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 이야기/이런사람↑

내가 만난 노무현

by 랭님 2011. 3. 30.

아래의 글은 내가 2002년 3월20일 노무현 공식 홈페이지(www.knowhow.or.kr)에 올린 글이다. 6시간동안 조회수 800 여 회를 기록하면서 노무현 팬클럽 홈페이지 편집부에서 퍼다가 노사모(www.nosamo.org) 초기화면 노사모소식란에 실은 글이다. (22일 오후 11시 현재 노하우 1827회 조회, 다음 뉴스 게시판 630회 조회, 기타 오마이뉴스 등, 총 3,220회 조회 중)


제13대 총선에 처음 출마했던 정치초년생 노무현의 선거참모로서 가까이서 보았던 노무현의 모습을 제가 보고 느낀 대로 쓴 그 글에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에 대해 새로운 면을 알게해 주어 고맙다는 메일을 제게 보내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21년전 나름대로 열혈남아였던 제가 인간 노무현과 처음 만나 그의 소탈한 인간됨과 깨끗한 정치인으로서의 그의 모습에 매료되어 갔던 이야기입니다. 21년이 지난 지금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낸 그분은 며칠전 고인이 되었습니다. 제16대 대통령취임식에 초청받아 국회의사당 앞에서 그 분의 대통령취임식 장면을 지켜보았던 일이 엊그제 같습니다. 순탄치 않을 그분의 집권기간을 예고하기라도 하듯 취임식 그 날 하늘이 잔뜩 찌푸렸었지요.

정치적인 견해의 차이때문에 정치인 노무현에 대한 호불호는 누구나 있을 수 있지만 제가 직접 만나고 이야기해 본 인간 노무현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용기있고 의리있는 멋진 사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치인으로서 정말 순수하고 깨끗한 길을 가고자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그 분은 갔으니 산 자에게 가혹하고 죽은 자에게 너그러운 우리네 인심이 노무현에 대해 조금은 너그러운 눈길로 그분을 바라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정치적인 이해관계와 호오(好惡)를 떠나면 훨씬 편한 마음으로 사람과 세상사를 볼 수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눈으로 보면 이해와 사람에 대한 호오(好惡)의 비늘에 가리워 미처 보지 못했거나 잘못 보았던 것들이 비로소 바르게 보일 수도 있지요.


죽은 자식 불알 만진다는 옛말도 있는데 이제와서 그 분을 아무리 그리워하고 추모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마는 그를 오해하고 그를 미워했던 사람이라면 아무라도 붙잡고 인간 노무현의 소탈하고 정직하고 진솔한 모습을 이제라도 다시 한번 알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아무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고인의 안식을 빕니다.


<내가 만난 노무현>

내가 노무현을 처음 만난 것은 1988년 13대 총선 때다. 그 때 나는 부산민주청년회(부민청)이라는 재야청년단체에 몸담고 있었다. 그 때 노무현은 인권변호사로 명망을 얻고 있었고 당시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의장을 맡고 있었다. 그런 그가 13대 총선에서 당시 김영삼이 총재로 있던 통일민주당 공천을 받아 부산 동구에 출마한 것이다. 당시 민정당 후보로는 전두환 정권의 막강 실세 삼허(허삼수, 허화평, 허문도)가운데 한 명인 허삼수가 출마했다. 당시 내가 몸담고 있던 부산민주청년회에서는 부민협 상임의장인 인권변호사 노무현 변호사가 출마한 만큼 부민청 차원에서 적극 조직적인 지원을 하기로 했다. 조직적인 지원이라고 해봤자 돈이나 무슨 힘이 있는 기관이 아니므로 오직 몸으로 때우는 게 유일하고 전부인 그런 지원이었다. 그래서 나는 노무현 선거캠프의 홍보부에서 방송담당을 맡음으로써 노무현과 처음 만나게 되었다. 더구나 노무현이 출마한 부산 동구는 내가 당시 살고 있던 곳이기도 했다. 나는 그 때 동구 초량동에 살았다. 선거캠프가 차려지고 그로부터 꼬박 한 달을 캠프와 여관에서일하고 먹고 잤다. 내가 맡은 일이란 선거방송차량의 아나운서였다. 나와 여자 1명이 방송원이었는데 내가 그 일을 맡게 된 데는 부르짖는 내 목소리가 꽤 호소력 있게 들린다는 내부의 판단 때문이었다. (나도 한 때는 열혈남아였다)

아침 일찍 캠프회의를 통해 유세 일정이 잡히면 방송차량요원이었던 나와 또 한 명의 여성동지는 제일 먼저 방송원고를 작성했다. 그 날 방문하게 되는 지역의 특성을 고려해서 원고를 작성하는 것이 중요했다. 예를 들어 수정동 산복도로의 시장지역을 방문할 때와 범일동 안창마을(부산의 대표적인 슬럼가인데 이곳은 문선명의 탄생지로 통일교의 성지이다)을 방문할 때의 방송원고가 달라야 했다.
방송원고가 대충 작성되면 방송차량이 제일 먼저 출발한다. 통상 1시간 정도 후보보다 앞서 유세지에 가서 바람을 잡는다. 후보가 도착하기 전에 사람들의 관심과 지지를 먼저 어느 정도 이끌어내야만 한다. 그게 방송차량에게 주어진 임무다. 나와 여성동지는 번갈아 가며 약간 목소리를 업하여 방송하기 시작한다. <친애하는 부산민주애국시민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통일민주당 기호 2번 부산의 자존심 인권변호사 노무현 선거방송차량입니다. 노동자와 서민의 벗, 인권변호사 노무현 후보가 이 곳에 곧 오십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이렇게 한 30, 40분을 유세홍보방송을 하고 있노라면 노무현 후보가 도착을 한다. 그러면 방송차량 지붕 위에 노무현이 올라가 즉석유세를 한다. 이런 식으로 아침 출근시간부터 저녁 퇴근시간까지 선거구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녔다. 아무래도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시장이나 출퇴근 시간엔 교통의 요지를 찾게 되지만 주택가를 일일이 돌 때도 많았다. 그럴 때는 방송차량이 주택가 골목엘 들어갈 수 없으므로 여성동지는 차량을 지키고 나는 핸드마이크를 들고 노무현 후보와 함께 골목을 누볐다. 10미터 정도 앞서가며 예의, <부산 시민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통일민주당 기호 2번 부산의 자존심 노무현 후보가 오셨습니다. 여러분 나오셔서 노무현 후보를 격려해 주십시오. 노무현 후보에게 뜨거운 지지를 보내주십시오. 여러분, 반갑습니다> 이렇게 나는 1988년 부산 동구의 산동네들을 거의 안 가본 곳 없을 정도로 노무현과 함께 뛰어 다녔다.

나는 그 때 민주화운동의 대선배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 노무현의 소탈하고 정직하고 꾸밈없는 모습에 꽤 반했었고 인간적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지금 이 글을 쓰려고 하니 그 때의 많은 크고 작은 일들이 기억 속에 떠오르나 인간 노무현의 면목을 잘 보여주는 몇 가지 에피소드들을 소개 하고자 한다.

1. 적진에 뛰어든 노무현

앞서 말했다시피 상대 민정당 후보는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허삼수였다. 그는 민정당 창당 주역의 한 사람이자 막강 실세 삼허의 핵심인물로 중앙당의 막강한 자금지원과 조직에 힘입어 꽤 당선을 자신했던 후보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당시 허삼수 측의 선거전략은 두 가지였다.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대대적인 금포살포와 유권자매수가 그 첫째요, 두 번째는 색깔론이다. 즉 노무현은 빨갱이라는 거다.
그의 자금 동원력은 상당해서 그 당시 허삼수가 동구에만 100억 가까이 뿌린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실제로 당시 허삼수 측에서는 지역구민의 대다수가 가난한 하층민인 것을 노려 당선이 되면 곧바로 쌀 한 가마니와 바꾸어준다는 노랑딱지를 산동네를 중심으로 살포하기도 했다. 날 찍어라 그래서 당선되면 그 표를 가지고 와라 쌀한가마니 주마 경상도말로 과연 앗싸라 한 유세방법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가 흑색선전이었다. 그 때 노무현은 분명 김영삼이 이끌고 있던 통일민주당 후보였음에도 허삼수 측은 노무현은 당선되면 전라도당인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에 입당할거라는 근거 없는 흑색선전을 폈다. 반전라도, 반김대중의 지역감정을 건드리는 동시에 이념문제에서 꽤 보수적인 부산의 정서를 이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참으로 택도 없는 날조된 거짓말이었지만 때론 이런 거짓말이 진실을 가리고 현실정치에서 종종 승리하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보아왔다. 노무현 찍으면 김대중한테 간다. 노무현은 김대중과 함께 빨갱이다. 자고 나면 전봇대에 이런 흑색선전물이 나붙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걸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가 캠프의 날마다의 회의주제요 고민거리였다. 선거판은 정말 추악해져 가고 있었다. 거짓과 날조, 비방과 중상 모략이 판치는 그야말로 이전투구 개판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 강도는 투표일이 다가올수록 더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이었다. 그 날은 마침 퇴근시간 무렵 유세지가 수정동의 허삼수 후보의 선거사무소가 있던 부근이었다. 방송차량에선 87년 대선 에서 김영삼의 로고송으로 썼던 <군정종식 김영삼>이 이름만 바꿔 <군정종식 노무현>이 흘러나오고 그 위에 꽤 호소력 있는 내 목소리로 <부산 민주애국시민 여러분, 통일민주당 기호 2번 노무현입니다>가 울려 퍼지자 사람들이 박수를 보내고 순식간에 즉석유세대 근처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노무현은 그 날 그 자리에서 허삼수 선거운동본부가 앞에 있는 것을 의식한 듯 근거 없는 흑색선전을 하지 말 것과 금품으로 유권자를 매수하지 말 것, 택도 없는 지역개발 공약으로 유권자를 우롱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 사람들의 뜨거운 박수와 노무현 연호아래 방송차량 지붕에서 내려온 노무현은 순간 갑자기 허삼수 선거운동 사무실 쪽을 향해 냅다 뛰는 게 아닌가? 경호를 맡았던 친구와 방송차량에 있던 나와 몇 사람의 스탭들은 너무도 갑작스런 일에 놀라 노무현을 따라 뛰었다. 노무현은 거침없이 허삼수 선거사무소로 뛰어들더니만 으레 그 특유의 돌쇠 같은 웃음을 지으며 허삼수측 스탭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수고한다고 격려를 했다. 그리고선 허삼수 후보를 만나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지금도 그 때 허삼수측 선거스탭들의 벙∼ 찐 얼굴이 기억이 난다.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상대후보에 대한 인신테러 가능성까지 나돌던 살벌한 그 때에 경호원도 안 데리고 느닷없이 적진으로 뛰어들어 적장을 만나겠다고 하니!
뒤따라간 우리도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얼른 정리가 되지 않았다. 허삼수 측에서는 긴급으로 허삼수를 수배했고 어딘가 유세를 나갔던 허삼수가 급하게 돌아왔다. 노무현은 허삼수와 반갑게 악수를 한 다음 서로 정치를 하자니 표를 다툴 수밖에는 없는 형편이긴 하지만 서로가 공명정대하게 겨루고 국민의 심판을 받자고 허삼수에게 제안했다. 허삼수가 거기서 뭐라고 할 것인가? 못 한다고 하겠는가? 허삼수는 물론 그래야 된다며 그간의 흑색선전이 본의가 아니었다며 정중히(?) 유감을 표했다. 그리고 노무현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고 한 10여분 후에 다정히 나왔다. 둘이서 뭔 얘길 그 때 했는지는 모르나 나중에 노무현에게 물어본 즉 별 얘기는 없었다고 한다. 허삼수가 꽤 놀랬던지 미안하다는 말을 다시 한 번 했다고 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로도 별로 달라진 건 없었다.

그 날 저녁 노무현은 경호원에게 혼이 났다. 유도대학을 나온 키 189의 그 친구는 볼멘 소리로 노무현에게 재발방지(!)를 요구했다. 나더러 경호를 하라는 겁니까 말라는 겁니까?
그 다음 날 저녁에 우리측 캠프에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자신을 허삼수 캠프의 총무를 맡고 있다고 소개한 그는 자신은 허삼수의 친척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말인즉 어제 노무현 후보를 보고 너무 감동을 받았다. 나 뿐 아니라 여기 스탭들 모두가 노무현이 돌아가고 난 다음 노무현의 그 용기와 당당함에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는 친척이라 어쩔 수 없지만 노무현 같은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야 한다며 여러분 정말 수고하시고 꼭 승리하시길 빈다는 얘길 했다. 그리고 자기가 전화한 사실은 꼭 비밀에 붙여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 전화를 받은 우리측 스탭들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어떤 여성동지는 감격해서 울음을 터뜨리고 노무현에게 재발방지를 요구하며 잔뜩 불어있던 경호원친구도 감동했는지 눈시울이 붉어졌던 게 기억난다.
허삼수 친척의 간절한 소원대로 노무현은 막강 허삼수를 누르고 결국 국회의원에 당선이 되었다.

진실을 요구함에 있어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할 수 있는 용기, 나와 많은 사람들은 그 때 노무현에게서 그 용기를 보았다. 그 용기가 바로 정치인 모두가 거대족벌언론의 눈치나 살피고 있을 때 그 거대언론에 단기필마로 맞설 수 있는 노무현만의 용기인 것이다. 요새 조선일보가 새로운 고민에 빠졌단다. 노무현이 일찍이 조선일보와는 인터뷰조차도 응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바라 노무현이 대통령후보가 되면 여당의 대통령후보와 인터뷰조차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뭘로 장사해 먹을꼬?

노무현은 용기 있는 사람이다. 나는 1988년에 이미 그걸 보았다. 그는 국회의원이 되어서도 그 용기를 보여주었다. 3당합당을 거부했고 국회에 나와 무성의하고 뻔뻔한 증언을 읽어 내려가던 전두환에게 명패를 집어던지며 항의했다. 낙선이 불을 보듯 뻔한 정치현실에서 지역감정의 견고한 벽을 깨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다. 이 모든 게 용기 있는 자가 아니면 걸을 수 없는 길 아닌가?

2. 눈앞의 돈 뭉치를 돌려보낸 가난한 노동자의 벗

선거 때 선거자금은 실탄이라고 하지 않은가? 전쟁에서 실탄이 떨어지면 더 말해 뭐하겠는가? 요새 야당이야 과거 37년 간 대대로 도적질 해먹던 놈들이 야당의 탈(!)을 쓰고 있으니 말이 야당이지 여당 보다 형편이 나으면 나았지 못할 게 없지만 1988년 그 때만 하더라도 진짜 야당엔 돈이 씨가 마를 때 아니었던가? 그런 상황에서 야당후보로 나선 노무현에게도 돈은 늘 궁했다. 그런데 노무현에게는 몇 몇 돈 많은 친구들이 있었다. 아는 사람은 알다시피 노무현은 한 때 지방법원판사를 지냈다. 이른바 하이클라스에 속하는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노무현이 인권변호사로 활약한 것이 대략 1981년부터의 일이니까 그 전의 삶은 그저 여느 법조인의 삶과 다를 게 없었다. 자신의 출세와 부가 인생의 전부요 목적인 그런 삶이었다. 노무현에겐 그 때 사귀었던 친구들 가운데 사업하는 몇 몇 친구들이 있다. 내가 그 당시 노무현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놀란 것은 그의 친구가 상당히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요트클럽회장이 있는 가하면 가난한 노동자도 있었다. 이것은 순전히 노무현의 인생역정을 통시적으로 서베이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그런데 선거 중반 한 참 실탄이 딸릴 때 그의 옛 친구가 하루는 선거사무실엘 찾아왔다. 사업을 하는 친구인데 그는 노무현에게 정확한 액수는 모르나 최소 몇 천만 원에 달하는 후원금을 보태 쓰라며 내 놓았다. 우리는 야! 이게 웬 떡이냐, 최소한 오늘 저녁엔 모처럼 뱃속에 기름칠이라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런데 노무현은 그 돈을 앞에 두고 무척 곤혹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이 양반이 친구의 우정에 너무 감격했나? 왜 아무 말도 못해? 맘 변하기 전에 얼른 받아 넣지 뭐하나? 사업하는 저 친구로서도 쉽지 않은 결정일텐데, 저러다 세무조사라도 나오면 어쩌려고, 내 머리 속엔 그런 생각들이 명멸했다. 그런데 노무현은 한참을 망설이다 특유의 돌쇠같은 웃음을 지으며 그 돈을 정중히 사양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 순간 고깃국에 이밥을 말아먹는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 콩나물국밥에 시래기김치를 얹어 먹어야 하는 처절한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노무현이 말한 사양의 이유는 이랬다. 나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으며 가난한 노동자, 서민의 벗으로 살아왔다. 나는 그들의 진정한 벗이 되고자 애써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가 국회의원이 되고자 하는 이유는 국회의원이 되면 더욱 힘있는 자리에서 그들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너는 사업가 아닌가? 너는 내 친구임에는 분명하지만 너는 엄연히 사용자 아닌가? 내가 사용자인 네 돈을 받아쓰며 어떻게 노동자를 위해 일한다고 말 할 수 있겠는가? 만약 네 돈을 내가 받은 후에 네 회사에서 쟁의가 일어났을 때 나는 그 때 누구 편을 들어야 하는가?
나는 그 때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돈을 들고 왔던 그 친구조차 눈시울이 빨개지며 입을 꼭 다문 채 노무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때 선거가 끝날 때까지 콩나물국밥 외엔 더는 먹지 못한다 할지라도 노무현은 꼭 국회의원으로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는 일종의 비장한 사명감 같은 걸 느꼈다.

나는 그 때 노무현은 정말 말로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노동자, 서민의 친구로 살고자 하는 굳은 의지를 가진 사람임을 느꼈다. 당시의 선거자금은 중앙당에서 내려온 쥐꼬리만한 선거자금과 시민들이 보내오는 후원금들이 전부였다. 그 당시 노무현의 그런 모습을 보며 내부에서조차 지나친 결벽증이 아닌가 하는 비판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결벽증은 옳았다. 얼마나 많은 정치인들이 현실정치가 요구하는 정치자금의 유혹 앞에 너무도 무력하게 쓰러지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결벽하지 않고서는 이 문제는 깨끗할 수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한 번은 선거사무실에 밤늦게 전화가 걸려왔다. 술이 한 잔 거나하게 들어간 중년의 남자인데 자기는 지금 서울에 살고 있다고 했다. 신문 파는 일을 하며 겨우 목구멍에 풀칠하며 사는데 노무현이 국회의원에 출마했다는 얘길 듣고 전화 드린다는 말을 해놓고선 그는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흑흑, 제가 사람이라면 가서 전단지라도 돌리며 도와드려야 하는데…흑흑 제가 병신이라 …흑흑, 제가 울산에서 일할 때 프래스공장에서 팔이 한쪽 짤렸거든요, 회사에선 내가 잘못했다고 …개새끼덜 …근데 노무현 변호사가 돈을 타내 줬어요. …흑흑, 변호사 쓰려면 돈이 엄청 든다던데 돈도 안 받고 …제가요, 아들놈이 하나 있는데 그놈더러 법대 가서 변호사 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노무현 같은 사람되라고… 이 애비처럼 못 배운 놈들 팔짤리고 다리 짤리고 허리 병신 되도 병신같이 돈 못 받아내는 이 애비같은 사람들 도와주는 변호사 되라고 …흑흑
저기요, 제가 병신이라 가서 돕고 싶어도 못 가요. 가면 노무현은 병신이 돕는다고 사람들이 놀릴 거고, 그리고 하루라도 돈을 벌어야 … 저기 그래서 말인데요, 거기 통장 같은 거 없어요? 내가요 몇 푼 안 돼도 돈을 좀 보내고 싶어요. 아니 쪼끔인데 그래두 내가 그거라도 안보내면 사람새끼도 아니잖아… 여러분 내 대신 수고 많이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노무현 그 분 꼭 국회의원 되야 합니다. 거 누구요? 허 뭐야 거? 아! 허삼수? 그런 씨팔XX 말고 노무현, 노무현 변호사, 그런 분이 되야 해요, 여러분 꼭 수고해주시오, …내가 가서 도와 드려야 되는데 …>

이 전화는 내가 직접 받았었다. 나는 그 전화를 받으며 어찌나 목이 메던지, 네, 네 그러며 아, 그래야죠, 물론입니다. 그 말밖에 하지 못했다. 노무현의 선거자금엔 이런 눈물겨운 후원금들이 많았다.
가난한 노동자, 서민의 벗으로 살기로 한 자기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눈앞의 수천만 원 돈 뭉치를 돌려보내던 사람, 노무현, 나는 그 때 그에게서 정직한 인간을 보았다. 가난한 노동자, 서민에 대해 의리를 지키려는 그의 진실을 보았다.

3. 밥상 앞에서 콧구멍을 후비던 사람

노무현은 꽤 소탈하다. 그를 가까이서 겪어본 사람은 그의 인간적인 소탈함에 매료된다. 정치인들이 선거 때만 되면 남의 어린애 안고 사진 찍고 출퇴근길 지하철에 괜히 서서 가고, 너무도 인간적이고 소탈한 서민의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별 짓거리들을 다하지만 노무현은 그런 밥맛 떨어지는 짓거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라는 걸 그를 겪어본 사람은 다 안다.
선거가 끝나고 당선이 확정된 다음날로 기억하는데 우리 방송반은 선거가 끝나도 바빴다. 왜? 당선인사 방송을 해야 하니까! 내 인생에서 그때만큼 기쁘고 흥분이 되었던 때도 그리 많지 않다. <위대한 부산민주시민 여러분, 감사합니다. 여기는 국회의원당선자 통일민주당 노무현 방송차량입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 대목에서 늘 감격해 목이 메었다. 이 부분에서 내가 말을 잇지 못해 여성동지가 마이크를 이어 받았던 적이 여러 번이다) 부산민주시민여러분의 뜨거운 지지에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이제 노무현 당선자는 부산이 낳은 위대한 지도자 김영삼 총재를 모시고 다시 한 번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신명을 바쳐 싸우겠습니다. (87년 대선에서 노태우가 당선되고 난 후의 부산의 분위기는 패배의식 그 자체였다. 김영삼이 졌다. 이 사실은 부산시민에게 말 할 수 없는 정치적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88년 총선 당시 부산의 정서는 이제 다시 한 번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에 표를 주어 야당의 힘을 보여주고 김영삼에게 힘을 주자는 그런 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그래서 부산에선 예의 통일민주당 바람이 불었던 것이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노무현의 이 승리는 부산시민의 승리요, 민주주의의 승리입니다.
운운…>

하루종일 당선인사방송을 하고 저녁식사를 위해 어느 식당에 다들 모였는데 한참 밥을 먹고 있는 도중에 노무현이 들어왔다. 모두가 환호와 박수로 일순간 식당이 떠나갈 듯 했다. 밥상 앞에 털썩 주저앉으며 노무현이 하는 말, <아이고, 오늘은 나도 이제 여기서 밥이나 실컷 묵고 시마이 해야겠다>
그러더니 갑자기 밥상 앞에서 콧구멍을 후비는 게 아닌가? 다들 밥 먹고 있는데, 거 참 코를 풀던가 하지…저 손으로 또 그냥 밥 먹으려나?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한 참을 콧구멍을 파던 그는 그 손으로 그냥 밥을 먹는 게 아닌가? 여성동지들은 킥킥거리고 우리 모두는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심 국회의원식당에서는 제발 저러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서 말이다.
유세도중 밥 먹을 시간이 되면 우리는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서 밥을 먹었는데 노무현은 수행중인 스탭들과 아무 거리낌없이 밥을 같이 먹었고 아무 스스럼없이 선거에 대해 솔직한 고민들을 털어놓고는 했다. 우리는 밥을 먹으면서 그 때 그 때 현장에서 참모회의를 할 수 있었던 셈이다. 스탭뿐만 아니라 자원봉사자들의 의견도 귀담아 듣는 노무현은 그야말로 오픈마인드를 가진 사람이었다.

4.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1988년 13대 총선을 치르며 내가 만난 노무현의 모습은 용기 있고, 정직하고 인간적인 소탈한 성품의 사람이었다. 그는 결국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콩나물국밥만 먹으며 발로 뛰었던 우리 모두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었고 이어 열린 5공 청문회에서 일약 전국적인 청문회스타로 떠올랐다. 우리는 그 때 그를 국회의원으로 당선시키는데 일조를 담당했던 것을 얼마나 자랑스럽고 가슴 뿌듯하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런 그가 십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대통령후보로 나섰다. 엊그제 방송3사의 여론조사 결과 한나라당의 이회창을 누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나라당의 이회창이 집권하는 것은 우리 역사의 퇴행이요 시계바늘을 냉전시대로 거꾸로 돌리는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나는 서울이 고향이라 지역감정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내가 호남사람이거나 단순히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자이기 때문에 이회창을 싫어하는 그런 게 아니란 뜻이다.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이렇다.

이회창은 냉전주의자이다.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이회창은 우리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미국을 방문해 부시의 대북관에 맞장구를 치고, 현정권의 햇볕정책에 공공연히 반대하는 것을 보라. 이회창과 한나라당이 현정부의 대북 지원을 퍼주기라고 연일 비난하는데 현정부 들어 북한에 퍼준(?) 쌀은 북한과 원수처럼 살고 있는 일본이 같은 기간 북한에 퍼준 것의 1/5밖에 되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은 퍼주기 운운하는 자들이 과연 최소한의 동포애를 가지고 있는 한민족인가를 묻게 만든다. 이회창은 민족의 화합을 이루어 낼 수 없는 북한과의 대결적인 자세를 버리지 못하는 수구냉전주의자이다. 한 번 생각해 보라. 이회창이 집권해서 고문경관 정형근이 국정원장 되고 원조극렬수구 김용갑이 국방장관 된다고 생각해 보라. 나는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과연 남북관계가, 이 나라의 인권이 어떻게 되겠는가? 이회창이 집권하면 남북관계는 다시 냉전시대로 돌아간다. 김대중 정부가 쌓아올린 화해와 협력의 공든 탑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이회창은 지역 분열주의자이므로 나라의 지도자가 되어선 안 된다. 내가 이회창이 소망 없는 정치인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는 지역분열의 현 정치구도의 수혜를 가장 많이 누리고 있는 덕분에 그걸 가장 많이 조장하는 정치인이라는 점이다. 이회창은 3김청산을 주장하며 낡은 정치와의 차별화를 시도하며 그 덕을 보려고 하면서도 정세에서 수세에 몰리면 반드시 대구나 부산을 찾아 장외집회를 하고 그 무슨 규탄집회를 밥먹듯이 해왔다. 집회를 하는 건 좋다. 하지만 왜 가까운 보라매공원이나 서울역 나두고 그 멀리 부산, 대구까지 기어내려 가는가? 지역분열정치작태를 정치의 기본기로 사용하는 데 그 수준이 삼김 뺨칠 지경이다. 삼김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이른바 이회창 대세론의 근거가 영남몰표인데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국민의 분열을 일부러 조장하는 이런 정치인은 절대 최고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회창이 걸어온 길은 민주주의를 위한 길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영달을 위한 길은 충실히 걸어 왔을지 모르나 그가 민주주의를 위해 어떠한 기여를 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반민주주의의 편에서 기득권을 누리며 살아왔다. 1961년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에게 간첩혐의를 씌워 5.16 혁명재판부에서 사형을 선고해 사법 살인할 때 민간인으로써 혁명재판부에 참여해 사형언도를 내린 판사가 바로 이회창이다. 민족일보사건은 박정희 군부가 정권을 찬탈하는 과정에서 계획된 진보인사에 대한 명백한 사법살인으로 밝혀졌다. 이에 대해 조직의 일원으로써 어쩔 수 없었다고 이회창은 변명했으나 그것은 대쪽을 자처하는 그에게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궁색한 변명이다. 정의를 위해 법이 있는 것이지 조직을 위해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문부식이 주도했던 81년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때 주모자들에게 주저 없이 사형언도를 내렸던 사람이 바로 이회창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때 그들을 무료변론하며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의 배후지원 내지는 방조했던 미국의 책임을 물은 사람이 노무현이다. 그리고 청년학생들의 충정을 이해해 달라고 선처를 호소했다. 거기에 이회창은 사형으로 답했다. 이회창은 반민주주의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왔다.

더구나 그의 아버지 이홍규는 마루야마라는 이름으로 일제하 검찰의 사상담당 검사보로 일하며 독립군을 잡아들이는 일제의 하수인 노릇을 하지 않았는가? 나는 이회창 아버지를 정죄하기에 앞서 그것을 민족의 아픔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절에 검찰에 몸담고 있었다면 달리 할 일이 뭐겠는가? 죄인 잡아들이는 게 검찰의 일인데 일제하 죄인이란 게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이 죄인 아닌가? 그러니 그 당시에 검찰에 몸담고 있었다면 더구나 사상담당이었다면 친일을 안 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친일을 안 할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하다. 옷을 벗는 거다. 당시 많은 애국적인 지식인들이 일제 하에서 폐병환자 비슷하게 무기력하고 무능한 모습으로 살다간 것을 나는 결코 그들의 무능 때문이 아니라고 본다. 일제의 식민지라는 엄연한 민족의 현실 속에서 개인의 영달을 꾀한다는 건 곧 그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그 현실의 구도가 주는 이득을 좇아 사는 길밖에 달리 무슨 길이 있는가?
일제하 조선인 검찰의 일이라는 게 독립운동가를 잡아들이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면 가야할 길은 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같은 동포로써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니 검사의 옷을 벗고 차라리 농사를 짓던가, 아니면 검사로서 한 세상 영달을 누리는 게 중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으로 일제의 주구노릇을 마다하지 않는 길이다.

최소한 이회창의 아버지는 민족의 아픔보다는 개인의 영달을 꾀한 사람이었고 그 덕에 오늘날 친일검사였다는 뒤늦은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기는 하지만 자식교육 잘 시켜 대통령자리까지 넘보게 하고 있으니 후회 없는 삶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의 영화는 여기서 끝나야 한다. 우리 사회가 해방 후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해 지금까지 치르고 있는 대가는 여기서 새삼 더 말해 무엇하랴?
민족의 역사가 암흑을 달릴 때 개인의 영달을 좇아 일제의 주구노릇을 한 자의 후손은 결코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역사 앞에 부끄럽고 망신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오는 12월 대선에서 친일파의 후손이 대통령직에 오르려는 것을 국민의 힘으로 막음으로써 정치인들이 하지 못한 친일청산의 일단을 보여주어야 한다.
더구나 1999년인가 이회창, 김종필은 그의 부하 국회의원들 20여명을 수행하고 일본 천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일본대사관 리셉션에 참석하여 일본천황폐하만세 삼창을 불렀다. 그것도 외교라고 강변하지만 얼마나 국민감정을 무시한 해괴한 짓거리인가? 그건 사대주의도 아니고 한마디로 정신나간 짓거리들이다. 그 시간 동해바다에서는 잘못된 어협협정 때문에 꽁치 한 마리 더 잡겠다고 어민들은 목숨걸고 일본어부들과 싸우고 있고, 일본순시선에 쫓기다가 배가 침몰 당해 물귀신이 되는 게 국민들이 처한 현실인데 그래 국회의원이란 자들이, 대통령 되겠다는 자들이 일본천황 생일잔치에서 샴페인을 터뜨리고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다니? 과연 그래도 되는 건가? 어쩌다가 우리 국민들은 이런 한심한 모리배들을 나라의 지도자로 뽑아 놓고 사는가?
이런 자들을 그저 내 고향 출신이니 너 국회의원 해먹어라 너 대통령 해먹어라 이래도 되는 건가?
과연 친일파의 후손다운 이회창의 처신이고 제 나라보다 일본에서 인기가 더 좋은 원조보수 김종필다운 짓이지만 이건 해도 너무 하는 짓거리들이다. 이런 자들이 21세기 한국을 이끌고 가겠다고 우리가 남이가 하며 국민을 우롱하는 데 대해 나는 정말 몸서리치는 분노를 느낀다.

105평짜리 빌라 세 채를 십 원 한 장 들이지 않고 수년 째 살고 있는 그가 과연 집 없는 서민의 고통에 관심이라도 가지겠는가? 두 자식을 군대면제 시킨 그가 과연 혹 이러다 전쟁이라도 나면 어쩌나 하고 가슴 졸이는 자식 군대 보낸 부모의 심정을 알기나 하겠는가? 알 까닭이 없다. 이회창 집안에 군면제자가 무려 7명이다. 그러니 부시의 말에 맞장구 치는 데서 더 나가 한 술 더 뜨는 거다.

이회창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정직하지도 않고 가난한 서민의 아픔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삶을 살아왔다. 특권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기에 바빴고 정치적 이득을 위해서 국민분열을 일삼아 왔다. 대쪽이라 하더니 과연 속이 좁기는 대나무 속 같이 좁아 도무지 포용력이 없다는 평을 자신의 부하들로부터도 듣고 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동서를 통합하고 북한을 포용하는 대국적인 정치를 펴겠는가?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그는 정직하고 근본이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며 책값을 벌기 위해 막노동을 해봤던 사람이다. 서민의 아픔을 아는 사람이다. 인권변호사로서 가난한 농민, 서민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그들을 위해 자신의 영달을 포기하고 살아온 사람이다. 정치인으로서도 무원칙하게 금뺏지를 좇아 양지를 좇지 않았고 망국의 병 지역감정의 벽을 허물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다. 비록 문정수에게 지긴 했지만 계속되는 그의 용기와 헌신에 부산시민의 마음도 움직여 부산시장선거에선 37%의 표를 얻기도 했다.

나는 오늘 노무현이야말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주저 없이 말하고 싶다. 이회창은 최악의 선택이다. 이회창이 영남몰표에 힘입어 만약 대통령이 된다면 나는 이민 가는 길을 알아 볼 것이다. 정말로.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정치에 소망이 있고 나라에 소망이 있다. 또다시 망국적인 지역감정 때문에 친일파의 후손이 대통령이 되거나 옛 독재자의 이미지나 팔아먹으려는 자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가 타락하면 우민(愚民)정치가 된다고 했다. 나는 제발 12월의 대선이 바보들의 잔치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는 날,
대학을 못 나와도 성실하고 정직하게 사는 자가 마침내는 성공하고 승리할 수 있다는 참으로 귀한 교훈을 우리는 후손들에 자랑스럽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이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정치의 진보요, 역사의 진보다.


출처:세상 사는사람들 게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