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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야기

참된 교육이란......(김동렬의 구조론에서....)

by 랭님 2009. 4. 28.

교육은 아마를 단련시켜 프로를 만드는 것이다. 프로와 아마의 차이는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되 장비를 갖추고 오르느냐 아니면 아무런 준비없이 맨손으로 기어오르느냐의 차이와 같다. 정상을 꿈 꾼다면 반드시 장비가 있어야 한다. 


교육이란 프로가 가진 장비를 전해주는 것이다. 언어와 문자라는 장비도 필요하지만 경험과 노하우라는 장비도 구비되어야 한다. 교과서로 전달되는 하드웨어 장비가 필요한 만큼 인성교육으로 전해지는 소프트웨어 장비도 필요하다.


참된 교육은 프로를 양성한다. 경험있는 베테랑이 되어야 한다. 목수가 연장을 사용하듯이 베테랑은 장비를 쓴다. 그 장비 중의 으뜸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이며 그것은 ‘어떤 일의 전체과정에 참여한 경험’이다.


미술을 배운다면 연필로 긋고 붓으로 칠하는 기교 보다는 어떤 그림을 그릴지의 구상단계에서부터 그림을 완성하고 난 다음 학부모를 초청하여 전시회를 여는 단계까지 1 사이클 전 과정의 체험이 중요하다.


운전자의 옆자리에 동승해서는 같은 길을 백번 갔어도 막상 핸들을 잡으면 길을 찾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 내 손으로 핸들을 잡는다면 길치가 아닌 이상 한 번 가본 곳은 반드시 찾아갈 수 있다. 체험이 중요하다.


전체과정을 체험한 어린이는 집으로 돌아와 그 체험한 것을 엄마에게 이야기한다. 엄마 앞에서 털어놓을 그 ‘이야기’가 내 안에 갖추어져 있는가가 중요하다. 그것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교육은 실패다.


동기유발≫과제실행≫결과보상으로 이어지는 1 사이클 진행의 전체과정을 이해하지 않으면 학교에서 배운 것을 엄마 앞에서 이야기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중에서 시험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은 과제실행 뿐이다.


동기유발과 결과보상은 객관적 평가가 불능이다. 21세기가 요구하는 교육이 그것이다. 평가 가능한 부분만 수업하는 기술교육에서 벗어나 평가할 수 없는 부분까지 훈련하는 전인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전인교육을 위해서는 장비가 필요하다. 그 장비는 교과서처럼 눈에 보이는 하드웨어가 아니라 체험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다. 소프트웨어 또한 하나의 장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교과서 위주의 하드웨어 장비는 선진국 수준에 근접하고 있다. 문제는 창의력이라는 소프트웨어 장비다. 경험부족에 노하우 빈곤이다. 인간의 창의가 어떻게 조직되는가에 대한 이해가 없다. 한 번도 선두에 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교육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베테랑과 풋내기의 차이는 어느 지점에서 발견되는가? 못한가의 차이에 내 안에 자기만의 이야기를 갖추어 있는가와 그렇지 않음에서 발견된다.


어디서 줏어들은 ‘카더라’ 말고 나 자신의 ‘이야기’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프로는 그 이야기를 내 안에 갖추고 있다. 베테랑들은 누구나 그 이야기라는 장비를 하나씩 구비하고 있다. 베테랑은 연장을 쓴다.


자유방임교육이든 스파르타식 교육이든 시중에 유행하는 교육방법들은 그 장비를 제공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야기’를 제공하지 않는다. 하드웨어를 판매할 뿐 소프트웨어 장비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이야기가 없으면 힘을 쓸 수 없다. 학교에서 배운 것은 있는데 집에서 엄마 앞에 털어놓을 것은 없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집요하게 말하려고 드는 아이가 제대로 배운 아이다.


동기유발≫과제실행≫결과보상이라는 전체과정이 없으면 아이는 말하지 않는다. 배운 것을 타인에게 말한다는 것은 곧 소통한다는 것이다. 배운 것이 그 분야를 떠나 다른 모든 분야와도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아는 것이다.


그것이 있어야 배운 것을 써먹을 수 있다. 그것이 소통이다. 교육은 소통에 의해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계몽이 아니라 소통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과 소통하고 진리와 소통하고 역사와 소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류역사상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추락한 예는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한 국가의 운명은 그 집단 전체의 공동지능의 질적수준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인류의 문명은 인류전체의 집단지능의 계발에 의해 진보하는 것이다.

 

전쟁을 일으킨 나라도, 침략을 당한 나라도, 식민지를 얻은 나라도, 식민지 지배를 받은 나라도 어떻게든 인류문명의 집단지능과의 접속을 유지한 나라들은 모두 성공하고 있다. 이는 교육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나타낸다.

 

교육의 최종목표는 인류전체의 집단지능과 접속하는데 있다. 그리고 소통하는데 있다. 한 사람의 지식은 전체 인류문명의 일부로 기능할 때 유의미하다. 기존의 교육은 그러한 점을 간과하고 있다. 소통이 없는 교육은 실패다.

 

미술수업을 받아 실력이 늘었다 해도 그 실력이란 손가락이라는 하드웨어를 운용하는 장비에 불과하다. 그리고 싶어하는 동기를 부여하고 노력한 만큼의 보상을 받아야 이야기가 완성된다. 소프트웨어 장비가 구동된다. 그것이 진짜다.

 

욕망을 일으켜야 하고 성과를 달성해야 하고 보상이 따라야 한다. 욕망과 성과와 보상이 하나의 체계로 통일되어 엄마 앞에서 털어놓을 이야기의 요건을 구성한다. 그 이야기를 획득할 때 인류문명의 집단지능과 접속하고 소통한다.

 

교육의 완성은 문명과의 소통에 있다. 과제의 수행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타인에게 전파하고 타인의 마음과 공명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기를 쓰고 엄마에게 이야기하고 말듯이 모두 털어놓게 하는 것이다.

 


주입식교육은 운전자의 옆자리에 동승하는 것과 같다. 인류문명과의 소통의 코드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교육의 실패다. 듀이에서 로웬펠드, 몬테소리로 이어지는 실용주의 교육도 이름이 그럴듯할 뿐 실제로는 교육포기이기 쉽다.

 

듀이 이래 미국식 실용주의 교육은 환경을 조성하고 자극을 가하면 저절로 된다는 식이다. 교육은 저절로 되지 않는다. 교육은 이야기를 만드는 장비다.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과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교육은 실패다.

 

스승이 이야기를 전해주지 않으면 그리고 친구가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면 문명과의 접속은 실패다. 인류의 집단지능과의 동조화는 실패다. 문명의 마음과 소통하지 못하는 지식은 죽은 지식이다. 진짜가 아니다.

 

모든 교육학자가 자발성을 강조하지만 일사이클의 완성을 통한 전체과정의 체험이라는 연장이 없으면 자발성은 나오지 않는다. 그 연장이 자연의 진리에 기초한 완성형의 재현이라는 본질에서 멀어지면 연장은 사용될 수 없다.

 

자연의 진리≫완성형의 포착≫모방을 통한 재현≫전체과정의 체험≫이야기의 획득을 거쳐서 교육의 성과는 인류전체의 집단지능과 접속한다. 자연의 진리로부터 완성된 패턴을 끌어내는 과정을 제공하지 않으면 자발성의 유도는 실패다.

 

자발성과 창의성은 가둬놓지 않고 풀어놓는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완성된 모델로 부터 반복적인 패턴을 읽는 직관력에 의해 포착되고 그로부터 유도되는 것이다. 자발성의 유도과정이 없는 방임교육은 실패다.

 

교육은 있는 것을 끌어내는 것이다. 끌어내는 데는 장비가 소용된다. 그 장비는 ‘이야기’라는 장비다. 자연과의 소통을 통해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다. 자연의 완성형과 소통해야 한다. 진리는 자연의 완전성에서 유도된다.

 

창의력에 주목하는 교육이론가들이 많으나 실제로는 이야기라는 소프트웨어가 사전에 세팅해 두어야 하고 장착해 두어야 하는 장비라는 사실을 모른다. 실용주의자 듀이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실용주의가 아니라 합리주의로 부터 출발해야 한다. 실용주의자 듀이가 강조하는 경험은 자연의 완전성에서 유도된 것이 아니라 우연의 소산에 불과하다. 여러가지를 자유롭게 경험하다 보면 우연히 창의력이 샘솟는다는 식이다.

 

어린이에게 자유를 주어 여러가지를 체험하게 하고 갖가지 장난감을 던져주고 자유방임하면 우연히 교육이 이루어질거라는 추측이다. 교육은 우연에 의해서 가능하지 않다. 엄격한 지도에 의해서도 가능하지 않다.

 

어린이에게 자유를 주면 게임방에 처박혀 있을 뿐이다. 진정한 교육은 깨달음에 의해서 가능하다. 깨달음은 인간의 창의적 본성인 직관력을 사용하여 자연의 완전성에서 비롯하여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을 읽는 데서 얻어진다.

 

깨달음은 자연의 완성된 모습에서 진리의 완전성을 포착한다. 그리고 그 완전성을 재현하여 나만의 이야기를 유도한다. 그렇게 유도해낸 ‘이야기’를 모뎀으로 삼아 인류문명의 집단지능과 접속상태를 유지한다.

 

자연의 완전성을 포착함에서 동기가 유발되고 집단지능과의 접속에서 성과가 보상되는 것이다. 자연의 완전성을 포착할 때 인간은 전율한다. 긴장한다. 인류문명의 집단지능과 접속할 때 공명한다. 이완된다. 기쁨으로 보상된다.

 

인간의 행동은 긴장으로 촉발되고 이완으로 보상된다. 긴장이 동기유발이며 오래된 친구를 만났을 때 처럼 편안하게 이완되는 것이 성과의 보상이다. 그 긴장과 이완이 동그라미의 시작과 끝으로 만난다. 일사이클의 완성이다.  

 

교육은 장비의 획득이다. 장비는 자연과 문명을 연결한다. 접속을 위해서는 이야기를 완성해야 한다. 자연의 완전성을 포착함에서 긴장을 얻어 동기유발하고 문명과의 소통에서 이완하여 보상받는 일사이클의 완성이 ‘이야기’다.

 

하드웨어 뿐 아니라 소프트웨어도 장비다. 그 장비가 일 사이클 전체과정에의 참여에 의해서만 세팅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묻지마식 자유방임은 극소수의 재능있는 천재를 찾아낼 뿐 전체적으로는 교육포기다.

 

방임에 의해 창발성이 길러지는 예는 희귀하다. 교육은 기본적으로 장비를 운용하는 능력이다. 자연이 있고 문명이 있으며 교육은 그 사이를 연결한다. 자연에서 유도해낸 성과물을 인류문명의 집단지능으로 전송하여 보내기다.

 

참된 교육은 큰 집을 건축하듯 일층부터 쌓아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가 강변에서 모래로 까치집을 짓듯 단순한 단계에서 먼저 전체를 완성하고 난 다음 그 완성된 모델에 밀도를 높여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기를 반복한다.

 

초등교육에서 중등교육, 고등교육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1층 위에 2층을 올리는 식이 아니라 초등교육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기본형의 내부에 밀도를 채워나가는 방법으로 진행된다. 풍선에 바람을 넣듯이 말이다.

 

초등교육 단계에서 이야기의 완성된 경지를 맛보지 못한 사람은 죽을 때 까지 완성될 수 없다. 자연에서 유도한 것을 내 안에서 재현하여 문명으로 전달한다는 본질을 간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류의 집단지능의 진보에 기여할 수 없다. 

 

한국에서 어학교육이 실패하는 이유는 유아 수준의 낮은 단계에서 듣기와 말하기의 전체과정을 완성하지 않은채 알파벳과 단어학습의 높은 단계로 직행하기 때문이다. 1백단어 안팎의 낮은 단계에서 이미 완성되어야 한다.

 

알파벳에서 단어≫문장≫문법 순으로 진행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가야 한다. 자연에서는 부분을 조직하여 전체를 구성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자연에서는 작은 하나의 씨앗 속에 배아형태로 이미 미래의 완성형이 들어있다.

 

자연의 방법은 이미 완성된 배아에 수분과 당분을 집어넣어 크기를 부풀려서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어학교육도 이와 같다. 1백단어로 자유자재로 말할 수 있게 되기 전에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말아야 한다.

 

아기는 단어보다 문법을 먼저 배운다. 낮은 수준의 문법을 익힌 다음 문장과 단어를 그 문법의 틀 속에 집어넣는다. 아기가 비록 ‘엄마’라는 한 단어를 말해도 이미 문법, 문장을 말한 것이다. 맥락으로 보면 그러하다.

 

자연에서는 항상 전체에서 부분으로 간다. 아기의 언어도 전체가 먼저다. 그 전체는 물론 유치한 수준이다. 그러나 ‘엄마’하는 한 마디로 타인의 주의를 끌고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에 성공한다는 점에서 이미 문법은 완성되어 있다.

 

자연은 완성되어 있다. 진리는 자연의 완전성으로 드러난다. 완성이 먼저다. 전체가 먼저다. 틀을 먼저 만들고 그 안에 내용을 채운다. 형식을 완성한 다음 밀도를 높여간다. 그러므로 깨달음이 먼저고 소통이 먼저다.

 

자연의 완전성을 포착하는 능력이 없다면 실패다. 반복적으로 구현되는 패턴을 읽는 능력이 없다면 실패다. 인간의 그릇 크기는 그 지점에서 사전에 정해져 버린다. 작은 그릇에 고등교육으로 밀도를 높인들 한계가 있다.

 

큰 그릇을 구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큰 교육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자연의 완전성을 포착하고 재현하여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 이야기로 문명의 집단지능과 접속하고 기여하는 것이다.  

 

먼저 자연과의 접속을 유지하고 먼저 문명과의 접속을 유지하고 널리 세상과 소통하면서 먼저 큰 그릇을 완성한 다음 그 다음에 전문화되고 세분된 고등교육으로 그 그릇의 내부에 밀도를 채워넣기다.

 

나는 남이 쓰지 않는 장비를 고안하여 사용하고 있다. 구조론이라는 장비다. 구조론은 존재의 매커니즘을 파악하여 다음 단계의 진행을 예측하게 한다. 물론 예측은 빗나갈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장비를 사용하는가이다.

 

장비를 사용한다면 예측이 빗나가도 보완할 수 있다. 자(尺)를 사용하여 건축한다면 설사 그 자의 운용에 오류가 있더라도 그 자 자체에 오류가 없는 이상 오류를 시정하여 마침내 그 건축을 완성할 수 있다.

 


한국의 교육 무엇이 문제인가?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 말한다면 가장 위험한 교육은 하나의 교육방법을 대한민국 전체가 공유하는 것이다. 이는 모든 선수가 골키퍼가 되거나 아니면 모든 선수가 공격수가 되려는 것 만큼이나 위험하다. 


평준화교육이든 엘리트교육이든 어느 하나에 올인한다면 반드시 실패한다. 포지션이 나누어져야 하듯이 사교육도 있고 공교육도 있어야 한다. 주입식 교육도 있어야 하고 창의적인 교육도 있어야 한다.


이러한 다양한 교육방법에 의해 인류의 집단지능은 완성된다. 만약 모든 한국인들이 같은 교과서로 같은 내용을 배운다면 포지션의 조합에 실패하게 되므로 한국형 집단지능의 완성은 실패로 된다.


조중동식 교육이든 전교조식 교육이든 어느 하나로 획일화 되는 것이 가장 나쁘다. 조중동식 교육은 모방에 능한 하급 기술자를 양성하고 전교조식 교육은 창의적인 지도자를 양성한다. 가장 좋은 교육은 동료를 양성하는 것이다.


왜 엄기봉씨는 불행해졌는가? 주변에 고등교육을 받은 친구 한 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향에서도 불행했고 철원으로 이주했어도 역시 불행해졌다. 왜 모두들 그를 속였을까?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학교육을 받은 한 명의 지성인이 엄기봉씨의 주변에 있었다면 그는 불행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인가? 대한민국의 어느 지역, 어느 공장, 어느 구석을 가더라도 반드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한 두명은 있어야 한다.


만약 대한민국의 어떤 집단, 어떤 지역, 어떤 그룹에 지성인이 단 한 명도 없다면 반드시 문제가 생겨난다. 그 사회는 위험에 처해지고 만다. 지성인은 시골에도 공장에도 도시에도 정부에도 고루 있어야 한다.


이상적인 교육은 이상적인 포지션의 조합이며 그것은 바깥을 감시하고 방향을 판단하는 리더와, 안을 감시하고 조직을 통제하는 총무와, 과제를 수행하는 기술자가 제각기 역할을 분담하고 팀을 유지하는 것이다.


강남식 교육은 기회를 얻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교육포기로 이끈다. 동기부여와 성과보상에서 배제되기 때문이다. 그 경우 어떤 지역이나 어떤 공장에는 엄기봉씨를 도와줄 지식인이 단 한 명도 없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 지역이 섬이나 집창촌과 같이 고립되고 단절된 공간이라면 인권유린이 일어나도 사회가 모르게 된다. 그 경우 사회는 위험해지고 만다. 유영철 같은 사이코패스가 나타난다. 사회는 몇 배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뉴욕타임스는 인구 1만3천명에 불과한 수족 보호구역 내에서 지난해 193건의 자살시도가 있었으며 올들어서도 이미 144건의 자살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공식 집계됐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취재를 위해 수족 보호구역에서 만난 6명의 여고생 가운데 4명이 자살을 시도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했다. 인디언 보호구역 청소년 자살률이 미국 평균보다 10배나 높았으며(중략) 알래스카 원주민 자살률도 인구 10만명 당 13명으로 전국 평균에 비해 세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

 

교육의 완성은 인류의 집단지능과 접속함며 개인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이 고등교육을 받은 친구와 동료를 가지고 그들로부터 동기를 얻고 성과를 공유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성공이 모두의 성공이 되게 하기다.


강남식 교육이 한국을 지배하면 미국 인디언 사회에서 보듯이 국가로부터 유리되어 동기를 상실하고 삶을 포기하는 예가 속출하게 된다. 한국이 금메달을 따고 우승을 하고 노벨상을 받아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동기를 부여하려면 성과가 공유되어야 한다. 성과를 공유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나와 상관이 있어야 한다. 한국팀의 선전이 나와 상관있게 사회구조가 세팅되어야 한다. 집단지능과의 접속을 유지함으로써 가능하다.


한국은 한국의 지정학적 구도에 맞는 교육을 시행해야 한다. 미국처럼 넓은 나라라면 인적자원이 풍부하여 어떻게든 집단지능이 형성되므로 소수의 천재가 다수의 범인을 이끌어 갈 수 있으나 한국은 결코 그렇지 않다.


한국과 같이 주변에 비교될 나라도 없이 고립된 나라는 모든 국민이 고르게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갈등에도 사회전체가 휘청거리게 되어 삶이 극도로 피곤해진다.


한국은 한 명의 전여옥급 사이코 패스가 국가 전체를 흔들어놓을 수 있는 나라다. 그러므로 그러한 한국의 특성에 맞는 교육제도가 창안되어야 한다. 모든 한국인이 주위에 지식인 친구나 동료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출처] 참된 교육이란......(김동렬의 구조론에서....) (애벌레의 꿈 창작소) |작성자 viol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