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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인문과학

하버마스 요약

by 랭님 2009. 11. 30.

Habermas Reader (1~5장 요약)
                                                                          신  승 철

1. 공적 영역의 정치적 기능의 변화

문제제기: 사회복지국가라는 조건에서 사회의 재봉건화과정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키 워 드: 재봉건화, 사회복지국가, 조작된 공중성, 비판적 공중성
명    제: 공적 이해와 사적이해의 결합에 따른 사회의 재봉건화과정은 조작된 공중성을 산출 하는데, 비판적 공중성은 이러한 조작된 공중성과 대립하게 된다.

전제(근거)
국가와 사회에 선행하는 사적영역은 국가와 사회의 결합/중간영역을 발생시키며 제헌적인 의미를 바뀌어 왔다. 면제에 의해 간접적으로 더 이상 허용될 수 없는 것은 이제 긍정적인 고려를 필요로 한다. 사회기구는 정치적 영역의 공공장 안에 있는 국가와 관련된 양식속에서 실천적이 된다. 간접적으로 정당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공공행정기관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그렇게 된다. 그들은 정치적 가율성에 의해 사적 자율성을 획득하고 방어하여야 한다. 공공영역과 사적 영역이 연결되어 있기에 중상주의에 직면한 조직된 사적 이해의 경쟁은 사회의 재봉건화를 이끈다. 재봉건화는 정치적 공적 영역 자체로 이르는데, 여기서 조직들은 가능한 공공성을 배제하고 국가와 서로 정치적 타협을 추구한다. 이 과정에서 계획되거나 조작된 공중성을 통해 동의를 획득하거나 공공영역의 약체화로 나아가는 사실적 추세를 보인다. 서로 개인적으로 다루어지는 사적 민중의 본래대로의 공공성은 조직된 사적 민중의 공공성으로 대체된다. 사회복지 국가의 정치적 공적 영역은 보여지거나 조작된 공중에 대한 여지를 남긴다. 자유주의적 제헌국가의 지속성을 보존하려는 정도에 따라 정치적 공공영역의 위임에 집착하게 된다. 비판적 공중성은 단지 계획되거나 조작된 공중성과 대립하게 된다. 사회복지국가의 조건하에서 작동하는 공중성은 스스로를 산출하는 과정으로서 자신을 인식하여야 한다. 자유주의적 양면가치의 개념이 분명히 만든 것으로서의 사회에 대한 인식은 이해의 구조적 대립의 감소와 극소의 관료적 결정을 가정해 왔다. 막스베버는 의회와 행정부간의 불가피한 모호한 관계에 대한 관점으로 이 경향을 분석한다. 국가의 정치적 관료체제에 대한 통제는 정당들과 압력집단들 속에 있는 사회적/정치적 관료집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거대조직들에서 공중성의 실종, 국가와 사회 양자 안에서 더욱이 그들의 서로 다룸안에서 공중성으로부터 그들의 비약은 경쟁하는 이해의 풀리지 않는 다수성으로부터 기인한다. 구조적으로 근절할 수 없는 이해들의 적대는 비판기능을 충족하기 위해 사회복지국가에 의해 재조직된 공적 영역에 대해 좁은 반경을 위치한다. 압력과 상호압력의 권력적 관계는 그러나 공적으로 실행되는데, 일반이해 기준에 따른 합리성이 원칙적으로 전혀 없는 적어도 불안정한 이해들의 동등화를 창조한다. 정치적 영역에서 효과적이게 되는 공공영역의 두조건 - 관료적 결정의 객관적으로 가능한 최소화와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일반적 이해의 기준에 따라 이해의 구조적 투쟁의 상대화-은 오늘날 단순한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자격박탈할 수 없다. 비판적 공중성과 조작된 목적을 단순히 계획하는 것 사이의 투쟁의 결과는 개방되어 있다. 그것을 이데올로기로 공공연히 비난할 수 없다.

    .  
2. 공적 의견에 대하여
문제제기 : 사회복지국가하에서 어떻게 비판적 공중성을 획득할 것인가?
키 워 드 : 공적 의견, 비공적 의견, 준공적 의견, 공중성, 공중, 대중
주    제 : 사회복지국가는 준공적의견을 포괄함 뿐만아니라 비공적 의견을 포괄함으로서
           비판적 공중성을 획득하여야 한다.

전제(근거)
공적 의견은 서로 다른 의미를 담지하는데, 이것도 정치-사회적인 권력들의 공중성을 복속시키는 역할을 수행하는 규범적 위임통치에 연결된 비판적 권위의 작용에 의해 산출된 것이든지, 아니면 각 개인들과 각 기관들, 소비상품과 프로그램의 작용 하에 있는 공중성이라는 교묘하게 선동되고 이슈화된 것과 결합되어 형성된 대상이든지에 의존한다. 공적 의견의 개념을 정의하는 두 경로는 명백해 졌다. 이것중의 하나는 자유주의 위치로 퇴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붕괴된 공적 의견장 한가운데서 의견을 형성하고 공중을 구조화할 수 있는 다시 말해  단순히 갈채를  제공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비판적으로 논쟁하는 대중이라는 대의제적인 내부적 원환에 관한 대화를 구조하기를 원한다. 다른 경로는 공적 의견의 개념으로 이끄는데, 이 공적 의견은 물질적 기준, 이를테면 이성과 대의제와 같은 것을 고려속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그리고는 제도적 기준으로 그 자체를 규정한다. 입헌적 법률의 사실로서 공적 의견은 공중 자신의 실천적인 행동속에서 더 이상 자기 정립되지 않는다. 공적 의견은 집합적 과정에 대한 사회-심리적인 분석의 꼬리표가 되는데, 공적 의견은 그들이 동일한 사회적 집단의 구성원일 때, 이슈화한 대중들의 태도를 말한다. 집단은 사회-역사적인 조건의 대중으로부터 또한 기구적 수단으로부터 그리고 틀림없이 사회적 기능으로부터 추상화되고 사회적 기능은 정치적 반경속에서 비판적으로 토론하고 있는 대중을 형성하고 의견 자체는 더 이상 추상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이것은 습관만이 아니라, 종교, 관습, 단순한 행동양식도 포괄한다. 공적 의견을 개인의견의 총합으로서 정의하려는 시도는 곧 집단적 관계에 대한 분석에 의해 곧 올바르게 된다. 오늘날의 정치적 장을 특징짓는 공공의 두가지 형태간의 전투는 사회복지국가로서 구성되는 산업사회안에 민주화과정의 판단척도로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비공적 의견은 많은 숫자가 작동중이며, 그리고 공적 의견은 정말로 하나의 꾸며낸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적 의미속에서 공적 의견의 개념은 유지된다. 왜냐하면 사회복지국가의 구성적인 실재가, 즉 사회적 권력과 정치적 지배가 효과적으로 민주적 공중성의 위임자를 지배하는 과정으로서 인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모델 사이에 두 개의 정치적으로 연관된 대화의 지역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 비공식의 사적이고 비공적인 의견이 한편이고, 공식적이고 기구적이고 권위화된 견해가 다른 한편이다. 18세기동안 삶의 사적 영역은 공공장에 대한 명백한 지향속에서 여전히 방어되어 졌다. 역으로 통합문화는 변질한 통조림한 상품을 심리적으로 사적 소비를 위한 공공의 서비스로서 지향된 문화를 배달한다. 집단적 대화과정은 직접적으로, 또는 더 풍부하게, 의견의 리더들을 통해 중재되는 매스미디어의 영향하에 있다. 의견이 본래의 공중의 대화의 그물망의 바깥에 남겨지는데 한해서 그들은 또한 비공적인 의견의 일부인 것이다. 소통적인 비공적 의견의 영역을 넘어서고 반대하여 준공적 의견이 있다. 이러한 정식의 견해의 원인은 특별한 기구들에게 돌아간다. 그것은 사무적이거나 준사무적인 경고, 선언, 선동, 연설을 권위화한다. 거대한 정치적 인쇄물과 일반적으로 그들 공공주의자 조직 이성적 토론과 충고, 영향 (내각, 정부직권, 관리상의 신체들, 의회위원회, 당의 리더쉽, 법인관료, 노조서기)을 산출한다. 기구상에서 공인된 의견으로서 공중의 비공인된 대중과 상호간에 일치를 획득할 수 없다. 두 공간사이에는 자연히 연결점도 존재한다. 항상 매스미디어라는 통로를 통하여 조작되고 계획된 공중성을 통해 구축되어진다. 공공적으로 선언된 것으로서 그들은 준공적 의견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 이성적으로 토론하는 사적 시민들로 구성된 공공의 대화망은 붕괴하였다. 그것으로부터 전에 출현한 공적 의견은 부분적으로 헤체되어 대중없이 사적 시민의 비공식적인 의견이 되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공중성인 의견은 그러나 그 두 대화의 영토가 제삼의 것, 비판적 공중성의 영토에 의해 중재되어진 정도에 따라 다만 산출할 수 있다. 비공적 의견이 준공적 의견의 순환으로 전달되는 비율에 따라 그것이 전달된다면 이 순환 자체는 시민적 공중에 의해 확장되어진 것 속에서 또한 공중성을 획득한다. 하나의 의견이 공적 의견이 되는 정도는 아래와 같은 기준에 의해 측정된다. 조직중인 공공장으로부터 이것이 발생하는 정도는 조직들의 구성원의 공중에 의해 구성되고 그리고 얼마나 많이 조직중인 공공장이 외부적인 매스미디어를 거쳐 사회적 조직과 국가기구들 사이에 대화하는가에 달려있다.  밀은 공중과 대중을 대조했는데;
공중안에 우리가 그 구절을 이해한다고 했을 때, 1) 운좋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받은 만큼 의견를 표현한다. 2) 공중의 대화는 너무 잘 조직되어서 공중에서 표현된 어떤 의견도 즉각적이고 효과적으로 대답되어질 기회가 있다. 의견은 그와 같은 토론에 의해 형성되었다. 3) 이미 효과적인 행동속에 통로를 발견하였다. 심지어 반대로- 필요하다면 - 권위에 대한 확산시스템 그리고 4) 권위적인 기구는 공중을 관통하지 못한다. 이것은 그와 같이 다소 그것의 작동속에서 자율적이다. 역으로 그들이 대중으로 특징화하는 의사소통속에서 말려드는 비율에 따라 의견이 공적 의견이기를 그친다.
대중속에서 1) 민중들이 의견을 받는 것보다 더 작게 의견을 표현한다. 공중이라는 공동체가 매스미디어를 통해 인상을 받아들이는 개인들의 추상적 집합이 된다. 2) 널리 퍼진 대화는 너무 조직되어서 개인들이 즉각적으로 또는 효과적으로 대답하기에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3) 행동속에서 의견의 실현은 그와 같은 행동의 전달을 조직하고 조정하는 권력에 의해 조정된다. 4)대중은 기구로부터 자율성이 없으며, 역으로 권위화된 기구의 수행자는 토론에 의한 의견의 형성을 가지게 되는 어떤 자율성을 환원시키면서 대중을 관통한다.  
문화산업을 경유하여 공중성의 방향이 위치지워짐을 통하여 비공적 의견은 공공적으로 명백한 사람을 통하여 존재하는 시스템으로 통합되어졌다. 즉, 이 시스템에 관련하여 비공적 의견은 어떤 자율성도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거대한 민주적 사회복지국가의 조건하에서 공중의 대화적인 내부결합도는 조직화된 공공장 사이로 삶은 산출되는 비판적 공중성을 통하여 산출될 수 있다. 완전히 짧게 순환된 준공적 의견의 순환은 지금까지의 비공적 의견의 비공식적인 영역과 결합되어야 한다. 투쟁과 동의는 사회의 역사적 발전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범주들이 아니다. 그것은 실질적 변화에 개방되어 있다.


3. 기술적 진보와 사회적 삶의 세계
문제제기: 기술적 진보와 사회적 삶의 세계를 어떻게 매개할 것인가?
키 워 드: 기술적 진보, 사회적 삶의 행동, 토론, 반성, 대화
명    제: 기술적 진보와 사회적 삶의 행동은 정치적으로 효과적인 토론과 대화를 통하여 통하여 매개될 수 있다.

전제(근거)
어느정도 정부전략과 행정의 실천적 질문은 초기시기에 기술적 지식의 적용을 통하여 다루어져 왔다. 기술적 지식의 대부분은 계급적인 기능의 획득된 기예로 실용적으로 제한되어서는 안된다. 다른 한편으로 삶을 통제하는 전통은 근대사회의 자기인식으로 너무 넓게 정의되어서도 안된다. 역사결정론은 자연적이며 전통적인 가치체계를 지향하는 행동의 유효성을 깨뜨려 왔다. 삶의 실행의 질문은 기술적 수단에도 전통적인 행동의 규범에도 배타적으로 집중하지 않는 이성적인 토론을 요구한다. 즉, 기술적으로 가장 진보한 시스템하에서 기술적 진보와 산업사회하의 삶의 행동사이의 매개를 양심적으로 취하게 만들어야 한다. 사회시스템이 기술적 합리성의 조건을 충족시키기에 충분치 않다. 기술적 진보의 사회-문화적인 계획되지 않은 결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것을 조정하는 것에 대하여 배우기 위해 스스로 도전할 것이다. 실천적 지식과 의지의 조절된 관계로 만들 능력을 이성적으로 인도하는 정치적으로 효과적인 토론을 괘도로 오르게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와 같은 토론은 그들의 이해의 전통적 반경의 자기인식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계몽시킬 수 있을 것이다. 잠재력과 의지의 변증법은 이해들에 일치하는 반영없이 오늘날 일어난다. 우리는 기술적 진보와 사회적 삶의 행동의 매개자들이라는 지향점으로 연속할 수 있을 것이다. 반성의 문제는 특별한 자격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지배의 비합리성은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일반적 토론에 속박된 정치적 결정을 만드는 과정의 발전에 의해 단지 지배될 수 있다. 우리는 권력구조의 합리화의 희망을 정치권력과의 대화를 통하여 생각하는 우호적인 조건에 놓여 있다.


4. 정치와 공적 의견의 과학화
문제제기 : 현대 대중민주주의하에서 정치가와 전문가는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여야 하며 어떠 한 위치에 있는가?
키 워 드 : 결단론적 모델, 기술주의적 모델, 실용주의 모델, 상호의사소통, 대중민주주의
명    제 : 현대 대중민주주의하에서 정치가와 전문가들은 그들간의 의사소통을 활성화할 뿐 만아니라 생활세계에 기반하여 시민의 의사소통을 활성화하여야만 한다.

전제(근거):
1) 결단론적 모델: 정치의 과학화는 실재경향이다 베버는 전문가의 의견과 정치적 실천과의 관계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발견한다. 그는 행정가에 의한 행정과 정치적 리더쉽을 엄밀히 분리한다. 결단은 경쟁하는 가치질서와 확신사이에서 만들어 진다. 전문가의 객관적 지식이 합리적 행정기구의 기술과 군사적 보장을 결정하는 한, 그리하여 과학적 규칙이 정치적 실천의 수단을 주관하는 한, 구체적 상황에서 실천적 결단은 이성을 통하여 충분히 합법화될 수 없다. 오늘날 지배의 합리화의 측면에서 결단론적 모델이 유효한가에 대한 질문에 직면해 있다. 결단이론은 새로운 기술을 유용하게 만들지 못하게 하며, 개선된 전통적 기구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환산된 전략과 자동적인 결정과정의 수단에 의해 그와 같이 선택을 합리화한다.
2) 기술지배적 모델: 과학적 인텔리겐차의 수행체는 구체적인 환경에서 객관적이 함축, 유용한 기술과 자원에 대한 요구 뿐만아니라 함축적인 전략과 통제의 규칙을 위해 노력한다. 만약 실천적 질문에 대하여 결단을 합리화할 수 있다면, 기술적 국가에서 정치가는 오직 가상적으로 결단을 만드는 권력으로 남는다. 정치가는 권력의 합리화에서 미봉책과 같은 것이 된다. 국가는 유용한 기술이 적용되는 효과적인 방법을 위하여 권력의 실체를 거부하도록 강제된 것처럼 보인다. 오직 결단론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이해들의 강제된 실현을 위한 기구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에 총괄적으로 합리화된 행정기구의 기관이 된다. 그러나 기술지배적 모델의 취약함은 분명하다. 이것은 기술적 과정에 내재적 필요성을 가정하며 독립된 존재의 외관, 이른바 비반성적이고 비계획적이며 수동적으로 적합한 자연적 역사의 지속안에 사회적 이해가 작용하는 자기규정적인 과정을 소유한다. 기술적 통제의 우리의 권력을 확장하는 연구작용의 틀속에서 우리는 가치시스템에 대하여 적절한 진술을 할 수 없게 되는데, 그것은 예컨데 사회적 필요와 의식의 객관적 상태에 대한 것이고 해방과 퇴보의 지향성에 대한 것이다. 실천적 주제에 대한 경우 우리는 결단론적 모델로 돌아가야 한다.
3) 실용주의 모델에서 전문가의 기능과 정치가 사이의 엄밀한 분리는 비판적 상호작용에 의해 대체된다. 전문가는 사실의 요구를 지배하고 순순하게 결단의 가상적인 권력으로 남는 정치가에 대한 군주가 될 수 없다. 상호의사소통은 가능하고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과학적 전문가가 결정가를 충고하고 정치가가 실천적 필요에 조응하여 과학자를 상담하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이제까지 현대의 대중민주주의구조에 대한 언급없이 전문가의 의견과 정치의 관계의 세가지 모델을 고려해 왔다. 실용주의모델은 민주주의와 필연적으로 연관된다. 권력의 분리와 전문가와 지도자간에 책임성이 결정론적 패턴에 따라 수행되어진다면 시민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기능하는 공공영역은 다만 지배집단을 정당화하는데만 복무할 뿐이다. 최선은 이들 정책결정자가 공중앞에서 그들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의 권력은 정당화될 수는 있으나 합리화될 수 없는 것이다. 합리화의 주장은 반대로 과학화된 정치의 기술주의적 모델에 의해 떠받쳐진다. 물론 정치권력의 합리적 행정기관으로의 환원은 여기서 민주주의를 희생시켜야만 인식될 수 있다. 대화는 사회적 이해속에서 그리고 주어진 사회적 삶-세계의 가치지향성속에서 기반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회적 규정에 의해 지배되고 구체적 상황에서 실용적으로 필요한 것의 역사적으로 결정된 선인식에 기초해야 한다. 과학의 공적 의견에 대한 관계는 정치의 과학화에 대하여 구성적이다. 실용주의모델은 현대 대중민주주의 하에서 정치적 정책입안에 적용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이 모델이 과학적 정보가 실천의 보통언어로 쉽게 번역되어야 하는 사회적 전제조건과 실천적 질문의 문맥으로부터 기술적 전략적 추천물의 특별화된 언어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무시하였다. 오늘날 기술진보의 지향점은 대개 사회적 삶을 재생산하기 위한 강요로부터 자발적으로 생성되는 사회적 이해에 의해 결정된다. 과학적으로 제도화된 정치적 의지의 계몽은 이성적으로 묶인 토론의 기준에 따라서 단지 스스로 대화하는 시민의 지평으로부터 진행할 수 있으며 그리고 그것으로 돌아가야 한다. 기술적 지식에 일치하는 필요의 명료화는 그들 스스로 정치적 행동의 의식속에서 비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을 가지고 전문가는 확신의 행동을 예상해야 한다. 그들이 대표적인 역할을 가정하는 한, 전문가는 실천적인 방법으로 기술과 전통의 도그마를 공유하는 것이 없이 역사철학의 문맥에서 필연적으로 생각한다. 기술이 해석학적으로 명료화된 주어진 상황에 대한 자기인식으로 통합되는 동안, 정치의 과학화과정은 정치적 의지가 계몽을 획득하고, 계몽이 존재하는 정치적 의지에 스며든다는 것을 보증한다면 실현될 수 있다. 이것은 일반적 대화의 이상적 조건에 의해서만 보증될 수 있다. 대중의 탈정치화와 정치제도로서 공공영역의 쇠락은 공적 토론에서 실천적 질문을 배제하려는 지배시스템의 구성요소이다. 번역의 내재적인 과학적 요구도 연구정보의 자유로운 교환의 외적 요구도 응답하는 공공사이의 과학적 연구의 실천적 결과의 토론을 작동시키기에 실천적으로 충분하지 않다. 만약 책임있는 과학자 자신이 궁극적으로 솔선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과학화된 사회는 과학과 기술이 시민의 마을을 통한 삶의 행동에 매개된 정도에 따라서만 이성적인 것으로 스스로 구성된다. 정치적 합리화는 정치적 의지의 계몽을 통해 일어나고 기술적 잠재력에 대한 교육과 서로 관계가 있다.


5. 이데올로기로서 기술과 과학  
문제제기 : 과학과 기술은 어떻게 이데올기화되며, 기술지배를 정당화하는가?
키 워 드 : 목적합리적 행동, 행동의 상호작용, 기술지배적 지배, 이데올로기
명   제 : 대중의 탈정치화로 특징짓는 현대자본주의의 지배권력은 목적합리적 행동의 체계와 구별되는 기술과 과학의 이데올로기화 즉, 기술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이용한다.  

전제(근거)
제도적 행동은 경험적 지식에 기초한 기술적 규칙에 의해 지배된다. 이성적 선택의 행동은 분석적 지식에 기초한 전략들에 의해 지배된다. 목적합리적 행동은 주어진 조건하에 규정된 목표를 실현한다. 제도적 행동이 현실의 효과적 통제의 기준에 따라 적합하거나 적합치 않은 수단을 조직하는 반면 전략적 행동은 가능한 우선적 선택의 올바른 평가에 의존한다. 행동의 상호작용은 묶여진 합의에 의해 성립된 규범에 의해 지배된다. 기술적 규칙과 전략의 유효성이 경험적으로 진리 또는 분석적으로 옳은 제안에 의존하는 반면, 사회적 규범의 유효성은 의도의 상호이해의 상호주관성에만 근거한다. 목적론적 합리화된 행동의 학문상의 규칙들은 사적 구조를 가진 내재화된 규범인 기술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기술은 우리를 문제로 끌수 있는 위치로 놓는다. 두 형태에 관련하여 우리는 목적합리적인 행동 또는 상호행동의 선지배에 따라 사회적 시스템속에서 구별할 수 있다. 사회의 제도적 틀은 상징적 상호작용으로 인도된 규범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경제시스템이나 국가장치 그것 안에 목적 합리적 행동의 원래의 집합이 제도화된 것과 같은 하부조직이 있다. 먼저 우리는 1) 사회나 사회문화적 삶이 세계의 제도적 틀과 2) 그것에 끼워 넣어진 목적합리적 행동의 하부조직 사이의 분석적 층위를 일반적으로 구별하려 한다. 이러한 구별에 도움을 받아 우리는 베버의 합리화개념을 재규정할수 있다. 전통사회는 시민사회의 기준과 만나는 모든 사회시스템을 표시하여 왔다. 이것의 몇 개의 특성은 1) 집중화된 지배권력, 2)사회의 사회-경제계급으로의 분화, 3)정치권력을 합리화하기 위한 중심적 세계관(신화, 복잡한 종교)의 보급등이다. 시민사회는 상대적으로 발전된 기술과 생산의 사회적 과정에서 노동의 분할에 기초하여 건설되어졌다. 생산의 전자본주의적 양식과 전산업적 기술, 전근대적 과학의 안정적 틀은 목적 합리적 행동의 하부조직의 제도적 틀의 전통적 틀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목적 합리적 행동의 하부조직의 영원한 확장을 보증하고, 생산력의 제도화된 틀의 전통적 우월성을 역전시키는 메카니즘으로 이해되어 왔다. 대화적 행동과 일치하는 언어게임의 합리화는 기계적, 전략적 행동과 일치하는 수단-목적 관계의 합리화를 가진 근대시기의 발달에 직면한다. 정당화의 전통적 형태는 붕괴된다. 자본주의는 이 문제에 빠질 뿐만아니라 이것을 해결하는 생산양식에 의해 정의된다. 부르조아적 정의의 이데올로기는 상호성의 범주를 적용하는 바, 정당화의 기초로서 대화적 행동의 연관으로 아직 적용된다. 그러나 상호성의 원칙은 이제 생산과 재생산의 배경 자체를 조직하는 원칙이다. 제도적 틀의 정당화는 즉각적으로 사회적 노동시스템으로 연결될 수 있다. 다만 소유질서는 정치적 관계로부터 생산관계로 변화해 왔는데, 그것이 시장의 합리화, 교환사회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정당화된 권력구조를 통하여 스스로 정당화되었기 때문이다. 목적합리적 행동의 하부조직의 영원한 확장을 수행하는 경제적 메카니즘의 건설과 정치적 시스템이 합리성의 새로운 요구에 적응되는 수단에 의한 경제적 정당화는 이들 발전된 하부구조에 의해 초래되었다. 이속에서 두가지 경향을 구별할 수 있는데 이것은 아래로부터의 합리화와 위로부터의 합리화이다. 전통적 구조는 점차적으로 기계적, 전략적 합리화의 조건에 종속된다. 이러한 것은 근대화의 강요하에 사회의 하부구조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삶의 모든 영역을 취한다. 아래로부터 오는 합리화의 이러한 압력은 위로부터의 합리화의 압력에 의해 만난다. 먼저 전통적 세계관과 객관성은 그들의 권력과 유효성을 잃는다. 둘째로 그들은 전통을 비판하고 형식적 법률과 동등한 것의 교환에 따라 해방된 전통의 물질을 재조직하는 둘다를 동시에 하는 구조로 변형된다. 새로운 것은 세계의 전통해석인 도그마주의 비판으로부터 출현하며 과학적 성격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행동적 권력관계를 분석과 대중적 의식에 의해 접근가능할 수 없게 유지하는 정당화 기능을 유지한다. 근대과학은 철학적 과학으로부터 구별속에서 갈릴레오 시기 이래로 발전해 왔다. 과학과 기술은 19세기부터 최근까지 상호의존적이지 않았다. 근대과학은 기술적 발전을 촉진하는데 기여하지 않았고 아래로부터 합리화로의 압력에 기여하지 않았다. 그것의 근대화과정의 기여는 간접적이다. 19세기이래로 두 개의 발전적 경향이 가장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 되었다. 예컨데 시스템의 안정성을 보증하기 위한 국가의 간섭의 증가와 과학을 생산적 힘으로 전환하는 연구와 기술의 상호의존성의 증가가 그것이다. 두 경향은 맑스에 의해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라고 올바르게 정식화된 해석에서 정치적 경제의 적용에 연관된 조건을 파괴하였다. 기술과 과학이 오늘날 정당화된 정치권력의 기능을 취한다는 마르쿠제의 주장은 올바르다. 자본주의의 실재적 발전은 암시적으로 부르조아의 자본주의 이상과 반대되었고,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다 .그것안에 권력은 중립화되었다. 사적소유권을 통한 자본주의유용성의 형태는 사업순환을 안정화한 사회적, 경제적 정착에 대한 정부의 올바름에 의해 다만 유지되어진다. 이것은 경제적인 관계에서 정치적인 체계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스스로 자율적으로 영속한다면 사회와 국가는 토대와 상부구조로 정의한 맑스이론의 관계에 있지 않을 것이다. 오래된 형태의 정치는 정당화의 전통적 형태를 통하여 실천적 목표의 관계로 스스로를 정의하도록 강제되었다. 오늘날 대체된 프로그램은 반대로 배타적으로 조작된 체계의 기능을 목적으로 한다. 기술적 질문에 대한 해결은 공공토론에 의존하지 않는다. 국가간섭주의의 새로운 정치는 대중의 탈정치화를 요구한다. 사회의 제도적 틀은 여전히 목적합리적 행동 자체의 체계와 구별된다. 대중의 탈정치화가 그럴듯해지는 것은 기술과 과학이 이데올로기 역할을 취함으로서 가능하다. 19세기말이래로 기술의 과학화는 점차 증대되었다. 산업연구의 도래와 더불어 과학, 기술, 산업적 유용성은 시스템으로 녹아들어 갔다. 기술과 과학은 맑스의 노동가치이론에 효력없는 조건을 수행하면서 주도하는 생산적 힘이 되었다. 사회적 이해가 여전히 기술진보의 지향점, 기능, 속도를 결정한는 것은 사실이다. 과학과 기술의 준자율적 진보는 사회시스템의 발전이 과학기술적 진보의 논리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전망을 일으킨다. 기술지배테제는 지적 수준에서 몇가지 해석으로 작용해 왔다. 그러나 더 중요하게 보이는 것은 이것이 탈정치화된 대중의 의식을 꿰뚫는 배경적인 이데올로기가 또한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기술지배적 의도는 새로운 정치의 이데올로기로서 복무하였다. 산업적으로 발전된 사회는 규범에 의해 인도되기 보다는 외적 자극에 의해 조정된 생활방식의 통제모델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기술지배적 의식은 한편으로 모든 선행하는 이데올로기보다 덜 이데올로기적이다. 오늘날의 지배, 그것은 지배에서 특별한 계급의 이해를 정당화하고 해방을 향한 다른 계급의 부분적 욕구를 억누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해방적 욕구자체에 영양을 준다. 부르조아이데올로기는 정당한 상호작용의 기본적 패턴, 지배의 해방, 그리고 상호적인 만족을 거스른다. 옛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객관적 사고와 반성이라는 사회의 기초를 만드는 것을 방해하는데 복무한다. 오늘날 기초는 시스템유지의 일을 전제하는 구조적 조건에 의해 제공된다. 그러나 엣날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두가지 방법에서 다르다 첫째, 오늘날 자본-노동관계는 지위보증하는 정치적 분배메카니즘의 결합 때문에 더 이상 잘못된 착취와 억압을 양산하지 않는다. 기술지배적 의식은 그러므로 초기이데올로기와 같이 집합적 억압의 방식에 동일하게 기반하지 않는다. 둘째, 대중지위는 오늘날 사유화된 필요의 보상을 목적으로 창조되지 않는다. 목적합리적인 행동의 상상적인 시스템의 기능을 대신에 고정시킨다. 기술주의적 의식은 도덕상황에 대한 떼냄이 아니라 삶의 범주와 같이 도덕의 억압을 반영한다. 이 의식의 이데올로기적 핵은 실천적인 것과 기술적인 것 사이의 구별의 소멸이다. 기술지배적 의식은 실천적 이해를 기술적 통제의 우리의 권력의 확장속에서 이해이면에 사라지게 만든다 

[출처] 하버마스 요약|작성자 신승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