터 유도되고, 각의 정의는 다시 입체의 정의로부터 유도된다.
세상에 크기는 없다. 원자론의 원자를 연상케 하는 절대크기가 없다. 모눈종이의 한 칸이 없다. 우리가 크다고 느끼는 것은 실상 비교가 만들어낸 관념이다. 비교하여 포지션을 확인한 것이다.
우리가 ‘크다’고 느끼는 것은 ‘날’의 포지션에서 ‘심’의 포지션을 바라보았다는 의미다. 단지 바라보는 방향, 곧 포지션이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비례다. 크기를 유도하려면 비교해야 하고 따라서 비례가 존재해야 한다.
비례를 유도하는 절차가 ‘밀도’다. 하나의 구조는 밀도의 차원에 도달함으로써 완성된다. 점≫선≫각≫입체≫밀도로 완성된다. 그런데 실제로 자연에서는 밀도≫입체≫각≫선≫점으로 쪼개질 뿐이다.
무엇인가? 존재론과 인식론이 있다. 실제 자연에서는 밀도≫입체≫각≫선≫점으로 쪼개지지만 이는 원본이 되는 하드웨어고 복제본은 점≫선≫각≫입체≫밀도의 순으로 집적된다. 복제본은 소프트웨어다.
원본이 빛이면 복제본은 그림자다. 빛은 밀도≫점으로 해체될 뿐이지만 그림자는 점≫밀도로 축적된다. 대지에 건물을 짓는 과정은 밀도≫점으로 해체되지만 그 건축에 의해 저절로 생겨나는 골목길은 점≫밀도로 축적된다.
저절로 생겨나는 그림자인 인식론은 스스로 작동하지 않으므로 그 복제본이 작동할 때는 다시 존재론으로 전환된다. 존재론이 凹면 인식론은 凸이고 그 凸가 작동할 때는 다시 凹로 바뀌는 것이다.
무엇인가? 투수가 공을 던지려면 먼저 어깨가 팔을 지배하고, 팔이 손을 지배하고, 손이 손가락을 지배한다. 어깨가 팔에 정보를 전달할 때 어깨┣≫팔┫이지만 그 팔이 다시 손에 정보를 전할 때는 팔┣≫손┫가 되는 것이다.
인식론은 귀납된다. 거울처럼 뒤집어서 반영한다. 인간의 인식에서는 점≫선≫각≫입체≫밀도의 순으로 집적되어 고도화 된다. 자연에서 존재론은 그 반대로 작동하므로 세상의 모든 혼선이 빚어진 것이다.
구조가 밀도의 차원으로 고도화 되기 이전의 점≫선≫각≫입체까지는 비례가 없다. 그러므로 크기 자체가 없다. 모눈종이 눈금의 칸 속은 텅 비어있다. 구조론은 그 칸 속을 채워서 모눈종이가 벌떡 일어서게 만드는 것이다.
닫힌 계에 외부에서의 작용이 가해지면 계에 밀도가 걸리고 이에 심과 날이 탄생한다. 포지션이 정해진다. 포지션에 따라 ‘크다’ 혹은 ‘작다’로 판정된다. 비로소 크기의 탄생이다. 구조는 밀도를 성립시킬 때 완전해진다.
밀도는 모눈종이의 칸을 채워서 서로 떨어져 있는 A와 B를 잇는다. 점≫선≫각≫입체까지는 연결되지 않는다. 우주 공간에 서로 떨어져 있는 A와 B를 어떻게든 연결시킬 수 없다. 왜? 정보를 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쉽게 종이 위의 A와 B 두 점을 선으로 잇는 것은 그 평면의 종이가 선을 가두고 있기 때문이다. 상위 단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존재는 높은 질서≫낮은 질서로 이행하므로 항상 상위단계가 존재해야 작동한다.
인간에게 있어 그 상위단계는 뇌 속에 존재하는 동일한 패턴의 모형이다. 인간이 입체를 볼 수 있는 것은 사람의 뇌 속에 사전에 제공되어 있는 밀도의 모형을 패턴원리를 따라 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1차원 선 위를 가는 개미가 방향을 틀지 못하듯이 서로 연결할 수 없다. 선에서는 선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 다른 선과 연결할 수 없다. 궤도 위를 가는 1차원 개미는 옆에 있는 동료 개미를 볼 수 없다.
문제를 풀 때 풀다라는 표현을 쓴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원인 A와 결과 B를 연결하는 문제다. 연결하기 위해 끈이 필요하다. 그 끈이 엉켰으므로 푸는 것이다. 세상 모든 문제는 서로 다른 두 점을 잇는 문제다.
달나라로 우주선을 보낸다 해도 달과 지구를 잇는다. 돈을 번다해도 돈과 나를 잇는다. 성공을 꿈 꾼다 해도 성공과 나를 잇는 길을 찾는다. 결국 구조론의 본질은 A와 B를 잇는 문제다.
도(道)는 길이다. 길은 잇는다. 이어지지 않아서 세상 모든 문제가 발생했으니 도를 얻어서 둘을 이으면 문제가 풀린다. 희망도, 깨달음도, 사랑도, 구원도 결국 A와 B를 잇는 이 하나의 문제로 환원된다.
사랑이란 너와 나를 잇는 것이다. 희망이란 현재와 미래를 잇는 것이다. 질서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것이다. 유교주의는 군신유의로 군신을 잇고 부자유친으로 부자를 잇는다. 그렇게 이어서 질서를 만든다.
문제가 결국 하나이듯이 답도 결국 하나다. 이으면 풀린다. 어떻게 이을까? 세상은 모눈종이다. 그 빈 칸을 채워야 이어진다. 계에 밀도를 걸어서 비례를 탄생시키는 방법으로 존재를 포지셔닝하여 이을 수 있다.
구조는 대상을 통제한다
구조란 어떤 대상을 외부에서 작용하여 통제하는 방법이다. 다섯 가지 방법으로 통제할 수 있다. ‘닿기≫늘기≫얽기≫꿰기≫몰기’의 방법이 있다. 각각 ‘점≫선≫각≫입체≫밀도’에 해당한다.
강에 다리가 놓여 있다. 다리의 폭이 그 다리 위를 지나는 화물의 크기를 제한한다. 이것이 구조가 대상을 통제한다는 것의 의미다. ‘닿기≫늘기≫얽기≫꿰기≫몰기’는 강에 놓여져 있는 그 다리의 형태다.
점의 닿기는 징검다리와 같다. 한 명만 건널 수 있다. 한 사람이 징검다리를 다 건널 때 까지 맞은 편에서는 올 수 없다. 반면 선의 늘기는 섶다리와 같다. 줄지어 차례로 건널 수 있다.
각의 얽기는 차선이 그어진 다리와 같다. 양방향으로 동시에 건널 수 있다. 여기서 점이나 선은 다리의 폭이 지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중요하다. 각의 얽기에 와서 처음으로 일정한 너비의 폭이 정해진다.
물론 실제로 지상에 다리를 놓으려면 아무리 작은 다리라 해도 일정한 너비의 폭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보가 지나는 랜선에서는 폭의 의미가 없다. 불빛으로 신호를 보낼 때 그 일정한 너비의 폭은 없다.
수학의 순수 추상으로 보면 점과 선은 폭이 없다. 그러면서도 충분히 교통할 수 있다. 정보도 전달되고 에너지도 전달된다. 인간의 눈이나 귀가 자연에서 정보를 얻는 바도 마찬가지다. 물론 물체는 건널 수 없다.
입체의 꿰기는 그 다리 위로 트럭이 지나는 것과 같다. 강물 위에 놓인 다리만 다리가 아니다. 트럭은 그 자체로 움직이는 다리다. 다리는 건네주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트럭도 엘리베이터도 에스컬레이터도 다리다.
입체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동시에 건넌다. 눈으로 사과를 본다면 그 사과에 대한 정보만 오고 실물은 오지 않는다. 반면 선은 에너지를 포함하고 각은 방향성을 포함하고 입체는 실물과 정보를 함께 운반한다.
밀도의 몰기는 수도관과 같다. 관에 유체를 태우고 밀도차를 걸어주면 저절로 흘러간다. 구조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밀도의 수도관이 징검다리+섶다리+차선있는 다리+트럭+수도관을 합쳐놓은 개념이라는 데 있다.
전선도 마찬가지다. 발전기가 전압을 걸어주면 스스로 길을 찾아간다. 전기는 항상 최단거리를 가므로 트럭과 달리 굳이 길을 알려주지 않아도 제 발로 길을 찾아간다. 저절로 제어되고 저절로 순환된다.
◎ 닿기 : 반복통제 - 점(點) (←●)
※ 현재상태를 변경한다. 움직이고 있는 것을 멈추거나 혹은 멈추어 있는 것을 움직이게 한다.
※ 일처리에 있어서는 일정한 공간을 왕복한다. 힘센 장정이 어린이를 한 명씩 업어서 강을 건네주고 다시 되돌아오기를 반복함과 같다.
◎ 늘기 : 연속통제 - 선(線) ( ←●○)
※ 움직이는 것은 가속시키고 정지한 것은 그 양을 늘린다. 현재상태를 더 확대한다. 증가시킨다.
※ 일처리에 있어서는 같은 패턴의 일을 모아서 대용량을 한꺼번에 연속적으로 처리한다. 여러 사람이 줄지어서 일제히 강을 건너는 것과 같다.
◎ 얽기 : 교차통제 - 각(角) (→○●←)
※ 마주보고 교착시킨다. 힘의 방향이 대칭을 이룬다. 이때 힘의 방향과 크기가 일치해야 하므로 정확도가 요구된다.
※ 일처리에 있어서는 정밀도를 높인다. 예리한 칼날과 같다. 힘의 정확도는 힘의 크기와 대등하다. 두 배 예리한 칼은 두 배 센 칼과 같다.
◎ 꿰기 : 결합통제 - 입체(立體)
→○○←
↑●
※ 심이 날을 통제한다. 높은 질서가 낮은 질서 통제한다. 1이 2를 통제하면 2가 4를, 4가 8을 통제하는 식으로 증폭되어 전체를 통제한다.
※ 일처리에 있어서는 단계적으로 처리능력을 확대시킨다. 피라미드식 통제, 봉건제도, 군대의 계급제도, 회사소직 등의 기하급수적 일처리와 같다.
◎ 몰기 : 유도통제 - 밀도(密度)
↓○
←○●←
↑○
※ 에워싼 다음 한쪽으로 길을 열어주고 밀도를 걸어주면 특정방향으로 움직인다. 이때 얽기나 꿰기와 달리 비대칭구조가 적용된다.
※ 일처리는 자동화 된다. 꿰기가 높은 질서에서 낮은 질서로 한 방향으로만 처리되는데 비해 몰기는 피드백의 되먹임에 의해 순환된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영역은 이 다섯가지 방법으로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 대상을 장악하고 지배할 수 있다. 원하는 데로 할 수 있다. 맘대로 다 된다. 세상은 이렇듯 단순한 것이다.
그러데도 세상이 복잡한 이유는 시간과 거리의 비례 때문이다. 심 1이 날 2를 통제한다. 이때 심이 날보다 크지만 날에 더 많은 시간과 거리가 주어지면 평형이 회복된다. 이때 거리가 두 배면 시간도 두 배다.
무엇인가? 대칭원리에 따라 상대방을 통제하려면 최소한 상대와 힘이 대등해야 한다. 상대가 강하고 내가 약하면 나는 상대를 통제할 수 없다. 이길 수 없다. 그런데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힘이 상대의 1/2밖에 안되어도 내가 더 예리한 칼을 쓰면 이길 수 있다. 더 많은 시간을 쓰면 이길 수 있고 더 많은 반복횟수로도 이길 수 있다. 상대가 지렛대의 짧은 날을 잡고 내가 긴 손잡이를 잡으면 내가 이긴다.
세상의 모든 착각과 혼선, 복잡함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특히 시간 상의 반복은 착각을 불러 일으켜서 오판하게 한다. 도드래는 힘을 절약시켜 주지만 시간이 두 배로 걸린다. 문제를 푼다는 것은 대략 이런 거다.
승부에서 이긴다는 것은 내가 더 높은 수준에서 통제하는 것이다. 더 높은 포지션을 선점함으로써 가능하다. 상대가 닿기를 쓰면 나는 늘기를 쓰고 상대가 늘기를 쓰면 나는 얽기를 써서 제압할 수 있다.
상대가 어떤 방법을 써도 나는 이길 수 있다. 만약 상대가 처음부터 몰기로 나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건은 항상 가장 낮은 단계에서 촉발되기 때문이다. 먼저 닿아야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건달이 시비를 걸어오더라도 어깨가 닿아야 시비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닿기를 써야 게임은 시작되며 이때 잽싸게 포지션을 이동시켜 늘기로 전술을 바꾸는 쪽이 승리한다. 그러면 상대방 역시 늘기로 응수한다.
그 경우 얽기를 구사하여 제압한다. 상대방이 얽기를 모방하면 꿰기로 제압한다. 이렇듯 상대가 따라와 주어야 더 높은 포지션으로 옮겨갈 수 있다. 이렇듯 상대를 낚아서 몰고 다니며 항상 승리할 수 있다.
구조론의 가치
완전성을 알 수 있다
모든 존재는 하나의 목적을 가진다. 그것은 관계맺기다. 무엇이든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관계는 둘이 어울리고서야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관계는 상대적이다. 이에 완전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짝사랑이면 불완전하다. 혼자서는 불완전하다. 인간은 지식에서 답을 찾지만 실패하고 만다. 학자가 골방에서 혼자 지식을 이룰 수는 있으나 짝사랑과 같다. 쓰이지 않는 지식은 허무할 뿐이다.
지식에서 실패하고 돈에서 답을 찾기도 한다. 돈은 무인도에서 혼자 쓸 수 없다. 사회가 있어야 돈이 쓰인다. 타인이 받아들여주어야 돈이 돈값을 한다. 재벌의 쌓아둔 돈 역시 짝사랑과 같다. 불완전하다.
인간은 종교와 예술과 문화로 눈을 돌린다. 그것은 지식과 돈을 쓰는 것이다. 그 지식을 완전하게 하고 그 돈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다. 종교와 예술과 문화는 결국 인간과 인간의 관계맺기다.
그것은 무엇인가? 소통이다. 세상 모든 존재는 시스템 안에서 그 시스템의 성장으로 하여 원본으로 부터 복제된 것이다. 그러므로 불완전하다. 짝사랑과 같은 것이다. 소통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식은 골방에서 나와야 구실을 한다. 소년은 세상으로 나와야 사람 구실을 한다. 돈은 재벌의 금고에서 나와야 돈의 구실을 한다. 그래야지만 숨을 쉬고 맥박이 뛰고 혼이 서린다. 흥분된다. 느낌 온다.
존재의 근본 문제는 결국 소통의 문제다. 불완전한 것을 완전하게 하는 문제다. 소통은 둘 이상이 만나고 맞서는 현장에서 얻어진다. 현장에서 답해야 진짜다. 예술, 종교, 문화, 관습, 이념들은 나름대로 이 문제에 답하고 있다.
종교와 예술은 어떻게든 소통의 접점을 제시한다. 틀린 답안지라도 최소한 답안지를 내밀어보기는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과학은 현실과의 소통을 거부한다. 혼자서 문제나 풀어댈 뿐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는다.
구조는 집적되어 고도화 된다. 밀도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 완성된다. 내부에 심을 심고 외부로 날을 뻗는다. 그 펼쳐진 날개로 타인과 손 잡을 수 있다. 비로소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예술, 종교, 문화, 이념들은 그 날개가 있다. 외부와 만나는 접점이 있다. 입력과 출력이 있다. 질은 낮아도 완제품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실천하게 한다. 어떤 사이비한 종교집단이라도 외부와 소통하는 접점은 있다.
반면 과학은 반제품이다. 지식은 반제품이다. 만질 수도 없고 먹을 수도 없다. 소스를 제공할 뿐이며 그 자체로서 인간의 행동과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 인간이 놀라고 당황했을 때 어쩌라는 건지 답을 주지 않는다.
지식은 그 자체로는 관계를 맺지 못한다. 입력과 출력의 접점이 없기 때문이다. 소통의 문제에 답하지 않는다. 결정적인 순간에 침묵한다. 실천해야 할때 타이밍을 찍어주지 못하고 나아가야 할때 방향을 일러주지 못한다.
구조론이 해결한다. 완전성의 개념을 제시한다. 완전과 불완전을 가려보는 심미안을 제공한다. 우선순위를 알면 스위치를 켤 타이밍을 정할 수 있고 접근경로를 알면 우리 함께 행진하여 나아갈 방향을 정할 수 있다.
일머리를 알 수 있다
일을 풀어가는 시간의 우선순위와 공간의 접근경로를 알 수 있다. 모든 존재는 고유한 주소지를 가진다. 이에 목차를 정할 수 있고 프로그램을 짤 수 있다. 계획할 수 있다. 설계도를 그릴 수 있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결국 연결의 문제다. 어떤 정밀한 기계장치라도 그 연결을 위한 입력과 출력부분은 아날로그다. 뛰어난 컴퓨터라도 입력하는 자판은 아날로그다. 손가락으로 일일이 쳐주어야 한다.
출력하는 모니터도 아날로그다. 눈으로 일일이 읽어야 한다. 연결의 접점부위는 어떤 과학도 답을 제시할 수 없다. 과학의 지식은 그 처음의 시작과 결말의 끝단을 찍어주지 않는다. 정밀하게 세팅된 중간부분을 알려줄 뿐이다.
존재는 많은 부분에서 세팅되어 있다. 과학은 세팅되어 있는 중간 부분을 해명한다. 세상에는 절대 세팅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입력과 출력부분이다. 어떤 일의 시작이나 끝단 인간이 혼자서 고독하게 결정해야 한다.
누구도 대리해주지 않는다.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대신 밥을 먹어주지 않고 대신 배설해주지 않는다. 버스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사람을 운반해주지만 타고 내리는 것은 본인이 직접 해야 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부터 국적과 주소와 가족과 신분이 정해진다. 사전에 세팅되어 있는 것이다. 정해진 궤도 안에서 자기자리만 찾아가면 된다. 이렇듯 세팅된 시스템에 적응하려 들기 때문에 인간이 망가진다.
그것이 허상임을 알아야 한다. 아무 것도 정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죽음 앞에서, 사랑 앞에서, 변혁의 기로에서 그것은 헛될 뿐이다. 언제라도 백지상태에서 새로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일의 1사이클이 진행되는 전체과정을 아는 것이 일머리를 아는 것이다. 특히 과학이 해명해주는 세팅된 중간부분을 제외하고 세팅되지 않은 시작과 끝부분을 다룰줄 아는 것이 일머리를 아는 것이다.
피드백을 아는 것이다. 대상을 장악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베테랑이어야 한다. 달인이어야 한다. 고수여야 한다. 그들은 다르다. 전체과정을 안다. 골방의 지식인과 달리 일머리를 안다. 소통할 줄 안다.
조직을 통제할 수 있다
구조는 집적을 거쳐 고도화 되어 밀도를 얻으면 시스템이 완성된다. 시스템은 에너지 순환이 이루어지는 1 사이클의 완성을 갖춘다. 완성되면 저절로 돌아간다. 자동차처럼 발동만 걸어주면 저절로 돌아가야 완전하다.
저절로 돌아가야 조직을 통제할 수 있다. 최소의 개입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다. 조직을 통제하는데 실패하는 이유는 리더가 일의 시작단계가 아닌 중간단계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 경우 방향성을 잃는다.
1만명의 무질서한 군중을 통제하려면 무리를 하나의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리더는 맨 앞이나 맨 뒤에 있어야 한다. 리더가 중간에 파묻혀 있으면 군중은 방향을 잃고 사방으로 흩어져 버린다.
리더는 시작단계와 마지막 단계만 개입해야 한다. 중간단계는 완벽하게 세팅해 두고 아예 건드리지를 말아야 한다. 예로부터 중간 허리에는 전문가와 관료를 포진시켰다. 그들에게 전권을 주고 건드리지 않았다.
이명박류 어리보기들은 그 중간허리를 건드려서 망친다. 맨 위의 리더는 깨우쳐 방향을 바꿀 수 있고 맨 아래의 병사는 선동하여 사기를 끌어올릴 수 있지만 훈련된 중간간부들은 전문성을 존중하여 일체 손대지 말아야 한다.
리더는 뛰어난 기획가이거나 혹은 뛰어난 영업맨이어야 한다. 스티브잡스의 기획력과 빌 게이츠의 영업력을 갖추어야 한다. 중간 허리를 흔드는 멍청이 리더를 만났다면 일은 글렀으니 튀는 것이 상책이다.
시스템 세팅은 디지털화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입력과 출력은 아날로그를 벗어날 수 없다. 최초에는 리더가 혼자 결정해야 한다. 발동을 걸어주어야 한다. 최후에는 제 손으로 떠먹어야 한다. 누구도 떠먹여주지 않는다.
뛰어난 엔진도 구동모터 없이 작동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밖에서 최소한의 개입으로 시동을 걸어주어야 한다. 좋은 리더는 그 부분에만 개입한다. 개입을 최소화 한다. 조직의 혼선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개입을 최소화 하려면 중간부분이 세팅되어야 한다. 디지털화 되어야 한다.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 중에서 입력 단계는 리더가 직접 개입하고 하부구조를 효율적으로 세팅해두면 조직은 저절로 돌아간다.
운전자는 단지 입력할 뿐이다. 저장≫제어≫연산≫출력의 나머지 하부구조는 엔진과 기어와 구동축과 바퀴가 알아서 한다. 그것이 조직을 통제하는 방법이다. 하부구조를 단계적으로 세팅해 두는 방법으로 가능하다.
창의할 수 있다
인간은 언어로 사유하고 언어로 판단하고 언어로 결정한다고 착각하지만 실로 그렇지 않다. 언어는 직관이 판단하고 결정한 것을 자신에게 납득시키거나 혹은 타인에게 전달하는 데 쓰일 뿐이다.
언어로 이루어진 교과서적 지식은 과거에 먼저 온 선현들이 판단하고 결정하여 축적한 데이터를 불러와서 쓰는 것이다. 그 부분은 세팅되어 있다. 이 부분은 진행되는 일의 중간부분에만 사용된다.
어떤 일의 첫 시작부분은 절대적으로 직관이 기능한다. 첫 등교, 첫 출근, 첫 만남, 첫 데이트, 첫날 밤은 그 불러들일 데이터가 없다. 있다 해도 쓸모가 없다. 그것은 가짜이기 때문이다. 모조품이기 때문이다.
행동과 연결되는 판단부분은 직관된다. 직관은 자연의 자연스러움, 아름다움, 떳떳함, 긴장됨의 감정에 기초한다. 예술가가 열정을 갖는 이유는 그 작품 앞에서 긴장하기 때문이다. 긴장이 창조의 직관을 끌어내기 때문이다.
모든 창조는 첫 시작이다. 다른 사람이 저장해 둔 데이터를 불러들여 사용한다면 창조가 아니다. 모방이다. 모방에는 열정이 필요하지 않다. 긴장이 필요하지 않다. 세팅되어 있는 것을 그냥 가져다 쓰면 된다.
자기 감정을 해석하는 능력이 직관력이다. 창의력은 직관력에서 얻어진다. 진정한 창의는 스타일의 완성에 있으며 그것은 계를 통일하는 밀도에 의해 얻어지기 때문이다. 밀도의 깊이를 느끼는 것이 긴장이다.
예술가의 첫번째 조건은 민감함이다. 예민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직관력을 사용할 수 있다. 계에 걸려있는 긴장의 밀도를 척 보고 파악할 수 있다. 그 긴장의 밀도에서 독창적인 자기 스타일이 유도된다.
자기 내면의 깊이에서 그 대상의 깊이가 반응하는 것이다. 그것이 스타일이다. 계를 통일하는 자기류의 질서를 얻는 것이다. 자기 내부에 쌓인 내공이 없다면 대상은 반응하지 않는다. 긴장되지 않는다.
그럴 때 관객은 졸음을 참지 못한다. 소설은 졸리고 드라마는 졸리고 객석의 청중은 졸고 있다. 관객이 집중하는 긴장감은 작가의 긴장이 복제된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스타일을 잃을 때 관객은 잠을 잔다.
예술가는 창의한다. 창의는 작가 자신이 주장하는 미학적 질서다. 작품 내부에 그 질서에 기초한 내적 정합성이 성립해야 한다. 계에 밀도가 걸려있어야 한다. 그것은 작품의 한 부분이 바뀌면 전체가 바뀌게 하는 것이다.
스타일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그것이다. 작품 중 한 귀퉁이를 임의로 바꾸면 다른 부분이 전체적으로 영향을 받아서 흔들려야 한다. 건물의 못 하나를 뽑으면 건물 전체가 무너져야 한다. 그럴 때 완벽한 작품이다.
작가는 계에 밀도를 걸어주는 방법으로 그 긴장을 끌어낸다. 그것이 소재와 내러티브와 주제를 넘어서는 스타일이다. 그 긴장을 포착할 수 있는 민감성이 작가의 소질이다. 약간의 어색함에도 예리하게 반응해야 한다.
분류할 수 있다
안다는 것은 분류할 줄 안다는 것이다. 자동차를 분류할 수 있는 사람이 자동차를 아는 사람이다. 먼저 완전성을 이해해야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외부와의 소통을 이해해야 그 완전성을 이해할 수 있다.
자동차 외부의 도로를 알고, 외부의 배를 알고, 외부의 비행기를 알아야 한다. 외부의 배에 내린 짐을 싣고 외부의 도로로 이동하여 외부의 비행기로 옮겨싣기 때문이다. 자동차 내부만 알고 있다면 불완전하다.
둘째 내부에서는 내적 정합성을 이해해야 완전하다. 그것은 계 전체를 한 줄에 꿰어 하나의 수단으로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내부를 장악하고 하나의 논리로 전부 설명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자동차는 핸들 하나로 조작한다. 운전기사는 한 명이어야 한다. 기어는 1단이거나 2단이거나 그 중의 하나다. 1단이면서 동시에 2단일 수는 없다. 브레이크와 엑셀레이터를 동시에 밟을 수는 없다.
존재는 항상 1을 따라간다. 그래야 계 전체가 통일된다. 통일되어야 외부에 맞설 수 있다. 그래야 일할 수 있다. 일해야 낳을 수 있고 낳아야 완전한다. 하나의 논리로 전체를 상대해야 한다.
머리와 몸통을 다른 논리로 각각 설명하면 불완전하다. 정치는 정치논리로 설명하고 경제는 경제논리로 설명한다면 불완전하다. 정치와 경제를 하나로 통일하는 상위단계의 논리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불완전하다.
셋째 그러한 내부의 통일성을 위해서 하위 단계의 부품들은 밸런스를 이루어야 한다. 천칭저울처럼 하나의 조작으로 양쪽이 통제되어야 한다. 그 긴장된 날 위에 올려져 있어야 한다. 대칭성의 부여로 가능하다.
자전거의 두 바퀴가 마주보고 대칭되기 때문에 통제할 수 있다. 좌우의 두 페달이 대칭되기 때문에 통제할 수 있다. 모든 방향으로 대칭성을 부여한 것이 바퀴다. 자동차가 바퀴로 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인간이 오른팔과 왼팔을 동시에 가지며 또 오른발과 왼발을 동시에 가지는 이유는 몸통이 그러한 대칭구조 위에 올려져 있어야만 제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팔이 하나 뿐이면 도리어 제어하기 어렵다.
안다는 것은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막연히 요소들을 선 위에 나열하는 주워섬기기는 분류가 아니다. 입체적 모형으로 이해해야 완전하다. 하부구조는 반드시 대칭되어야 하고 상부구조는 반드시 일원화 되어야 한다.
그리고 최상위 단계에서 소통의 창구는 외부로 열려있어야 한다. 손과 발은 대칭원리를 따라 마주보아야 하고, 입력과 출력은 입에서 항문까지 하나의 관으로 연결되어야 하며, 눈과 귀와 코는 바깥을 향해 창을 내어야 한다.
선장은 밖을 보아야 하고, 갑판장은 내부를 통솔해야 하며, 선원들은 2인 1조로 작업해야 한다. 대통령은 밖으로 안보와 외교를 책임지고 총리는 안으로 내치를 책임지며 국민은 부부로, 가족으로, 공동체로 조를 짜야 한다.
안다는 것은 분류할 줄 안다는 것이다. 인간의 사유는 분류로 부터 시작되므로 분류를 모르면 애초에 사유를 할 수가 없다. 어떤 주제를 두고 사색하고자 해도 도대체 당장 무엇에 착수해야할 지 알 수가 없다.
명상을 한다고 해도 그냥 눈 감고 앉아있을 뿐이다. 골똘히 생각한다 해도 그저 머리에 힘 주고 있을 뿐이다. 분류할 수 있어야 명상에 착수할 수 있다. 첫 단추를 꿸 수 있다. 분석하고 종합하고 응용할 수 있다.
분류는 일단 대상의 컨셉을 잡고 그 안과 밖을 살펴서 밖에서 안으로 흐르는 에너지의 흐름을 추적한다. 외적인 소통가능성≫내적인 통일성≫하부구조의 대칭성의 순서를 따라간다. 사색할 수 있다. 알아낼 수 있다.
예견할 수 있다
한 분야의 베테랑은 다음 상황을 예측할 수 있다. 그 일의 전체과정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일머리를 알기 때문이다. 일의 우선순위와 접근경로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테랑도 익숙한 자기분야에 한해 예측이 가능할 뿐이다.
고수는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뻔히 예측할 수 있다. 자신이 판을 짰기 때문이다. 자신이 상황을 장악하고 주도하기 때문이다. 상대는 낚인 것이다. 함정에 빠졌다. 단수를 치고 장군을 부르면 빠져나가는 길은 외길이다.
모든 변화는 높은 질서에서 낮은 질서로 이행한다. 높은 포지션을 선점한 사람이 상대를 낚을 수 있다. 밀도의 포지션을 차지했다면 5장의 카드를 쥔 셈이다. 입체는 4장, 각은 3장, 선은 2장, 점은 1장의 카드뿐이다.
적을 유인하여 함정에 빠뜨렸다면 적은 점의 포지션에 있다. 적은 함정에서 빠져나오는 수 외에 다른 카드가 없다. 반면 이쪽은 밀고 당기며 여러 카드를 쓸 수 있다. 적의 움직임을 뻔히 예측할 수 있다.
앞날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만 그 예측모형을 만들고 이를 객관화하여 널리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은 적다. 구조론의 의미는 입체적인 구조의 예측모형을 만들 수 있다는 데 있다. 객관적인 예측이 가능하다.
예측이 가능한 이유는 구조가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대칭원리다. 수요와 공급은 대칭된다. 가격이 오르면 수요는 줄어들고 가격이 내리면 수요는 늘어난다. 가격의 오르내림을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수요와 공급은 선형구조다. 더 많은 대칭구조가 모여서 입체적 모형을 구축한다. 세상 돌아가는 원리는 복잡하다. 더 많은 변수가 물려 있다. 가격이 오르면 사재기가 가세하여 더 올라간다. 예측은 빗나간다.
세상은 크다. 그것은 하나의 동그라미다. 큰 동그라미 안에 작은 동그라미가 있고, 작은 동그라미 안에 더 작은 동그라미가 있다. 무수히 많은 동심원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예측하기 어렵다.
입체적 구조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변화가 1년 주기의 작은 사이클인지 혹은 100년 주기의 큰 사이클인지 아니면 인류문명 단위의 더 큰 사이클인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예측할 수 있다.
예측은 높은 단계에서 낮은 단계를 아는 것이다. 일의 진행은 언제나 높은 질서에서 낮은 질서의 한 방향으로 이행하기 때문이다. 예측은 가능하다. 패턴을 읽어서 예측할 수 있다.
함정을 파고 상대성을 유인하여 예측할 수 있다. 주도권을 장악하고 게임을 지배하는 방법으로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약하다. 진짜는 창의다. 참된 자는 상대성을 끊는다. 대칭구조를 끊는다.
상대를 유인하지도 않고 함정을 파지도 않는다. 애초에 상대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바깥으로 나아가 새로운 지평을 연다. 그들은 창조한다. 창조는 예측을 뛰어넘는다. 예측조차가 불필요하다. 모든 것이 그 안에 있다.
지성인이라면 미래를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 지식은 한 부분을 보는 것이고 지성은 전체를 보는 것이다. 전모를 보아야 예측이 가능하다. 인간의 일상적 사고는 선형적 사고다. 입체적 사고를 할 때 전모를 볼 수 있다.
구조주의 세계관
● 존재는 언제나 일방향으로 작동한다.
계는 언제라도 안정되려 하기 때문이다. 불안정할 경우 외부의 작용에 의해 우연히 변화가 일어날 확률이 높다. 변화는 에너지의 손실을 가져오고 점차 변화의 동력을 잃으며 그 결과로 안정된다.
그러므로 존재는 높은 질서에서 낮은 질서로, 위에서 아래로, 밖에서 안으로, 형식에서 내용으로, 불균일에서 균일로, 전체에서 부분으로, 복잡에서 단순으로 움직인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따라 비가역적으로 움직인다.
바둑을 두어도 주변과 많이 물려있어서 밀도가 높은 화점에서 출발한다. 주변과 팽팽하게 물려있는 화점이 가장 긴장도가 높다. 그곳이 기둥줄이 되고, 근간이 되고, 줄기가 되고, 벼리가 된다. 사건은 그 주변에서 시작된다.
● 양질전화는 없다.
존재는 질에서 양으로, 들뜬상태에서 바닥상태로 이행한다. 양질전화의 착각은 정보의 무한복제 때문이다. 물의 온도가 일정한 한계에 이르기까지 올라가면 일제히 끓는 것이 아니다. 이는 외견상의 착시다.
불과 물의 집적상태가 이미 높은 질서다. 곧 질이다. 닫힌 계의 한 부분에서 이미 높은 질서의 질이 달성되었는데 그 정보가 무한복제 되어 계 전체에 고루 전해지는데 시간이 걸릴 뿐이다.
국가 전체에 모순이 팽배해야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한 부분에서 이미 일어난 혁명이 국가 전체에 전달되는 데 시간이 걸린다. 네티즌이 불만이 가득차야 정치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 도입이 이미 혁명이다.
● 자전거는 전진해야 균형이 잡힌다
물고기가 꼬리를 왼쪽으로 치든 오른쪽으로 치든 몸통은 앞으로 간다. 심의 1이 대칭의 날 2를 통제하기 때문이다. 새의 좌우 날개는 방향성이 없으므로 결국 저절로 원위치 된다. 몸통의 방향이 진짜다.
자전거는 먼저 균형을 잡고 다음에 페달을 밟아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전진해야 저절로 균형이 잡힌다. 균형은 좌우의 날 2고 전진은 심 1이다. 구조는 언제라도 심 1이 날 2를 통제하기 때문이다.
사회도 먼저 전진해야 진보와 보수의 밸런스가 잡힌다. 밸런스를 잡으려고 진보나 보수를 추구하면 끝내 그 밸런스에 이르지 못한다. 정치에서 중도노선이 옳은데도 중도파는 항상 패배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 부분이 전체를 대표한다
힘이 꺾어지는 연결부위가 구조적 취약점이다. 모든 고장은 힘이 전달되는 연결부위의 접점에서 일어난다. 인체의 관절과 같다. 기계장치에서 힘을 전달하는 톱니바퀴가 맞닿는 접촉부분이다.
관절부위는 완벽하게 세팅되지 않는다. 아날로그 구조를 가지므로 베어링으로 힘을 분산하고 윤활유와 스프링으로 완충시켜야 한다. 힘이 전달되는 끝단의 작은 부분에 구조체 전체의 힘이 일시에 걸리기 때문이다.
연인과 입술이 맞닿는 접촉점에서 그 사랑의 밀도 전체가 전달된다. 역사의 전환점은 관절부위와 같다. 변화의 시기에는 부분이 전체를 대표한다. 1퍼센트 깨어있는 네티즌의 불만이 대한민국의 전체모순을 집약한다.
● 완전무결한 시스템은 없다.
구조체의 중간 부분은 고장나지 않게 세팅될 수 있으나 최초 입력과 최후 출력부분은 세팅될 수 없다. 지식은 세팅될 수 있으나 예술은 세팅될 수 없다. 사랑은 세팅될 수 없다. 창의는 잡아가둘 수 없다.
우연성이 지배하는 공간이 있다. 최초의 만남과 최후의 이별은 어쩔 수 없다. 탄생과 죽음은 해결될 수 없다. 그러므로 조직하지 않는 조직, 통제하지 않는 질서, 이심전심으로 작동하는 유기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
기계론의 오류를 인정해야 한다. 힘이 전달되는 매 단위마다 재질서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 부분은 확률에 지배된다. 오류를 인정하고 시행착오에 따른 오류시정의 업데이트 기능과 리셋기능을 두어야 한다.
● 세상은 동그라미의 집합이다.
어떤 존재든 1을 따라간다. 가만히 있는 물체도 무게중심이 있다. 내부에 중력이 흐르고 있다. 움직이는 물체에 운동의 중심이 있고 작용하는 물체에는 힘의 중심이 있다. 계 내부의 내적 정합성이 있다.
통일성이 있다. 요소들을 일관되게 꿰어내는 하나의 테마가 있다. 완성형이 있다. 완성된 하나의 세포, 완성된 하나의 심장, 완성된 한 명의 사람, 완성된 하나의 인류, 완성된 하나의 우주로 동그라미를 이루고 있다.
존재는 하나의 스크린이다. 입체적 스크린이다. 투시할 수 있어야 한다. 내부에 혈관이 도로망을 구성하고 있고 분주하게 오가는 혈액이 있고 트래픽이 걸려 있다. 모든 존재의 내부에 그런 것이 있다.
● 만병통치약은 없다.
존재의 절반은 나의 바깥에 있다. 확률 개념이다. 주사위가 어떤 눈을 가리킬지의 절반은 주사위 자체가 아니라 바깥의 환경이 결정한다. 그러므로 바깥의 환경을 동시에 조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바깥 환경은 부단히 변화한다. 그러므로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에 따른 부단한 미시제어 과정이 있어야 한다. 단 한번의 혁명으로 모두 바뀌고 평화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밀고 당기는 긴장상태가 지속되어야 한다.
진보든 보수든 긴장에서 벗어나려 하다가 매너리즘에 빠지고 만다. 최고의 진보는 그 긴장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개인이 단련되어야 한다. 강한 개인이어야 한다. 깨어있어야 한다.
● 세상은 온통 역설이다.
정치는 역설이고 경제도 역설이다. 우리는 오른손을 내밀어 상대방을 타격한다고 믿지만 중력 메커니즘을 들여다 보면 먼저 왼발로 땅을 뒤로 밀고 있다. 왼발로 땅을 미는 동작이 먼저다. 왼발에 의존해서 오른발을 내민다.
그러므로 만약 왼쪽으로 내딛어 진보하려거든 오른쪽의 사정에 관심을 가지고 조치를 해두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반드시 발목잡힌다. 발목잡는 오른편에 화낼 일이 아니다. 일의 우선순위가 잘못된 거다.
배가 앞으로 가려면 노가 먼저 뒤로 움직여주어야 한다. 항상 반대편이 먼저 조치된다. 문제는 이것이 우연한 현상이거나 혹은 여러 현상들 중 하나가 아니라 예외없이 적용되는 보편법칙이라는 데 있다.
● 변화의 바람은 바깥에서 온다.
주변부가 중심부를 치는 것이 역사의 본질적인 모습이다. 모든 변화는 밖에서 온다. 요원의 들불처럼 온다. 주변부에서 아웃사이더가 일을 저지른다. 내부에서 자가발전으로 가능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중심부는 시스템에 갇힌 미완성의 존재들이다. 그들은 미완성이므로 서로 협력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변화될 수 없다. 상대와 밀접하게 맞물려서 세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부는 작다. 작으므로 완성되기 쉽다. 주변부의 그들은 독립적으로 완성된 존재들이다. 서로 밀접하게 물려있지 않으므로 발목잡는 이가 없다. 중심부로 쇄도하면서 가속도를 얻는다. 변혁의 기운은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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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를 알면 다 아는 거다. 그런데 아는 사람이 없다. 건물의 구조를 모르는 목수가 집을 짓고, 정치의 구조를 모르는 CEO 출신이 함부로 정치판에 뛰어든다. 구조를 알면 다 풀리는데 구조를 몰라서 온통 막혀있다.
조형의 구조를 모르는 화가가 눈감고 대충 그린다. 마음의 구조를 모르는 종교인이 잘못된 설교를 늘어놓는다. 소통의 구조를 모르는 지식인이 따르지 않는 대중들에게 불평을 늘어놓는다.
구조는 얽힘이다. 높은 얽힘과 낮은 얽힘이 있다. 높은 얽힘은 궁수가 활을 당기는 것이고 낮은 얽힘은 활시위가 화살을 당기는 것이다. 구조론은 한 마디로 높은 얽힘 밸런스 1이 낮은 얽힘 밸런스 2를 지배한다는 거다.
이를 원리(原理)라 한다. 으뜸되는 결이다. 결 따라 간다. 세상 모든 것은 그 하나의 원리를 유전인자 삼아 정보를 대량으로 복제하여 이루어진다. 이에 삼라만상이 펼쳐진다. 세상의 모습은 다양하나 근본은 하나다.
궁수가 활을 당기면 궁수의 팔은 ┓자로 꺾인다. 그 원본을 복제하여 활시위가 화살을 당기면서 역시 ┓자로 꺾인다. 모든 존재는 이와 같은 연쇄적인 복제로 전개된다. 이렇듯 세상은 복제되었으므로 원본만 알면 해결된다.
인간은 먼저 화살을 발견하고 두리번거리며 그 화살이 어디서 날아왔는지를 추론한다. 다음 활을 발견한다. 화살이 활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 이전에 궁수가 그 활을 당겼다는 사실은 모른다.
통찰력은 복제본을 보고 추론하여 원본을 포착하는 것이다. 활이 화살을 당겼다는 사실을 토대로 궁수가 활을 당겼음을 추론하여 아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속에 몇 가지 질서가 숨어 있는지 단박에 안다.
구조주의적 세계관이 필요하다. 중복과 혼잡을 제거하여 최종적인 원본을 찾는 것이다. 만유의 소스가 되는 그 하나의 질서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포착하기다. 관악기의 리드처럼 세상의 온갖 다양한 모습들을 변주해낸다.
2) 개론
구조론 개념도
구조를 발견해 보자. 젓가락 두 짝이 구조다. 밤과 낮, 음과 양, 여자와 남자, 하늘과 땅처럼 짝지은 것은 모두 구조다. 존재는 기본적으로 둘이 짝을 지어서 한 쌍을 이룬다. 그 방법으로 존재의 토대를 얻는다.
칼은 칼집을 얻고 컵은 손잡이를 얻는다. 책은 표지를 얻고 드라마는 타이틀을 얻고 탁자는 받침대를 얻는다. 그렇게 존재가 비빌언덕을 얻는 것이다. 이렇듯 쌍으로 존재하는 것은 모두 구조다.
구조의 기본은 포지션이다. 포지션은 심과 날이다. 이때 심이 날에 앞선다. 심이 우두머리가 되고 날은 딸린 식구들이다. 차별이 있다. 짝을 짓고 쌍을 이룬 가운데 계급이 다르므로 포지션이 구분된다. 그것이 질서다.
심은 높고 날은 낮다. 밤낮이 날이면 하루가 심이다. 음극과 양극이 날이면 전류가 심이다. 천칭저울의 축 하나가 두 접시를 통제하듯이 심 1이 날 2를 지배하는 구조로 존재는 짝지어져 있다.
칼과 도마, 종이와 연필, 활과 화살처럼 작용 반작용의 쌍도 구조다. 이들은 서로 떨어져 있지만 일을 할 때는 반드시 짝을 짓고 쌍을 이룬다. 구조론은 그 일을 중심으로 존재의 근본을 추적해 들어간다.
자연의 기본은 대칭성의 원리다. 자연의 대칭성은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 의해 성립한다. 작용 반작용이야말로 모든 구조의 자궁이다. 거기로 부터 심과 날, 쌍과 짝의 포지션과 질서가 유도되어 나온다.
구조를 이해함은 심 1이 작용 반작용의 날 2를 통제하는 원리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자전거라면 왼쪽과 오른쪽의 페달이 날 2를 이룬 가운데 페달축 이 심 1을 이루고 있다. 거기에 작은 저울이 숨어 있다.
만유는 제각기 내부에 저울 하나씩을 품고 있다. 어떤 것이든 무언가 존재한다면 반드시 그 내부에 심 1과 날 2가 있다. 세상은 무수한 저울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바깥에 입력과 출력이 있다.
저울이 심 1에 날 2면 거기에 입력과 출력을 더하여 5로 구조체를 이룬다. 구조체는 일을 한다.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의 다섯이 하나의 팀으로 세팅되어 외부의 작용을 처리하며 조직적으로 일한다.
그냥 가만있는 것도 내부에 중력이 흐르며 공간성으로 자기를 보존하고 시간성으로 외부작용에 대응하는 최소한의 일을 한다. 보존되지 않고 대응하지 않으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있는 것은 모두 일한다.
구조체들이 모여서 자연계 혹은 생태계 혹은 인류문명과 같은 거대한 시스템을 이룬다. 세상은 정보≫포지션≫구조≫구조체 그리고 구조체가 고도로 집적하여 이루어진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다.
● 구조 - 심 1+날 2로 이루어진 구조체 내부의 저울이다. 외부에서의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의 판정을 내린다.
● 구조체 - 구조 3에 입, 출력을 더하여 5를 이루며 외부작용을 받아들여 에너지를 순환시키는 형태로 일을 하고 잉여를 남긴다.
● 시스템 - 구조체가 일하면 잉여가 발생하여 증가한다. 증가하면 이탈하므로 주변에 거느리고 소통한다. 성장하고 발전하고 진보한다.
자연에서 구조는 값≫포지션≫평형계≫구조체≫시스템으로 존재한다. 다섯이 모두 구조이나 구조의 본래 의미와 가까운 것은 평형계 개념이다. 평형계는 판정하고 구조체는 에너지를 순환시키고 시스템은 성장한다.
이렇게 구조는 일한다. 이때 구조체의 일이 진행되는 순서대로 보는 것이 존재론이다. 존재론과 인식론을 구분하는 이유는 정보를 전달하는 작용측과 전달받는 수용측이 빛과 그림자의 관계로 상반되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궁수가 활시위를 당기며 팔을 <자로 꺾으면 활은 그 반대편에서 >자로 꺾인다. <>로 대칭된다. 이때 >는 <를 복제한 것이다. 거울처럼 거꾸로 비치는 것이다. 이 부분이 인식론이다.
그러나 그 활이 다시 화살을 날려보낼 때는 활시위가 <로 꺾인다. 궁수의 팔 <와 활시위 <는 포지션이 같다. 방향성이 같다. 그러므로 만유의 작동은 한 가지다. 궁극적으로 만유는 존재론으로 귀일되는 것이다.
인식론은 정보를 전달받는 동안 잠시 거꾸로 나타내는 것이다. 어깨가 팔에 정보를 주면 팔이 그 정보를 손에 넘기고 손은 다시 공에 정보를 넘겨서 투수는 공을 던진다. 이때 정보를 주는 어깨가 ┣면 받는 팔은 ┫다.
그러나 그 팔이 다시 손에게 정보를 넘겨줄 때는 ┣로 포지션이 바뀐다. 존재론과 인식론이 ┣┫┣┫로 사슬처럼 배치된다. 실제로 힘의 전달은 ┣┣다. 만유는 하나의 방향으로 작동한다. 인식론은 정보를 전할 뿐이다.
존재론은 자연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연역이다. 자연은 연역한다. 항상 높은 질서에서 낮은 질서의 일방향으로만 이행한다. 문제는 인간이 자연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는 데 있다.
자연의 실상 ┣가 인간의 정신에 반영될 때는 거울처럼 순서가 뒤집혀서 ┫로 입력된다. 그것이 귀납이다. 귀납은 보여지는대로 보는 것이다. 낮은 질서가 먼저 보이고 높은 질서는 나중 보인다. 귀납은 인식론을 구성한다.
존재론이 하드웨어라면 인식론은 소프트웨어다. 문제는 인간이 인식할 때는 인식론을 따르면서도 행동할 때는 존재론을 따른다는 데 있다.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인식과 행동 사이의 괴리가 발생한다.
구조론은 존재론과 인식론으로 최종 완성된다. 구조론은 연역과 귀납을 통일하여 모순을 인식과 실천의 모순을 바로잡는다. 인간의 삶을 자연의 본래 모습과 일치시키는데 구조론의 참된 의미가 있다.
착상하기
세상이 레고블럭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블럭의 집합도 블럭 한 개를 닮는다. 세상이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면? 원자의 모습은 원자의 집합인 은하계의 모습을 닮는다. 부분과 전체는 언제라도 닮은 꼴이다.
A와 B 사이에서 정보가 전달되는 첨단부는 부분이 전체를 대표해야 하므로 부분과 전체는 닮아야 한다. 우리가 3차원 입체를 볼 뿐 4차원 밀도를 꿰뚫어보지 못하므로 닮은 특징이 잘 관찰되지 않을 뿐이다.
26차원 초끈이론이 주장된다. 세상이 진동하는 끈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왜 끈이어야 하는가? 양자론이 기존의 원자개념을 해체했기 때문이다. 원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어야 하는데 양자론은 이를 부정한다.
양자론에 의해 소립자는 무한히 작아질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가장 작은 것은 점이다. 그런데 점은 크기가 없다. 무한히 작은 점을 아무리 모아도 이렇게 큰 세상이 구축되지는 않는다.
원자의 점 개념으로는 건축된 우주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 점으로 안 되니 선이 나왔다. 26차원 초끈이론이다. 그러나 선으로도 여전히 부족하다. 다시 면으로 올라간다. 11차원 M이론(막이론) 나왔다.
원자론의 점≫초끈이론의 선≫막이론의 면으로 진보했다. 이제 입체이론만 나오면 된다는 말인가? 그러나 입체는 자체적으로 정보를 전할 수 없다. 입체로도 부족하니 한 차원 더 올라가야 한다. 밀도의 세계가 열려야 한다.
밀도 차원에서 정보가 소통된다. 완전하다. 이렇듯 세상은 다섯 차원이 존재한다. 점≫선≫각≫입체는 불완전하고 4차원 밀도가 완전하다. 원자≫초끈≫막≫입체(?)로 부족하고 밀도의 장을 해명한 구조론이 해답이다.
통일장이론을 완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초끈이론을 발상하게 한 점의 크기 문제를 해결해서다. 구조는 대칭을 낳고 대칭은 점≫선≫면≫입체의 일방향성과 달리 양방향으로 전개된다.
초끈이론에서 끈의 진동하는 성질은 구조론의 대칭성 원리에 따른 양방향 전개 성질과 닮아있다. 수는 1,2,3...으로 커지면서 동시에 0.1≫0.01≫0.001...로 작아진다. 양쪽으로 동시에 전개하는 것이다.
기존의 점≫선≫면≫입체 개념은 1,2,3,4..로 커질 뿐 작아지지 않으므로 일방향 전개다. 원자≫초끈≫막이론도 같은 한계에 봉착해 있다. 구조론은 점≫선≫각≫입체를 넘어 밀도 개념에서 양방향 전개를 성립시킨다.
세상을 좌표로 본다면 모눈종이와 같다. 모눈의 한 칸이 1이라면 곧 원자다. 구조론의 밀도 개념은 그 칸의 빈 속을 채워넣는다. 기존의 원자, 초끈, 막 개념은 그물로 지은 집이다. 뼈는 있는데 살이 없다. 속이 비었다.
골조는 올렸는데 벽체를 채울 수 없다. 1, 2, 3..으로 전개될 뿐 그 1과 2 사이가 비었다. 끈과 막을 진동시켜 채워보려고 시도하나 우스울 뿐이다. 구조론의 밀도개념으로 그 속을 채운다.
부분과 전체는 닮는다. 세상이 원자의 집합이라면 우주는 은하계처럼 생겼을 것이고 세상이 레고블럭의 집합이면 우주는 凸처럼 생겼을 것이다. 세상은 구조체 (┳)의 집적이므로 우주는 (┳)꼴로 생겼다.
원자개념을 기호로 나타내면 ○다. 속이 비었다. 초끈 이론은 반대다. 진동하는 끈이 ┳라면 겉이 비었다. 껍질이 없어 보존되지 않는다. 구조는 원자의 ○ 속에 초끈의 ┳를 채워 (┳)를 유도한다. 겉과 속을 해결한다.
우리는 점≫선≫각≫입체를 본다. 밀도는 보지 못한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면실제로는 평면을 볼 뿐 입체도 보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입체는 뇌에 의해 2차적으로 해석된 것이다. 촛점의 차이로 입체감을 느낄 뿐이다.
만약 인간에게 투시능력이 있다면 밀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중력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지구의 모습에서 (┳)꼴을 찾을 수 있다. 가운데 심이 있고 가장자리로 날개가 펼쳐져 저울을 이루었다.
표면에 에너지가 드나드는 입출력의 문이 있다. 겉으로 보면 지구는 ○지만 중력으로 보면 지구는 (┳)다. 살펴보면 나뭇가지에도, 강줄기에도, 도로망에도, 전자회로에도 무수한 (┳)들이 들어차 있음을 알 수 있다.
깨달음의 재현
인간은 자연의 있는 그대로를 직접 파악할 수 없다. 전모를 볼 수 없다. 관측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뿐이다. 현상은 그림자다. 거울에 비쳐 좌우가 바뀐 것이다. 그 상은 왜곡된 것이다.
인간이 보는 것은 모두 그림자다. 그림자가 있다면 어딘가에 빛이 있다. 빛을 어떻게 찾을까? 추론의 방법이 소용된다. 추론을 위하여 단서가 필요하다. 단서는 자연의 규칙성에서 얻는다.
구조론은 자연의 규칙성 ‘팩트≫패턴≫로직≫메커니즘≫패러다임’으로부터 유도된 존재의 질서다. 보이는 그림자의 배후에서 그림자를 만드는 태양과 빛과 바늘과 스크린들 사이의 숨은 질서를 포착하기다.
인간의 지식은 자연의 실재≫신체감관 지각≫규칙성 발견≫질서체계 도달≫보편원리 발견으로 인식론 완성의 순으로 진행된다. 이를 다시 존재론으로 전환하고 자연의 전개순서에 맞게 연역하여 개별적인 지식을 대량복제한다.
● 자연을 관측함.. 태양≫빛≫바늘≫스크린≫그림자
● 지각으로 단서확보.. 색깔, 냄새, 소리, 맛, 촉감
● 패턴비교로 규칙성 발견.. 팩트≫패턴≫로직≫메커니즘≫패러다임
● 귀납추론으로 질서체계 도달.. 사실≫의미≫가치≫개념≫원리
● 보편원리로 인식론 완성.. 지각≫수용≫분석≫종합≫응용
자연이 지식에 앞선다. 자연에 사실이 먼저 주어져 있고 뒤에 온 인간이 그 사실을 관찰하여 수동적으로 지식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지식은 인간에 의해 능동적으로 창조된다. 이에 메타지식이 얻어진다.
지식의 기초는 관찰과 학습으로 이루어지지만 이를 존재론으로 전환시켜야 지식의 대량복제가 가능하다. 그림자를 다시 빛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지식이다. 곧 깨달음이다.
인식에는 오류가 있다. 우리는 눈으로 본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빛의 파동을 뇌가 해석한 것이다. 자연의 실재를 본 것은 눈이고 만진 것은 손이다. 눈과 손으로부터 전달된 정보를 해석하는 것은 뇌다.
몇 단계 거쳐서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석이 중요하다. 우리는 사과가 빨갛다고 믿지만 실로 사과에는 빨강이 없다. 빨강은 뇌가 만들어낸 상이다. 약간의 단서가 있을 뿐 진실은 아니다. 상당부분 뇌에 의해 연출되었다.
염색체가 투명하여 보이지 않으므로 과학자가 염색하여 보이게 연출하듯이 인간의 뇌는 보이지 않는 빛의 파동에 색을 입혀 염색한다. 그것은 그림자다. 복제본이다. 빛이 원본이다. 원본을 포착해야 한다.
우리는 손으로 물체를 만져보고 안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강력과 약력, 전자기력, 중력, 마찰력 중에 하나를 만진 것이다. 물(物) 자체는 만질 수 없다. 속성은 만질 수 없다. 본질은 만질 수 없다.
과학의 방법론은 재현에 의의를 둔다. 실험실에서 밝혀진 것이 다른 사람에 의해 재현될 수 있어야 과학의 분야로 인정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남에게 배운 지식은 모두 잠정적인 것이다. 진짜가 아니다.
관찰하여 얻은 지식도 추론하여 얻은 지식도 모두 잠정적인 지식에 불과하다. 승인은 떨어지지 않았다. 인식론은 뇌 안에서 다시 존재론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림자에서 빛으로 포지션 변경이 일어나야 한다.
그 방법으로 뇌 안에서 재현되어야 한다. 그렇게 재질서화를 통하여 지식은 검증되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하게 뇌가 다시 세팅되어야 한다. 깨달음이다. 구조론의 이해는 이 경지에 도달함을 목표로 한다.
인간이 그냥 가만이 있어도 눈이라는 열린 창을 통하여 빛이 스스로 들어와서 뇌에 그림자를 새긴다. 이렇듯 얼마간의 지식은 저절로 생겨난다. 불완전하다. 관찰이든 학습이든 외부에서 주입된 지식은 가짜다.
구조론을 안다는 것은 자연에서 그림자로 뇌에 맺혀진 값을 알고≫그 이면에 감추어진 포지션을 알고≫평형계와≫구조체≫시스템을 아는 것이며 그 시스템이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복제된 것임을 아는 것이다.
그 복제본으로부터 추론을 전개하여 원본을 찾아 뇌 안에 새로 세팅하는 것이다. 그림자가 아닌 빛을 뇌 속에 심는 것이다. 뇌 안에서 빛이 그림자로 맺히는 자연의 과정을 재현해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검증하는 것이다.
연역과 귀납
하나를 알면 열을 안다고 했다. 연역의 세계에서는 정보의 대량복제가 가능하다. 자연으로 부터 추론하여 사실≫의미≫가치≫개념≫원리의 질서를 얻고 이를 토대로 연역하여 인간은 대규모의 지식체계를 구축한다.
학문은 인류의 공동작업이다. 스승이 일군 터에 후학들이 건물을 세운다. 큰 집을 짓는 것이다. 거대한 네트워크의 건설이다. 그러한 학문적 체계의 진행은 자연의 존재론과 일치다. 이를 통하여 재현되고 검증된다.
이를 위해서는 연역할 수 있는 최고단계의 포지션을 차지해야 한다. 최종 원리의 단계에 도달하고서야 바르게 연역할 수 있다. 공간구조에서는 점≫선≫각≫입체≫밀도다. 밀도의 단계에서 연역해야 바르다.
물질에서는 양≫운동≫힘≫입자≫질이다. 질에서 연역해야 바르다. 그 이전 단계에서 연역하면 실패로 된다. 상은 왜곡된다. 데카르트의 제 1원인에 도달하고서야 제대로 된 연역은 가능하다.
최초의 단서를 토대로 정보를 집적하여 연역할 수 있는 원리의 단계까지 고도화 시키는 과정이 귀납추론이다. 곧 인식론이다. 지각≫수용≫분석≫종합≫응용의 순으로 귀납된다. 최종 응용단계에서 존재론으로 전환된다.
인식 메커니즘의 최초 출발지는 자연이다. 태양≫빛≫바늘≫스크린≫그림자로 인간에게 전달된다. 인간은 이를 뒤집어 반대로 본다. 반영(反映)된다. 그림자≫스크린≫바늘≫빛≫태양의 순서로 거꾸로 포착된다.
인간의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에 색깔, 소리, 냄새, 맛, 촉각으로 비친다. 이 모든 것이 그림자다. 신체감관으로 지각되는 정보는 모두 그림자다. 믿기 어렵다. 거기서 규칙성을 포착해야 진실의 문이 열린다.
그림자를 보고 곧 사실을 인식했다고 믿으면 헛것을 본 셈이다. 그것이 인식의 단서가 될 지언정 그 자체로 인식은 아니다. 그 단서들을 비교하여 거기서 ‘팩트, 패턴, 로직, 메커니즘, 패러다임’의 규칙성을 유도한다.
얻어진 규칙성을 집적하여 사실≫의미≫가치≫개념≫원리를 유도하여 인간의 뇌에 지각≫수용≫분석≫종합≫응용의 순으로 집적하면 지식의 체계가 구축된다. 이를 뒤집어 배경≫실체≫연관≫이행≫귀결로 연역할 수 있다.
● 연역(존재론의 세계) - 빛에서 그림자로 전개(위에서 아래로)
● 귀납(인식론의 세계) - 그림자를 통해 빛 발견(아래에서 위로)
자연의 현상이 있다면 먼저 그 현상을 있게 하는 상층부의 조건들이 전제로 있다. 그림자의 전제는 빛이다. 우리가 실제로 목격한 세계는 그림자의 세계다. 추론하여 빛의 세계를 알 수 있다.
연역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질서다. 연역이 진짜다. 연역이 정보를 대량복제하여 지식을 성립시킨다. 귀납은 연역의 출발점인 원리에 도달하기 위하여 뇌가 정보를 집적하여 고도화 하는 과정이다.
교과서적 지식은 실험하고 증명하는 귀납추론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인간의 뇌가 실제로 지식을 생산하는 방법은 대부분 연역이다. 한 가지를 실험해도 그 실험의 결과로부터 굉장히 많은 지식을 연역해 낸다.
사과를 만져보고 사과가 무겁다는 사실을 알아내는 것이 귀납이다. 귀납은 낮은 수준의 정보처리다. 사과가 무겁다는 사실에서 보편적 원리인 중력의 존재를 발견하는 것이 연역이다. 연역은 높은 수준의 정보처리다.
● 존재론(V방향)과 인식론(Λ방향)
배경 ≪-≫ 응용
실체 ≪-≫ 종합
연관 ≪-≫ 분석
이행 ≪-≫ 수용
귀결 ≪-≫ 지각
※ 존재론은 왼쪽 위에서 아래로 배경≫실체≫연관≫이행≫귀결의 순서이고 인식론은 오른쪽 아래에서 위로 지각≫수용≫분석≫종합≫응용의 순서다. 방향이 상반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세상은 빛과 그림자다. 인간은 그림자의 세계에 산다. 그림자는 뇌가 해석하여 연출한 가짜다. 복제된 것이다. 자연의 참 모습이 아니다. 재질서화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본래의 빛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존재론은 자연의 흐름이고 인식론은 뇌 안에서의 정보처리다. 인간은 자연의 맞은 편에서 자연과 맞선 존재이다. 모름지기 깨달을 일이다. 깨달음은 인식론을 존재론으로 전환하여 자연의 본래 모습과 일치시킨다.
존재론과 인식론
존재론의 세계
인간은 자연의 그림자인 정보를 ‘지각≫수용≫분석≫종합≫응용’하는 절차를 거쳐 인식을 수립한다. 존재론은 이를 뒤집어 자연의 질서가 어떻게 낱낱의 정보로 해체되어 인간의 의식에 투영되는지 그 절차를 해명한다.
자연은 ‘배경≫실체≫연관≫이행≫귀결’의 절차를 거쳐 정보를 낳는다. 그 정보가 인간에게 지각된다. 자연은 시스템이다. 시스템은 뭉쳐진 덩어리다. 시스템이 해체되어 정보-data-값으로 변하는 과정이 존재론이다.
● 존재론 - ‘배경≫실체≫연관≫이행≫귀결’이다. 존재론의 론(論)은 논리로서의 의미다. 존재의 논리에 대응되는 자연의 실재는 시스템≫구조체≫평형계≫포지션≫값이다.
(논리) ≪-≫ (자연)
◎ 배경 ≫ 시스템(질) - 집적도 5≫4≫3≫2≫1
◎ 실체 ≫ 구조체(입자) -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
◎ 연관 ≫ 평형계(힘) - 밀도≫입체≫각≫선≫점
◎ 이행 ≫ 포지션(운동) - 순환≫분할≫가역≫연속≫반복
◎ 귀결 ≫ 값(량) - 광원≫빛≫바늘≫스크린≫그림자
자연은 산과 강, 하늘과 땅, 별자리와 우주처럼 큰 덩어리 단위로 존재한다. 시스템이다. 시스템 안에는 구조체들이 있다. 그것은 사람 한 명, 하나의 별, 한 채의 집, 한 그루 나무처럼 하나의 독립적인 단위다.
모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체는 내부에 저울을 하나씩 갖추고 있다. 곧 평형계다. 구조의 핵심이다. 심과 날의 포지션이 기능한다. 그 평형계의 저울이 순환≫분할≫가역≫연속≫반복의 yes와 no를 판정한다.
해시계로 나타낼 수 있다. 순환되는 것은 태양이다. 곧 광원이다. 분할되는 것은 빛이다. 가역되는 것은 해시계의 바늘이며 연속되는 것은 스크린이고 그 스크린 위에 그림자가 반복된다.
우리는 그 그림자를 보고 세상을 인식한다. 그림자는 스크린 위에 반복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믿을 수 없다. 이렇듯 우리가 존재한다고 철썩같이 믿는 것은 어쩌면 신기루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을 다 의심한다고 해도 광원≫빛≫바늘≫스크린≫그림자로 전개되는 메커니즘 자체는 의심할 수 없다. 보이는 것이 다 가짜라 해도 그 가짜를 만드는 진짜가 어딘가에 있다.
희미한 그림자가 있다면 어딘가에 분명한 빛이 있다. 명백하다. 그림자를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빛을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림자는 빛을 재현할 수 없지만 빛은 그림자를 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배경 - 시스템의 집적된 세계
● 집적도 5(인공지능)- 625 구조체, 3125 구성소를 가진다.
● 집적도 4(자동차) - 125 구조체, 625 구성소를 가진다.
● 집적도 3(저울) - 25 구조체, 125 구성소를 가진다.
● 집적도 2(바퀴) - 5 구조체, 25 구성소를 가진다.
● 집적도 1(막대) - 1 구조체, 5 구성소로 수립된다.
하나의 바퀴에는 작은 막대 다섯이 숨어 있다. 하나의 저울에는 작은 바퀴 다섯이 숨어 있다. 하나의 엔진에는 작은 저울 다섯이 숨어 있고, 하나의 인공지능에는 작은 엔진 다섯이 숨어 있다. 이 방법으로 구조는 집적된다.
동력원(집적도 5)≫동력발생≫동력제어≫동력전달≫동력효과(집적도 1)의 순으로 집적도가 낮아진다. 생명체는 스스로 먹이(동력)을 조달하는 점에서 집적도 5에 해당한다. 컴퓨터도 불완전하나마 그러하다.
컴퓨터의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이 이루어지는 각 단계에 각각 작은 엔진이 하나씩 숨어 있다. 스스로 에너지를 흡수하여 증식하는 작은 바이러스 하나에 3125개의 구성소와 625개의 막대, 125개의 바퀴(관절)가 숨어 있다.
또 25개의 저울과 5개의 엔진과 하나의 뇌가 숨어 있다. 생명체 보다 복잡한 구조는 없다. 더 이상의 복잡성이 있다면 이는 중복이거나 혼합된 복합구조다. 단일구조에는 집적도 5 이상은 없다. 시스템 이상은 없다.
◎ 실체 - 구조체의 통일된 세계
● 입력(받기) 원인-시작
● 저장(쌓기)
● 제어(틀기)
● 연산(풀기)
● 출력(주기) 결과-끝
하나의 구조체 안에는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의 다섯 단계가 있다. 이들은 포함관계를 이룬다. 입력 안에 저장이 있고, 저장 안에 제어가, 제어 안에 연산이, 연산 안에 출력이 있다.
가만히 있는 돌멩이도 중력의 입력과 출력이 있다. 외부에서의 작용에 내부의 평형계로 대응하여 반작용하는 구조가 있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존재 자체가 부정된다. 작용했는데도 반작용이 없다면 존재가 없는 것이다.
유령이나 허깨비 같은 상상의 존재는 그러한 반작용이 없다. 내부에 평형계가 없으므로 반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반작용 테스트를 통하여 그것이 지어낸 허구인지 아닌지 검증할 수 있다.
구조체의 의미는 이러한 구성이 하나의 기준으로 일관된다는 점에서 통일성을 가진다는데 있다. 소설이라면 테마에 의해 요소들이 통일되어야 하고 그림이라면 관측자의 시점에 의해 소실점을 기준으로 통일되어야 한다.
구조체는 외부의 작용에 대응하여 반작용의 일을 한다. 일에 의해 통일된다. 입력에서 출력까지 일직선으로 배치된다. 소화관과 같다. 입에서 항문까지 하나의 라인으로 전개된다. 구조체는 반드시 내부에 이런 것이 있다.
구조체의 통일성에 의해 존재는 원자론의 원자-소립자와도 같은 하나의 독립적 단위가 된다. 어떤 것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여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작용-반작용의 구조가 내부에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속에 뭔가 들어있어야 있는 거다. 귀신이든, 유령이든, 요정이든, 기(氣)든, 텔레파시든 내부에서 내적 정합성을 성립시키고 외부의 작용에 대하여 반작용으로 일을 하는 저울이 들어있어야 한다. 없으면 가짜다.
◎ 연관 - 평형계의 판정하는 세계
● 밀도 : 부분의 합 대 전체의 평형.. 밀도의 비중을 잰다.
● 입체 : 심 1 대 날 2의 평형 .. 입체의 부피를 잰다.
● 각 : 날 대 날의 평형 .. 각의 면을 잰다.
● 선 : 날 대 운동한 시간*거리의 비의 평형 .. 선의 길이를 잰다.
● 점 : 외계로 침투하여 전이된 평형 .. 점의 갯수를 센다.
구조체의 내부에 들어있다가 외부의 작용에 대해서 어떤 반작용을 할 것인지 판정을 내리는 저울이 평형계다. 물리세계에는 0, 1, 2, 3, 4차원을 각각 구성하는 다섯 가지 저울이 있다.
우리가 점, 선, 각, 입체라고 부르는 것이 모두 저울이다. 밀도는 질량을 재는 저울이고 입체는 부피를 재는 저울이고, 각은 면을 재는 저울이며, 선은 길이를 재는 저울이고, 점은 갯수를 세는 저울이다.
인간의 뇌는 혼자서 인체 전체를 통제한다는 점에서 부분의 합과 전체의 평형을 이룬다. 밀도의 평형이다. 생물의 몸에 뇌가 있는 이유는 외부의 작용에 대하여 평형을 유지하기 위한 반작용 여부를 판정하기 위해서다.
인간의 뇌는 인간 바깥의 모든 것과 대칭성을 유지하며 평형을 찾아 인체를 움직인다. 눈은 빛 자극에 대칭되고 귀는 소리자극에 대칭되고, 혀는 맛 자극에 대칭되고, 코는 냄새자극에 대칭되고, 촉각은 물리자극에 대칭된다.
◎ 이행 - 일(work)의 변화하는 세계
● 순환/비순환.. yes면 위로, no면 아래로 이행
● 분할/비분할.. yes면 위로, no면 아래로 이행
● 가역/비가역.. yes면 위로, no면 아래로 이행
● 연속/불연속.. yes면 위로, no면 아래로 이행
● 반복/비반복.. yes면 위로, no면 아래로 이행
일은 평형의 붕괴다. 상위단계의 평형이 붕괴되며 낮은 단계의 평형으로 이행한다. 반대로 아래 단계의 평형이 성립되면 위 단계로 이동한다. 맨 아래 반복/비반복 판정에서 반복되면 한 단계 위로 이동하여 연속이 판정된다.
반복되는 것이 곧 연속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속되는 것이 가역되는 것이고 가역되는 것은 분할되는 것이며 분할되는 것은 순환되는 것이다. 계속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반대로 no가 판정되면 아래 단계로 내려간다.
우리가 일(work)이라고 부르는 것은 평형이 붕괴되면서 이를 복원하기 위하여 움직여간 거리와 시간의 비례를 의미할 때가 많다. 천칭의 왼쪽에 2가 오른쪽에 1이 있다면 평형의 붕괴다. 밸런스는 무너진다.
이를 회복하기 위하여 시간이 걸리며 1을 2회 반복하거나 혹은 거리를 2배로 늘려줄 수 있다. 그 경우 평형은 복원된다. 그 시간적 횟수의 반복과 공간적 거리의 연장이 곧 일이다. 지렛대의 원리와 같다.
◎ 귀결 - 값(data)의 나타내는 세계
● 광원 ≫ 원리
● 빛 ≫ 개념
● 바늘 ≫ 가치
● 스크린 ≫ 의미
● 그림자 ≫ 사실
정보는 그림자다. 그림자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광원과 빛과 바늘과 스크린 없이 그림자는 존재할 수가 없다. 정보는 어딘가에 침투되어 있다. 밥은 숟가락에 실려 있고 짐은 마차에 실려있다.
정보는 언제나 어딘가에 실려있다. 소리는 음파에 실려 있고 냄새는 분자에 실려있다. 칼라는 빛에 실려있고 촉각은 질량에 실려있고 맛은 음식에 실려있다. 태워져 있다. 다른 것에 침투하여 있다.
정보는 밸런스가 해체되어 평형이 무너진 상태이다. 그러므로 정보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항상 어딘가에 침투하여 스며들어 있다. 컴퓨터의 정보는 CD에 태워져 있다. 음악의 정보는 레코드판 홈에 새겨져 있다.
인식론의 세계
존재론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모습을 나타낸다면 인식론은 그 자연의 모습이 인간의 뇌 속에 펼쳐져 있는 스크린에 만드는 그림자의 모습을 나타낸다. 인식론은 존재론을 복제하고 있다. 복제본이다.
자연이 하드웨어면 인식론은 소프트웨어다. 건물이라는 하드웨어를 세우면 골목길이라는 소프트웨어는 저절로 생겨난다. 복제된 것이다. 골목길은 원본인 건물의 속성을 얼마간 반영하지만 원본 그대로는 아니다.
자연은 덩어리로 존재한다. 인간의 뇌 속으로 침투할 때는 조각나 있다. 자연에존재하는 곰이나 호랑이나 산이나 강이나 덩어리다. 인간의 뇌로 비치는 소리나 맛이나 빛깔이나 촉각아니 냄새나 모두 부스러기들이다.
겨우 data만 입력될 뿐이다. 산산이 조각난 부스러기 data를 근거로 추론하여 뇌 속에서 자연의 진짜 모습을 복원해야 한다. 컴퓨터의 파일에는 확장자명이 붙어 있다. 그러므로 소프트웨어를 돌려서 복원할 수 있다.
인간의 뇌로 침투하는 data도 맛이니 냄새니 빛깔이니 하는 확장자명이 따라붙는다. 고작 그 정도의 적은 단서로 추론하여 거대한 덩어리인 자연의 실제 모습을 완벽하게 복원해야 한다. 쉽지 않다.
● 인식론 - 지각≫수용≫분석≫종합≫응용이 있다. 자연에서 지각되는 값들에 팩트≫패턴≫로직≫메커니즘≫패러다임의 규칙성을 부여하여 사실≫의미≫가치≫개념≫원리의 순으로 정보의 질을 고도화 시켜 얻는다.
인식론은 스스로를 인식할 수 없다. 이는 과학의 방법론이 재료의 분석이 아니라 실험을 통한 재현에 의해서 완성되는 이치와 같다. 자동차는 부품을 조립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운행해야 비로소 완성된다.
인간의 인식도 마찬가지다. 깨달음이어야 완성된다. 학습된 지식은 참고할만한 데이터에 불과하다. 그 자체를 지식으로 믿는다면 위험 천만이다. 연역하여 추가적인 지식을 생산하는데 성공해야 참된 지식이다.
◎ 지각≫그림자(신체감관에 지각되는 색깔, 소리, 맛, 냄새, 촉감)
◎ 수용≫스크린(뇌리에 각인되는 이미지, 느낌, 인상, 정서 등의 확장자 명)
◎ 분석≫바늘(사고하는 논리로서의 팩트≫패턴≫로직≫메커니즘≫패러다임)
◎ 종합≫빛(언어화 된 개념으로서의 사실≫의미≫가치≫개념≫원리)
◎ 응용≫태양(문법과 같이 완전하게 세팅된 지적 체계)
태양이 쏜 빛이 해시계의 바늘에 제어되어 스크린에 그림자를 연출한다. 그림자만 보고 어딘가에 있을 태양의 존재를 추론하면 인식론의 귀납이다. 날아온 화살만 보고 어딘가에 숨어 있을 궁수의 존재를 추론하기다.
규칙성을 보고 추론할 수 있다. 색깔, 소리, 맛, 냄새, 촉감이 반복된다면 그 안에 규칙이 있다. 정보는 조각나 있지만 자연은 덩어리로 있다. 팩트≫패턴≫로직≫메커니즘≫패러다임의 규칙성을 적용하여 덩어리를 찾을 수 있다.
팩트가 조각난 한 개의 토막이라면 관찰하여 짝을 찾을 수 있다. 어딘가에 반드시 짝이 있다. 패턴은 둘 이상의 토막이 짝을 지은 것이다. 로직은 둘 이상의 패턴이 쌍을 이룬 것이다.
메커니즘은 둘 이상의 로직이 하나의 독립적인 개체를 이룬 것이다. 패러다임은 둘 이상의 메커니즘이 하나의 공간적 영역을 구성한 것이다. 이로써 자연의 덩어리져 있는 본래 모습과 가까워진다.
자연의 규칙성
◎ 팩트.. (낱낱의 날개) 각각의 시계바늘은 다르다. 길이가 다르고 위치가 다르고, 크기가 다르고, 역할이 다르고, 순서가 다르다. 어떻게든 반드시 조금은 다르다. 다름의 1 단위가 포착해야 할 최초의 단서다.
◎ 패턴.. (날개와 날개의 짝) 시(時)를 가리키는 짧은 바늘과 분(分)을 가리키는 긴 바늘이 대칭을 이루며 시계 하나에 공존한다. 하나의 영역에 닮은 것이 둘 이상 공존하고 있다면 그것이 패턴이다.
◎ 로직.. (심과 날개의 쌍) 시계 속의 태엽, 진자, 기어, 바늘은 모두 축에 꿰어져 있으며 축이 날개를 움직인다. 이들은 서로 얽혀서 로직을 이룬다.(태엽의 심>날개)≫(진자의 심>날개)로 위사와 경사가 종횡으로 교대한다.
◎ 메커니즘.. (심이 날개를 지배) 하나의 완성된 시계 안에서 지배-종속관계로 연결된 태엽, 진자, 기어, 바늘은 각각의 로직(평형계)을 가진다. 이들은 각자의 축에 꿰어져 있다. 꿰어짐이 로직이면 꿰어냄이 메커니즘이다.
◎ 패러다임.. (완성품들의 소통) 완성된 시계와 완성된 자동차와 완성된 TV가 완성된 한 채의 집에 모인다. 이들은 독립적인 완성의 단위에 도달하여 있다. 계급이 같으므로 그 집의 구성원으로 참석한다.
낱낱의 정보에서 짝을 찾고, 짝에서 심과 날개의 포지션을 구분하여 쌍을 찾고, 그 쌍의 지배-종속관계에서 독립적인 개체를 찾고 그 개체가 모여서 덩어리를 이룬 시스템을 찾는다. 마침내 자연과 일치하면 인식은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