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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저런사람↓

이명박 장로와 ‘죽음의 행렬’

by 랭님 2009. 1. 29.

출처 : 한겨레칼럼 2009/01/29 11:33 손석춘

어디까지 갈 셈인가. 이명박 대통령에 묻는다. 먹고살게 해 달라고 절규하던 철거민 다섯 명이 새까맣게 불타 숨졌는데도 진솔한 반성은 보이지 않는다. 철거민 단체 탓이라며 되술래잡는다.
비극적 참사 앞에서 ‘고의 방화’ 가능성을 들먹인 국회의원이나 그 또래를 새삼 거론하고 싶진 않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 기본조차 없는 정치 모리배가 국회의사당에 들꾄 지 오래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이 더 어둔 곳에 똬리 틀고 있어서다. 바로 청와대다.

이명박 정권 대체 어디까지 갈 셈인가

임기가 아직 4년 남은 대통령이 입만 열면 ‘법치’를 부르댈 때, 이미 한자리씩 꿰차고 앉은 출세주의자들이 무슨 일을 꾀할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더 높은 감투를 쓰려는 부라퀴들의 과잉 충성도 눈에 선하다. 대통령 눈에 들면 언제든 장관에 발탁될 상황에서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이 잔혹한 ‘공권력’을 어떻게 두남두며 언구럭 부릴까도 미루어 알 수 있다.

기실 국민을 시들방귀로 여기는 대한민국 ‘공권력’의 문제점은 뿌리가 ‘친일’까지 닿아 있다. 심지어 노무현 정권에서도 비정규직 노동자와 농민을 대낮에 때려죽인 전과가 있지 않은가. 그들에게 이명박 정권의 등장은 무엇이었을까? 그나마 눈치 살필 수고 없이 마구 휘둘러도 된다는 보증 아니었을까?

그래서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처참한 죽음의 행렬이 결코 끝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프랑스 사르코지 정권처럼 세계적으로 소문난 우파마저 신자유주의를 벗어나려는 판에 금산분리 완화, 방송 사영화, 비정규직 확산 따위의 신자유주의 법안을 언죽번죽 ‘경제 살리기’로 호도하는 저들을 보라.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와 농민, 영세 자영업자들과 그 가족이 피와 눈물을 쏟아야 하는가.

     용산 철거민 강제진압 희생자들을 추모합니다

저 처참한 죽음의 행렬 아직 끝나지 않아


비단 신자유주의 악령만이 아니다. 철거민 참사로 묻히고 말았지만, 서해에서 남과 북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무장 높아가고 있다. 이미 북쪽은 “빈말이 아니다”라며 일촉즉발의 위기 사태라고 공언했다. 봄이 오면 서해의 풍부한 꽃게를 남과 북이 웃으며 함께 잡자는 합리적 논의는 실종되고, 근거도 모호한 ‘국경선’을 외마디처럼 질러대며 일방적이고 자극적 선동으로 군사 충돌을 부추길 때, 또다시 남과 북의 애먼 젊은이들이 목숨 잃을 가능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경제공황을 맞은 미국이 탈출구로 전쟁을 선택할 수 있다는 진단마저 솔솔 나오는 상황이다. 버락 오바마 정권이 들어섰다고 마음을 모두 놓기엔 미국 경제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그럼에도 부익부 빈익빈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노골적으로 강행하고 남북 대결주의로 무람없이 치닫는 이명박 정권 아래서 죽음의 행렬은 꼬리가 보이지 않는다. 종교 갈등마저 곰비임비 불거질 만큼 신앙에 ‘독실’하다는 이명박 장로에게 죽음의 행렬에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누가복음은 쇠귀에 경읽기일까. 성경과 정반대로 되레 국민의 생때같은 목숨을 빼앗고 있지 않은가.

남북 대결과 신자유주의로 이어질 죽음의 행렬

찬찬히 저 긴 죽음의 행렬을 보라. 비참하게 죽은 원혼들만의 행렬이 아니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의 행렬을 직시할 때다. 줄 이은 행렬에 저들의 살붙이는 전혀 없다. 저들이 끼리끼리 볼맞아 희희낙락 즐길 때 차가운 죽음의 문은 노동자·농민·빈민, 영세 자영업자들 행렬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설 수밖에 없다. 저들이 제 동족과 대화보다 대결을 즐길 때, 죽음의 악령은 저들의 자식들과 달리 ‘국방의 의무’로 군에 온 애먼 젊은이들 꼭뒤를 벅벅이 덮쳐올 수밖에 없다.

저 멀리 들려오는 곡성의 흐느낌 담아 이명박 정권에 다시 묻는다. 줄 선 행렬에도 눈 슴벅이며 묻는다. 어디까지 갈 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