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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현대 한국 불교의 방향

by 랭님 2008. 9. 17.

현대 한국 불교의 방향


 

병고 고익진
(전 동대 불교학과 교수)


1. 이념정립의 필요성

본 내용중에서 도입부분은 생략하고 글 올립니다. 생략된부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용운 스님의 '조선불교유신론' 내용
권상로의 불교개혁론 등 일제의 식민지 하에 한국불교 개혁을위한 노력.

현대 불교 혁신을 위한 조계종 총무원 주최 세미나 내용
- 이하 계속 -
종단을 정비하고 승려를 교육하고 민중속에 뛰어들어 사회구제를 위해 나서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한국불교가 현대사회에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런  일들이  반드시 실현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일이 사상적  뒷받침없이  이루어 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종교에 있어서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종교사상이다. 종교사상에 입각해서 종교행동이 있게 되고, 종교행동에 의해서 종교경험이 있게 되며, 그 위에 종교집단이 형성된다. 종교에 두루 나타나는 이러한 현상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종교사상이다.
따라서 사상적인 방침이 결정되지 않은 채 승려교육이나  포교 현대화, 종교문제등을 논한다는 것은 근본을 망각하고 지엽을  쫓는 것과 같다.   필자의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지 모른다. 그러한 것은 이미 자명한 일이 아닌가. 조계종의 경우 1956년에 공포된 종헌 제2조에는 그 종지가 다음과 같이 뚜렷이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본 종은 석가 세존의 근본교리인 자각.각타.각행원만을 바탕으로 삼고, 직지인심.견성성불.전법도생을 종지로 삼는다.   그런뒤에 금강경과 전등법어로써 소의경전을 삼되, 기타  경전의 연구와 염불.지주 등을 제한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제3조) 한마디로 말해서 금강경에 의해 오도한 육조혜능의 선 사상을 계승한다는 입장이다. 조계(조계 : 육조의 주처)라는 종명에 어울리는 종지이다.
그러나 종단에서 이러한 종지가 실제로 얼마만큼 지켜지고  있을까? 승려교육을 맡아 왔던 전통적인 강원의 커리큘럼은  사집과 사교로 구성되고 그 위에 대교과가 있는데, 이것은 화엄을 최상의 교법으로 치고 있음이 뚜렸하다.
선원 또한 오로지 화두에만 골몰하여, 경전은 전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교육과정에서 부터 선과 교는 심한  대립상태에 있다고 말 할 수가 있다.
일반을 상대로 한 포교에서는 더욱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신도회가 조직되고, 정기법회가 봉행되고, 포교활동이 활발한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포교가 현재 어떤 상태로 진행되고 있는가?  각 법회마다 방침이 다르고, 동일한 법회라고 해도 수시로 방침이 달라진다. 설법자의 뜻에 따라 어떤 때는 금강경이  설해지고  어떤 능엄경이 강의된다.
염불이 권해지는가 하면, 선이 권장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나는 많은 보살에게까지 화두를 주어, '화두타러 간다'는 말까지 들린다.   이렇게 일정한 방침이 없는데도 포교가 제대로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일정한 교리가 반복적으로 설해지고 사유될때 비로
소 듣는 사람의 마음에 신앙체제가 형성된다.
정기 법회의 가장 큰 목적은 이러한 신앙체계의 형성과 강화에 있음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일정한  방침없이  임의로 법문이 주어진다면, 사람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소리를 구하게  될것이고, 단순히 그렇게 '듣는 법회'에서 경건한 신앙심이  함양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오늘날 불교 중흥을 논함에 있어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사상적인 이념의 정립에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종헌에 종지가 명시되어 있다는 것만으로 만사가 해결되었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시대의 추이와 함께 교리는 끊임없이 새로 해석되고 새로 적용되어야 한다. 종헌에 명시된 종지에 대해서 그런  연구가  일찌기 우리 종단에서 행해진 일이 있는가? 그러한 연구가 체계적으로 논술된 논서나 장소가 생산된 일이 있는가?
논서는 차지하고, 종지에 상응하는 통리된 성전하나 제대로 발간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경지에서 필자는 힘에 닿지 않는 일인줄 번연히 알면서도 감히 한국 불교의 이념적인 측면을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필자가 염두에 두는 대상은 소수 엘리트를 위한 불교나,  종파에 국집된 불교가 아니다. 일반 대중에게 오늘날 어떤 교리를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가를 폭넓게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2. 선의 문제성

한국불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선이라  해도  좋다.
삼국시대에 이 땅에 도착한 불교는 통일기 신라 때 찬란한 교학의 꽃을 피웠다. 그러한 교학 중에 가장 성했던 것은 화엄이었다.
그러나 신라 하대에는 선이 전래하여, 고려 일대는 선과  교의 대립과 지양이라는 현상을 드러낸다. 특히 보조지눌과 그의  제자 진각헤심에 의해 창도된 간화선은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교를  버리고 선에 들어간다'는 위치로 부상하였으며, 이런 전통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간화선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화두라는 문제를 가지고  조용히 사유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한 화두는 1천 7백개를 헤아리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무자 화두'이다.

옛날 중국에 조주라는 유명한 선승이 있었는데,  하루는  어떤 스님이 그이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는 서슴지 않고 '무'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일체 중생에게 모두 부처가 될 성품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조주는 왜 없다고 답하였을까? 간화선은 이런 '무' 자를 열심히 참구하는 것인데, 과연 어떤 방법으로 그 문제를  풀어야 할까? 보조지눌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시하고 있다.

한마음으로 그 문제를 들되 이리 저리 생각해서는 않된다.  유와 무로 풀어도 안 되고, 참다운 무라고 해도 않되고, 도리로  따져도 안되고, 마음 깊이 생각하고 헤아려도 안되고, 눈섭을  치켜 세우고 눈을 깜박이는 곳에서 근거를 찾아도 안되고, 언어 위에서
살 길을 찾아도 안되고, 일어나는 곳에서 합당함을  얻어도  안되고, 문자 가운데서 인증해도 안되고, 미혹을 버리고 깨침을  기다려도 안된다. 모든 헤아림을 떨쳐버리고 밝고 밝은 곳에서 간파할지니, 영리한 사람이면 듣는 순간 깨칠 것이다. 그러지  못할진댄 '유다 무다' 하지 말고 다만 그것을 응시해야 한다. '이 무슨  도리인고?'

간화선이란 이런 형태의 선법을 가리킨다. 송나라 대혜선사의 사상을 계승한 것이다. 대승불교는 생사를 부정하고 열반을  추구하는 소승불교의 염색적인 가치관을 극복하고자  흉기한  것이다.
모든 법이 공(空)하다는 대승의 직관지 곧 반야에는 생사와  열반이라는 분별은 자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선은 대승불교의 그러한 실천적 반야를 가장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다. 대혜선사는 그러한 선에 다시 독창적인  테크닉(화두)을 가하여 새로운 차원을 연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보조지눌은  이러한 대혜의 선사상을 깨달음에 이르는 곧 바로 뚫린 길( 경절문 ) 이라고 부르고, 이것을 이해 시키기 위해 세가지  법문을 조직하고 있다.

첫째는 육조혜능의 선법을 크게 선양했던  하택신회의 선인데, 이것은 명석한 면이 있지만 아직 아직 헤아림의 자취를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하였다.

둘째는, 중생의 무명망념이 곧 부처의 보광명지라는 이통현의 화엄관이다. 이것 또한 교리적인 헤아림의 자취가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셋째번의 대혜선에는 불덩어리에 눈송이가 붙지 못하듯   이, 그런 분별이 붙은 곳이 없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행해지고 있는 간화선은 바로 이러한 대혜선이다. 그렇다면 현 한국불교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할 '사상적 이념 정립'의 문제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관심을  보내야 할 곳은 그러한 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한국불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표적 종단이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의 종지가 그러한 선의 전승을 표방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러한 선이 과연 일반 대중을 위한 불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회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불교는 매우 지적인 종교이기 때문에 일반이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 더구나 대승의 심오한 공사상은 범인의 상식을 초월하고 있다.

선은 다시 그러한 교의 경계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전혀  다른 정신적 차원을 전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늘날은 간화선을 체계적으로 이해시키려고 했던 보조의 선학까지도  비판하면서 더욱 극단에 흐르고 있는 경향이다.
일반대중이 어떻게 그런 난해한 선을 이해하여 그로써  종교적 생활을 영휘할 수가 있겠는가? 소수 엘리트나 서구 지성인의 호기심을 끌지는 모르지만, 일반 대중을 위한 불교가 되기는 어렵다고 필자는 보고싶다.

일반 대중뿐 아니라 전문적인 출가인 에게도 선은  쉬운  길이 아닌것 같다. 확철대오 하였다고 자신할 사람이 몇 이나 될까?
많은 해를 선원에서 보내고도 답답한 마음이라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중국의 연수 선사는 "열사람이 가서  아홉사람은  탈락한다"고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선에 대한속단이나 오해가 오늘날  불교계에 얼마나 많은 해독을 끼치고 있는가.
불립문자라는 표방아래 경전을 배척하면서도 조사어록은 탐독한다. 무애행을 한다면서 파개를 일삼고 이를 합리화 한다.  법도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어찌 법 아닌 것(비법)에 집작하는지  일종의 테크닉에 불가한 화두에 집착하여 교묘한 희론을 일삼는다. 그러면서도 언어와 사량 분별을 떠난다고 자처한다. 이 어찌 난샌스가 아니가.
일반 대중을 위한 불교를 생각하는 견지에서 필자는 선을 이상과 같이본다. 그러나 이러한 필자의 견해를 선에 선에 대한 전적인 부정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필자도 선이 불교의 진정한 뜻을 발휘하는데 놀랄만한 장정을 갖고 있다고 시인한다. 불교의 목적이  언어와 사유를 초월한  궁극적 진리를 깨닫는데 있을진데 선 보다 더 직접적으로 그러한 깨달음을 제시한 것은 없을 것이다.
선은 반야 사상의 극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필자가 여기에서 문제로 삼고자 하는 것은 선은 그러한 파격적인  독창성으로 말미암아 일반 대중을 위한 불교로는  오히려  부적당하다는 말일 뿐이다.  


3. 교학의 문제성

교는 선에 비해 매우 자상하고 친절하다. 일반  대중과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언어와 사유를 전적으로 배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는 선보다도 대중불교에 더 적합하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교에도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이 보통 '교'라고 말하는 것은 경전보다는  경전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가리킨다. 부처님의 입멸후 1 백여년이 지난뒤  (BC 4세기경) 불교교단은 교리와 계율에 관한 의견대립으로 크게  둘로 갈라지고, 그로부터 다시 소소한 분열이 일어나 20부파를 헤아리게 된다.

경전에 대한 연구는 이 부파불교 시대에 이미 왕성하게  행해지고 있었다. 그뒤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BC 1 세기경) 그의  상응한 경전들이 성립하는데, 이러한 대승경전에 대해서도 다시 체계적인 연구가 행해져 중관과 유식이라는 두 학파를 형성 하게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기원 1 세기경 부터 불교는 서역을 통해 중국에 전해진다. 인도 불교의 경전과 연구논서가 중국어로 번역됨은 물론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중국사람들에 의해 한역 경전과 논서가 연구되고 그러한 연구를 토대로 종파가 형성된다.
삼론.법상.화엄.천태.율.선.정토.밀교 등은 중국 종파의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중에서도 특히 천태와 화엄은 인도 불교가  중국적으로 전개된 중국 교학불교의 2대쌍벽으로 칭해지고 있다.
중국불교의 이러한 종파적인 교학은 신라 통일기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에 전해지고 여기에 한국적 사유가 가해져 더욱 그  내용을 풍부하게 한다.
오늘날 우리들이 선에 대한 교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한국적인 교학을 의미한다. 그러한 한국 불교의 교학 중에서  가장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화엄학 이라고 말 할 수 있다.

화엄학은 의상이 중국에 들어가 중국 화엄종의 제 2 조  지엄에게 수학하고 그 종지를 전래한 뒤, 통일기 신라교학의 주축을 이루었다.

고려시대에도 균여와 의천과 같은 훌륭한 화엄학자를  배출했으며, 심지어는 지눌과 같은 선가도 화엄을 연구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고려시대의 11 종이 6종으로  감축되고(태종 7년), 다시 선.교 2종으로 폐합된다(세종 6년). 그 뒤 청허  휴정의 '사교입선(사교입선)'설에 의해 여전히 연구되고  전승되었음은 조선조 중엽에 성립되었음을 강원과 그  커리큘럼(사집.사교.대교)의 존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라고 하면 곧 화엄학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다. 그리고 선보다도 교가 대중불교에 적합하다면,  이러한 화엄학으로 대중불교를 심자는 말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화엄학이 과연 대중불교에 적절한 교리가 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에 대해서도 의문을 표시하지 않을 수가 없다.
화엄학은 불교학 가운데서도 가장 난해하고 복잡한 교리로 알려져 있다. 중관학파의 변증법적 공관(空觀)과 유식학파의  아라야연기설, 기신론의 여래장 사상 등의 모든 교학적 이론을 종합하여 체계화한 것이 화엄의 법계관(法界關)이다.
따라서 화엄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인도에서 중국에 이르는  전 불교교학을 철저하게 연구되지 않으면 안된다. 전문적인  불교학자도 감당키 어려운 이러한 화엄학이 어떻게 일반 대중을 위한  불교가 될 수 있겠는가?
비슷한 말을 삼론.법상.천태.밀교와 같은 교학들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그들 또한 엄청난 부피의 전적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화엄을 비롯한 이러한 종파적 교학들은  부처님의 뜻을 각 파의 소의경전이나 논서에 한정시키는 편협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각 파의 소위 교상판석이라는 경전 분류법에서 최고 의 경전으로 판정된 경전만이 집중적으로 천착되고, 그런 각도에서 다른 경전들을 이해하고자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에서 경전은 영원한 진리를 간직한 문헌이지만,  시대의 변천과 함께 그 뜻은 언제나 새로운 해석과 새로운 적용이 가해져야 한다.
그러므로 어느 한 시대에 어느 한 종파에서 가졌던 견해로 불교의 진정한 뜻이 한정되어 버린다면, 이것을 어찌 문제라고 하지 않겠는가?

이런 견지에서 필자는 '선'에 못지 않게 '교'에도 문제성이  있다고 본다. 일반 대중을 위한 오늘날의 불교를 위해서는  지나치게 종파적인 교학은 부적당하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기독교에서  신학이 곧 기독교가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말할 필요도 없이 경전에 의해야 할 것이다.  경전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말씀을 각자의 마음 속에 직접 들려 주도록  해야  한다.
새삼스러운 말인것 같지만 너무나도 명백한 이와 같은 사실을 우리는 지금껏 소홀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육조의 불교, 법장의 불교, 천태의 불교는 있지만 석가의 불교는 없다'는 한 불교학자의 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4. 바람직한 방향 : 경전의 선택

선이나 교보다는 경전에 의해야 한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그렇다면 이제 어떤 경전을 택해야 할까. 불교에는 소승에서 대승에 이르는 방대한 경전이 있어서 모든 사람이 그 많은 경전을 다 읽고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새로운 문제에 부딪히게 된 셈인데,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현재 널리 행해지고 있는 것은 여러 경전에서 긴요한  부분을 발췌하여 그것을 새로운 체계로 엮어놓는 방법이다.

'불교유신론'을 쓴한용운이 곧이어 '불교대전'을 편찬한  것은 그런 선구적인 작업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 뒤  그런  종류의 불교성전은 여러 곳에서 편찬되었고, 취근의 것으로는 1972년 동국역경원에서 나온 '불교성전'을 들 수가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불교성전에 나타난 공통적인 양상은 그 목적이 깨달음을 얻게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 전반에 대한  상식이나 교양을 얻게 하는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개의 경우 불.법.승의 3보를 중심으로 그에 관한 경전의 요문을 수록하고 있는데, 그것도 교훈적인 말씀을  열거하는데  촛점을 맞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번역 또한 '읽을 수 있는 성전'을  만든다는 취지 아래 지나친 윤문이 행해져, 불교 술어가 지닌 미묘한구조가 크게 손상되고 있다.
경전의 목적이 '깨달음을 가리키는 손짓'의 구실을 하는데 있을진대, 이러한 성전이 절대적인 귀의를 받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성전이란 어떤  것일까?  불교 경전은 어느 것이나 깨달음에 이르는 일미(일미)의 것이라고  설해지고 있다. 어느 경전이든 하나를 택하여 그것을 열심히  참구하면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다.

종래의 교학이 어느 한 경전을 집중적으로 천착한 것은  이러한 판단에서였을 것이고, 또 그것은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경전이 일미의 것이라는 말은 모든 경전이 다  동등한 수준의 교리를 갖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불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색의 하나는, 다른 종교가 궁극적인 진리 - 신관(申觀)이나 우주론 - 에서부터 설해주는 것과는 달리, 인간의 현실세계에서 시작하여 궁극적인 진리를 향해 교설이  베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진리는 스스로 깨닫도록 그에 이르는  길만이 제시되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결코 말로 설해져  있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에 부처님은 '나는 다만 길을 가리킬 뿐'이라고  설하시고,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받았을 때는 언제나  침묵을  지키셨다. 따라서 모든 경전이 궁극적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교리를  담은 것이다.

따라서 모든 불교 교리는 점점 심화되어 가는 중층적인  조직을 띠게 된다. 경전이란 바로 이러한 교리를 담은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경전이 궁극적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일미의 것이긴  하지만  각 경전이 저마다 다른 교리적 수준을 갖게 되는 것이다.
불교경전이 지닌 이러한 특징을 구체적인 예를 통해  살펴보자.
대승불교의 초기에 성립된 경전으로는  반야경.법화경.십주경.무량수경 등을 들 수가 있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바탕은 이러한 초기 대승경전이라고  하겠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기초적인 것은 반야경이다.  이  반야경에는 '모든 법이 공하다'는 말이 수 없이 반복되면서, 보살에게  반야바라밀다에 행할 것이 권해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왜 모든 법이 공한가'에 대한 뚜렸한 이유는  제시 되어 있지 않다. '공'은 다만 직관해야 할 성질의 것일까?  인간의 합리적 사유를 중요시 하는 불교에서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 명제에 대한 이유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반야경의 공관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중관학파의 비조 용수는 공의 논리적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연기한 것은  공이요, 그것은 가명이며, 그것은 또 중도의 뜻이다." 공의 이유가  연기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연기'라는 것이 용수의 저술에서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다 존재의 독자성을 인정하려는 집착의 잘못만을 파하고 있을 분이다. 그렇다면 공의 이유로서의 그 '연기'라는 개념은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이가?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대승불교 이전에 성립된 아함경에서이다.


출처 : http://kr.buddhism.org/zen/sutras/korea.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