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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인문과학

구조론 1

by 랭님 2009. 4. 28.

 [구조론]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
다섯가지 구조
당신의 상식은 틀렸다
구조주의 역사
구조론을 얻다



 [구조론 입문]
1) 해제
비반복성의 이해
일치와 연동의 법칙
구조란 무엇인가?
구조론의 가치
구조주의 세계관
2) 개론
구조론 개념도
존재론과 인식론
 [구조체 이론]
1) 구조체
구조체의 이해
평형계의 원리
2) 구조체의 발전
유도이론
집적이론
보편이론
일반이론
분류이론
 [구조분석]
구조분석




 [구조주의]
4. 구조론의 응용
 구조주의 교육론
 구조주의 경제학
 구조주의 미학
 구조주의 진화론
 구조주의 양자론
 [용어사전]
1. 구조론 용어사전
2. 구조론 핵심요약




 [구조론]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
구조론은 세상 모든 현상을 구조 하나로 전부 풀어낼 수 있다는 개념에 입각한 이론이다. 그것은 원리에 대한 원리, 법칙에 대한 법칙, 질서에 대한 질서, 이론에 대한 이론, 과학에 대한 과학이라 하겠다.
구조는 얽힘이다. 그러므로 풀어야 한다. 얽혀서 존재를 이루어졌으므로 풀어서 해명되는 것이다. 여기서 ‘얽기’와 ‘풀기’가 만유를 이해하는 근본임을 포착할 일이다. 세상은 한 마디로 얽힘과 풀림이다.
원리는 만유의 얽힘이다. 이론은 그 얽힌 것의 풀림이다. 법칙은 같은 조건에서는 같은 방법으로 풀리는 것이며 질서는 그 풀림이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는 것이며 과학은 그 질서를 사물에 적용한 것이다.
만유는 질서가 있다. 더하여 얽힌 것은 빼서 풀리고, 곱하여 얽힌 것은 나누어서 풀린다. ←로 얽혔으면 →로 풀린다. 언제라도 얽힌 반대방향으로 풀리게 되어 있기 때문에 질서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를 풀 수 있다.


기하와 대수의 차이로 비유될 수 있다. 기하의 도형은 얽혀 있고 대수의 수(數)는 해체되어 있다. 사과는 사과나무에 달려 있다. 기하는 사과나무에 달린 그대로의 사과를 보고 대수는 그 사과를 따서 상자에 담아 본다.
대수로 보면 2+2나 2*2나 값이 같지만 기하로 보면 세팅된 포지션이 다르다. 2+2는 선(線)상에 □□□□로 나열되어 있고 2*2는 면(面) 상에 田로 쌓여있다. 기하는 포지션의 얽힘이고 대수는 값의 풀림이다. 


존재는 어떻게 얽혔는가? 짝과 쌍으로 얽힌다. 대칭과 평형으로 얽히고, 작용 반작용으로 얽힌다. 존재는 서로 얽혀서 포지션을 이루고, 평형계를 이루고, 구조체를 이루고 나아가 시스템을 이룬다.
존재는 어떻게 풀리는가? 값으로 풀리고, 정보(data)로 풀리고, 수(數)로 풀린다. 일(work)의 우선순위와 접근경로로 풀리고 에너지 순환의 1 사이클로 풀린다. 존재는 얽혀서 물질을 이루고 풀려서 운동으로 나타난다.


세상을 구조 하나로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풀어내기 위해서는 만유가 동일한 구조를 공유하고 있다는 대전제가 필요하다. 이것이 진리의 보편성이다. 구조의 얽힘과 풀림으로 세상은 모두 설명된다.
집과 자동차와 배는 구조가 같다. 그러므로 집이나 짓던 건축업자가 자동차도 만들고 조선소도 짓는다. 자동차와 배와 집은 공통적으로 짝과 쌍, 대칭과 평형, 심과 날 그리고 에너지 순환의 1 사이클로 조직된다.
그러므로 구조가 같고 얽히고 풀리는 질서가 같다. 겉으로 다르게 보이지만 속성이 같고 본질이 같다. 만유는 단 하나의 기본적인 구조 값≫포지션≫평형계≫구조체≫시스템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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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천년 전 사람들에게 지구 반대쪽의 신대륙에 대해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코웃음을 칠 것이다. 백년 전 사람들에게 미래에 등장할 인터넷 신대륙의 사이버 까페에 대해 이야기하면 역시 코웃음 칠 것이다. 
구조론은 신대륙이다. 사물을 바라봄에 있어서 특정한 하나의 견해가 아니라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이론(Theory of Everything)이다. 세상 모두를 한 줄에 꿰어 하나의 논리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설명한다.
구조론은 짝과 쌍, 대칭과 평형, 순서와 방향의 얽힘과 풀림에 대한 이론이다. 그렇다. 세상은 크게 얽혀 있다. 밤과 낮으로 얽히고, 앞과 뒤로 얽히고, 겉과 속으로 얽히고, 플러스와 마이너스로 얽혔다.
여자와 남자, 하늘과 땅, 산과 바다, 수직과 수평, 오른손과 왼손으로 얽혀 있다. 세상은 온통 얽혀서 짝을 짓고 쌍을 이룬다. 서로 마주보고 서로 맞물려 있다. 얽혀서는 물질을 이루고 풀려서는 운동으로 나타난다.
어렸을 때다. "왜 세상 모든 것은 짝을 갖지요?" 이렇게 물어볼 수 없었다는 거다. 누구에게 물어볼 수 있을까? 아무도 나의 의문에 답해주지 않았다. 그때 이미 세상은 내게 신뢰를 잃고 권위를 잃었다.

세살 꼬마도 할 수 있는 질문에 답해주는 인간이 지구 상에 단 한 명도 없다니. 그때 이미 세상은 내게 얕보인 거다. 세상은, 사회는, 문명은 그 허술함을 내게 들켜 버린 거다. 나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종교도, 철학도, 과학도 내 물음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있었다. 그 어떤 위대한 스승도, 영웅도, 과학자도, 노벨상 수상자도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한 내 앞에서는 뭣도 아니게 된 거다. 고독하게 끝까지 가보아야 했다.
돌아와 내 질문에 스스로 답하기로 한다. 구조론은 지난 수 십년 간 스스로 질문하고 답한 기록이다. 구조론은 세상의 얽힘과 풀림을 해명한다. 세상은 이렇게 얽혀서 서로 짝을 짓고 이렇게 풀려서 운행한다.


다섯 가지 구조
자연을 관찰하여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존재가 서로 ‘만나고≫맞물리고≫맞서고≫하나되고≫소통하며’ 잉여를 낳아 그것으로 우주를 보존하고 생태계를 순환시키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구조는 얽힘이다. ‘값≫포지션≫평형계≫구조체≫시스템’ 순으로 고도화 된다. 더 밀접하게 얽혀든다. 각각 만남의 구조, 맞물림의 구조, 맞섬의 구조, 하나됨의 구조, 소통의 구조를 이루니 이로써 세상은 크게 이루어졌다.


값 - 만나서 접촉하다
빛 가는 곳에 그림자 있다. 그림자가 빛에 딸려 있듯이 data(값)는 항상 어딘가에 종속되어 있다. 더 크고 확실한 것에 빌붙어 그림자로 있다. 자연을 관찰하여 색깔, 냄새, 소리, 맛, 촉각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포지션 - 맞물려서 연결하다
data의 패턴을 비교하여 짝과 쌍을 찾을 수 있다. 모든 존재는 안과 밖, 겉과 속, 앞과 뒤로 짝을 짓고 쌍을 이루며 대칭을 이루고 평형으로 나아간다. 하늘과 땅, 밤과 낮, 여자와 남자로 짝을 지은 것이 포지션이다.


평형계 - 맞서서 판정하다
포지션이 서로 얽혀 평형을 이루고 외부작용에 대해 반작용을 판정한다. 모든 존재의 내부에 판정을 내리는 저울 ┳가 있다. 칼의 날, 전축의 바늘, 라디오 안테나, 폭탄의 뇌관, 화살의 깃으로 평형계는 있다.


구조체 - 하나되어 일하다
평형계는 외부작용을 받아들여 일을 하고 잉여를 낳는다. 구조체는 일이 진행되는 1 사이클을 따라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의 5단계로 세팅된다. 구조의 저울 ┳에 입출력을 더하여 구조체 5(┳)를 이룬다.


시스템 - 소통하여 낳는다
구조체가 일하여 잉여가 축적되면 시스템으로 성장한다. 시스템은 일하는 하드웨어와 축적된 잉여가 구조 속의 구조를 이룬 소프트웨어로 이루어진다. 자연의 생태계나 인간의 조직 혹은 공동체를 들 수 있다.


구조론은 자연의 정보와, 그 정보가 연결된 포지션, 포지션이 외부에 대응하는 평형계, 평형계가 일하는 구조체, 구조체가 성장하는 시스템의 다섯 구조가 세상이라는 드라마를 어떻게 조직하여 내는지에 대한 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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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자연에서 일차적으로 얻는 정보는 빛깔, 냄새, 소리, 맛, 촉각의 data다. 값이다. 구조는 data가 일정한 포지션을 얻어 고도화 된 것이다. 포지션은 ‘네가 이렇게 가면 나는 이렇게 간다’는 상대적인 관계다.
‘A면 B다’의 관계성 법칙으로 출발한다. 구조론은 관계를 해명하며 모든 관계는 결국 A와 B의 관계다. 이것이 논리학의 궁극적 출발점이다. 논리란 서로 다른 둘을 연결시키는 문제이며 ‘A면 B다’로 정립될 수 있다. 

 

관계성 법칙 (값)
    A면 B다 → 빛의 맞은 편에서 그림자를 찾는다.


일치와 연동의 법칙 (포지션)
    짝과 쌍 → 작용 반작용에 따른 대칭과 평형을 찾는다.


극한의 법칙 (평형계)
    심과 날 → 중복과 혼잡을 배제하면 구조의 저울 ┳가 드러난다.


완전성 법칙 (구조체)
    아날로그와 디지털 → 일의 1 사이클을 따라 디지털구조 (┳)로 세팅된다.


잉여의 법칙 (시스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 잉여가 축적되면 구조가 복제되어 성장한다.


자연에 관계성 법칙 ‘A면 B다’를 적용하여 data를 얻는다. 빛의 맞은 편에서 그림자 찾기다. 빛 A면 그림자 B다. 이 방법으로 빛깔, 소리, 냄새, 맛, 촉각의 값을 얻을 수 있다. 이를 단서로 추론을 전개할 수 있다.
data에 일치와 연동의 법칙을 적용하여 포지션을 유도할 수 있다. 일치와 연동의 법칙은 ‘A면 B다’의 관계성 법칙에 일정한 조건을 부여한 것이다. A가 이렇게 가면 B는 이렇게 간다는 것이다.
포지션은 A와 B의 상대적인 관계다. 공격수가 앞으로 나아가면 수비수는 뒤로 물러난다. 산이 높을수록 골은 깊어진다. 해가 높이 떠오를수록 그림자의 길이는 짧아진다. B는 항상 A의 반대로 돈다.
이렇듯 상대의 움직임에 따라 자신의 대응을 결정하는 것이 포지션이다. 포지션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있다. 항상 상대의 맞은편에서 반대쪽으로 도는 ‘일치’거나 항상 상대를 따라가는 ‘연동’이다.
그림자는 빛의 반대편으로 돈다. 그러면서 빛을 따라간다. 여기서 질서가 발견된다. 빛이 먼저 가고 그림자는 뒤쫓아간다. 빛이 주(主)고 그림자는 종(從)이다. 우선순위가 가려진다. 자연의 모든 질서가 여기서 비롯된다.
음은 항상 양의 반대편에 서고 밤은 항상 낮의 반대편에 선다. 음은 양을 따라가고 밤은 낮을 다라간다. 뒤는 앞의 반대편에 선다. 뒤는 항상 앞을 따라간다. 바늘에 실 가듯이 항상 따라간다. 그래서 포지션이다.


포지션에 극한의 법칙을 적용하여 평형계를 구한다. 극한의 법칙은 닫힌계 내에서 중복과 혼잡을 제거하기다. 중복은 같은 것이 반복되었을 때 이를 약분함이며 혼잡은 이질적인 것이 섞여 있을 때 이를 배제함이다.
단순화 하면 구조가 드러난다. 중복과 혼잡을 제거하여 심 1에 날 2로 이루어진 평형계를 얻을 수 있다. 존재의 내부에 숨은 저울이다. 극한의 법칙은 세상의 그 어떤 복잡한 구조도 결국 심 1에 날 2로 단순화 되는 원리다.
자동차의 구조가 복잡하다 해도 많은 바퀴들의 집적에 불과하다. 바퀴는 둥글지만 본질은 축을 중심으로 윗부분의 ←와 아랫부분의 →다. 심 1에 날 2다. 그 근원은 엔진 속에서 피스톤의 왕복운동에 있다.
피스톤은 축을 중심으로 배기의 ↑와 폭발의 ↓가 심 1에 날 2로 평형을 이룬 것이다. 바퀴가 둥근 이유는 이를 반복적으로 구현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편의로 바퀴를 둥글게 깎아서 둥글 뿐 본질은 평형계 ┳다.


사람의 팔다리나 지렛대 혹은 천칭저울 또는 기계장치의 arm은 겉보기에 바퀴와 다르지만 본질이 같다. 구조가 같다. 콤파스 ┳다. 콤파스는 하나의 심과 두 날이다. 이를 반복적으로 전개하면 둥근 원이 된다.
자동차는 피스톤에서 플라이휘일, 클러치, 기어, 차축, 바퀴 등으로 복잡하게 연결되지만 결국 바퀴와 바퀴가 톱니로 물려 단순히 반복될 뿐이다. 중복을 생략하고 혼잡을 제거하면 평형계 ┳만 남는다.
11명이 뛰는 축구시합에서 골이 터지는 확률을 높이려면 선수를 12명으로 늘릴까 아니면 10명으로 줄일까? 극한의 법칙에 따라 심 1에 연동된 날의 수를 극단적으로 줄이거나 늘려보는 방법을 쓸 수 있다.

 

각 1명이 뛰는 시합과 각 100명이 뛰는 시합을 비교해 보자. 각 1명이 뛸 경우 더 많은 골이 터진다. 그러므로 선수의 수를 10명으로 줄여야 더 많은 골을 얻을 수 있다. 이렇듯 극한의 법칙으로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다.
이때 축구공이 심 1이면 두 팀은 날 2다. 축구시합 아니라 어떤 경기라도 이 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동차가 아무리 복잡해도 결국 피스톤 1에 운동 ↑와 ↓ 2로 이루어진 평형계다.
시계가 복잡해도 진자운동의 ←와 → 사이의 평형계다. 사람의 걸음도 왼발을 앞으로 내딛는 ←와 오른발로 뒷땅을 미는 →다. 사람이 걷거나 활이 화살을 날려보내거나 엔진이 피스톤을 쏘아보내거나 구조는 같다.


인류가 고안한 모든 장치는 구조가 같다. 구조가 작동하려면 힘이 필요하다. 힘은 잉여에 의해 얻어진다. 잉여는 심 1에 날 2일 때 그 중 날 1을 제거하여 나머지 1의 잉여를 얻는 형태로 생성된다.
심 1을 가운데 두고 대칭을 이룬 날 2에서 이를 심1과 날 1의 대칭으로 전환하고 남는 1을 잉여로 삼아 구조는 작동한다. 이로써 우주는 지탱된다. 자연은 보존되고 생태계는 순환하고 문명은 진보한다.
이때 제거된 잉여 1은 흡기행정에 의한 가솔린 충전으로 다시 보충된다. 그 보충된 1을 태워서 또 잉여를 조달하고 다시 그만큼의 가솔린을 보충하기를 반복하며 자동차의 엔진은 작동하는 것이다.
인간의 심장이 뛰어도 그렇고 미생물이 세포분열을 해도 그렇다. 만유는 동일한 구조를 사용하며 모든 구조는 심 1에 날 2의 평형계다. 평형계는 저울이다. 그 저울로 판정하되 남으면 잉여로 배출한다.
저울 ┳는 저장≫제어≫연산한다. 여기에 입력과 출력을 더하여 5를 이루면 디지털구조 5로 세팅되어 반복적인 일을 수행한다.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의 5로 완성되어 일의 1 단위를 이룬다.
일은 반복된다.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지듯이 반복된다. 이들이 5로 세팅되어 반복적인 일을 수행하는 것이 디지털 구조체다. 반면 세팅되지 않고 일시적으로 작용 반작용의 5를 이루는 것은 아날로그 구조체다.
아날로그 구조는 야구공이 배트와 충돌하는 순간에 일시적으로 구조 (┳)를 성립시키고 해체된다. 그러므로 구조가 잘 관찰되지 않는다. 반면 디지털 구조체는 5로 세팅되어 반복적으로 일하므로 구조가 잘 관찰된다.
완전성 법칙은 구조체가 에너지 순환의 1 사이클, 곧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의 5로 존재의 1 단위를 이루는 원리다. 세상은 무수한 단위들로 이루어져 있다. 1번≫1반≫1학년≫1학교로 마디져서 동그라미를 이룬다.
한 손가락≫한 손≫한 팔≫한 사람≫한 인류≫하나의 생태계로 계속 단위를 만들어 나가는 원리다. 한 사람≫한 가정≫한 씨족≫한 민족≫한 지구촌으로 지속적으로 단위를 만들며 나아간다. 동그라미를 만든다.
그 단위 안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작용 반작용의 밸런스가 있다. 그 단위로 세상과 만나고≫맞물리고≫맞서고≫하나되고≫소통한다. 인류의 모든 실패는 그 각 단위의 완성의 실패로 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사회의 구조가 아무리 그럴듯하게 설계되어 있다 하더라도 각 단위의 완성에 실패하면 공산주의 실험처럼 망하고 파시즘의 광기처럼 망한다. 개인이 각자 완성되지 않은 채로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실험은 실패하고 만다.
일 하지 못하고 잉여를 낳지 못하기 때문이다. 완성되지 않으면 불임이다. 완성되지 않은 꽃은 나비나 벌을 초대하지 못한다. 완성되지 않은 씨앗은 싹트지 않는다. 언제라도 동그라미의 완성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구조체는 에너지 순환의 1 사이클로 완성되어 일을 한다. 일을 하여 잉여를 낳는다. 잉여를 낳으므로 힘이 있다. 그 힘에 의해 구조체는 집적된다. 집적되어 거대한 체계를 구성한다. 곧 시스템이 작동하는 잉여의 법칙이다.


자연의 생태계나 인간의 회사조직이나 혹은 가족이나 국가와 같은 공동체를 비롯한 모든 진보하고 발전하는 것, 점점 숫자가 늘어나고 커지는 것은 시스템으로 존재한다. 우주도 하나의 시스템이다.
시스템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구축된다. 일하는 쪽이 하드웨어라면 일감이 지나가는 통로가 소프트웨어다. 소프트웨어는 구조체의 반복적인 일처리에서 출력측의 입력전환 곧 피드백에 의해 성립된다.

 

구조는 건축한다. 도시의 건물이 하드웨어라면 그 건물들 사이로 생겨난 골목길은 소프트웨어다. 건물을 지으면 골목길은 저절로 생겨난다. 방 하나를 지으면 마루나 복도 하나가 저절로 생겨난다.
이때 골목길의 구조, 통로의 구조는 건물의 구조, 방의 구조를 복제한다. 그림자는 빛의 구조를 복제한다. 인간이 실제 눈으로 보는 칼라는 그림자다. 그림자는 빛을 복제하므로 빛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구조체가 반복적인 일을 수행할 때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이 하나의 길다란 관(管)을 형성한다. 긴 파이프와 같다. 사람이라면 입에서 항문까지 하나의 긴 관을 이루고 있다. 인간은 그 자체로 파이프다.
모든 생물, 모든 조직, 모든 기관, 모든 장치가 구조로 보면 길다란 하나의 관이다. 단단한 돌멩이라도 구조로 보면 중력을 전달하는 관이다. 물이 수도관 속을 흐르듯이 중력은 돌멩이나 쇠붙이 속을 흐른다.
그 파이프 안의 빈공간이 소프트웨어다. 파이프를 만들면 저절로 파이프 안의 빈 공간이 생긴다. 복제되는 것이다. 도시의 건축물이 하드웨어면 도로망은 소프트웨어다. 빛이 하드웨어면 그림자는 소프트웨어다.
자동차가 하드웨어면 운전은 소프트웨어다. 영토와 국민이 하드웨어면 주권은 소프트웨어다. 반복적인 일처리를 하는 시스템에는 항상 출력측의 입력전환이 있고 하드웨어와 이를 복제한 소프트웨어가 존재한다.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를 복제하여 구조 속의 구조를 이룬다. 복제되면 양이 점점 증가하게 되며 그 증가한 양을 수용하기 위하여 시스템은 그만큼 발전하고 진보한다. 나무가 자라듯이 시스템은 점점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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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를 둘러보자. 모든 존재가 어떻게든 짝을 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이 마주보고 대칭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암컷과 수컷만 짝 짓는 것이 아니다. 자동차라면 보디와 섀시가 짝이다. 집은 골목길과 짝이다.
바다는 산과 짝이고, 동물은 식물과 짝이고, 꽃은 열매와 짝이다. 항상 짝이 있다. 짝이 없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존재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가만이 있는 돌멩이도 그 내부로 중력이 흐르게 한다.
둥근 지구의 대칭과 평형을 위하여 돌멩이도 일하고 있다. 어떤 게으럼뱅이도 최소한 시간과 공간 상에서 자신을 보존하는 일은 하고 있다. 일하려면 그 일을 만나야 한다. 그 만남이 짝짓기다. 구조는 존재의 짝짓기다.
공간은 자리 곧 포지션 지정이며 시간은 외부의 작용에 대응함이다. 가만이 있는 것도 자기의 주소지를 가진다. 자리를 지키며 외부에서의 영향에 어떻게든 대응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무(無)다.
어떤 존재가 오른쪽과 짝지으면서 동시에 왼쪽과 짝지으면 하나가 남는다. 그만큼 효율성이 얻어진다. 더 유리해진다. 주변에 비해 더 높은 포지션을 차지한 것이다. 바둑판의 화점과 같다. 상대적인 우위에 선다.
여기서 우주의 근원적인 질서가 얻어진다. 높고 낮음이 가려져서 존재가 작동하는 일정한 방향성이 얻어진다. 물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그 가는 길이 정해지는 것이다. 법칙의 탄생이다.
더 많이 짝지어서 포지션의 우위에 선 존재가 어떤 이유로 남는 짝 하나를 제거하는 데서 에너지가 얻어진다. 에너지가 순환되면 비로소 우주는 작동한다. 생명은 호흡하고 문명은 진보한다.
우주가 복잡하지만 오직 이 하나의 방법으로 에너지를 조달하므로 꿰뚫어 볼 수 있다. 구조론은 존재가 어떤 방법으로 짝을 지어 잉여를 생산하고 우주를 보존하며 한편으로 생명을 진보시키는지를 해명하고 있다

 

당신의 상식은 틀렸다
구조론이 중요한 이유는 보통사람의 상식적인 판단이 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오판을 저지른다. 오류가 없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그러므로 항상 검증되어야 한다. 이에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두 번 생각해야 답이 보인다. 당연히 옳을 것이라는 믿음은 당연히 틀렸다. 반드시 의심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때 판단의 내용이 틀린 것이 아니라 판단의 전제가 원초적으로 틀렸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인식내용이 틀린 것이 아니라 인식의 틀이 틀렸다. 눈이 삔 것이 아니라 그 눈이 애초에 엉뚱한 방향을 바라본 것이다. 충격받아야 한다. 처절하게 반성해야 한다. 상시적인 오류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 검증 없이는 거의 틀린다.
바꾸어야 한다. 상식의 이름으로 굳어진 고정관념과 편견과 타성과 무지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틀을 새로 건설해야 한다. 그 틀은 선형사고의 2분법에서 벗어난 입체적 모형의 틀이어야 한다.
돼지 불을 까는 요령은 주둥이를 말뚝에 묶는 것이다. 돼지는 앞에서 공격받았으므로 한사코 뒤로 물러나려 한다. 뒤로 몸을 뻗댄다. 농부는 뒤에서 불을 까버린다. 항상 이런 식이다. 앞에서 바람잡고 있다면 타겟은 뒤다.
우리는 야바위꾼이 빠른 손놀림으로 행인을 속인다고 여긴다. 천만에! 야바위꾼은 마술사가 쓰는 도구를 쓴다. 장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바위꾼이 장치가 숨어있는 도구를 이용하여 속인다고 안다. 천만에!
야바위는 손동작으로 속이지 않고 장치로도 속이지 않는다. 야바위는 바람잡이를 동원하여 행인에게 속임수의 수법을 넌지시 일러준다. 만약 당신이 어떤 계기로 야바위꾼이 쓰는 수법을 알아냈다고 믿었다면 그게 속은 거다.
어떤 사람이 야바위꾼에게 걸려 돈을 잃고 울상짓고 있다면 바로 그 사람이 패거리의 행동대장이다. 이런 식이다. 당신은 어떤 경우에도 속는다. 야바위꾼은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식은 이토록 허술한 것이다. 불을 떼이는 돼지와 다르지 않다. 상식적인 판단이 틀리므로 그 상식 위에 건설된 시민의 민주주의는 위태롭다. 상식적인 판단으로 투표했는데 결과가 이명박이다. 집단의 오판이다.
중세의 마녀사냥과 같은 집단적 사고의 오류는 늘 있어왔다. 양떼는 숫자만 많으면 안심한다. 다수가 가는 길은 옳다고 믿는다. 그러나 역사는 다수가 저지른 잘못을 소수가 수습하는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의 연속이다.
구조를 꿰뚫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전모를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1 사이클의 전체과정을 경험해야 한다. 뇌 속에 입체적 모형을 세팅해 두어야 한다. 두 번 생각하면 보인다. 바로 깨달음이다.


●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작다
부분의 합은 전체와 같다는 판단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숫자 0의 존재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0은 포지션이다. 자리다. 자리값이 있다. 포지션의 존재를 감안하면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작다.
시골다방의 배달커피가 홀손님보다 더 가격이 싸다. 이유가 있다. 역전다방은 역전 앞이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자리 위에 건설되었다. 자리값이 매겨져 있다. 배달손님은 그 자리를 차지하지 않으므로 싸다.
신발을 잊은 채 출근하는 사람은 없다. 신발을 신지 않고는 발이 아파서 출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10층건물을 짓는 사람은 항상 1층부터 짓는다. 10층을 지은 다음 9층을 짓는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은 없다.
신발을 잊고 출근할 수 없듯이 그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은 지구 중력의 도움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그 중력이 디폴트값으로 제공하는 포지션의 존재를 잊어먹는다.
자리값을 잊어먹는다. 그래서 0은 뒤늦게 발견되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이 땅 속에 산다면 어떨까? 사과 한 개를 안으로 들여오기 위해서는 사과 한 개를 놓아둘 빈 공간을 먼저 확보해야 한다.
만원전철과 같다. 안쪽의 승객이 내리기 위해서는 문앞에 있는 사람이 잠시 내려주어야 한다.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밖으로 빠져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0의 존재를 망각할 수 없다.

 

그렇다. 지구 표면에서는 중력이 포지션 문제를 대거 해결해준다.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듯이 포지션의 고마움을 잊어먹는다. 0의 가치를 잊어먹는다. 일상적으로 오류를 저지르지만 그래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자동차의 부품은 약 3만개에 달한다. 자동차 부품 3만여개의 가치는 완성차 한 대와 같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부품들을 모두 모아도 뭔가 하나가 빠졌다. 부품들은 자기 포지션을 가진다. 아뿔싸! 포지션을 빠뜨렸다.
자동차는 3만개의 부품+3만개의 포지션으로 이루어져 있다. 합이 6만이다. 부품의 합+부품의 위치+부품의 결합순서+부품의 결합방향+부품의 결합에너지라야 비로소 전체가 이룩된다. 한 대의 자동차가 완성된다.
포지션 0을 포착하지 못하므로 우리의 상식은 틀렸다. 그래도 사는데 크게 불편하지는 않지만 그 투박함으로 우주에 로켓을 쏘아보낼 수는 없다. 우주로 가려면 정밀해야 한다. 반드시 0을 발견해야 한다.
언어가 다른 한국인과 일본인이 무인도에 표류한다면 어떨까? 의사소통에 무리가 없다. 배가 고프기 때문에 손짓만 해도 ‘먹거리를 나누자’는 의미를 알아듣는다. 궁하면 통하기 때문에 포지션의 중요성을 망각한다.
그러나 예술은 한가로운 것이다. 예술은 궁하지 않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에는 흔히 포지션의 오류가 있다. 김홍도의 씨름도에서 오른쪽 맨 아래 인물은 왼손과 오른손이 바뀌어 있다. 한가로우면 실수를 저지른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있다. 소프트웨어는 부품의 포지션이다.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작은 이유는 포지션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한 채의 완성된 건물은 건축자재들의 합+설계도다. 완공되고 나면 설계도는 버려진다.
0과 같다. 0은 사라졌을까? 과연 설계도는 사라졌을까? 천만에! 완성된 건물 안에 설계도가 숨어 있다. 포지션들은 설계도에서 슬쩍 걸어나와 건물로 자리를 옮겨갔다. 인간이 꿰뚫어 보지 못할 뿐이다. 그곳에 있다.


● 껍데기가 알맹이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흔히 알맹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연한 상식이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안쪽을 바라보고 있을 때 리더는 홀로 밖을 경계해야 한다. 변화는 항상 밖에서 온다.
모든 변화는 높은 질서에서≫낮은 질서로 이행한다. 밖이 안보다 더 많은 변수와 물려 있다. 밖이 더 높은 질서다. 사건은 항상 밖에서부터 시작되므로 처음에는 밖이 중요하다. 물론 나중에는 안이 중요하게 된다.
알맹이는 껍질에 쌓여 있다. 그 알맹이는 임신의 결과로 존재한다. 임신은 밖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알맹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이유는 껍데기가 저 들판에서 수 개월 동안 알맹이를 보호하는 역할을 완수했기 때문이다.
껍데기가 이미 중요한 역할을 끝냈기 때문에 임무를 마치고 떠나가는 것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비와 바람과 곰팡이와 벌레의 공격으로부터 껍데기가 보호했기 때문에 알맹이의 성과가 주어지는 것이다.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 형식의 전제 없이 알맹이만 빼먹으려 하다가는 실패하게 된다. 형식에 집착해도 물론 안 되지만 형식의 절차는 반드시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알맹이가 중요하다는 상식은 매우 위험하다.
중요한 일일수록 형식이 중요하다. 전쟁에서 형식은 특히 중요하다. 정치에서도 형식은 중요하다. 예술에서도 형식이 중요하다. 어떤 일이든지 처음 시도할 때는 형식이 중요하다. 첫 인상이 대세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두번째 부터는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 형식은 양식으로 대체된다. 형식은 설계도와 같다. 설계도는 복제되고 모방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형식을 멀리하고 실질만을 추구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표절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방에는 형식이 필요하지 않다. 후진국이 선진국을 따라잡는 데는 형식이 필요없다. 그러나 짧은 글을 쓰더라도 남의 것을 모방하지 않고 순수하게 자신의 창의로만 해결하려 한다면 반드시 형식의 고민에 빠지게 된다. 

 

● 자전거는 달려야 중심을 잡는다.
먼저 중심을 잡고 균형을 잡은 다음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의 상식이다. 틀렸다. 자전거는 속도를 내야 바로 설 수 있다. 팽이는 돌아야 바로 선다. 배는 빠르게 달려야 파도를 헤쳐 나아갈 수 있다.
헤엄치는 사람은 어떻게든 물을 헤어야 뜬다. 먼저 자세를 잡아 물에 뜬 다음에 물을 헤어 전진하려고 하면 실패한다. 먼저 균형을 잡고난 다음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우리의 당연한 상식은 당연히 틀렸다.
이런 점은 정치에서 잘 관찰된다. 진보냐 보수냐 노선투쟁을 벌여서 먼저 진로를 결정한 다음에 속도를 내려하면 끝내 출발하지 못한다. 평화시위냐 강경투쟁이냐를 결정한 다음에 투쟁하려고 하면 시작도 못해보고 주저앉는다.
방향을 찾은 다음에 가야하는 것이 아니라 가다보면 세가 모이고 그 기세에 의해서 방향은 저절로 찾아진다. 정치에서는 실천이 중요하다. 행동하지 않은 말빨은 사기다. 그리고 그 실천은 반드시 물적 토대에 기반한다.
만약 어떤 정치집단이 노선투쟁에 골몰하고 있다면 물적 토대를 잃었다는 증거다. 좌파들이 노선투쟁에 집착하는 이유는 토대와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토대는 인터넷이다. 토대는 창의다. 토대는 미디어다.
자전거도 없이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려고 하니 노선투쟁을 하게 된다. 물도 없는데 헤엄치려고 하니 노선투쟁을 벌이게 된다. 자전거가 토대고 물이 토대다. 이미 자전거를 얻고 물을 확보했다면 길은 저절로 분명해진다.
우리가 새로운 도구를 활용하고 끝없이 창의한다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온다면 대세가 가는 방향은 절로 뚜렷하다. 그러나 사전에 방향을 정해놓고 출발하려고 한다면 백날 논쟁만 하다가 시기를 놓치게 된다.
   
● 우주는 총체적 인플레이션이다
우리는 무에서 유가 탄생하지 않는다고 배웠다. 질량보존의 법칙에 따라 에너지의 총량은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않는다고 배웠다. 당연한 상식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천만에! 우주의 탄생은 그 자체로 인플레이션이다.
당연한 상식이 적용되지 않는 지점이 있다. 정보다. 질량보존의 법칙에 따라 에너지는 늘지도 줄지도 않지만 우주의 총정보량은 순증가한다. 정보는 돌에 화석으로 새겨져 있고 나무에 나이테로 새겨져 있다. 그 정보가 늘었다.
깡통을 누르면 찌그러진다. 속부터 구겨져서 나뭇가지 모양의 주름살이 생긴다. 이때 중심과 주변의 차이가 성립한다. 심과 날이 얻어진다. 정보가 생겨난 것이다. 포지션이 생겨난 것이다. 그 포지션은 증가한다.
태초에 우주는 하나의 둥근 알과 같았다. 어떤 이유로 밖에서 압력이 작용했다. 계의 밀도가 높아졌다. 이때 사방에 미치는 힘은 균일하게 작용하지 않는다. 중심이 주변보다 밀도가 높다. 중심으로부터 균열이 시작된다.
지금 우주는 대체로 균일해 졌지만 그것은 정보가 무수히 탄생하여 밀도차를 상쇄시켰기 때문이다. 깡통의 찌그러짐이 중심부의 높은 밀도를 흡수하여 도로 환원시켰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총 정보량이 증가했다.
모든 존재는 점점 늘어난다. 사람이 나이를 먹을수록 기억은 증가한다. 너무 많아서 통제할 수 없는 수준이 되면 둘로 나눠진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 우주전체로는 무언가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자연이 우주탄생의 인플레이션 원리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팍팍하기 그지없다. 조금의 여유도 없다. 잠시 한 눈이라도 팔면 누군가가 그 새를 비집고 들어온다. 빼앗기고 만다.
자연은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이 넉넉하다. 우주는 터무니없이 크다. 공간을 무한대로 낭비하고 있다. 별은 너무나 많다. 외계생명체가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별들에는 생명이 없다. 자원이 낭비되고 있는 것이다. 
지구에는 물이 너무나 많다. 공기도 매우 많다. 햇볕도 넉넉하다. 태양이 매년 지구에 공급하는 에너지의 극소량만 활용해도 지구인의 살림살이는 넉넉해진다. 우리가 그 에너지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식물은 꽃을 넉넉하게 피운다. 겨울이 되면 그 많은 잎새들을 아낌없이 버린다. 버리는 김에 화려한 단풍잔치 벌인다. 하늘은 많은 비를 내리지만 대부분은 그냥 바다로 흘러간다. 터무니없이 자원을 낭비하고 있다.  
자연이 이렇듯 풍요롭고 넉넉한데도 우리의 삶이 팍팍한 이유는 톱 포지션을 차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상위 포지션은 넉넉하지만 한 단계 포지션이 내려갈 때 마다 그 넉넉함과 같은 비례로 재량권이 좁아진다.

 

왕에게 1 억이 있다면 귀족에게는 그 절반 혹은 십분의 1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작 백분의 1이 주어질 뿐이며, 평민에게는 다시 귀족이 가진 것의 백분의 1이 주어진다. 노예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
톱 포지션을 차지하는 방법은 창의하는 것이다. 인터넷의 바다는 무한히 넓다. 창의한다면 그 넓은 인터넷을 모두 먹을 수 있다. 그러나 누구 남이 하는 것을 따라하려고 하면 그만 각박해지고 만다. 치열한 경쟁에 내몰린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한정되어 있고 부족하다는 상식에 익숙해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그동안 이류국가였기 때문이다. 창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진국을 따라잡기 급급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마인드 바꿔야 한다.
자연은 넉넉하다. 창의할 수 있다면 우리도 넉넉해질 수 있다. 경쟁의 방법으로는 절대 넉넉해질 수 없다. 남의 것을 빼앗아서는 넉넉해질 수 없다. 오직 창의의 방법으로만이 우리는 자연의 본래와 닮을 수 있다.  


● 양질전환은 없다.
양이 일정한 한계에 도달하면 질적인 비약을 이룬다는 마르크스의 생각이 널리 퍼져 있으나 틀린 상식이다. 닫힌계 안에서 양은 질로 전환되지 않는다. 바다에 물을 아무리 많이 모아두어도 질의 변화는 없다.
양적변화가 질적변화를 촉발한다는 착각은 닫힌계 개념의 부재로 인한 오류다. 변화는 일정한 범위의 닫힌계를 중심으로 일어난다. 계 밖에서 촉발되어 계 안으로 진행된디. 그 영역 안에서 양은 질로 비약하지 않는다.
양질전화의 예로 알려진 사건들은 한 부분에서 이미 일어난 질적 변화가 계 전체에 파급되는 과정이다. 질은 공명된다. 복제된다. 전파된다. 닮아간다. 그 과정은 양질전환처럼 보이지만 착각에 불과하다. 
지구상에 사람이 둘 뿐이었던 에덴동산에서는 글자가 필요하지 않았다. 아담과 이브 둘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래야 뻔하다. 주로 먹고 싸는 일이다. 언어 없이도 의사소통은 가능하다.
인구가 증가한다. 갈수록 소통은 어려워진다. 언어와 문자가 창안된다. 이때 인구의 양이 늘어났기 때문에 문명의 질적인 비약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인간 내부에 잠재한 역량이 촉발되어 드러났을 뿐이다.
소떼는 아무리 늘어나도 소떼고 쥐떼는 아무리 늘어나도 쥐떼다. 질적인 비약은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질적인 비약을 이루고 있다. 이는 특별한 것이다. 인간에게는 처음부터 언어와 문자의 가능성이 있었다.
질은 사전에 담보되어 있었다. 그 질의 파급을 촉발시킬 방아쇠가 당겨지지 않았을 뿐이다. 인구증가는 그 방아쇠가 당겨질 확률을 높여준다. 타이밍이 문제였을 뿐 그 확률 또한 사전에 예비되어 있었다.
문명의 진보를 위해서는 양적 증가가 아니라 질적 비약이 필요하다. 그 질의 변화는 확률에 의해 얻어지며 그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다양성 뿐이다. 다양성은 계에 동시에 물려있는 변수의 수다.
하나의 구조체 안에서 중심의 심이 많은 날개를 가질 때 질의 변화는 작동한다. 질의 비약은 창의에서 얻어지고 창의는 다양성에서 얻어지고 다양성은 질서의 자궁이라 할 무질서에서 얻어진다.
노력하면 뭔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망상을 버려야 한다. 포지션의 조합이 잘못되면 아무리 노력해도 조금도 얻어지지 않는다. 천재는 결코 99프로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99개 촉수의 이상적인 조합에서 얻어진다.
천재는 포지션과 타이밍에서 얻어진다. 톱 포지션을 차지한 사람은 무한히 창의할 수 있다. 그것은 신대륙을 얻은 절대군주가 그 신대륙에 국가를 건설하며 무한히 창의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독재자가 흔히 그러하듯이 온갖 아이디어를 실험할 수 있다. 반면 가장 낮은 포지션을 차지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조금도 얻을 수 없다. 그것은 소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조금의 소득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포지션은 다섯이며 한 단계 내려갈 때 마다 1/5씩 몫이 줄어든다. 일의 1 사이클이 진행되는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 중에서 가장 낮은 다섯째 출력 포지션을 차지한 사람은 디자인을 개선하여 1을 얻을 수 있다.
이때 더 높은 네번째 연산 포지션을 차지한 사람은 효능을 개선하여 5를 차지할 수 있다. 포지션이 한 단계 상승할 때 마다 몫이 5배 증가한다. 세번째 제어 포지션을 차지한 사람은 성능을 개선시켜 25를 얻을 수 있다.
두번째 저장 포지션을 차지한 사람은 기능을 발명하여 125를 얻을 수 있고 가장 높은 포지션이라 할 입력 포지션을 차지한 사람은 소재를 개발하여 625를 얻을 수 있다. 소재≫기능≫성능≫효능≫디자인 순이다.
MS의 빌 게이츠가 톱 포지션을 차지한 사람이다. 그는 소재를 개발했다. 소스를 쥐고 있다. 교류전기를 발견한 테슬라나 플라스틱으로 전기용품을 개발한 마쓰시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적은 노력을 기울이고도 무한에 가깝게 얻는다.
인터넷에서도 마찬가지다. 네이버나 다음, 구글은 톱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다. 그저먹기로 성공하고 있다. 물론 그 포지션을 차지하는 과정에서는 노력이 따랐겠지만 한 번 선점한 다음에는 공짜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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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론은 포지셔닝 게임이다. 포지션은 다섯이다. 어느 위치에 설 것인가? 맨 아래 사람이 1을 먹을 때 그 윗 사람은 5를 먹는다. 더 윗 사람은 25를 먹고 더 윗 사람은 125를 먹고 맨 위 사람은 625를 먹는다.
일관되게 포지션의 우위에 설 수 있다. 질≫입자≫힘≫운동≫량의 포지션이 있다. 상대가 량에 위치한다면 운동을 차지하는 방법으로 이길 수 있다. 상대가 운동을 차지한다면 힘을 차지하는 방법으로 이길 수 있다.
그런데 상대가 처음부터 가장 높은 포지션인 질을 차지해 버린다면 어떻게 하지?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사건은 언제나 양에서 촉발되기 때문이다. 사건은 항상 현장에서 일어난다. 현장은 가장 낮은 포지션이다.
현장 근무자의 임금이 적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실로 현장이 중요하다. 승리하려면 처음 현장으로 가서 먼저 양을 차지하고 있다가 상대가 그 자리를 뺏으러 올 때 운동으로 이동해야 한다.
현장에만 매달려 있어도 곤란하다. 폭넓게 움직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상대가 뺏으러 오면 그 현장을 양보하고 운동으로 이동해야 한다. 상대가 운동의 포지션을 뺏으로 오면 힘의 포지션으로 이동해야 한다.
역시 상대가 힘으로 나오면 입자로 이동하고, 입자로 나오면 질로 이동하며 일관되게 포지션의 우위에 서야 한다. 그러려면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도무지 어디가 운동이고 어디가 힘인지를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한다.
구조론은 포지션 잡기다. 자리를 잘 잡아야 한다. 자리를 잘못 잡은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고 목 좋은 곳에 자리를 잘 잡은 사람은 가만이 앉아서 텃세만 받아도 배가 부르다. 이래도 구조론을 배우지 않겠는가?  '

 


구조주의 역사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뜰앞에 피어난 화려한 꽃도 근본을 추적해 보면 하나의 작은 씨앗으로부터 차근차근 전개되어 나왔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씨앗은 그러한 성질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씨앗은 원래 그렇다. 그것은 물(物) 자체의 고유한 속성이다.’ 이것이 옛 사람의 견해다. 원자론이 그러하다. 원자는 만물의 씨앗이다. 씨앗은 원래 그렇다. 내부에 고유한 속성이 있다.
과연 그러한가? 세상은 원자라는 씨앗이 꽃을 피운 것인가? 틀렸다. 고유한 속성 따위는 없다. 원자는 없다. 씨앗 또한 중간에 거쳐가는 하나의 정거장일 뿐 최종적인 것은 아니다. 근본은 따로 있다.
꽃은 씨앗 속의 유전자가 피운다. 유전자는 정보의 집적이다. 정보는 관계에서 나온다. 씨앗은 물과 햇볕과 거름을 만나 관계를 맺고서야 꽃을 피울 수 있다. 관계는 만남이다. 만물의 근본은 정보다. 정보는 만남이다.
만남은 둘 이상에 의해 성립한다. 혼자서는 만날 수 없다. 혼자서는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만유의 성질은 물(物) 자체에 고유하지 않고 어떤 상대적인 만남과 그에 따른 관계맺기에 의해 2차적으로 성립한다.

 

칼은 도마 위에서 무우를 만나야 칼이다. 연필은 종이를 만나 글씨를 이루어야 연필이다. 만나서 관계를 맺으면 전봇대도 이쑤시개가 될 수 있고 임자를 만나지 못하면 고려청자도 한낱 사금파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구조론은 물(物) 자체의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상대적인 관계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태도이다. 왜인가? 세상은 너무나 크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물 자체의 속성으로 세상을 설명하려면 그 현상의 숫자 만큼 원소가 있어야 한다. 
삼라만상의 온갖 현상을 씨앗의 논리로 설명하려면 온갖 씨앗이 있어야 한다. 원소의 숫자는 점점 증가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숫자처럼 증가한다. 힌두교에 등장하는 신은 많기도 하다.
일본의 신도라서 다르지 않다. 신의 숫자는 국어사전에 오른 개념의 숫자만큼 늘어나야 한다. 하나의 개념이 탄생할 때 하나의 신이 탄생하는 식이다. 이런 식이라면 감당할 수 없다. 세상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구조주의는 세상의 모든 개별현상을 하나의 통합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일원론적 태도로 부터 출발한다. 세상은 다양하다. 그러나 추적해 보면 한 지점에서 모두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등산을 하는 사람은 산의 정상에서 모두 만난다.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다가 보면 강의 하구에서 모두 만나게 된다. 족보를 따라 거슬러올라가 보면 아담과 이브에서 모두 만나게 된다. 결국 세상은 하나다.
세상은 크게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 신들의 숫자가 많아야 할 이유는 없다. 일원론이 다원론의 한계를 극복한다. 구조론은 일원론이다. 세상은 결국 하나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 보이는 현상은 결코 하나가 아니다.
그런데도 근본이 하나인 이유는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연결하는 것은 길이다. 길은 도(道)다. 도(道)는 도시와 도시를 잇는다. 하나가 아닌 것을 하나로 되돌린다. 그래서 진리는 예로부터 도(道)로 표현되어 왔다. 
엄마와 아빠와 자녀들은 서로 연결되어서 하나의 가족을 이룬다. 전라도와 충청도와 경상도는 서로 연결되어서 하나의 대한민국을 이룬다. 머리와 몸통과 손발은 서로 연결되어서 하나의 사람을 이룬다.
구조는 연결이다. 연결될 때 서로 만나서 관계를 맺는다. 관계맺기에 의해 만유의 고유한 속성이 유도된다. 사랑은 연결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 무슨 짓을 하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이 결정된다.

 


구조적 관점의 탄생
세상은 크고 현상은 다양하다. 하나의 주머니에 우겨 담으려면 그 주머니는 매우 커야 한다. 가장 큰 주머니는 무엇일까? 거짓말하기 시합과 같다. 먼저 말하면 진다. 상대가 어떤 거짓말을 해도 보다 더 큰 거짓말을 댈 수 있다.
가장 큰 숫자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상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큰 주머니는 어떤 주머니인가? 그것은 점점 커지는 주머니다. 고무풍선처럼 계속 커지는 주머니가 있다면 모두 담아낼 수 있다.
계속 커지면서도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점점 커지면서도 본래의 하나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큰 나무다. 큰 생태계다. 큰 도시다. 큰 조직이다. 그것은 큰 나라다. 큰 네트워크다. 인터넷이다.
그것은 유전인자다. 씨앗이 되는 어떤 기초적인 소스가 있다. 그 소스로 부터 복제하여 점점 양이 많아진다. 나무처럼 커지고 개미집처럼 커지고 도시처럼 커진다. 그러면서도 최초의 출발점과 연결을 유지한다.
그 연결이 끊어지면? 풍선은 터진다. 둘로 쪼개진다. 그 경우 정체성을 잃고 변질되고 만다. ‘하나여야 한다’는 전제와 어긋난다. 변질되지 않고 정체성을 유지하려면? 연결되어야 한다. 떨어져 있어도 서로 통해야 한다.
산의 정상은 하나여야 하고 강의 하구도 하나여야 한다. 하나이기 위해서는 연결되어야 한다. 무엇이 연결하는가? 도로다. 길이다. 도(道)다. 추상화 하면 관계다. 구조는 세상을 관계망으로 이해한다.
세상은 붕괴되지 않는다. 도시가 커지면 둘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도로에 의해 서로 연결되기 때문에 문명은 붕괴되지 않는다. 보존된다. 세상이 보존되듯이 보존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질서다.
질서란 점점 커지다가 마침내 둘로 쪼개져서 서로 떨어져 있게 되어도 연결이 유지되게 하는 것이다. 자녀가 크면 분가한다. 부모와 헤어진다. 그러나 연락은 유지된다. 소통은 유지된다. 그것이 질서다.

 

점(點)은 분리된다. 쪼개진다. 떨어진다. 하나가 아니게 된다. 선(線)은 연결하지만 단지 길어질 뿐 커질 수 없다. 크기가 없다. 면(面) 역시 넓어질 뿐 커지지 않는다. 크기가 있는 것은 입체다. 
그러나 입체는 딱딱해서 커지기 어렵다. 입체처럼 크기를 가지면서도 딱딱하지 않은 것은? 점점 커져서 분리 되면서도 본체와 연결을 유지하므로써 최초의 단일체가 갖는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밀도다.
본래 하나로부터 비롯되고, 점점 커져서 마침내 분가하게 되며, 그러면서도 연결을 유지하여 가족이 네트워크를 이루고 질서를 유지하며 보존되는 것은? 그것은 어떤 기초적인 소스로부터 무한복제되는 것이어야 한다.
세상은 그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구조다. 구조는 망이 개방되어 있어서 누구든지 한 지선을 차지하고 거기서 사이트를 개설하여 점포를 열고 독자적인 상행위를 할 수 있는 열린 구조라야 한다.


● 속성 - 만유의 속성은 관계가 낳는다.


● 진보 - 관계는 점점 커지면서 분가하여 시스템으로 발전한다.


● 질서 - 분가해도 네트워크에 의해 연결되어 본래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만유는 보편적 속성이 있고 그 속성으로 부터 발현되어 삼라만상으로 전개된 진보가 있고 그 진보의 과정에 질서가 있다. 속성은 씨앗이다. 진보는 그 씨앗이 싹이 터서 성장함이다. 질서는 꽃피움이다.
한 알의 씨앗이 물과 흙과 태양과 거름을 만나 새싹으로 진보한다. 발전한다. 점점 커진다. 마침내 꽃을 피운다. 거기에 질서가 있다. 그러므로 아름답다. 일찌기 이러한 구조적 관점에서의 착상이 있었다.
탈레스의 물 일원론이 그 시작이라 하겠다. 탈레스가 최초로 구조를 사유한 것이다. 물은 무르다. 딱딱하지 않다. 물은 생명을 자라게 한다. 물은 하천으로 강으로 바다로 연결된다. 물은 구조의 모든 성질을 가진다.
탈레스가 물 일원론을 주장했을 때 물의 어떤 속성을 빗대어 말한 것이지 물(水) 자체를 말한 것은 아니다. 물도 있고 돌도 있고 쇠도 있고 불도 있는데 유독 물만 선택될 수는 없는 것이다.
물의 속성을 뽑아 추상화하여 독립적인 개념을 만들어야 한다. 이 수준에서 나온 착상들 중 하나가 원자론이다. 원자는 씨앗이다. 그 씨앗은 새싹으로 자라나서 마침내 꽃을 피운다. 그러나 틀렸다.
원자론은 위에 열거한 많은 속성을 가지지 않는다. 원자는 돌처럼 딱딱하므로 스스로 커질 수 없다. 씨앗은 흙과 물과 태양과 거름을 만나야만 꽃을 피울 수 있는데 원자론은 그러한 만남에 대해서 해명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작은 씨앗에서 한 떨기 어여쁜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고 원자 개념을 상상했지만 틀렸다. 씨앗은 껍질이 있다. 딱딱하다. 구조는 성장한다. 딱딱한 것은 성장할 수 없으므로 무른 개념이 제시되어야 한다.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 개념이 구조와 가깝다. 그리이스 사상의 카오스와 코스모스 개념도 그러하다. 도교의 도(道) 개념, 장자의 혼돈개념에도 일부 구조적 측면이 사색되어 있다.
중국철학 특유의 음양론과 오행론 역시 일정부분 구조원리를 반영한다. 음양론의 조화설 개념은 구조가 점점 성장하는 성질을 반영한다. 오행론의 상생상극개념은 구조론의 관계망 개념과 닮은 부분이 있다.
석가의 제행무상 제법무아 개념과 금강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개념에도 구조의 관계-상대성 개념이 반영되어 있다. 인연설에서 인(因)은 씨앗이다. 최초의 소스다. 연(緣)은 그 씨앗의 성장이다. 기(起)로서 꽃 피운다.


근대에 와서는 헤겔의 변증법이 구조론을 닮아있다. 정(正)과 반(反)의 대칭개념은 구조론의 평형계 개념을 닮았다. 다만 시스템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합(合)에서 다시 정으로 되돌아가서 순환논리의 오류에 빠졌다. 
데카르트의 연역법과 그의 방법적 접근이 거둔 일부 성취는 중요하다. 연역법의 제 1원인 개념은 구조론의 ‘성장하여 본체에서 떨어져 나갔어도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본래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질서 개념과 닮았다.

 

인간에게 칼을 주면 곧 휘두른다. 자(尺)를 주면 곧 사물을 잰다. 그 칼과 그 자가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특히 동양사상은 실용적인 산술에 관심을 가졌을 뿐 근거가 되는 보편원리의 발견에 소홀하였다.   
세상 모든 것은 높은 질서≫낮은 질서로 간다. 근본을 돌아보지 못하고 실용에 빠져버린다. 반면 데카르트는 수학자였지만 연산에 몰입하지 않고 시선을 그 반대편으로 돌려 근원을 더듬었다. 수학의 자궁을 찾은 것이다.
수학의 최초 탄생지점이 중요하다. 반드시 자궁이 있다. 그러나 데카르트 이후 수학의 자궁을 탐색한 사람은 없다. 낙동강은 황지에서 발원되고 한강은 검룡소에서 시작된다. 항상 근본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물의 흐름을 따라 하류로 내려갔을 뿐 물길을 거슬러 수원지를 조사하지 않았다. 그들은 근대주의가 발명한 눈에 보이는 온갖 신기한 물건들에 홀려서 호기심많은 아이들처럼 줄지어 뒤따라갔다.


현대 프랑스철학의 구조주의도 그러하다. 이름만 구조를 내세울 뿐 누구도 구조의 자궁을 탐색하지 않았다. 그들은 강을 따라 줄지어 바다로 갔을 뿐 황지와 검룡소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구조로 설명하기를 시도했지만 하나의 소스인 구조체를 해명하지 않는다. 소스인 C언어도 모르면서 실용적인 소프트웨어만 개발하려 덤빈 격이다. 소스를 모르면 반드시 한계가 있다.
씨앗을 찾았다고 다가 아니다. 만유의 소스가 있고 만유의 유전인자가 있다. 씨앗 속에서 그 유전인자를 찾아야 한다. 근래에 유행하는 철학사조 중에는 카오스이론의 일부 개념이 구조의 본질에 가깝다 하겠다.
카오스이론이 주목한 난류는 곧 밀도의 장(場)이다. 밀도의 장이야 말로 구조체의 자궁이다. 모든 것은 거기서 탄생했다. 장자의 혼돈 개념도 마찬가지다. 장자의 혼돈은 질서를 비판함이 아니라 질서의 자궁을 탐색함이다.
무질서는 질서의 파괴가 아니라 출발점이다. 세상에는 질서가 있다. 모두들 질서를 좋아한다. 아이들처럼 그리로 졸졸 따라갔다. 그들이 근대의 모든 성취를 일구었다. 대단하다. 그러나 완전하지 않다.
아름답지가 않다. 고결하지 않다. 더 사색했어야 했다. 그 질서의 자궁을 탐색했어야 했다. 자궁은 낳는다. 세상은 위대한 낳음에 의해 이루어졌다. 무른 것이 낳을 수 있다. 질서는 딱딱해서 낳을 수 없다.
장자에 의하면 태초에 혼돈이 있었는데 일곱개의 구멍을 뚫어 질서를 부여하였더니 혼돈이 죽었다고 했다. 혼돈처럼 커다란 하나의 주머니가 있다. 자궁이 있다. 구조는 세상의 자궁이다. 구조가 모든 것을 낳았다.

 


구조주의에서 구조론으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따르면 로마군 특유의 발달한 조직과 전술, 시스템은 본래 로마에 정복당한 에트루리아인의 뛰어난 석조건축술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들은 건축가의 마인드로 군대를 운영한 것이다.
로마군은 특히 숙영지 건설에 열심이었다고 한다. 잠시 쓰고 버릴 숙영지라도 교범에따라 튼튼하게 짓는다. 단지 전투에 승리할 목적이라면 그렇게 튼튼한 숙영지가 필요하지 않다. 다른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1회의 전투로 사태가 종결되기를 기대한 게르만족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숙영지가 주둔지로 변하고 주둔지가 식민도시로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투는 장기화 되고 성질급한 게르만족은 그만 질려버린다. 전의를 상실한다.
건축가가 집을 짓듯이 조금씩 쌓는다. 게르만의 땅을 야금야금 먹어간다. 적의 땅을 일거에 빼앗는 것이 아니라 빈 땅을 개척하여 조금씩 도시를 건설해 간 것이다. 이는 동서고금의 전략가들이 말하는 바와 다르다.
전장에서는 병사들의 사기가 중요하고 장수의 임기응변하는 지휘능력이 중요하다.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것은 전쟁의 명분이고 리더가 주입하는 것은 전쟁의 목표다. 그러나 로마군은 다르다.
그들은 본래 돌을 쪼는 석수장이였다. 석수장이처럼 열심히 쌓아댄다. 한니발과 같은 장수의 천재적인 자질이나 제갈량과 같은 신묘한 전술구사와 다르다. 전술의 기본은 속임수라는 손자병법의 주장과도 다르다.

 

전쟁이란 쓸어버리는 것이다. 방해자를 없애는 것이다.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다. 소멸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군은 반대다. 그들은 건설한다. 도로부터 닦았다. 항구를 열고 배를 보내고 식민도시를 건설한다.
로마군이 항상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은 건축가가 도시를 건설하듯이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쌓아가는 형태의 집요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그 경우 뛰어난 리더가 없어도 교범에 의해 저절로 돌아가게 된다.


쓸어버리는 데는 속임수가 필요하다. 속임수는 1회용이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지는 않기 때문이다. 반면 건설하는 데는 속임수가 불가능하다. 건설은 정직하다. 정직해야만 한다. 건설은 결코 한번에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로마군은 적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적에게 신뢰를 주는 방법으로 승리했다. 적의 땅을 빼앗고 전리품을 챙겨 떠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주저앉아 도시를 건설하고 눌러살며 상품을 교역할 것에 대한 신뢰였다.
로마군은 그 신뢰로 이겼다. 전투에서는 한니발에 속아서 졌어도 전쟁에서는 결국 이겼다. 건축가의 마인드로 이겼다. 건축술과 국가의 시스템은 깊은 관련이 있다. 국가도 건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조주의란 건축가의 마인드로 세상을 바라보기다. 다만 구조론에 있어서 그 건축은 정보의 건축이다. 로마의 건축은 하드웨어다. 정보의 건축은 소프트웨어다. 건축은 질서를 추구하고 정보는 무질서를 통제한다. 반대다.


● 재래의 전쟁 - 방해자를 제거한다.
● 로마의 관점 - 쌓아올려서 건축한다.
● 구조의 관점 - 길을 열어서 서로 소통시킨다.


세 가지 관점이 제시될 수 있다. 재래의 관점은 그저 앞길을 막는 방해자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는 보수세력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로라 부시가 연설에서 말한 유머에 이런 것이 있다. “전기톱으로 잘라버려!”
부시가 텍사스 농장에서 곤란한 일이 있으면 항상 던지는 말이었다고 한다. 이라크가 문제라구? 제거해버려! 북한이 문제라구? 제거해버려! 그들은 로마교범의 방법을 쓰지 않았다. 로마는 제거하는 대신 건축했다. 포용했다.
구조론은 건축한다. 구조의 건축은 단단한 하드웨어 건축이 아니다. 부드러운 소프트웨어 건축이다. 일의 구조, 정보의 구조다. 의미의 구조, 가치의 구조다. 변화의 구조, 진보의 구조다. 최종적으로는 소통의 구조다.


● 보수세력의 단선적 사고- 전진과 후진 밖에 없는 선(線) 위에서는 단지방해자를 제거할 뿐 다른 수단은 없다.
● 진보세력의 건설적 사고- 상하좌우가 있는 입체에서는 방해자를 뛰어넘어 우회할 수도 있고 포용할 수도 있다. 항상 비켜가는 다른 수단이 있다.
● 구조론의 소통적 사고 - 진보세력의 건설적 관점이 하나의 질서아래 점점 커질 뿐인데 반해 서로 분리되어서 네트워크를 이루고 소통한다.  


구조론은 서구의 구조주의와 다르다. 서구의 건축은 유형의 건축이다. 질서있는 건축이다. 그들은 지배하고 조직하고 통제한다. 구조론은 무형의 건축이다. 질서를 초월한 건축이다. 이심전심으로 소통한다.
서구 구조주의 건축은 단지 입체를 조직할 뿐이지만 구조론의 정보건축은 밀도를 조직한다. 밀도는 무르다. 로마군단의 조직력이 뛰어났다지만 하나의 단일체라는 한계가 있었다. 구조론은 그 한계를 극복하다.
입체건축은 정보건축의 하부구조다. 정보건축은 입체건축의 상부구조다. 입체건축은 건물을 올려 집을 짓고 정보건축은 길을 닦아 도시를 건설한다. 입체건축은 하나의 대문으로 통제하고 정보건축은 사통팔달로 개방한다.
입체건축은 하나의 중심을 가지고 정보건축은 여러개의 부도심을 가진다. 입체건축은 지배하고 정보건축은 호응한다. 근본적인 관점의 차이가 있다. 한 차원 더 높은 데서 바라보고 있다. 그 배경에 동양적 사고가 있다.
서구의 구조주의에는 미학적 완전성의 개념이 없다. 이심전심 수평적 소통의 개념이 없다. 로마처럼 지배할 뿐 인도처럼 공존하지 못한다. 동양철학에는 옛부터 그러한 발상의 씨앗이 있었는데 서구철학에는 없다.
서구의 구조주의 철학과 필자의 구조론은 애초에 출발점이 다르고 입각한 포지션이 다르다. 의식적으로 구조주의 서적은 피했다. 구조론이라 이름한 이유도 구조주의와 구분하기 위해서다. 차이가 있다.

 

필자의 구조론이 서구 구조주의 철학에 앞선다. 구조론과 서구 구조주의 철학의 차이는 기하학과 대수학의 차이와 같다. 기하가 대수에 앞선다. 대수학은 원래 기하학을 연산해놓은 것이다.
대수학은 주어진 문제를 해결할 뿐이지만 기하학은 그 문제가 어떤 원인으로 생겨났는지 추론한다. 동양수학은 기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편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하급기술자의 실용학문으로 수준이 낮아졌다.
구조론은 본래 국어사전에 일정한 기술체계가 없다는 사실을 포착하고 그 사전의 기술체계를 만들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또 세상의 모든 오류가 사실판단에서가 아니라 언어사용에서 빚어진다는 인식을 얻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같은데 그것을 서로 다르게 표현하여 전달하기 때문에 혼선이 빚어진 것이다. 언어를 과학화 하면 세상의 모든 문제가 풀린다. 그렇다면 문법에 답이 있다. 그리고 그 문법은 자연의 진리를 반영한다.
자연의 진리를 포착하는 언어는 1차적으로 대수학이고 2차적으로 기하학이다. 대수와 기하를 넘어 자연의 본래와 직접 연결하는 것은? 그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구조론이다.
자연≫구조≫기하≫대수≫언어 순으로 유도된다. 자연이 실제의 사과 하나를 입력하면≫구조론이 얽어서 저장하고≫기하학이 틀어서 제어하고≫대수학이 풀어서 연산하여≫언어의 개념으로 그 사과가 인식에 반영된다.
구조론을 더 진전시킨 것은 불교의 인연 개념에 대한 깨달음과 린네의 분류이론에서 얻은 아이디어에서였다. 그리고 기하학의 점, 선, 면, 입체, 밀도의 차원개념에서 구조론의 입력, 저장, 제어, 연산, 출력의 5를 얻었다.
헤겔의 변증법에서 자연의 대칭원리를 얻고, 데카르트의 제 1원인에서 연역법을 얻었다. 엔트로피의 법칙과 모순되는 마르크스의 양질전화 개념에 대한 의문부호에서 존재론과 인식론의 혼선된 문제가 풀렸다.
그러나 이들이 구조론의 자궁은 아니다. 구조론의 씨앗은 순수하게 나의 내부에서 나왔고 이들은 햇볕과 물과 거름과 흙의 역할을 했을 뿐이다. 나의 내부에서 완성된 구조론을 이 모든 방향으로 해석하여 검증한 것이다.

 


구조론을 얻다
초등학교 3학년이다. 담임 선생님이 국어사전을 나눠주며 사전찾기 숙제를 낸다. 좆을 찾아보니 자지로 기술되어 있었다. 자지를 찾아보니 좆으로 기술되어 있었다. 젖은 유방이었고 유방은 젖이었다.
사과는 사과나무의 열매였고 고양이는 고양이과의 동물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남편이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아내라면 뭔가 제자리에서 뱅뱅 도는 느낌이다. 이건 이상하다. 확실하게 끊어주는 맛이 있어야 한다.
산은 정상에서 끝나고 동굴은 막장에서 끝난다. 나무는 뿌리에서 끝나고 강은 바다에서 끝난다. 분명하게 끝단이 드러나 보여야 한다. 시작과 끝이 분명해야 한다. 하나의 단위가 똑 떨어지게 완성되는 맛이 있어야 한다.


국어사전의 기술체계는 잘못된 것이다. 뭔가 허전하다. 텅 비어 있다는 느낌이다. 그 빈 곳을 채우고 싶다. 국어사전의 기술체계를 바로잡는 합리적인 기술체계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조금씩 생각을 모았다.
4학년 자연과목 수업이다. 자석에 쇠를 붙이는 실험이다. 실험이 끝나고 결과를 발표하는데 아무도 선생님의 마음에 드는 답변을 하지 못한다. 나의 답변은 ‘자석과 쇠 사이에 일정한 힘의 방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실험으로 알아낸 나의 지식이다. 선생님은 나의 견해를 일축했다. 발표를 잘못한 죄로 급우 전원이 손바닥을 맞았다. 선생님의 결론은 ‘자석이 쇠를 잡아 당긴다’는 것이었다. 황당하다. 3학년 때의 국어사전처럼 이상하다.
‘자석으로 쇠를 잡아당기는 실험’의 결과가 ‘자석이 쇠를 잡아당기는 것’이라면 유방이 젖이고 젖이 유방이라는 국어사전의 뺑뺑이와 다를 바 없다. 동어반복에 순환의 오류다. 뭔가 허전하다. 동의할 수 없다.
딱 느낌이 왔다. 목숨을 걸어도 좋다는 생각. 갈릴레이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 할 때의 기분. 선생님이 틀렸고 내가 옳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건 아닌 거다. 나의 길을 찾았다. 끝이 궁금하다. 이 길의 끝까지 가보자.
만유인력을 배웠을 때도 충격을 받았다. 사과가 땅에 떨어진다. 이유가 뭐지? 무겁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알고 더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거기서 더 의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름이 확 끼쳤다.
자석이 쇠를 당기는 실험의 결과가 자석이 쇠를 당기는 것이라는 선생님의 허무한 가르침과 사과가 무겁기 때문에 떨어진다는 나의 견해가 뭐가 다르지? 똑 같은 동어반복이다. 역시 텅 비어 있다는 느낌. 허전하다.
무겁다? 왜 무거운가? 사과가 떨어지려 하기 때문에 무거운 것이다. 결국 사과가 떨어지는 이유는 사과가 떨어지려 하기 때문이다? 이건 아니다. 이런 식이라면 만유인력을 발견할 수 없다. 동어반복을 벗어나야 한다.

 

느낌이 왔다. 직관이다. 뭔가 있다. 허공에 떠 있는 느낌. 처음 수영을 배울 때 물 속에서 발이 바닥에 닿지 않을 때의 느낌. 그 느낌 놓치지 말아야 한다. 뼈에 새겨 놓아야 한다. 이후 10년 동안 줄곧 생각했다.
‘무겁기 때문이다’와 ‘만유인력 때문이다’의 차이는? ‘무겁다’는 형용사다. 만유인력은 명사다. 명사로 표현되어야 한다. 명사는 어떤 ‘있는 것’을 나타낸다. ‘있다’고 말할 때의 어떤 뻑적지근한 느낌이 있다.
내가 ‘자석과 쇠 사이에 일정한 힘의 방향성이 있다’고 했을 때도 ‘있는 것’이다.  비로소 발이 바닥에 닿았다. 지구의 중력이 느껴진다. 밑에서부터 그득하게 차오르는 충일감 있다. 똑 떨어진다는 느낌이 있다.
동사나 형용사로 표현할 때의 허전함과 다르게 명사로 표현할 때의 속이 가득차오르는 뻐근한 느낌이 있다. 명사는 존재를 나타낸다. 자석이 쇠를 당긴다고 할 때의 당긴다는 동사다. 존재가 아니다. 존재가 정답이다.
명사와 동사와의 차이. 빛과 그림자의 차이. 물체는 뻑적지근하게 존재하여 있고 그림자는 텅 비어서 없다. 발이 공중에 떠 허전한 느낌이 들 때 그림자를 좇는 거다. 발이 지면에 닿는 뻑적지근한 느낌이 들어야 한다.
심과 날이 있다. 심을 잡아야 한다. 그래야 명사로 표현할 수 있다. 날은 심에 딸려 있다. 동사나 형용사로 표현된다면 날을 잡은 거다. 뒤에서 소맷자락이나 바짓가랑이를 잡을 것이 아니라 정면에서 목을 움켜잡아야 한다.
‘만유인력’처럼 이름붙여 명사로 표현해야 한다. 자기력 혹은 자기장이라고 명명해야 한다. 자석 실험의 결론은 자기장의 존재를 발견하는 것으로 정리되어야 한다. 명사가 나와주어야 비로소 답이 나온 거다.


뉴튼의 사과, 선생님의 자석, 국어사전의 젖. 이 셋의 공통점은 동어반복으로 제자리에서 맴을 돌아 끝단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번듯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물체가 아니라 해를 따라가는 그림자를 좇아간 것이다. 
추상적인 관계로 설명해야 한다. 명사로 변환하여 표현하기다. ‘A면 B다’를 충족하는 하나의 방정식으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으로 국어사전의 기술체계를 바로잡을 수 있다. 거기서 유레카다.
모든 존재는 기본적으로 주어+동사다. 주어에 주목하면 동사로 표현되고 동어반복의 오류에 빠진다. 반면 동사에 주목하면 관계가 보인다. 관계는 메커니즘이고 이는 명사로 표현될 수 있다. 메커니즘을 잡아채야 한다.
바람이 불다. ‘불다’를 명사로 바꾸면 ‘불음’이 된다. 불음이 바람이다. 명사냐 동사냐의 차이가 있을 뿐 본질이 같다. 바람에 주목하면 불다에 도달하고 끝난다. 불다에 주목하면 밀도차 곧 기압의 존재가 발견된다. 
입으로 바람을 불어본다. 입속이 바깥보다 공기의 밀도가 높다. 기압의 차이에 의해 공기가 특정 경로로 이동한다는 사실이 규명되고 동역학적 메커니즘이 발견된다. ‘A면 B다’를 충족하는 방정식 확립이다.


답을 찾았다. 나침반 삼아 세상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후 나의 모든 지혜는 이 하나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이 하나의 패턴을 지난 수 십년간 무수히 써 먹었던 것이다.
시선을 어디에다 둘 것인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제에 대하여 진술을 따라가고, 주어에 대하여 술어를 따라가고, 명사에 대하여 동사를 따라가는데 나는 이를 뒤집어 보았을 뿐이다. 그랬더니 구조가 드러나 보였다.


관찰해 보면 세상 모든 법칙이 결국 이 하나의 패턴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무릇 철학이나 과학이란 것은 동사로 포착된 자연의 사실에서 메커니즘을 규명하고 추상성을 부여하여 명사화 하는 과정이다.
모든 움직이는 것에는 메커니즘이 숨어 있다. 그것을 규명하여 명명하는 것이 과학이다.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다. 사랑이나 자유나 깨달음이나 진리나 역사나 문명이나 다 마찬가지다. 그렇게 명사화 한 것이다.
미(美)나 추(醜)나 선(善)이나 악(惡)이나 도(道)나 덕(德)이나 다 마찬가지다. 들여다 보면 그 안에서 작동하는 은밀히 메커니즘이 있고 그 바깥에 함께 가는 짝이 있다. 그리고 그 이전에 자연에서의 몸짓이 있다.
메커니즘은 집과 같다. 그 안에 식구들 딸려있다. 가장과도 같다. 가솔들이 딸려 있다. 그렇게 집을 찾고 가장을 찾고 주소지를 찾은 것이 개념이다. 개념은 존재의 주소지다. 철학한다는 것은 개념을 잡는다는 거다.
개념은 다른 개념과 만나 짝을 짓는다. 미추로 짝을 짓고, 선악으로 짝을 짓고, 도덕으로 짝을 짓는다. 그렇게 구조로 얽혀 점차 가지를 쳐 나간다. 심에서 날로 뻗어나간다. 비로소 세상은 크게 이루어졌다.
동사로 나타나는 자연의 몸짓들에서 그 내부를 들여다보아 내적 정합성에서 메커니즘을 찾아 개념을 이루고 밖으로 짝을 지어 가치와 의미와 사실로 전개하니 존재의 주소지가 정해져서 세상은 크게 이룩되었다.   
하나의 현상이 있으면 반드시 원리와 개념과 가치와 의미와 사실이 있다. 원리가 주소지다. 개념이 가장이고 가치, 의미, 사실은 딸린 식구들이다. 명사에서 동사를 보면 사실이 보이되 원리가 보이지 않는다. 뒤집으면 보인다.
4학년 때 과학경시대회 후보를 선발한다 해서 초등학교 1학년 자연과목을 다시 공부하게 된 일이 있었다. 후보로 선발되지 못했지만 그때 물질, 물체, 물상, 물리 등의 기초개념을 배우게 되었다. 
물질이란 무엇인가? 물체란? 물리란? 물상이란? 물건이란? 이것이 초등학교 1학년 자연과목에서 다루어진다고? 그런데 나는 배운 기억이라곤 없다. 깜짝 놀랐다. 물질이 뭐지? 다시 미로에 빠진 느낌이다.
그렇다. 산을 오르면 정상을 밟아야 하고 강을 내려가면 바다에 닿아야 하고 동굴을 탐사하면 막장을 찍어야 한다. 출발점과 종결점을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그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 터이다.
물질과 물체가 과학의 출발점인데 물질이 뭔지 물체가 뭔지 모르면서 과학을 하겠다면 터무니 없다. 젖과 유방 사이에서 뱅뱅돌고 자석과 쇠 사이에서 헤매는 격이다. 다시 발이 허공에 떠 버렸다. 먼저 물질을 알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끝단을 얻는 문제다. 산의 정상, 동굴의 막장, 강의 바다를 찾아야 만 안심이 된다. 1만년 전 조상들은 지구의 끝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동쪽이나 서쪽으로 끝까지 가보면 마지막에는 뭐가 나오지?
지금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지만 그때는 몰랐다. 끝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을 발견하고서야 비로소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런데 지금 인류의 학문은 어떤가? 시작도 끝도 모호하다. 허공에 떠서 흘러다닌다.
지구의 끝은 북극도 남극도 아니다. 지구의 중심이다. 만유인력이 지구 상의 모든 사물과 물체들을 지구중심을 기점으로 삼아 줄 세운다. 그렇다면 학문의 만유인력은 무엇이지? 학문의 지구 중심은?
수레의 굴대 역할을 하는 축이 있어야 한다. 모든 인식, 모든 학문, 모든 과학, 모든 깨달음, 모든 이론의 궁극적인 출발점은? 낙동강은 황지에서 발원하여 남해에서 끝난다는데 인간에게서 인식의 출발점은?
린네의 생물분류법에서 힌트를 얻는다. 정확히 말하면 린네의 오류를 발견하고 린네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린네의 분류는 일정부분 합리성을 가지면서도 근본적으로 비합리적인 분류다. 
린네는 왜 7단계를 채택했지? 7이어야 한다는 근거는? 없다. 걍 분류한 거다. 산의 정상이 아니고 강의 바다가 아니고 동굴의 막장이 아니다. 린네의 분류법 역시 발이 허공에 떠 있다. 똑 부러지는 뭔가가 없다.


그렇다면? 답은 나왔다. 분류학에 답이 있다. 분류가 잘못되어 모든 문제가 일어났으므로 분류를 바로잡으면 모두 해결된다. 도서관을 찾았다. 문제는 제대로 된 분류학의 이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분류학이야말로 인류 최초의 학문이라 할 수 있다. 모든 학문은 분류로부터 시작된다. 학문이 무당의 주술과 다르고 종교의 경전과 다른 점은 체계가 있다는 것이다. 체계는 줄기와 가지의 구분이다. 심과 날의 구분이다.
학문은 인간의 경험적 지식에 체계를 부유한 것이다. 무엇인가? 종교의 경전이나 무당의 주술이 개인작업인데 비해 학문은 인류의 공동작업이다. 공동작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줄기와 가지가 있어야 한다.
스승이 토대를 놓고 중흥조가 기둥을 세우면 후학들이 논과 장을 더하여 지붕을 올리니 학문의 세계가 성장하는 것이다. 그렇다. 학문은 큰 나무와도 같다. 줄기와 가지가 구분되어야 후학들이 한 마디씩 첨가할 수 있다. 
학문의 체계를 세우는 방법이 분류다. 분류 없이 학문은 없다. 그러나 학문이 탄생하고 수 천년이 지난 아직도 인류의 분류는 공자의 육예(六藝)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시적인 분류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류가 축적한 지식은 거의 모두 분류에 의해 얻어졌다. 분류가 없으면 지식의 축적이 안 된다. 도서관에 아무리 많은 지식이 축적되어 있어도 장서더미 속에서 내가 원하는 책을 찾아낼 수 없다면 헛탕이다.


그러나 정작 분류구분의 근거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다. 절대적인 분류기준은 없다. 오늘날 도서관학의 도서분류는 원시수준이다. 서점의 책 진열도 대충이다. 야후의 분류도 합리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구글에 밀렸다.
생물은 진화의 경로를 따라가고 물질은 구성의 경로를 따라간다. 린네의 분류는 진화의 계통을 따른다. 진화는 유전자에 의해 일어나므로 유전자의 속성을 근거로 합리적인 분류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린네의 분류는 유전자를 근거삼지 않았으므로 본질에서 실패다. 그러나 계통을 따라가는 방법을 제시했다는 것은 평가할 만 하다. 나무에 가지가 많아도 엉키지 않는다. 계통을 따르면 적어도 중복은 피할 수 있다.


린네가 생물을 분류했으므로 나는 무생물을 분류하기로 했다. 린네가 생물의 진화경로에서 7단계의 구분지를 얻었듯이 나는 물질의 구성원리에서 몇 단계의 구분지를 얻어 분류에 착수하기로 하였다.
생물이 태초의 원핵생물에서 진핵생물로, 무척추동물에서 척추동물로 진화한 경로를 모방하여 물질이 한 점에서 선으로, 각으로, 입체로 성장하여 존재 그 자체를 구축하는 경로를 찾아내자는 것이다.
‘바람이 불다’에서 동사 ‘불다’를 명사 ‘불음’으로 바꾸면서 공기의 밀도차에 의한 기압의 존재라는 동역학적 메커니즘이 발견하듯이 동사를 명사로 바꾸어가는 메커니즘에 답이 있다는 아이디어를 적용해 본다.    
물질영역의 근본개념인 물리, 물질, 물상, 물건, 물체 등의 개념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린네식으로 분류하여 내 책상 위의 연필에 도달하는데 많은 단계가 있다. 물리가 물성을 낳고 물성이 물질을 낳는 식이다.


물리≫물성≫물질≫물상≫물체●사물≫물건≫기물≫물품≫상품●문구류≫필기구류≫필통≫연필들≫특정연필의 전개를 관찰하던 중 일정한 패턴이 주기를 가지고 반복되고 있음을 알았다. 중간에 끊어주는 ●가 있다.


그것이 산의 정상이 되고, 동굴의 막장이 되고, 강의 바다가 되고 지구의 중심이 된다. 만유인력이 끊어주고 자석과 쇠 사이에 성립하는 힘의 방향성이 끊어준다. 항상 중간에서 끊어주는 무언가가 있다.
린네의 종속과목강문계 7단계 분류에 아종을 추가하면 8단계가 된다. 동물도 아니고 식물도 아닌 것이 있다는데 이를 포함하면 9단계가 된다. 이런 식으로 계속 가짓수가 늘면 곤란하다.
이제마가 4상의설을 만들었는데 어떤 재야학자가 이를 8상의설로 발전시켰다가 다시 16상의설로 확대하였다 한다. 뒤이어 32상, 64상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
태초 무극에서 음양이 나왔다. 4괘와 8괘에 이어 64괘가 나왔다. 128괘로 증가하면 곤란하다. 우리는 3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4차원에 이어 막이론의 11차원, 초끈이론의 26차원 나오면 곤란하다. 
석가의 12연기법도 일정한 패턴의 반복이 있다. 대략 3개의 그룹으로 나눠진다는 점에서 나의 관찰과 닮은 데가 있다. 12연기는 노사(老死)에서 끝난다. 왜 노사에서 끝나지? 죽었으니 끝이라는 건가? 이상하다.
피천득의 수필 인연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인연이 뭐지? 인연 개념은 서구 논리학의 인과율과 같다. 인(因)은 원인이고 연(緣)은 그 원인이 작동하게 하는 조건이다. 기(起)는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결과를 촉발한다.
거기에 결과를 더하면 인≫연≫기≫과의 4단계로 인과법칙이 성립한다. 확실히 석가의 인연법 혹은 연기법은 서구 논리학의 인과율을 한 단계 더 심화 발전시킬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헤겔의 변증법에서도 아이디어를 빌린다. 정반합의 구조는 인≫연≫기≫과의 구조와 비슷하다. 그런데 선이 아니라 각이다. 인과율 혹은 인연법이 종적인 시간순서인데 비해 정과 반은 횡적인 공간의 대칭이다.
인과율, 인연법이 시간 상에서 성립하는데 비해 헤겔의 변증법은 공간 상에서 성립한다. 보다 입체적이다. 그렇다. 시간의 인과율에서 공간의 인과율로 바뀌어야 한다. 비로소 산의 정상이 눈에 들어온다.
산을 오르는 과정은 수직 ↑이다. 정상에 서면 눈앞에 수평선 ← →이 펼쳐진다. 정과 반은 수평의 ← →지만 합은 수직의 ↑이다. 수직은 수평을 만나 끝단을 이룬다. 평형계 ┳로 완성된다.
강은 종으로 흐르지만 바다에 이르면 횡으로 폭넓게 펼쳐진다. 동굴은 종으로 진행하지만 막장은 횡으로 가로막는다. 모든 종은 횡으로 막히고 모든 수직은 수평에 이르러 끝난다. 그렇게 완성된다.
건물은 대지의 ← →에 중력의 ↑를 복제하여 기둥의 ↑로 일어서고 지붕의 ← →로 마감된다. 비로소 완성된다. 지구의 중력과 대지가 ┻꼴을 이루었으므로 건물은 이를 복제하여 대칭을 이루어 ┳로 완성된 것이다.
산이 ┻꼴을 이루었으므로 이를 복제한 바다는 ┳꼴로 그 산과 대칭을 이룬 것이다. 비로소 끝단이 발견되었다. 왜 그 지점에서 끝나는가? 복제했기 때문이다. 원본이 ┻이므로 이를 복제하여 대칭된 짝은 ┳로 끝나는 것이다. 

 

하늘과 땅, 음과 양, 여자와 남자, 산과 바다, 밤과 낮은 짝을 지어 쌍을 이룬다. 하늘이 ┻면 바다는 ┳고 음이 凹면 양은 凸다. 이 둘이 만나 세팅된다. 완성된다. 1.2.3.4... 로 무한전개 하지 않고 확실히 끝난다.
세상 모든 존재는 복제된 존재이며 복제된 쪽은 원본을 바라보고 대칭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구조론은 5로 끝이 나는 것이다. ┣┣┣로 반복되지 않는다. ┣┫로 마주보기 때문에 1 단위를 이루어 끝이 나버리는 것이다.
차원는 0차원에서 4차원까지 있다. 5차원 이상은 없다. 차원 개념은 자연의 모습을 복제하고 있는데 자연이 ┻로 끝나므로 차원은 ┳로 끝난다. 산은 정상에서 끝난다. 산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지구 중심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0차원 점(點)이 산의 정상이라면 4차원 밀도는 지구의 중심인 거다. 존재는 심과 날이다. 날이 뾰족한 산이면 심은 지구 중심이다. 자동차라면 엔진에서 시작되어 바퀴에서 끝난다. 엔진이 심이면 바퀴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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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는 순서와 방향의 얽힘이다. 시간은 순서를 나타내고 공간은 방향을 나타낸다. 기존의 인과율 개념은 시간의 순서에 주목할 뿐 공간의 방향성을 반영하지 못한다. 구조론은 인과율을 공간개념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시간의 순서는 쭉 이어져서 끝단을 알 수 없다. 오늘 다음에 내일이 있고 모레가 있고 글피가 있다. 끝없이 이어진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므로 반드시 그 지점이 시작이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없다.
하루는 새벽 0시에서 시작되어 밤 12시에서 끝나지만 그 기준은 임의로 정한 것이다. 해뜨는 시각을 하루의 시작으로 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공간의 방향으로 보면 태양과 내가 가장 가까운 시점이 있다.
정면으로 마주보고 →←의 정대칭을 이루는 시점이 있다. 낮 12시 정오다. 자정을 0시로 결정한 것은 태양과 내가 가장 멀리있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영원히 순환될 뿐이지만 공간은 반드시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구조론의 5는 인과율의 시간성에 공간의 방향성을 반영한 것이다.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의 5단계 중에 세번째 제어가 대칭의 정렬을 나타낸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대칭과 그 대칭이 →←로 정렬된 평형이 있다.
모든 존재는 공간적으로 존재하면서 시간적으로도 존재한다. 시간은 일한다. 그러므로 일의 1 사이클을 가진다. 시작과 끝을 가진다. 왜냐하면 일은 홀로 할 수 없고 누군가와 만나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만남에서 대칭 →←를 이룬다. 그 지점에서 구조는 5로 완결된다. 왜 5인가? 5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세팅되어 있다가 해체되어 비로소 끝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산의 정상, 동굴의 막장, 강의 바다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구조는 왜 5로 끝나는가? 복제되기 때문이다. 한 알의 씨앗은 싹으로 자라나 꽃과 열매로 완성된다. 끝난다. 왜 끝나는가? 씨앗 속에 배아가 있다. 꽃의 한 살이는 그 씨앗 속에 세팅된 배아를 복제한 것이기 때문이다.
배아에서 세팅이 완성되어 있으므로 그 배아를 복제한 꽃의 한살이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다. 왜 강은 바다에서 끝나는가? 강의 깊음은 산의 높음을 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과 강이 마주보고 ┣ ┫를 이루기 때문이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다. 둘은 마주보고 대칭을 이룬다. 환자가 감기에 걸렸다. 원인은 바이러스의 침투다. 결과는 감기의 발병이다. 이때 감기의 발병 ┫는 바이러스의 침투 ┣를 복제한다.
원인이 작용이면 결과는 반작용이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 따라 작용과 반작용은 대칭된다. 반작용은 작용을 복제한다. 그러므로 결과는 원인을 복제한다. 산이 원인이면 강은 결과다. 강의 깊음은 산의 높음을 복제한다.
작용 ┣는 열렸고 반작용 ┫는 닫혔다. 닫혀서 끝난다. 구조가 5인 이유는 작용과 반작용, 원인과 결과, 열림과 닫힘이 ┣┫로 마주 보고 ●로 대칭되어 ┣●┫로 5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구조체 (┳)로 나타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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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일곱이었다. 김성동의 소설 만다라를 읽는다. ‘병 안의 새’ 화두가 소개된다. 유리병 속에 작은 새 한마리가 갇혀 있다. 병의 입구는 좁다. 새는 나올 수 없다. 병에 손을 대지 않고 새를 꺼낼 수 있겠는가?

 

물론 불가능하다. 그러나 물과 햇볕이 단단한 씨앗 속에서 뿌리와 싹과 잎과 꽃을 꺼내기는 쉽다. 부르면 나온다. 물이 부르면 뿌리가 나오고, 햇볕이 부르면 잎이 나오고, 바람이 부르면 꽃이 나온다.
태초에 우주의 빅뱅도 이와 다르지 않았으리라.
안과 밖이 있다. 밖에서 부르면 안에서 나온다. 밖에서 부르는 인식론의 세계와 안에서 나오는 존재론의 세계가 있다. 서로 마주보고 대칭되어 ┣●┫를 이루니 세계는 완전하다. 밖에서 불러주면 안에서 응답하니 완전하다.
중요한 것은 작은 씨앗 속에 배아의 형태로 미래의 작은 나무가 이미 완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무는 자라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씨앗 속에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을 다치지 않고 무사히 꺼낼 때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뜰 앞의 한 떨기 꽃은 복제된 것이고 씨앗 속의 배아가 원본이다. 원본은 완전하다. 작은 씨앗 속에 우주가 갖추어져 있다. 뿌리도 싹도 잎도 꽃도 소스의 형태로 예비되어 작은 만다라를 이루었다.
우리는 배우고 익혀서 점차 완성되어 간다고 믿지만 착각이다. 나의 내부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본성을 다치지 않고 잘 꺼내기만 해도 성공이다. 깨달음이다. 밖에서 구하지 않고 안에서 꺼내기다.
우리는 건물이 1층부터 차곡차곡 쌓여서 완성된다고 믿지만 틀렸다. 구조로 보면 냇가의 모래로 만든 작은 까치집에도 있을 것은 다 있다.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이 갖추어져 있다. 전부 세팅되어 있다.
한 문명에도 그것이 있고 한 나라에도 그것이 있고 한 도시에도 있고 한 채의 집에도 있고 작은 씨앗 속에도 있다. 도처에 있다. 컵에도 있고 주전자에도 있다. 어디라도 있다. 끊임없이 복제되고 있다. 
세상 모든 것이 제각기 만다라를 갖추고 그 안에서 훨훨 날고 있다. 각자의 우주를 이루고 완성되어 있다. 구태여 바깥세계로 출타하고픈 욕망을 가질 필요조차도 없이. 나는 만족한다. 스물 네살 무렵 여기까지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