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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인문과학

하버마스와 바타이유 - 잉여와 결핍을 둘러싼 논쟁을 중심으로 -

by 랭님 2009. 11. 30.


하버마스와 바타이유
- 잉여와 결핍을 둘러싼 논쟁을 중심으로


서문 : 하버마스, 바타이유를 만나다.

1. 계산과 방탕 사이에서 
   가. 홉스의 결핍이론과 계산이성
   나. 바타이유의 잉여이론과 방탕의 테제
   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이론에서의 과소, 과잉의 문제

2. 하버마스와 바타이유와의 대화
   가. 하버마스의 근대 계몽주의 기획의 연속에서 결핍이론의 계승
   나. 바타이유의 방탕이론이 갖고 있는 계몽주의의 종언
   다. 근대와 탈근대 논쟁에서 과소, 과잉의 문제

3. 나무 형상으로 본 두 이론
   가. 하버마스가 고집하는 바오밥 나무
   나. 바타이유가 주장한 수상식물형 나무
   다. 두 나무 유형이 갖고 있는 현대인의 정체성 문제

4. 이성인가? 욕망인가?
   가. 이성이 욕망의 프로그램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요건
   나. 욕망이 이성의 프로그램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요건
   다. 욕망과 이성의 평행론, 스피노자의 부활

결론 : 잉여, 결핍테제의 쟁점 정리

 

 

 서문 : 하버마스, 바타이유를 만나다.


하버마스는 푸코와의 대면을 위해서 그의 책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에서 바타이유를 언급한다. 그의 책에서는 바타이유가 제기하고 있는 중요한 쟁점들을 고찰하면서 실질적으로 새로운 탈근대의 맹아와 만나게 된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이 결핍과 부재의 필요욕구에 기반 한 홉스의 계산이성의 유산이라는 입장에서, 바타이유의 잉여와 과잉의 방탕이론을 대면하는 것이 그 글의 목표라고 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유한한 자원에 대한 소유권을 둘러싸고 인민전쟁에 나선다는 홉스의 이론적 지반이 필연적으로 요청하는 리바이어던의 계몽주의에 대해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의 합의모델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일종의 이론적 가설의 입장에서 이 글은 서술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근대와 탈근대의 변화 속에서 욕망의 지형의 변화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그 욕망의 지형의 변화에 의해서 정체성의 변화도 필연적으로 수반되고 있으며, 이 정체성의 변화에 입각하여 새롭게 이론이 재구성될 필요성이 도출되는 것이다. 그런 입장과 더불어 스피노자의 이성과 욕망의 평행론은 이러한 욕망의 지형의 변화에 평행적으로 계주하는 합리적 이성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탈근대 논의에 있어서 바타이유가 주장한 리비도경제학을 이성의 영역으로 도입할 수 있는 중요한 가교를 구축하고 있다. 대부분의 포스트모던 논의에 있어서 이성에 대한 논의를 쉽게 버리고 욕망이론으로 탈주하는 것은 일종의 또 하나의 편향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버마스와 바타이유는 근대와 탈근대의 욕망의 지형에 따라 현실 설명력을 증대시킬 수 있는 새로운 계기로서 서로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는 것이 이 글의 요점이다.


1. 계산과 방탕 사이에서

가. 홉스의 결핍이론과 계산이성

홉스의 사상은 초기 근대의 경제적인 상황을 반영하면서, 근대의 경제학의 기본적인 맥락을 구축하였다는데 의미가 있다. 홉스는 유한한 자원 속에서 특정한 개인이 남을 침해해서만 자신의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는 근대 초기의 결핍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재화의 부족과 결핍의 욕구는 인과관계를 가지면서, 근대 초기의 경제적인 내적인 동학을 구체화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시경제학의 수요와 공급곡선과 같은 부분은 홉스의 사상적 배경 하에서 필요욕구와 재화의 동학을 보여준다는데 의미가 있다. 홉스의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상황은 자유 시장경제 체제에서 무한경쟁에 빠진 개개인간의 역학관계를 구체화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문제의 쟁점에는 그것의 원천적인 자원이 유한하기 때문에 투쟁의 상황으로 치달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투쟁의 상황은 결핍의 욕구에 의한 전쟁의 상황을 의미하는 것으로 투영되지만, 사실상 과잉에 대한 해소로서의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홉스는 그것을 과잉으로 해석하지 않고 과소로 해석한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의 과소한 자원 배분에 권력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정당성을 역설하지만, 실질적으로 재화의 집중과 독점에 대한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파열적 투쟁의 상황으로 치달아가는 것을 막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국가와 독점자본간의 유착으로 실질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 의미에서 리바이어던은 계산이성을 실현할 수 있는 화신으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부재로 인한 결핍의 필요욕구를 계산할 수 있는 이성의 등장은 그것을 보장할 수 있는 실질적인 권력조차도 요구하는 것이다. 주권질서는 이러한 계산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그 계산은 결핍의 욕구로 가득 찬 경쟁적 개인을 조정할 수 있는 초월적 권력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근대 초기의 욕망은 결핍과 부재에 대한 갈망으로 사고되며, 계산을 통해서 분배될 수밖에 없는 과소한 재화의 기반을 드러낸다. 이러한 홉스의 사상은 국가자본주의의 기본적인 철학을 의미하며, 결핍과 부재로 가득 찬 욕망의 증대구조를 드러낸다. 이 욕망은 부정적이며, 매우 부재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결핍을 충족하기 위한 갈망의 의미를 담고 있다.


나. 바타이유의 잉여이론과 방탕의 테제

바타이유의 잉여이론은 새로운 경제학적 지평을 보여준다. 홉스의 철학처럼 유한한 자원의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자원의 잉여가 문제가 된다. 바타이유는 잉여를 파괴적으로 다루는 카니발리즘이라는 제의를 분석하면서, 기존 경제학이 다루고 있는 유한한 자원과 이를 둘러싼 결핍의 욕구로 가득 찬 경쟁적 인민이라는 공식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경제학의 기본 철학을 세운 홉스의 공식이 매우 잘못되어 있다는 점을 발견한 바타이유는 잉여에 대한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소모되기를 원하는 잉여의 차원은 새로운 욕망의 지평을 의미한다. 그것은 매우 방탕하게 소비하는 욕망의 존재이다. 그것은 베블런의 과시소비욕구와 매우 유사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베블런이 금융자본주의 하에서 주식 등을 소유한 부재소유의 상황을 과시소비욕구로 자기 계급을 표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바타이유의 잉여에 대한 방탕이론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상황을 예감하고 있다. 그것은 재화의 과소의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재화와 부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문제인 상황을 의미한다. 그것은 근대초기의 계산 이성적 설정이나 고전 경제학의 상황과 매우 다른 상황을 의미한다. 이제 전쟁은 유한한 자원을 둘러싼 투쟁을 의미하기 보다는 과잉되어 있는 자원에 대한 파괴의식으로 바뀐다. 방탕한 자본주의의 욕망은 부르주아계급에 한정되기 보다는 노동귀족들에게도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필요욕구의 수준에 한정되어 있던 노동자들도 부의 재분배에 있어서 잉여와 접속하게 되며, 거대한 귀족계층을 형성하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잉여의 방탕적 소비와 관련된 문제가 사회적 차원의 새로운 지반을 구성한다는 점이다. 이제 잉여에 대한 방탕적 소비는 스놉들의 과시소비와 같은 명품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노동귀족들의 교육 붐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바타이유는 탈근대 상황이 부와 재화가 적어서 문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문제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이론에서의 과소, 과잉의 문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이론은 욕망의 미시 정치적 지형을 간과하면서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의사소통에는 욕망의 미시적인 역학관계가 관철된다. 그 의사소통의 성공여부가 필요욕구에 의한 것인지, 방탕에 의한 것인지에 따라서 문제는 매우 달라질 수밖에 없다. 고급귀족 언어와 서민언어간의 의사소통의 문제도 여기서 제기될 수 있다. 문제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이론이 여전히 진행 중인 홉스의 계산이성적인 합의과정으로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이행, 과소의 문제에서 과잉과 잉여의 문제로의 이행을 간과한 채, 계산 이성적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언어프로그램으로 그것을 한정시켰다는데 문제가 있다.

하버마스가 '생활세계 식민화 테제'를 말할 때, 그것은 잉여에 대한 분배를 둘러싼 양극화에 따른 내부 식민지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체계의 생활세계로의 침투라는 수준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하버마스는 결핍에 사로잡힌 필요욕구의 주체들이 계산적 합의에 이른다는 근대의 설정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탈근대의 상황으로 급속히 치달아가고 있다. 노동을 통한 소득분배가 더 이상 불가능해 진 상황에서 사회적 잉여와 부를 둘러싼 분배의 차원은 전혀 다른 매카니즘이 된 것이다. 동시에 이주민들의 이동과 다문화가정의 형성과 아래로부터의 세계화의 수준은 주권질서를 뒤흔들고 있으며, 리바이어던을 통한 과소한 자원을 둘러싼 인민전쟁의 종식이라는 상황과 다른 방향에서 잉여를 원하는 이주와 도주의 물결을 만들어 내고 있다.  


2. 하버마스와 바타이유와의 대화

가. 하버마스의 근대 계몽주의 기획의 연속에서 결핍이론의 계승

하버마스의 선험적 이성능력으로서의 언어사용능력은 다문화가정에서 발생하는 소수자 언어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는 설정이다. 근대 계몽주의의 설정은 주권체제 내에서의 언어 패러다임을 구체화하는 것이며, 그것을 교육을 통해 계몽시키는데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주 노동자들이나 다문화세대들이 사용하는 소수자 언어가 발생하는 있는 시점에서 하버마스의 언어적 전회의 기획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물론 가장 근원으로 들어가자면, 유한한 자원에 대한 분배의 문제를 계산해 낼 수 있는 능력을 인민에게 교육한다는 주권체제의 계몽의 기획도 같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잉여와 과잉으로 치달아가는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는 매우 설명의 한계를 갖는다는 점이다.

근대의 계몽주의의 기획은 일국적 주권체제의 침식과 잠식에 의해서 유효하지 않은 상황이며, 이 이주민들의 등장의 배경은 바로 부와 잉여를 찾아서 이주하는 거대한 세계 시민의 도주의 물결을 의미하는 것이다. 탈근대의 개막의 배경은 바로 이러한 욕망의 지도의 변화에 기반 하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서 고찰하지 않는다면, 문제의 쟁점에 접근할 수조차 없다. 하버마스에게 있어서 맑스는 근대적 의미에서 계승되고 있지만, 노동이 소득을 보장하지 않고, 주식이나 부동산의 차원에서 부가 분배되는 새로운 상황에서의 양극화는 맑스주의 테제에서 말하고 있지 않다. 사회적 양극화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은 근대의 패러다임을 버리는 것에 있다. 노동을 소득과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 자체와 소득을 연결하는 새로운 시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케인즈주의적인 소비욕망의 긍정의 의미를 담고 있는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하버마스의 긍정은 욕망의 지도에 대한 일정한 긍정의 의미를 담고 있지만, 탈근대 상황에서 변화된 생성적 욕망의 수준, 소수자의 욕망의 수준, 이주민의 욕망의 수준을 독해하기에는 한계를 갖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유한한 자원과 결핍과 부재로서의 욕망, 그것을 둘러싼 인민전쟁이라는 근대의 욕망경제의 기반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나. 바타이유의 방탕이론이 갖고 있는 계몽주의의 종언

바타이유의 잉여를 해결하기 위한 카니발리즘과 같은 제의식에 대한 고찰은 새로운 시대의 잉여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기 위한 증례라고 할 수 있다. 탈근대 사회의 잉여적 부는 새로운 차원의 전쟁기계의 차원을 움직이고 있는데, 그것은 홉스의 인민전쟁의 의미라기보다는 너무도 부가 집적되고 잉여로 가득한 상황에서 그것을 파괴하기 위한 수단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쟁에 대한 입장의 차이에서도 근대와 탈근대는 전혀 다른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 바타이유는 이러한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예감하면서 리비도 경제학을 새롭게 구성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욕망경제는 기존의 고전 경제학의 차원과는 달리, 근대사회의 이면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것을 단순히 성경제학으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욕망경제의 새로운 차원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잉여에 대한 태도가 욕망의 차원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대의 계몽주의의 기획이 갖고 있는 유한한 자원에 대한 인민전쟁을 막기 위한 리바이어던 주권체제의 교육적 기획은 탈근대 상황에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미 리바이어던을 넘어선 초국적 금융자본의 등장을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이제 계몽의 기획으로 이러한 욕망의 차원을 조절해 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초국적 자본의 실존은 리바이어던의 계몽적 계산이성을 늘 초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과 더불어 잉여와 부를 찾아서 길을 나선 이주민들은 일국적 차원의 계몽기획으로 포괄될 수 없는 삶의 욕망의 차원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바타이유는 사실상 근대 계몽주의의 종언을 암묵적으로 말하고 있는 셈이다.

다. 근대와 탈근대 논쟁에서 과소, 과잉의 문제

근대와 탈근대의 시기 구분 논쟁에서 욕망경제의 문제는 사소한 것으로 다루어지거나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 구분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욕망의 역학관계에 달려 있으며, 욕망경제의 지반 변화에 대한 추적을 통해서 시기 구분의 위상을 구체화할 수 있다. 근대는 과소이미지를 투영하는 사고 속에서 그러한 인식적 지반 위에서 논의를 진행했다고 볼 수 있는데, 중요한 점은 욕망의 차원을 부재와 결핍에서 오는 필요욕구의 차원에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근대의 기획 속에서 별종적으로 욕망을 자기보존, 자기긍정, 생성의 의미로 본 사람은 다름 아닌 스피노자였다. 계몽의 프로젝트는 욕망 자체를 게걸스러운 탐욕과 같은 부정적인 힘으로 사고하였으며, 그 결과 이성에 의한 훈육과 계도가 필요하다는 식의 생각을 정당화시켰다.

그러나 탈근대적 지반은 과잉이미지에 기반 하여 욕망이 필요욕구의 수준에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생성과 창조의 영역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은 스피노자의 사상의 계승이라고 할 수 있다. 탈근대의 시각에서는 새로운 욕망의 지도, 새로운 욕망경제가 구성되는데, 계산이성이라기 보다는 재화의 과잉과 잉여 속에서 측정 불가능한 영역으로 향하는 욕망의 새로운 지향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근대와 탈근대의 갈림길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기는 참 힘들 것이지만, 유한한 재화와 결핍에 대한 충족의 욕구라는 과소이미지에서 잉여의 차원, 욕망에 의한 창조와 생성이라는 과잉이미지로의 전변이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을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차원에서도 사고할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원래부터 양면성을 갖고 상보적으로 존재하던 두 양상이 전도되는 과정이었다고 보는 것이 올바르다고 할 수 있다.


3. 나무 형상으로 본 두 이론

가. 하버마스가 고집하는 바오밥 나무

나무는 인식의 유형으로 등장하는 하나의 형상일 뿐만 아니라, 식물과 인간의 삶은 비유적으로 유사성을 갖고 있다고 사고되고는 했다. 나무 중에서도 가장 생존의 욕구로 가득 찬 나무가 아마도 바오밥 나무라고 할 수 있다. 바오밥 나무는 뿌리를 땅 밑으로 뻗어 모든 물을 빨아들이려는 강력한 욕구의 형상이다. 바오밥 나무는 주변에 어떤 식물도 자라날 수 없도록 독점적인 자신의 힘을 갖는다. 이 나무가 생기게 된 이유는 너무도 척박한 환경에 대해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자연적으로 진화되었기 때문이다. 근대의 결핍의 충족을 위한 필요욕구는 바오밥 나무의 거대한 뿌리로 형상화될 수 있다. 그것은 무엇이든 빨아 들여 살아남기 위한 생존에 대한 강력한 욕구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버마스가 근대 계몽이성의 프로젝트를 의사소통적 이성으로 바꾸어낸 것은 바오밥 나무의 존재를 사실상 기반하고 있다. 바오밥 나무와 같이 필요욕구로 가득 차, 유한한 자원 속에서 남들의 이해를 침해하지 않고 인민전쟁으로 치달아가지 않도록 이성은 그것을 소통시켜내고 합의에 이르게 해야 한다. 이러한 의사소통적 합의모델은 바오밥 나무의 생존적인 본능에 기반 한 욕구모델을 사실 상 숨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버마스의 이러한 바오밥 나무 유형에 기반 한 의사소통적 이성은 바오밥 나무가 상호주관성이라기보다는 실지로는 독점적인 이해를 위해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다. 수평적인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이 독점적 이해에 움직이려는 바오밥 나무의 뿌리를 근절해야 한다는 역설이 발생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이론은 내적 자기모순을 가지고 있으며, 이상적인 담화요건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나. 바타이유가 주장한 수상식물형 나무

바오밥 나무는 사막에서 생존하기 위한 진화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새로운 유형의 나무가 있다. 그것은 물이 너무 많아서 자신의 뿌리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게 된 수상 식물형 나무라고 할 수 있다. 이 수상 식물형 나무는 물 위에서 동동 떠다니며, 땅에 뿌리를 박기 않으며, 서로의 뿌리를 지지대로 삼아 군락을 이룬다. 물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던 상황에서 이 나무의 생존방식은 놀랍게도 바타이유의 잉여의 문제에 매우 유사한 형상을 가지고 있다. 이 나무의 주된 특징은 떠돌아다니며 무리를 이룬다는 특징은 노마드적으로 국경을 넘나드는 이주민들의 실존적 양상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이주민들의 특징은 잉여를 찾아서 떠돈다는 것이며, 떠돌이, 이방인들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탈근대의 인간유형을 의미한다.

바타이유의 수상식물형 나무의 유형은 너무 남아돌아가지만, 그것에 대한 수평적인 분배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새로운 상황에서 그것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초국적 자본이나 이주노동자들의 실존적 양상을 보여준다. 이 나무는 뿌리를 지지대로 삼지 않고, 보트처럼 잘 떠돌 수 있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부재와 결핍의 상황에서의 뿌리의 의미와 잉여와 과잉에서의 뿌리의 의미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노마디즘은 이러한 탈근대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며, 바타이유의 과잉과 잉여의 차원은 이러한 형상 속에서 탈근대의 상황을 예감하고 있는 것이다.

다. 두 나무 유형이 갖고 있는 현대인의 정체성 문제

두 나무의 유형으로 보았을 때, 탈근대의 상황에서의 정체성인 다중적 연결접속의 유형으로 뿌리 없이 떠도는 이주민들의 형상과 근대의 상황에서의 정체성인 한 곳에 정착하고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정주민의 형상은 매우 다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욕망의 차원에서의 문제라고 할 수 있으며, 결핍과 잉여 사이에서 욕망이 어떤 쪽으로 수렴 되어 가는가? 라는 중요한 문제지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나무 유형에서 중요한 지점은 아무래도 바오밥 나무의 유형이 잎과 줄기, 뿌리 간의 유기적인 전체를 형성하며, 독점적이고 수직적인 유형의 관계망을 형성했다고 한다면, 수상식물 나무 유형에서는 뿌리줄기들이 서로 연결 접속되어 수평적 관계망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와 탈근대의 인민의 정체성의 상이한 양상은 전체를 보는 시각도 변화시키며, 전체가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라기보다는 부분들이 결합되어 있는 무리로서의 전체로 재규정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유형은 탈근대 상황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중요한 욕망 지반을 보여준다. 더 이상 욕망이 유한한 자원에 대한 분배를 위한 필요욕구에 머물지 않고, 매우 풍부한 잉여를 바탕으로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욕망의 이러한 기반으로부터의 변화는 인식유형이나 정체성을 변화시켰으며, 인민들을 다중적인 수평적 연결접속의 가능성으로 인도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하버마스의 수평적 의사소통은 이상적 담화상황이 아니라, 실질적인 수평적 연결접속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근본적인 변화를 직시하지 못한 채 근대의 욕망의 기반 속에서 관념적으로 탈근대를 예감하였다고 볼 수 있지만, 바타이유는 탈근대의 새로운 욕망의 기반을 정확하게 응시하며 그것의 단초를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4. 이성인가? 욕망인가?

가. 이성이 욕망의 프로그램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요건

이성도 일종의 욕망의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과소적 상황에서 서로의 갈등을 조정하면서, 그것의 합리적인 분배를 위한 계산의 요청이나, 그것의 의사소통적인 합의로의 도출을 위해서 반드시 요구되었던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성과 욕망은 충돌한다기보다는 하나의 일면적 차원을 보여주는 의미에서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이성은 재화나 부가 과소한 상황에서 바오밥나무 유형으로만 디자인 된 결과 매우 협소한 역할만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성의 내적 자기 원인이 이러한 욕망의 지형에만 한정될 때, 의사소통적 이성의 풍부한 논의는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행위이론과 소통이성에 대한 이론은 과소이미지에 협착되어서 논의될 것이 아니라, 욕망의 잉여와 과잉의 문제를 해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에 기반 한 이성의 논의는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할 수 있으며, 형식적 요건으로 존재하는 타당성 요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을 설명할 수 있는 기반에 대한 논의로 바뀌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버마스가 바오밥 나무유형의 욕망 기반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는 기존에 존재하는 수직적 의사소통의 유형에 자신을 가두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오히려 잉여의 차원에서 도출되는 수상식물형 나무 유형의 수평적 연결접속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이론에 도입하는 것이 요구되는 시점인 것이다.

나. 욕망이 이성의 프로그램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요건

바타이유의 방탕이론의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차원의 욕망은 새로운 합리성에 대한 지식을 증대하는데 기여하여야 한다. 욕망의 새로운 차원에 대한 직관이 무엇이었는지 탈근대 상황에서 많은 부분 해명되고 있다고 할 때, 그것을 정확히 인식의 차원에서 해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욕망의 변화는 평행적으로 이성적 차원의 변화도 수반한다. 이성의 영역을 단순히 과소이미지에 갖힌 계산이성으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욕망과 평행적으로 움직이는 이성의 담화가능성의 계기를 남겨두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성에 대한 논의에는 일종의 이론적 공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이론적 공백을 욕망이론으로 탈출하면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새로운 지형을 조명함으로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욕망이론은 이성의 이론일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었지만, 욕망은 가장 이성적으로 고찰되어야 할 삶의 기반이기 때문에, 이성은 욕망의 변동에 조응하여 자신의 이론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탈근대-근대의 논의에 있어서도 이성에 대한 논의는 탈근대를 수용하지 못하면서, 결국 욕망의 새로운 지형에 대해서 접근하지 못하고, 현실과 멀어지는 효과를 갖게 되었다고 할 때, 이성에 대한 논의는 계산이성과 같은 과소이미지에 협착된 기존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으며, 이주노동자와 다문화가정 등이 발생하고 있는 새로운 현실에 대해서 분석하고 평가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 욕망과 이성의 평행론, 스피노자의 부활

하버마스와 바타이유로 대표되는 이성과 욕망의 관계와 바오밥 나무 유형의 필요욕구와 수상식물형 나무유형의 욕망간의 관계는 스피노자의 욕망과 이성의 평행론에 의해서 조명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욕망의 자기운동의 내적 동학과 평행하게 이성의 합리적 의식이 증가한다고 본다. 즉, 변용능력의 증가에 따른 공통관념의 증가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욕망과 이성의 평행론에 입각하여 하버마스와 바타이유를 평가한다면, 바타이유는 새로운 욕망의 변화를 먼저 설명해 냈고, 그것에 대해서 합리적인 판단으로서의 이성능력이 뒤따라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에 기반 한 소통이성이 결핍과 부재에 기반한 필요욕구에 협착될 필요는 전혀 없으며, 새로운 욕망의 지형의 변화에 따라서 이론적 공백을 채워나가는 진지한 행동을 할 필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욕망과 이성의 평행론은 하버마스와 바타이유를 잇는 새로운 가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며, 이성으로부터의 완전한 탈각을 원하는 포스트모던의 논의나 욕망이론의 현실적 변화에 대해서 둔감했던 근대이론의 양 편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을 얻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의 합리주의는 새롭게 재조명되어 이성이론과 욕망이론의 가교의 역할을 해낼 수 있으며, 근대와 탈근대의 논의에서 보인 편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현실을 분석할 수 있는 이론적 지반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 하버마스에게는 2%가 부족한데, 그것은 위대한 철학자 스피노자의 욕망과 이성의 평행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결론 : 잉여, 결핍테제의 쟁점 정리

스피노자의 욕망은 자기긍정, 자기보존, 생성의 중요한 삶의 역동적 역량을 의미하고 있지만, 하버마스와 바타이유의 두 이론에서 조명하고 있는 욕망의 입장은 과소이미지에 협착되거나 과잉이미지에 협착되어 있는 매우 불균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홉스의 계산이성의 합의모델을 암묵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하버마스에게 창조와 생성의 욕망이라는 스피노자의 모델의 입장에 기반 한 이성모델의 평행적 발전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이며, 또한 바타이유에 있어서의 과잉이미지에 기반 한 방탕과 소모하는 욕망의 과시적 형태도 변형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의 입장에서 욕망은 결핍과 잉여의 두 편향이 아니라, 자기 내적인 원인으로서 존재하는 매우 균형 잡힌 이성적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성주의가 욕망을 배제하거나, 욕망이론이 이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결핍과 잉여를 포괄하는 새로운 욕망과 이성의 평행론을 구축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버마스와 바타이유의 양대 이론의 양면적 허점을 극복할 수 있는 이론가가 바로 스피노자라고 할 수 있다. 과잉이미지의 수상 식물 형 나무와 과소이미지의 바오밥 나무 유형은 근대와 탈근대 논의에서 제출된 두 가지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결핍의 형상을 다른 하나는 과잉의 형상을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뿌리줄기 유형의 새로운 식물형을 제시한다. 그것은 옆으로 증식하는 구근식물의 유형이라고 할 수 있으며, 리좀이라는 것으로 지칭될 수 있는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뿌리줄기유형은 바오밥 나무 유형과 수상식물 형 나무 유형을 능가하는 새로운 메타 이미지를 구성하는 것이다. 결국 이 결핍과 과잉의 두 이미지는 리좀이라는 메타이미지에 포괄되며, 그것은 수평적 연결접속이라는 민주적 공동체의 구성을 요청하는 근본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즉, 스피노자 철학은 공통부에 기반 한 민주적 사회의 건설이라는 공공성에 대한 요청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버마스와 바타이유의 대화는 스피노자의 뿌리줄기 유형으로 수렴되어 그것의 해결방안을 구축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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