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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점수

by 랭님 2009. 7. 24.
불가에 돈오점수란 말이 있습니다. 갑작스런 깨달음과 점진적인 수련이라는 뜻입니다. 컨설팅, 코칭 일을 하면서 이 말이 더 가깝게 다가옵니다.

저는 학창시절 늘 궁금했습니다. 왜 점수돈오라고 안하고 돈오점수라고 할까. 점진적으로 수련을 쌓다가 어느 순간 팍하고 세상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 더 논리적으로 잘 맞는 것 같았거든요. 그 순서로 보면 점수돈오라고 해야 하지 않나 이거죠.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것은 불가에는 돈오점수인지 점수돈오인지 (아니면 돈오돈수 같은 다른 조합인지) 등에 대해 여전히 논쟁이 있다는 점이었고, 돈오점수는 말 그대로 갑작스럽게 깨닫고 나서 점진적인 수련을 한다는 뜻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저야 불교에 대해 일천한 지식 밖에 갖고 있지 못하니 어느 쪽이 옳니 그르니 말은 못하겠고, 돈오점수가 제가 하는 "변화를 만드는 일"에서 어떤 의미로 다가 오는지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사티어 변화 모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버지니아 사티어(Virginia Satir)라고 가족 치료 전문가가 만든 변화 모델입니다. 먼저 그림을 보시죠.

이 모델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고, 여기에서는 제가 말하려는 돈오점수와의 연관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모든 변화는 우선 외부 요인(Foreign element)이라고 하는 것이 들어오고 저항이 시작됩니다. 그러다가 저항이 우세하면 원래 상태(Late status quo)로 돌아갑니다. 도저히 외부 요인을 무시할 수 없는 때에 균형이 깨지고 혼란(Chaos)의 단계로 들어갑니다. 와인버그는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은 명언을 합니다.

위기는 갑자기 오지 않는다. 위기에 대한 인식이 갑자기 올 뿐이다.
늘 위기는 조짐을 보였습니다. 계속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외부 요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는 순간에 균형이 깨어지고 위기(혼란)가 찾아오지요.

이렇게 외부 요인을 받아들인 때부터는 퍼포먼스가 예전보다도 못합니다. 한동안 계속되다가 전환점이 옵니다.

전환적 착상(Transforming idea)이 생깁니다. 생각이 바뀌고 세상이 달라져 보이는 시점이지요. 이 때가 일종의 돈오입니다. 갑작스러운 깨달음이죠. 만사 척척 해결될 것만 같습니다. 게임 다 끝난 것 같습니다. 실제로 가끔 퍼포먼스가 기가 막히게 나오기도 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멈춰버리는 조직과 개인을 너무도 많이 봤습니다. "아 이제 되나 보다"하고 거기에서 멈춥니다. 그러면 그 조직과 개인은 자동으로 이전 상태(Late status quo)로 돌아가게 됩니다. 변화(외부 요인)를 받아들이지 못한 겁니다. 여러가지에 대해 두루 아마추어인 사람과 조직이 갖는 공통점입니다.

진정 변화하는 곳에서는 돈오 이후에 점수를 계속합니다. 바로 통합과 수련(Integration/Practice)의 단계입니다. 자기가 얻은 깨달음을 실제로 실천해 보고 부족한 부분은 더 다듬고 또 가끔씩 실수하면 뭐가 부족한지 연구하고 다시 보충하고 등 점수가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새로운 안정적 상태(New status quo)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정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외부 요인이 들어오고, 혼란을 겪고, 돈오를 하고, 또 점수를 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자기가 정말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학습한 과정을 잘 생각해 보세요. 분명 돈오의 순간이 있고 또 그 뒤에 점수가 이어졌을 겁니다. 예컨대, 생소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우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언어의 모든 개념을 한 실에 꿰찰 수 있는 듯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초등학생으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는데 말이죠. 그런데 그 깨달음을 갖고 실제 프로그래밍을 하다 보면 잘 될 때도 있고 형편 없을 때도 있습니다. 지속적인 수련을 하다보면 비로소 내 몸에 그 깨달음이 익고 체화되는 것이죠.

조직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애자일을 도입한다고 칩시다. 처음에 애자일을 도입해서 퍼포먼스가 팍 내려갑니다. 헤매다가 아! 이러면 되겠다!를 외칩니다. 그러면서 실제로도 뭔가 성과가 좋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끝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시작입니다. 수련의 시작.

--김창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