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운동의 전개과정과 그 특징
윤수종ꋯ전남대학교 교수/ 사회학
1. 머리말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거리행진을 하고 시위도 하며 매춘부들은 경찰이 성희롱을 하였다고 국가인권위원회에 항의 방문하고 있다. 보호감호소 수용자들은 사회보호법 폐지를 위해 집단단식을 하며, 외국인노동자들은 강제추방에 대항하여 숨고 도망 다닌다. 장애인들은 쇠사슬로 서로를 묶고 괴성을 지르며 이동권을 주장한다. 이것이 21세기 한국 소수자운동의 그림이다. 물론 이런 그림 말고도 많은 그림들이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그림들일 것이다.
사실 운동과 관련하여 소수자 주체에 대한 관심과 논의는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또한 1980년대의 혁명적 열기 속에서 오히려 우리는 주체문제를 이념 속에서 혹은 노동자계급이라는 거대한 틀에서만 생각해 오지 않았던가? 1980년대의 혁명열기가 국가권력을 변혁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권력의 부당성을 사회에 널리 인식시켰고 지배권력 또한 변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오히려 실제적인 삶의 혁명을 가져오려는 소수자운동의 등장은 한국 사회의 운동지형을 넓혀왔을 뿐만 아니라 운동의 질적 내용도 심화시켰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소수자운동의 주체인 소수자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적극적으로 말하면 소수자란 표준화를 거부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소수자는 표준화된 인간상으로부터의 거리에 의해 규정된다고 할 수 있겠다. 이성에 입각하여 설정된 표준적인 근대 인간상은 바로 백인-남성-어른-이성애자-본토박이-건강인-지성인-표준어를 쓰는 사람 등등으로 표상된다. 이성에 집착하는 이러한 다수자적 인간상은 표준화된 모형을 준거로 하여 광기(욕망)를 배제하고 주변으로 통하는 모든 통로를 차단하려고 한다. 따라서 유색인-여성-어린이-동성애자-이주민-환자-무지렁이-사투리를 쓰는 사람 등등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권력과 연결된다. 표준적인 인간상에 대항하여 다양한 소수자상이 표출되는 것은 차이를 강조하는 탈근대에 들어서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다. 우리의 인간에 대한 인식은 점차 근대적인 이성적 인간상에서 탈근대적인 주변적 소수적 인간상으로 이행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윤수종 편, ꡔ다르게 사는 사람들ꡕ, 이학사, 2002, 11-13쪽.
소수자들은 국가 권력으로부터 배제된다는 특징을 지닌다. 즉 국가의 감시 시선에 감지되지 않는 자신들만의 활동을 벌여 나간다. 자신들의 고유한 욕망을 표출하면서 주변으로 향하는 다양한 출구들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일부 소수자들은 합법적인 공간을 확보하면서 국가 장치를 이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소수자들은 국가 장치에 포획되기를 거부하는 특성을 보인다.
이러한 소수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고 자신들의 존립 공간(자유의 공간)을 만들어 나가려고 한다. 윤수종, 「맑스주의의 확장과 소수자운동의 의의」, ꡔ진보평론ꡕ창간호, 1999, 99-124쪽.
2. 제국 시대의 소수자운동
제국 시대에 소수자운동이라. 커져만 가는 지배권력에 대항해서 그 작은 운동으로 어떻게 이기려고 하느냐 하는 것이 승리(권력장악) 관점에 있는 사람들의 비난이다.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새로운 주인이 다르게 만들어간다고 한 기존의 혁명논리에서 볼 때 소수자운동은 그저 주변자들의 청원운동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제국 시대의 운동이야말로 권력에 대항하여 대중이 어디에서나 언제나 자신을 구성해 나가야 한다면, 소수자운동이야말로 권력에 대항하여 주체성을 새로이 만들어가는 주요한 운동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 권력을 해체하는 운동은 좀더 전진적인 세력이 기존 권력에 진입하여 변형시키는 방식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기존 권력에서 벗어나서 자율적인 집합체들을 만들어감으로써 권력을 약화시키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나타난 분권운동 같은 권력참여운동과 같은 소극적인 방식보다는 자율적인 집합체들을 만들어 가는 운동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전지구적(제국) 권력은 국민국가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제기구와 초국적 기업들이 만들어낸 네트워크들, 그리고 대의제를 통해 표현되는 인민들과 그들을 대표하는 NGO 같은 조직들로 이루어져 있다. 제국 권력은 훈육메커니즘, 포획메카니즘을 통해서 대중의 활동을 자신의 이윤추구에 맞추어가려한다. 이러한 초코드화하는 제국권력에 맞서 대중은 다양한 방식으로 투쟁해 나간다.
최근 활성화되고 있는 제국 시대의 대중운동은 반세계화운동, 자율운동, 소수자운동, 보이지 않는 운동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윤수종, 「제국 시대의 대중운동」, ꡔ마르크스주의 연구ꡕ창간호, 2004년 여름, 31-55쪽.
반세계화운동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공세에 반대하는 전지구적 민중운동으로, 세계화의 주도세력 및 국제기구에 대한 포위·타격 투쟁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대안 토론과 논쟁의 장으로서 세계사회포럼이라는 양 축으로 진행하고 있다. 반세계화운동은 9·11을 계기로 반전운동과 결합하여 전개하고 있는데, 대안적인 세계화 상을 모색하며 새로운 국제주의, 새로운 연대방식을 제기하고 있다.
자율운동은 기존의 노동운동 영역에서는 노동자계급 내부의 자율성을 증대시키는 한편 불안정 노동층을 포괄하려는 방향으로 전개된다(공공영역의 확보). 또한 사회적 공간에서는 다양한 층들과 청년들이 점거운동, 반핵운동, 여성운동, 환경운동 등과 결합하면서 지배체제가 강요하는 것과는 다른 삶의 방식들을 실험해 나가고 있다.
보이지 않는 운동은 생체정치적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대중이 자신의 욕망에 따라, 일상생활에서 부과된 것을 거부하거나 변형해 나감으로써 이것이 축적되면 커다란 변형을 가져올 수 있는 흐름이다.
그 외에도 여러 운동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소수자운동도 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소수자운동은 소수자들이 자기정체성을 확인하고 자신들의 색다른 자유의 공간을 만들어 가는 것으로 나타난다. 표준화를 거부하는 소수자들의 운동은 제국시대의 다양한 대중운동의 하나로서, 특히 주체성을 변형하여, 새로운 주체성을 만들어 가는 특징을 지닌다. 또한 소수자운동은 기존 권력(구성된 권력)을 점차 구성권력으로 대체해 나가는 흐름 속에서 운동주체의 폭을 넓히고, 사회 전체의 다양성을 증대시켜 줄 것이며 결국은 권력의 지배력을 약화시킬 것이다.
대중은 이러한 다양한 운동을 통해, 기존 제도화된 틀을 넘어 제국 권력과 대결해 나가며 제국을 압박한다. 그 과정에서 물론 자신들의 자유의 공간을 확장해 간다. 가타리의 생각 Felix Guattari, 'Plan de la planète', La Révolution Moléculaire, 10/18, 1980, pp. 99-117.
처럼 오히려 제국화의 경향 속에서 반대방향으로 넓히는 운동, 즉 소수자들의 다양한 증식이야말로 제국의 지구계획에 맞서 대중의 삶의 공간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3. 소수자운동의 전개과정
‘우리는 모두 소수자다’라는 구호가 있듯이 모든 사람은 특이성(singularité)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소수자이다. 나아가 그 특이성이 발현되면서 표준화되지 않는 많은 개인들이나 집합체들이 나타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자운동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얼핏 나열하더라도, 매춘여성운동, 장애인운동, 동성애자운동, 외국인노동자운동, 죄수운동, 양심적 병역거부운동, 넝마주이운동, 탈북자운동, 북파공작원운동, 어린이운동, 불안정노동자운동, 청년운동, 실업자운동, 부랑자운동, 중독자운동, 환자운동, 정신병원수용자운동, 노숙자운동, 혼혈아운동, 수양부모운동, 다른 과학운동, 성폭력반대운동 등등.
또한 소수자운동은 자신들의 고유한 공간을 만들어 나가기 때문에 곧바로 대안운동과 결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어린이운동은 곧바로 공동육아운동이나 대안교육운동 등과 연결된다. 그러나 소수자운동이 곧바로 가시적인 대안들을 만들어 내지는 않더라도 이미 그 잠재적 형태들을 실험해 나간다.
최근 10여 년간 한국의 소수자운동은 두드러지게 약진하였다. 물론 기존의 노동자운동이나 부문운동의 발전이 있었고 그러한 운동들이 대중의 인식과 생활을 변형시켰기 때문에 이러한 소수자운동들이 활성화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한국사회에서 지난 10여 년간 가장 두드러진 소수자운동 가운데 몇 가지를 선별하여 간략히 살펴보고, 소수자운동의 특징을 논의해 보고자 한다.
1) 매춘여성(성판매여성) 운동
성매매관련 운동은 한국교회여성연합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기생관광반대운동과 인신매매반대운동, 매춘여성들을 위한 쉼터와 한소리회를 중심으로 한 매춘여성인권운동이 있다. 그리고 성매매를 여성주의적으로 접근하려는 성매매반대운동과 여성학적 논의들이 있었다. 전자는 1970-1980년대 활발히 진행되었고, 1990년대 들어 소수자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지닌 후자가 주를 이루고 있다. 민경자, ‘한국매춘여성운동사’, ꡔ한국여성인권운동사ꡕ, 한울, 1999, 239-299쪽.
매춘(성판매)여성들은 매우 부정적인 자아인식을 가지고 있다. 가족에게 배제되고 대부분 예명을 쓰며 과장된 치장을 한다. 그러면서도 순결과 정절이데올로기를 수용하는 모순적인 자아정체감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매춘여성들은 생존을 위하여 서로 협력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라는 동류의식을 갖고,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로 돕고 고통을 나누면서 자신의 환경에 대해 일상적인 저항을 해나가는 경우가 많다. 이들이 서로 도와주는 방식은 집단동거, 탈출, 탈매춘 등등 아주 다양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생긴 연결망은 매춘여성들 간의 자치적인 자조모임으로 차츰 발전하게 되었다.
1960년대 초반 이후 대부분의 기지촌에서는 당국과 포주들이 매춘여성들을 관리하기 위해 자치조직을 만들었다. 타율적인 조직화였지만 이를 통해 매춘여성들은 자신들의 자아정체감을 조금씩 획득해 갔고 집단행동도 하기 시작하였다. 민경자, ‘한국 매춘여성의 연대와 집단화’, ꡔ진보평론ꡕ13호, 2002년 가을, 185-216쪽.
1972년 송탄지역의 자치회 회원 1천여명은 미군들이 화대를 인하하라는 유인물을 돌리자, 미군성토대회를 열고 미군기지 정문 앞에 몰려가 농성을 벌인 일이 있었다. 또 강제성병검사를 둘러싼 비리와 부정에 대한 폭로와 자신들의 권리를 찾으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1971년에는 기지촌 여성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미군을 즉각 체포할 것을 요구하며 200여명이 미군기지 앞에서 몽둥이를 들고 시위를 벌인 일도 있다.
한편 1981년, 용산역 앞의 매춘여성들 250여명은 자치적인 자조모임인 개나리회를 만들었다. 이 모임에서는 기둥서방 없애기, 펨프손님 안받기, 고운말 쓰기, 물건 싸게 팔고 싸게 사기, 계산 잘해서 받기, 1인1통장 갖기, 약 줄이기, 놀음화투 줄이기 등등 다양한 운동을 벌이고 양로원, 고아원, 나환자마을 등에서 봉사활동도 하였다. 지금 보아도 개나리회는 급진적인 문제의식을 지니고 출발하였던 자율적 자치조직으로, 다양한 악조건 때문에, 만들어졌다 없어졌다를 반복하였다. 막달레나의 집 엮음, ꡔ용감한 여성들, 늑대를 타고 달리는ꡕ, 삼인, 2002, 256-318쪽.
매춘여성운동은 활동가들이 쉼터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쉼터로는 1984년 용산역 앞에 막달레나의 집이 처음 설립된 이후 1988년 사마리아의 집이 설립되었고, 그 후 여러 쉼터들이 생겨나고 있다. 쉼터는 도망 나온 매춘여성에게 머물 곳을 제공하고 위로하며 그들이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물론 매춘여성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각종 상담을 비롯하여 여성교실이나 공부방, 어린이방 등을 운영하며 경조사 등도 감당해 낸다. 이옥정 구술, 엄상미 정리, ꡔ막달레나, 막 달래나?ꡕ, 개마서원, 2000.
막달레나의 집은 설립 이후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매춘여성들과 활동가, 연구자들의 결합역할을 하며 성매매를 인정하느냐 마느냐는 논의를 과감히 넘어, 매춘여성 자신이 필드워커로서 변신해 나가는 과정을 함께 실험해 나가고 있다. 막달레나의 집 엮음, ꡔ용감한 여성들 필드워크를 하다ꡕ, 막달레나의 집, 2002.
활동가들뿐만 아니라 매춘여성들이 변해가는 과정을 통해 매춘여성 문제를 내부적으로 탐사하며 새로운 형태의 쉼터나 센터들을 계속 탐색하고 있다.
또한 쉼터는 기지촌 지역에서도 만들어졌는데, 1986년 의정부에서 기지촌여성쉼터 ‘두레방’이 출범하였다. 두레방의 주요 사업은 상담, 영어교실, 공동식사, 탁아, 탈매춘을 위한 전업사업, 기지촌활동 등이었다. 그 외에도 혼혈아동을 위한 공부방, 놀이방 운영, 대학생들의 기지촌 활동, 전업프로그램으로서 두레방 빵사업, 기지촌 여성의 삶을 알리는 각종 강연과 회지발간 등의 사업을 하고 있다. 특히 두레방의 전업사업은 매춘여성정책에 분명한 대안을 제시한 바 있다. 1996년 이후 학생운동 출신의 활동가들이 빠져나가고, 지금은 교회여성 출신들이 어렵게 꾸려가고 있다.
두레방에서 함께 활동하던 젊은 학생운동출신 활동가들이 기지촌 여성과 아동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 위해, 1996년 동두천에서, 종교로부터 자유로운 ‘새움터’를 열었다. ‘새움터’는 시장조사, 허브재배, 직업재활상담 등 직업재활프로그램을 시작하였고, 그 후 허브가공가게(꽃가게)를 열고 공동작업장도 마련하여 매춘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전업사업을 전개하였다. 지금도 직업재활센터(전업센터)와 아동센터, 그리고 상담실 체제를 갖추고 활동하고 있는데. 아동센터는 혼혈아동들을 중심으로 상담과 교육활동을 하며 상담실은 오후 1시에 공동식사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집단상담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정희진, 「죽어야 사는 여성들의 인권」, ꡔ한국여성인권운동사ꡕ, 한울, 1999, 300-358쪽.
성판매여성운동은 쉼터 형식의 자기조직화를 꾀하는 한편 제도개선을 위한 운동도 벌여나간다. 현행법상 매춘여성들은 ‘범법자’인 까닭에 인권침해사례들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매춘여성 관련제도들을 개선하려는 것이다.
특히 1998년 쉼터들이 결집하여 ‘매매춘 근절을 위한 한소리회(한소리회)’라는 연합체를 구성하였다. 한소리회는 성매매문제를 사회에 제기하고 매춘여성들을 효율적으로 지원하며 국제연대 강화가 그 목적이다. 한소리회는 24시간 상담전화를 일상적으로 운영하는데, 대부분 상담은 빚 문제 때문에 탈매춘을 할 수 없음을 호소하는 내용들이다. 그리고 한소리회는 개별쉼터와 연계하여 관계기관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포부의 빚 포기각서를 받고, 빚을 청산하여주는 일, 인권유린 상황을 여론화 하는 일 등을 하고 있다. 또한 한국교회여성연합회는 그동안 쉼터운동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던 상담 요구에 부응하여 1997년 ‘가출소녀와 매춘여성에게 열린 전화’를 개소하기도 하였다.
한편 한소리회, 한국교회여성연합회 등이 중심이 되어 법개정운동도 벌여나갔다. 1994년부터 매춘여성에 대한 보호처분을 가능케 한 ‘윤락행위등방지법’ 개정운동을 벌였으며 1996년에는 이러한 움직임을 약간 반영한 보건복지부 개정안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처벌규정을 강화하는 쪽으로 개정되었을 뿐, 매춘여성들의 인권보호와 재활 등에 대해서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더욱이 성매매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사창의 공창화’ 방안처럼 성매매 합법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아직 매춘여성운동은 직업권을 획득하려는 운동으로까지 나가지는 않기에, 공창제는 반대하고 있다. 1990년대 후반, 10대여성 성매매 반대운동이 국가의 청소년보호정책의 일환으로 제기되었다. 국가주도의 이러한 성매매반대운동은 오히려 매춘여성의 실질적 삶과 인권에 대한 논의를 잠재우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최근 들어서는 미성년 성폭력 범죄자들을 공개하는 문제로 다시 한번 성매매 문제가 매춘여성에게서 멀어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기지촌 지역에는 외국(필리핀, 러시아 등)여성들의 유입이 늘고 있고, 한국 매춘여성과의 갈등도 나타나고 있다.
2) 동성애(성적 소수자) 운동
동성애운동은 1993년 11월 7명으로 구성된 초동회라는 모임이 그 시작이다. 게이와 레즈비언이 함께 구성한 이 모임은 왜곡된 동성애자 이미지를 바로 알리며 오도된 에이즈운동을 비판하는데 주목적을 두고 소식지를 제작하여 종로일대 게이바와 극장에 배포하였다. 그러나 초동회는 곧 해체되었다. 동성애자라 할지라도 남성과 여성의 활동방식과 내용이 달랐기 때문이다. 동성애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바로잡는 것은 공통의 목표였지만 게이들은 에이즈예방교육을, 레즈비언들은 여성과 동성애자라는 이중적 억압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고민해야 했기 때문이다. 종로 낙원동과 같은 지역에 게이커뮤니티가 있었던 게이들은 곧바로 1994년 2월에 친구사이(남성동성애자 인권운동단체)를 조직했지만 레즈비언들은 어렵게 11월에 끼리끼리(여성동성애자 인권운동단체)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들은 소식지를 발간하고 상담을 하며 각종 모임을 만들어 나갔다.
1995년 들어, 서울의 유명대학들에서 동성애자모임이 발족되면서 동성애담론이 확산되어 갔다. 몇 사람은 커밍아웃하여 매체에 적극 나서고 학술적인 차원의 논의도 유도하였다. 6월에는 관련 4개 단체가 모여 ‘동성애자인권운동협의회(동인협)’을 결성하였다. 동인협은 여름인권학교, 기금마련행사 등을 개최하면서 내부역량을 다져 나갔다. 또한 PC통신에 동성애논쟁이 크게 일게 되었다. 그러면서 기존 단체들의 인권운동은 동성애자를 비하하고 에이즈의 주범인양 편견을 조장하는 언론에 대해 대처하는 한편 언론을 활용하는 데 집중하였다. 점차 위세를 떨치게 된 PC통신모임들은 동성애자들끼리의 만남을 훨씬 쉽게 만들었고, 동성애관련 정보와 생활방식들에 대한 논의를 확산시켰다. 동성애담론이 만개하고 각종 논쟁이 일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동성애커뮤니티들이 전국적으로 그리고 레즈비언까지 확산되어 갔다.
동성애운동은 1997년에는 노동법과 안기부법 개악에 반대하는 노동자투쟁에 연대투쟁하기도 하면서 좀더 적극적으로 활동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1월 14일에는 대학로에 레인보우깃발을 휘날리며 ‘한국동성애자들이 처음으로 거리시위를 한 날’이었다. 6월에는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중고교교과서 개정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동성애자 인터넷사이트가 만들어지고 퀴어영화제를 개최하려 시도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무산되었다. 또한 한 PC통신에서 하나의 모임만 가능했으므로 자연스럽게 서울 중심의 모임이 되었는데, 좀더 자유로운 전화사서함의 일종인 153전화모임이 활성화되면서 각 지방에 자생적인 모임이 만들어졌다(전화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남기고 다른 사람이 남긴 목소리도 들을 수 있는 그런 서비스, 전국모임까지 개최).
이제 동성애자 모임은 PC통신모임, 153모임, 인권운동모임, 대학모임 등으로 분명히 나뉘고, 단체명이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만 전국적으로 30개(1998년)에 달할 정도로 확대되었다. 동성애커뮤니티를 이끄는 주체가 다양해지면서 전국 23개 단체들이 모여 ‘한국동성애자단체협의회(한동협)’를 결성하였다. 한동협은 각모임의 지역차이나 성격차이를 극복하고 수평적인 의사교류체계를 갖자는 목표를 내세웠다. 그리고 국가인권법 제정을 위한 시민운동단체들의 연합에 참여하였다. 또한 언론 보도에 항의하여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려, 시위를 하기도 하였다. 활동가들의 역량을 집결하여 서울퀴어영화제도 개최하였고 출판활동을 비롯하여 동성애관련 각종 문화행사를 활발하게 시도하였다.
동성애운동은 인터넷 보급으로 크게 달라졌다. 1999년 PC통신 실명제가 실시되면서 PC통신모임보다는 인터넷상의 동성애자모임이 약진하였다. 1999년 후반기 인터넷전용선이 점차 보급되면서 2000년 들어, 동성애자커뮤니티는 인터넷 중심으로 전환되었고 인터넷사이트는 양적, 질적으로 급속히 팽창했다. 인터넷상의 팽창이나 움직임과는 달리 오프라인에서는 별다른 쟁점도 없었다. 단체들도 시위나 대정부투쟁들은 거의 하지 않고 자체 내부의 프로그램이나 인권학교 등을 개최해 나갔다. 인권운동은 점차 쇠퇴하고 하위문화로서 게이커뮤니티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물론 이전부터 있어 왔지만 점차 이태원을 중심으로 한 게이커뮤니티가 확장되면서 중년층 게이는 종로, 청년층 게이는 이태원, 레즈비언은 신촌이라는 공식이 자리 잡게 된다.
인터넷 사이트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동성애자 커뮤니티를 이루게 되고 커뮤니티가 150여개(2000년) 만들어졌지만 동성애자 커뮤니티는 급속히 개인화되고 탈정치화되는 흐름 속에서 단체협의회 등을 구성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또한 포털 사이트 다음(Daum)이 1999년 5월 카페서비스를 개시한 이후 많은 동성애자카페들이 생겨나 또 하나의 세력권을 이루게 되었다(330여개). 특히 이런 변화와 더불어 성인 위주의 동성애자 모임에서 환영받지 못하던 청소년 동성애자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서울퀴어영화제도 열고 특히 퀴어문화축제를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여러 단체들이 참여하여 조직위원회를 꾸미고 축제를 계속해 나가고 있다. 조용하던 동성애자활동가 단체들은 홍석천 사건으로 다른 사회단체들과 연합하여 지지모임을 만들고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없애라는 요구를 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2001년에는 트랜스젠더 스타의 매체등장과 인터넷검열 문제로 시끄러웠다. 못생긴 트랜스젠더 이야기 김비, ꡔ못생긴 트랜스젠더 김비이야기ꡕ, 오상, 2001.
는 빠지고 예쁜 트랜스젠더 이야기가 난무했지만 다양한 성에 대한 인식이 점차 확산되었다. 그리고 정보통신윤리위원회와 청소년보호위원회에 대항한 싸움이 본격화되었다. 동성애를 퇴폐2등급으로 규정한 정통윤의 조치에 항의하고 또 대표적인 동성애인터넷 사이트 엑스존 폐쇄조치에 대해 재판까지 마다않는 대응을 하고 있다. 서동진, 「성적 시민권의 정치학과 비이성애적 주체」, ꡔ한국의 소수자, 실태와 전망ꡕ, 2003년 한국사회학회/한국문화인류학회 공동심포지움, 85-101쪽.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적인 표현을 수정할 것을 국가인권위에 제기하였다.
특히 6월에 퀴어문화축제를 둘러싸고 조직위원회와 동인련(동성애자인권연대) 사이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동인련대표의 ‘대표행세’에 대한 논란이 일었고 7월말에 ‘한국동성애자연합’이 결성되었다. 내부의 권력화에 대응하여 오히려 연합체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또한 트랜스젠더 문제를 둘러싸고 성별정정 요구가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대학동성애자모임들이나 동성애자인권단체들이 국가인권위원회를 차별시정기구로 적극 활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2003년에는 동성애청소년의 자살과 군대내 동성애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청소년보호법 안의 동성애차별조항 삭제를 둘러싼 싸움이 삭제 쪽으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다른 법적인 권리투쟁에서는 아직도 동성애적 관계나 동성애적 사랑을 인정하지 않는 판결과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이제는 동성애단체들의 활동도 점차 제도화되어 가고 있지만 개인들의 법적 싸움은 여전히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1년여 동안 준비해 왔던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가 공식 창립을 선언하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ꡔ버디ꡕ, 20호, 2002년 봄.
2004년 5월에는 레즈비언인권연구소가 개소하였다.
이상에서 동성애운동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하였다. 이제 동성애조직과 단체들의 운영과 활동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인권운동 측면에서는 친구사이와 끼리끼리가 대표적인 단체로서 회원조직이며 동인련은 활동가 조직이고, 퀴어영화제사무국도 인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의 활동이 돋보이고 있다.
그리고 연대차원의 운동에서는 게이와 레즈비언이 함께 하였지만 단체들 수준에서는 일찍부터 분리되어 활동하였다. 이해솔, 「한국 레즈비언 인권운동사」, ꡔ한국여성인권운동사ꡕ, 한울, 1999, 359-403쪽.
레즈비언 모임은 다양하며 점차 밖으로 나오는 양상이다. 그러나 레즈비언 커뮤니티는 동성애자이며 여성이라는 이중적 차별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여전히 움츠러들고 있다. 반면 인권운동과 조직활동에서는 게이단체들이나 모임들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또한 동성애 운동에서 나타났던 내부 권력화 문제는 조직화 문제에서 새로운 방향설정을 요구하였다. 진통 끝에 구성되었던 한동연은 조직의 운영원칙을 대표제를 두지 않는 방향에서 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보면 운영위원회와 사무국, 그리고 자원활동단을 두고 이들을 상하 구조조직이 아니며 각자의 역할과 참여도에 의해 구분하였을 뿐이고. 세 단위의 구성원은 동등한 발언권을 가지도록 하였다. 대표체가 아니라 ‘명실상부한 한국동성애자들의 연합체가 되기 위해 민주적 절차와 협의의 과정들을 원칙에 두고, 더욱 많은 의견 개진과 활발한 논의를 위해 조직 구성을 강화해 나갈 것’을 제기하였다.
전반적으로 동성애 운동은 성적 소수자 운동으로 지평을 넓혀가려 하고 있고, 트랜스젠더, 양성애자, 복장도착자, 사도-마저히스트 등을 포괄해 나가려 하고 있다. 현재는 트랜스젠더 문제가 부각되고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가시적인 동성애운동은 인터넷 커뮤니티와 지역커뮤니티라는 기반 위에서 진행된다. 물론 우리나라 동성애운동은 억압적인 상황에서 인권운동으로 출발하면서 점차 다양한 쟁점들을 포괄해 나갔는데, 점차 동성애자들의 욕망을 발산할 수 있는 다양한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가상공간인 인터넷커뮤니티는 현실공간에 존재를 드러내기에 부담스러운 동성애자들이 함께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특히 가상공간이 갖는 탈시간적, 탈공간적 특성으로 인해 현실공간에서 시공간적으로 많은 제한을 지닌 동성애자들이 모이게 되었고, 특히 청소년이나 지방에 거주하는 동성애자들의 결집을 가능하게 하였다.
레즈비언의 경우 오프라인 공간은 인권단체와 레즈비언 바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인권단체와 레즈비언 바(혼성 바도 생기고 있다)가 문화행사나 이벤트를 통해 여성동성애자들을 한자리에 결집시키지만 직업, 나이, 취미, 성정체성 등 다양한 차이에서 오는 관심과 욕구들을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가상공간에서의 활동은 바로 이러한 것들을 각종 소모임과 동호회 공간을 통해서 표현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정경운, 「여성 성적소수자의 가상공간 활동에 대하여」, ꡔ진보평론ꡕ14호, 2002년 겨울, 180-202쪽.
게이의 경우 오래전부터 지역커뮤니티가 발달해 왔다. 게이들이 만남의 장소로 활용해 왔던 화장실, 사우나, 극장의 역사는 정말 ‘고유한 역사’를 지닐 정도며 최근 들어서는 찜질방이 활성화되고 있다. 이러한 만남의 장소가 특정 지역에 근접해 있거나 주위에 게이바가 생기면 지역게이커뮤니티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지역커뮤니티는 종로와 지방 대도시의 터미널부근 등에서 형성되어 오다가 1990년대 들어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다. 전통적인 종로 낙원동 뿐만 아니라 젊은 게이들이 모이면서 활성화된 이태원의 게이커뮤니티, 그 외에도 신당동, 약수동, 그리고 지방 대도시의 지역커뮤니티들은 어둠침침한 불빛을 걷어내고 환한 불빛을 드러내고 있다. 유흥문화 중심으로 형성된 한계가 있지만 이러한 지역커뮤니티는 동성애자들의 자유로운 생활공간으로 발돋움하였다.
3) 장애인 운동
한국에 장애인 자신에 의한 장애인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87년 민주화대투쟁을 거치면서이다. 1986년 ‘전국지체부자유 대학생연합’은 그 동안의 친목, 동아리 중심의 모임에서 벗어나 장애인운동을 선포하고 심신장애인복지법 개정투쟁,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을 위한 투쟁을 벌였다(야3당 점거농성). 이후 1987년 대선을 기점으로 정책대안들이 활발히 제기되었다. 1988년에는 장애인올림픽 개최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장애인의 현실과 복지와 너무나 유리된 전시적인 올림픽이, 우리나라 장애인의 지위를 포장하고 미화하는 기만적인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비리장애인 시설과 단체장들을 고발하고 퇴진을 요구하는 활동과 장애인 대중에 기반한 운동을 지향하는 흐름이 존재했다. 당시 장애인운동에는 대학내 관련학과와 봉사동아리의 비장애인들이 많이 결합하였다. 1989년 정점에 이른 ‘장애인복지법’,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운동은 1990년 양 법안이 제정되는 결실을 맺었다. 이연재, 「제6공화국하의 장애인」, 한국장애인복지정책연구회 펴냄, ꡔ한국의 장애인ꡕ, 1993, 121-164쪽.
또한 이 시기에는 지체장애인협회의 출범으로 장애인의 정치세력화라는 용어가 생겨났으며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의 창립으로 장애인인식개선과 장애인문제를 지속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새로운 장치를 마련하였다.
1991년 한 장애인학교설립에 반대하는 주민들에 대해 대처하기 위한 공대위가 만들어졌다. 이 공대위에는 이 문제에 공감한 많은 단체들이 참여하였고 곧 장애인복지공동대책위원회로 전환하여 활동하였다. 특히 1993년에는 ‘특수교육진흥법’ 개정운동을 벌였다. 장애아동의 의무교육면제제도를 폐지하고 장애아동의 의무교육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공대위는 한국장애인복지공동대책협의회(장대협)로 전환하였고 1998년 법인단체들만 모아서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으로 묶였다. 최근 들어 장애인당사자주의가 대두하면서 장애인당사자 주도로 운동을 해온 한국DPI(장애인연맹)를 비롯하여 4개단체가 모여 장애인당사자단체 협의체인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를 2002년 3월 출범시켰다. 여타 단체들도 가입을 계속하고 있다. 협의체 수준에서 색다른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최근에 장애인단체들은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대한 논의를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장애인운동에서 무엇보다도 커다란 사회적 의제를 제기한 것은 이동권투쟁이었다. 온몸에 쇠사슬을 묶고 버스를, 혹은 지하철로를 점거한 채 ‘장애인도 버스를(지하철) 타고 싶다’, ‘장애인에게 이동권을 보장하라’고 절규하는 장애인들의 모습에서 일반시민들은 강한 인상을 받았다. 장애인이동권투쟁은 2001년 1월 오이도역에서 장애인이 리프트를 타다 추락사한 사건을 계기로 대책위가 꾸려지면서 시작되었다. 대책위는 사건이 터졌을 때 사안별로 대응할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동권 문제를 제기하자는 취지 하에 출발하였다. 따라서 지하철뿐만 아니라 버스 등 대중교통 문제를 함께 거론하였다. 4월 들어 ‘장애인이동권쟁취를 위한 이동권연대회의(이동권연대)’가 결성되면서 이동권투쟁의 막이 올랐다. 첫 시작은 서울역 선로점거농성이라는 매우 극적인 형태였고, 이후 이동권투쟁은 이후 정부종합청사앞 1인시위, 지하철연착투쟁, 시청앞 노숙투쟁 및 서울역 천막농성, 버스점거투쟁, 사다리와 쇠사슬을 목에 걸고 한 종로거리 점거농성, 이순신 동상 고공시위, 버스탑승투쟁 김도현, 「장애인 노동권·생활권 쟁취를 위한 장애인운동의 과제」, ꡔ진보평론ꡕ12호, 2002년 여름, 113-126쪽.
등 다양한 형태로 전개하였다. 이동권연대는 제도개선(손해배상청구소송), 정부투쟁(천막농성, 버스점거, 지하철점거), 캠페인(100만인서명운동)의 세 가지 차원에서 다각적인 투쟁을 전개하고 있으며, 울산, 광주, 인천 등지의 지역조직도 만들어져 있으며 지금도 활발하게 투쟁하고 있다.
장애인운동의 이러한 활발한 전개 속에서 장애여성들은 독자적인 운동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나섰다. 김은정, 「정상성에 도전하는 여성들」, ꡔ한국여성인권운동사ꡕ, 한울, 1999, 404-451쪽.
장애인운동에는 1980년대 후반까지는 여성들이 더 많이 참여하거나 남녀가 거의 동등한 비율로 참여해 왔다. 그러나 운동단체들이 조직화되면서 남성중심의 대표체계와 운동방식이 주조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장애여성성폭력, 가정폭력 문제를 계기로 장애여성의 문제들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의 ‘빗장을 여는 사람들’의 장애여성들이 국제대회에 참여하면서 장애여성 문제를 의제로 올렸고 나아가 장애여성의 독자적인 조직화 필요성이 대두하게 되었다. 1998년 2월 결성된 ‘장애여성 공감’은 대표 없이 운영위원들이 중심이 되어 움직이며 학령, 연령에 따른 위계도 거부하면서 자기표현프로그램, 회원대상프로그램을 하고 잡지를 발간한다. 약 50여명의 회원이 있으며 지체장애인이 많고 여성들뿐이다. 장애여성 공감이 자조조직의 성격이 강하다면, ‘대구장애여성연대’는 지역풀뿌리 연대를 지향하는 장애여성 당사자단체이다. 1997년 6월 다른 이름으로 출발하여 재가장애여성 방문상담을 비롯하여 여러 활동을 하였고 2001년에는 대구여성장애인성폭력상담소를 개소하여 활동하고 있다. 동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회원들에게 달려가는 열린 조직화를 지향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관련단체들과 대구지역 장애인단체연대회의를 결성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조미경, 「한국 장애여성운동의 흐름과 과제」, 5·18연구소, ꡔ민주주의와 인권ꡕ2권1호, 2002년, 137-174쪽.
이처럼 장애인운동은 법개선운동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장애인들의 삶을 바꾸려는 노력도 하고 있다. 이른바 자립생활운동이라고 하는 것이다. 재활이라고 하는 패러다임은 비장애인들에게 적합하게 만들어진(장애인들에게는 부적합한) 사회 틀 속으로 장애인들이 들어가 적응하고 살 것을, 장애인들에게 강요하는 논리이다. 여기서 도태되는 중증의 장애인들은 자신들의 욕구를 무시당한 채 시설이나 부모의 보호 아래 평생을 살아갈 것을 강요당한다. 이에 대항하여 자립생활운동은 장애인 당사자가 자립의 욕구를 가지고 부모나 시설의 보호에서 벗어나 지역사회에서 자립하여 살아가는 것을 지향한다.
자립생활운동은 당사자 주체의 역량강화와 욕구충족, 정상화 등을 위한 장애인 복지의 흐름을 주도하며 자조모임을 중심으로 서울, 부산, 대구, 광주, 전주, 제주 등 점점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각종 자립생활연구회나 연대체, 네트워크가 만들어져 각종서비스와 상담활동을 벌이고 있다. 자립생활은 개인 및 부부형태로 이루어지거나 집단적 형태(자립생활공동체)를 띤 것도 있다. 자립생활운동은 장애인 당사자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문제도 새롭게 제기해 나가고 있다. 최근 이러한 자립생활운동조직들을 기반으로 장애인노동조합을 만들자는 제안도 나오고 있다.
장애인들은 지금까지 대체로 시설(사회복지시설)에 수용되어 왔다. 그러면서 시설 운영자들의 비리와 부패를 둘러싼 싸움이 많았다. 그 가운데 가장 길고도 많은 교훈을 남긴 것을 든다면 에바다 투쟁일 것이다. 이승헌,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에바다민주화투쟁 보고서」, ꡔ진보평론ꡕ17호, 2003년 가을, 169-194쪽.
7여년에 걸쳐 시설운영자들과 지방권력의 결탁의 고리를 끊고 투쟁을 지속적으로 이끌어 간 동력은 에바다 내외부의 자기구성적 활동이었다. 외부적으로는 운동세력의 끊임없는 결합과 지원이 있고 그 과정에서 엮어진 공동대책위(혹은 연대회의)는 내부 운영을 민주적이고 투명한 논의와 그 결과에 대한 공동책임이라는 원칙에 입각하여 해 나갔다. 이것은 시설운영자와 지방권력의 작동방식과는 다른 메커니즘이었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기존의 농아원의 폭압적이고 폐쇄적인 생활에 대비되는 삶공동체(해아래집)를 만들어 갔던 것이다.
4) 외국인노동자(이주노동자) 운동
외국인노동자들 한국에 거주, 취업하고 있는 외국인노동자(이주노동자)는 크게 세 부류이다. 첫 번째는 법무부 ‘출입국관리법’에 의해 합법취업 비자를 발급 받은 교수, 회화지도, 연구 자격의 제 1세계 출신 전문직업 종사자들과 가수, 무희 등 예술흥행 자격으로 사증을 발급 받은 필리핀, 러시아 국적의 여성들이다. 두 번째는 1991년 11월부터 시행된 산업기술연수생제도를 통해 국내에 들어온 연수생이다. 세 번째는 외국인노동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미등록노동자이다. 미등록 노동자가 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인데 그 하나는 관광, 방문 등의 단기사증을 발급 받아 한국에 들어온 후, 체류기간을 초과한 채로 취업 및 거주를 하는 경우와 산업기술연수생으로 연수업체에서 근무하다가 저임금, 장시간 노동 등의 이유로 연수업체를 이탈하여 불법 체류인 상태로 취업하는 경우이다.
은 1987년경부터 한국에 자발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생산기능직 인력난을 메꾸어 나간 사람들로, 주로 관광사증으로 입국하였다가 체류기간을 초과하고 취업하는 미등록노동자였다. 정부는 이들의 취업을 묵인하다가 1991년 4만명이 넘어서자 ‘산업연수생제도’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런데 이 제도 하에서는 노동력을 활용하면서도 ‘근로자’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인권침해가 발생하였다. 또한 1998년부터는 산업연수를 마치고 일정기간 취업할 수 있는 연수취업제도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였고 2002년 4월 전체 외국인노동자 가운데 80%정도가 미등록노동자(34만여명)였다. 정부는 "2004년 외국인력수급계획"에서 외국인노동자들을 7만9천명(고용허가제 2만5천 명, 취업관리제 1만 6천명, 산업연수제 3만8천명)을 도입하기로 하였다.
다른 말로 ‘불법체류’노동자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노동권 및 인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가 빈번하였다.
(1) 외국인노동자 지원단체 활동 설동훈, 「한국의 외국인노동자 운동, 1992-2002년」, 김진균 편저, ꡔ저항, 연대, 기억의 정치2ꡕ, 문화과학사, 2003, 76-99쪽.
이러한 상황에서 1992년 종교계를 시작으로 외국인노동자를 지원하는 단체들이 결성되기에 이른다. 상담활동을 주로 하면서 쉼터를 개설하는 외국인노동자 상담소 형태의 지원단체들이 서울, 수도권에서부터 설립되기 시작하여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1994-1997년 사이에 많이 결성되었다. 이 때는 외국인노동자가 급증한 시기였다. 미등록외국인 노동자를 산업연수생으로 대체하려 했으나 오히려 미등록노동자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외국인노동자 인권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외국인노동자 문제가 쟁점이 된 이후 1996-1997년에는 부산, 대구, 광주, 창원 등 지방 주요 거점 도시에서 본격적으로 외국인노동자 지원활동이 시작되었다. 1998년에는 IMF 위기로 외국인노동자 수도 줄어들고 새로 결성되는 지원단체도 급속히 줄었으나 2000년 이후 다시 증가하고 있다.
외국인노동자 지원단체들은 제각각 분산되어 발전방향을 모색하던 중 세 차례의 공동투쟁을 계기로 연대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1993년 불법체류에 대한 과다한 범칙금 징수에 항의하여 재중동포가 자살하자 지원단체들은 최초로 항의시위를 벌이게 된다. 1994년에는 산업재해를 당한 미등록노동자들이 경실련 강당에서 농성을 벌이면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대책위가 만들어졌다. 1995년 1월에는 산업기술연수생들이 인권침해에 항의하여 명동성당에서 천막농성을 하였다. 이런 투쟁을 계기로 1995년 7월 명동성당 농성당시 결집된 38개 단체들 가운데 일상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단체들 10여개가 외국인노동자공동체와 함께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외노협)’를 결성하였다. 이후 외국인노동자운동에서 외노협은 국내노동조합과 외국인노동자공동체와의 연대를 모색했고 산업연수제도를 폐지하고 ‘노동허가제도’를 실시하도록 하는 외국인인력제도 개선투쟁을 벌여왔다.
외국인노동자지원단체들은 외국인노동자 개인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상담과 복지 및 교육활동, 외국인노동자공동체 지원, 외국인노동자 권리확보운동, 외국인력제도 개선운동 등을 해 나간다. 상담·복지·교육 활동은 외국인 노동자가 피해를 입었을 경우 구제받을 수 있는 방법을 무료상담해 주는데 주로 임금체불, 의료, 산업재해, 여권, 폭행 등의 문제가 많았다. 또한 여러 단체들이 외국인노동자의 쉼터(피난처, 숙소)를 제공하였으며 주말 간이진료소를 설치하여 의료지원을 하고 한국어강습을 하였다. 외국인노동자지원단체들은 권리확보운동으로서 외국인연수생과 미등록노동자를 ‘근로자’로서 인정하도록 하는 운동도 벌여왔다. 이로써 외국인 노동자들은 그들의 권리를 조금씩이나마 확보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산업연수생이 근로자냐 아니냐는 논란이 계속되고, 미등록노동자는 신분이 노출될 경우 강제퇴거당해야 한다. 더욱이 이들은 언제든지 해고당할 수 있는 불안정한 고용관계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권리를 당당히 요구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지원단체들은 외국인력제도 개선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외노협은 1995년 ‘외국인노동자보호법’ 시안을 만들고 법제정을 촉구해 왔다. 2000년 들어 외노협은 노동허가제도를 내용으로 하는 법률제정을 시도하였고, 같은 시기에 노동부는 고용허가제를 내용으로 하는 법률을 제정하려는 데까지 이르렀다. 고용허가제도와 노동허가제도는 산업연수제도의 폐지를 전제로 하는 것으로 정부가 사용자에게 고용허가를, 외국인노동자에게 노동허가를 발급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다만 두 제도의 차이는 외국인노동자의 직업이동의 허용 정도에 있다. 노동허가제도는 고용허가제도보다 직업선택의 자유를 훨씬 광범위하게 보장한다.
고용허가제를 법제화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히면서 점차 외국인노동자운동은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외노협에 속해 있는 39개 단체들은 종교나 지역에 관계없이 연대를 꾀하고 있으며 사회적 행동과 발언에서 적극적이다. 외노협에 속해 있지 않으면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는 단체들도 있으며 최근 노조형태나 여성연대의 형태를 띠고 운동을 벌이는 단체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외국인노동자운동이 있었기에 1998년과 같은 극단적인 경기침체 시기에도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공격적 행동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서구의 신나치들을 보라).
(2) 외국인노동자들의 투쟁 설동훈, 「한국의 외국인 노동운동, 1993-2003년: 이주노동자의 저항의 기록」, ꡔ진보평론ꡕ17호, 2003년 가을, 246-269.
외국인 노동자운동의 또 다른 한 축은 외국인노동자 자신들의 운동으로, 범칙금 부과에 항의한 한 외국인노동자의 자살에서 비롯하였다. 이후 외국인노동자들은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시위와 농성을 벌여나갔다. 산업재해를 당한 외국인노동자들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던 소극적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1994년 1월 한 달 동안 경실련 강당에서 네팔과 방글라데시 미등록노동자 11명이 산업재해 보상과 체불임금 지급 등을 비롯하여 사업주에 의한 구타와 감금노동과 같은 인권과 노동권 침해를 고발하며 농성을 하였다. 1995년 1월에는 네팔인 산업연수생 13명이 10여일 동안 명동성당에서 천막을 치고 몸에 쇠사슬을 감은 채,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때리지 마세요’ 등의 요구를 내걸고 농성을 하였다. 당시 외국인노동자들은 농성 초반 가장 직접적인 요구인 구타금지와 체불임금지급, 여권반환 등의 요구에서 점차 본질적인 문제로 투쟁의 수위를 높여 나갔다. 농성참가자들은 한국정부의 사과와 한국노동자와 동일한 노동권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초기 외국인노동자들의 투쟁방식은 상담지원단체와 함께 자신들의 열악한 인권상태를 폭로하면서 제도개선을 요구하는 거점농성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점차 외국인 노동자들 스스로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 파업투쟁을 벌이는 일이 발생하였다. IMF 시기에는 투쟁사례들도 적게 나타났다.
기술을 배운다는 조건으로 값싼 임금에 노동자권리를 박탈당한 산업연수생들에 의한 집단적인 작업거부가 간헐적으로 이루어졌다. 임금인상, 노동조건, 식비문제, 숙소문제 등을 둘러싸고, 나아가 외국인노동자의 특수한 조건(가족의 경조사로 휴가를 내서 다녀오려던 연수생을 해고시킨 것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파업)을 둘러싸고 외국인노동자들은 직접 고용주(회사)와 대결하게 되었다.
드디어 2002년 1월 경기도 포전 소재 아모르 가구에서 미등록노동자 93명이 체불임금 지급을 요구하며 파업,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9개국의 출신의 노동자들이었으며 외노협 등과의 공동투쟁 끝에 회사는 외국인노동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2001년 5월 결성된 ‘서울경인지역 평등노동조합 이주노동자지부’는 외국인 미등록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조직하려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 고용허가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면 외국인노동자가 참여하는 노동조합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것이다.
한편 최근 불법체류자를 강제색출하고 귀환조치하는 과정에서 미등록외국인노동자들을 수용하는 시설인 외국인보호소 경기도 화성 외국인보호소(400명 수용), 전남 여수 출입국관리소에서 운영하고 있는 외국인보호소(130명 수용), 각 지역 출입국 관리소의 보호소.
의 인권침해사례가 보고되고 인권참해에 대한 외국인노동자들의 반발이 커지고 있다.
(3) 외국인노동자 공동체
외국인노동자는 한국에서 대개 본국 출신의 친구나 친척과 교류하지만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도 한다. 대개 외국인노동자는 선행 이주자의 소개로 오게 되고 서로 가까운 지역이나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사회적 연결망을 만들어 간다. 이러한 사회적 연결망이 조직화되면 출신국별 공동체 형태의 조직이 만들어 진다. 그리고 나아가 공동체들 간의 연합조직도 나타나고 있다. 공동체의 구성형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지만, 대부분 출신국가별로 지역, 종교, 정치지향, 조합, 언어를 바탕으로 구성되거나 출신국가별로 한국 내 거주지역을 바탕으로 구성된다. 서선영, 이주노동자투쟁본부 조직국, 「1강 이주노동자의 현실」 (2001.2.21. 수), ꡔ이노투본 정치학교 자료집(2001)ꡕ, 서울경인지역 평등노동조합 이주노동자지부 자료실.
현재까지 외국인노동자 공동체는 외국인노동자운동의 주체로서 운동체 역할을 하고 있기보다는 상호부조와 친목도모를 추구하면서 생활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바탕으로 노동현장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비록 직접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기본적인 상담과 함께 처리에 대한 지원을 일정부분 담당하고 있으며, 한국 상담단체나 상담자에게 안내 해주거나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외국인노동자들의 활동초기에는 이 공동체들은 외국인노동자들의 자발적인 투쟁을 전개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외노협이 활동하면서 이들 공동체들이 지닌 조직운동으로서의 활동 지형들이 후퇴하게 되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들 공동체는 여전히 외국인노동자들 자신들의 중요한 공간으로 남아 있다. 많은 외국인노동자들이 공동체활동을 통해서 정보를 얻고, 정보가 유통되며, 토론 문화도 형성화시켜낼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1992년 처음 만들어졌고 조직변화를 거친 필리핀인 공동체는 서울에서 다양한 위원회를 두고 활동하며 1995년 즈음에는 다른 도시들의 성당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1993년에는 네팔인들이 네팔인자문위원회를 결성하였고, 1995년에는 중국동포미등록노동자들이 중국노동자협회를 결성하였다. 약 400명의 회원을 가진 이 협회는 대표를 선출하고 한국생활의 어려움에 공동대처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설동훈, ꡔ한국사회의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ꡕ, 서울대 박사논문, 1996, 168-173쪽.
그 외에도 각국별로 외국인노동자공동체가 만들어져 활동하고 있다.
앞으로 외국인노동자 운동은 외국인노동자 자체 조직강화 지원에 주력하고 외국인노동자 지원단체들의 특화된 활동을 기반으로 상호보완적인 네트워크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외국인노동자의 주체성을 공동체 속에서 확인해 나가고 다른 공동체나 한국인들과의 횡단적 연계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5) 죄수 운동
한국에서 수형자(죄수)들이 주체가 되어 전개한 운동의 대표적인 형태로 ‘양심수’로 불리는 정치범들과 관련한 다양한 형태의 저항운동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 양심수 운동은 일반 수형자들의 운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된다. 물론 양심수들의 경우 자신이 범법자라는 정체성을 가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는 점에서 소수자로서 죄수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느냐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일반 죄수들이 죄수 정체성을 갖고 운동하기 이전, 독재정권 시절에는 도덕적으로 결코 소수자가 아닌 양심수와 양심수를 지원하는 운동이 활발했다. 물론 지금도 양심수들은 여전히 생기고 있다. 또한 무미아 아부자말(Mumia Abu-Jamal)의 말대로 모든 죄수는 정치범 Mumia Abu-Jamal et. cetra., Still Black, Still Strong, Semiotext(e), 1993.
이라고 한다면 이제 얌심수와 일반죄수 간의 경계를 무너뜨릴 때가 온 것 같다. 더욱이 한국에는 북한과의 대치 속에서 수십 년간 감옥생활을 한 양심수로 ‘장기수’들이 있다.
양심수운동은 감옥 밖, 지지자들에 의한 운동에서 발전하였다. 특히 어머니들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준 조직으로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민가협)’가 있다. 민가협은 1985년 말 창립한 이후 양심수 석방, 국가보안법 등 제반 악법 철폐, 고문 추방 등을 위해 노력하며 양심수들의 인권침해와 맞서 싸우고 양심수들을 구조하는 활동을 벌여왔다.
이러한 민가협의 노력과 1987년 민주화대투쟁의 여파 속에서 1988년에는 1400명에 달하던 양심수 다수를 석방시키는 성과를 이루었다. 그러나 당시 장기수 300여명이 석방되지 못했다. 장기수 미석방 문제를 계기로 우리사회에서 완전히 묻혀있었다고 볼 수 있던 장기수 문제가 공론화하였고 장기수 석방을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결국 1999년 말까지, 모든 비전향장기수들이 풀려났다. 2001년 9월 마침내 63명의 비전향장기수를 북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민가협은 현재까지 갇혀있는 양심수(2002년 중반 600여명 추산)의 전면석방과 비민주적인 법제도개선 등 인권개선을 위해 계속 활동하고 있다.
또한 감옥 내외부에서 전향제도에 대항한 저항과 폐지운동도 진행해 왔고, 서승, ꡔ서승의 옥중 19년ꡕ, 역사비평사, 1999.
최근에는 보안법폐지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물론 양심수운동 가운데에서도 1990년대 들어 장기수들이 출소하면서 이들의 생활터전을 마련하고 돕는 활동이 여러 곳에서 전개되었다. 물론 장기수들은 감옥 안에서 자신들의 고유한 생활방식을 개발하기도 하고 생계방안, 새로운 건강관리방법 등을 만들면서 0.5평 속에서 살아왔다. 최정기, ꡔ비전향장기수ꡕ, 책세상, 2002.
그럼에도 출소 이후 나이가 많고 사회적응이 어려워 여러 단체들과 함께 장기수들이 살 집이나 일터를 만들기도 하였다. 비전향장기수들이 북으로 간 이후 전향 장기수나 북으로 가기를 희망하는 장기수들의 움직임은 여전히 있다.
한국에서 일반 죄수들의 적극적인 저항은 최근에야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죄수들의 불만과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양한 형태의 은밀한 저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흔히 교도소에서 ‘보안사고’라고 부르는 죄수들의 행동양식은 그 대부분이 교정당국에 대한 죄수들의 은밀한 저항을 가리키는 교정권력 용어이다. 죄수들의 시선으로 보면 그러한 행동양식은 자신들이 주체가 되어가는 운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수형자들의 저항은 몇몇 사건(신창원 사건, 조세형 사건 등)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최정기, 「수형자의 불만과 저항」, ꡔ진보평론ꡕ16호, 2003년 여름, 183-206쪽.
감옥에서 일어나는 죄수들의 저항에는 매우 다양한 유형이 있다. 사실 가장 극단적인 억압이 가해지고 있는 사상범들의 경우에는 통방 등 규정을 어기는 행위 자체가 투쟁의 일환일 수 있다. 그러나 적극적인 의미의 투쟁들은 개인적으로는 청원이나 면담 신청 등 합법적인 수단을 이용한 이의제기, 항의와 통제거부, 단식과 자살이 있고, 집단적으로는 주어진 일정(영화관람이나 반공강연 등)에 대한 거부, 통제에 대한 무시 및 불복종, 그리고 통제와 무관하게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는 방식, 수형자들이 감방 문을 차고 소리를 지르는 함성투쟁(샤우팅), 감옥권력의 부당한 권력행사나 교도관들의 불법행위를 교도소 외부에 전달하는 행위, 조직결성 및 활동, 단식투쟁 등이 있다. 윤수종, 「파업의 일상성」, ꡔ진보평론ꡕ3호, 2000년 봄, 42-68쪽.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죄수들에 비해 사상범들이 저항을 주도했는데, 최정기, ꡔ감옥체제와 사상범의 수형생활 연구ꡕ, 전남대학교 박사논문, 2000, 182쪽.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단식투쟁이다. 개인적인 단식투쟁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집단적으로 이루어진다. 집단적인 단식은 통방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목숨을 걸고,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집단적인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정순택, 「지옥일기」, ꡔ진보평론ꡕ10호, 2001년 겨울, 233-275쪽.
단식투쟁의 성공여부는 감옥권력의 부당함을 입증할 만한 증거의 확보․보전, 내부결속, 외부와 연락을 취해 문제를 어떻게 사회화시킬 것인가 등에 달려 있다. 한 탈옥사건에서, 탈옥자는 자신의 행위가 감옥의 폭력과 억압에 대한 저항임을 밝힌 바 있으며, 대도로 이름을 떨친 한 출옥자는 감옥에서의 의문사 규명에 나서는 등 교도소의 잘못된 제도 및 관행에 대해 ‘교정’하려는 것을 볼 수 있다. 탈옥이야말로 감옥에서는 가장 적극적인 저항형태임에 틀림없다. 권력의 장소를 철거하는 것이 탈옥인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일반 죄수들이 교도소(감호소) 안에서 적극적인 운동을 벌이고 있다. 죄수운동의 새로운 양상이다. 교도소와는 별도로‘재사회화를 위한 교정공간’이라는 것이 있는데 상습범 가운데 재범 우려가 높은 범죄인에게 형과 별도로 보호감호처분을 내리도록 하여 청송보호감호소에 격리 수용한다. 청송보호감호소는 제1보호감호소와 제2보호감호소가 있으며 감호소 생활은 거의 교도소 생활과 같으며 출소대기소인 제2감호소는 감호소 쪽에 흠이 잡히면 가출소가 늦어지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구속’은 오히려 교도소보다도 더 심하다고 한다. 보호감호제도는 전두환정권시절 ‘사회정화’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끊임없이 위헌시비에 말려왔다.
이미 1987년, 1993년 등 여러 차례 단식농성 등 집단행동이 있었다. 2001년에는 1980년 계엄군에 의해 삼청교육대로 끌려간 사람이 그곳에서의 가혹행위에 항의하다 청송보호감호소에 이감된 뒤 1984년 재소자 처우개선을 요구하다, 교도관들의 폭행과 가혹행위에 숨진 사건(박영두 사건)이 불거지기도 했다. 1600여명 수용되어 있는 청송보호소에서는 2002년 4월 이후 현재까지 1년에도 몇 차례씩 집단단식이 벌어지고 있고, 특히 제2감호소의 경우 2004년 4월 수용자 700여 명 중, 600여명이 참여할 정도의 대규모 단식투쟁이 있었다.
출소자들도 투쟁에 나섰다. 과천정부종합청사 정문 앞에서 ‘사회보호법 폐지를 촉구하는 1인 릴레이시위’를 하기도 하고, 출소자증언대회를 하고, 70여명은 기자회견을 통해 청송보호감호소 “보호감호제는 형기를 마친 이들을 재수감하는 명백한 인권침해”라며 최근 법무부의 보호감호제 일부 수정 방침을 비난할 정도가 되었다.
투쟁이 계속되자, 시민사회단체의 관심이 집중되고 활동도 본격화됐다. 시민사회단체들은 2003년 3월 ‘사회보호법 폐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공대위는 청송보호감호소의 현실을 알리는 데 집중했고, 보호감호소의 피감호자는 우리 사회의 소외된 계층의 문제라는 것을 알리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 지금은 이미 헌법재판소에서 사회보호법에 대해 세 차례의 합헌 결정을 한 바 있지만 계속 법적 소송을 제기하고 폐지법안을 제안하고 있다.
이처럼 죄수운동에서도 점차 죄수들이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며 운동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고, 앞으로 교도소 내부의 다양한 권리들과 관련하여 운동해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
또한 양심을 지키기 위해 감옥에 수감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그들이다. 물론 전에도 대학생들이 전방입소 거부나 교련훈련 거부, 그리고 군인들이 군대내 양심선언 등의 방법을 통해 저항을 했었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가 있었다. 이미 지난 수 십 년 동안 양심적 병역거부로 구속당한 젊은이들이 1만여 명에 이르고 현재 구속되어 있는 이들만도 1,600여명이나 된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양심적 병역거부로 구속되어 있는 대부분이,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인 까닭에 병역거부는 특정종교의 교리문제로 취급당해 왔다. 특히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종교에 대한 일반인들의 태도는 이들을 이단시하는 경향까지 있기에 이들에 대한 판단은 더욱 편향되어 왔다. 최근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사람들이 병역거부를 선언하기 시작하면서 양심적 병역거부가 특정종교의 문제가 아닌 보편적 인권의 문제라는 주장이 펼쳐지고 있다. 대체복무제도라는 대안이 논의되고 있으며 공대위는 현재 30개 단체가 참여하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로 전환하여 활동하고 있다.
4. 소수자운동의 특성
이상 몇 가지 소수자운동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각 소수자마다 고유한 특성들을 가지기 때문에 각각의 소수자운동마다 색다른 특징이 있다. 그리고 한 소수자운동 안에서도 또 다른 소수자가 등장하여 독자적인 운동을 펼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자운동을 총괄하여 정리하려는 것 자체가 다수자적인 발상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다.
여기서는 소수자운동들을 총괄하여 정리하기보다는 소수자운동이 기존의 운동방식과는 다른 특성을 정리하고 강조함으로써 기존 운동의 전개과정에 비판적인 준거점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몇 가지 항목별로 소수자 운동의 특성에 관해 논의해 보자.
1) 정체성
소수자들은 표준적인 인간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인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어 왔다. 소수자들 스스로도 그러한 차별과 배제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왔다. 흔히 주변자로서의 모습을 보이기 십상이다. 따라서 소수자들이 운동을 하게 되면 차이를 차별화하는 표준적인 시선에 대항해서 자신들의 차이를 드러내게 된다. 사회에서 표준화된 학생이 ‘나는 학생이오’라고 알리기 위해 거리행진을 하지 않지만 성적 소수자들은 자신들이 특이한 사람들이지만 자신들의 고유한 자긍심을 가진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거리행진, 자긍심(프라이드) 행사 등을 한다. 물론 매체가 횡행하는 시대에 초상권 등의 문제가 있기도 하고 소수자들 자체도 그런 것을 인식하여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움직이기도 한다(모자를 쓰고 항의하는 매춘여성들). 장애인이나 외국인노동자처럼 외관상 분별이 가능한 소수자들은 조금 다르게 자신들을 드러낸다.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경증장애인과는 달리 중증장애인들은 거리에 나서는 것 자체가 이미 색다른 존재를 알리는 것이고, 더욱이 이들이 집단적으로 움직이면 전혀 다른 광경을 연출한다. 외국인노동자들은 여럿이서 움직이면 마치 무슨 협박집단처럼 인식된다.
그리고 많은 경우 소수자들은 ‘범법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현행법상으로 범법자인 경우(외국인노동자, 매춘여성)가 있을 뿐만 아니라 소수자들 스스로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감추고 나아가 자신의 욕망에 따른 행위를 하면서도 죄를 짓는다는 의식이 있기도 하다. 범법자적 정체성은 소수자들의 법적인 권리를 극도로 위축시킨다. 일단 소수자들을 범법자로 보는 권력이나 소수자들의 고용주들은 소수자들을 권리주체로서 대하지 않는다. 따라서 보편적 인권이라고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권리들조차 인정하지 않게 된다(따라서 소수자들은 우선 기본적인 인권을 요구하는 운동에 나서게 된다).
그래서 소수자들이 운동을 하게 되기까지는 이러한 정체성을 넘어서는 과정이 필요하다. 또는 그러한 정체성을 스스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전체 인성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상 소수자들은 특히 복수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복수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가족에서는 아버지이고 회사에서는 직장인이고 이웃에게는 봉사자이고 교회에서는 신자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소수자들은 사회에서 당연시하거나 표준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정체성을 부분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체 정체성의 갈등상황에 빠지기 쉽다. 어엿한 아버지이고 훌륭한 교사이며 착한 효자인 한 남성이 동성애자라고 밝혀질 때, 그는 동성애자라는 부분적 정체성으로 자신의 전체 정체성의 규정을 받는다. 외국인노동자의 경우도 여러 가지 부분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외국인노동자라는 정체성이 그의 다른 정체성 부분들을 전일적으로 규정해 버리는데서 오는 정체성 갈등은 엄청나다. 죄수 또한 마찬가지이다.
소수자들이 운동에 나서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정체성에 대한 자기인식이 먼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이념에 입각하여 자심의 몸을 던지던 전통적인 운동과는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소수자들 사이에서는 복수적 정체성의 측면 보다는 자신의 소수자적인 정체성을 강조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 부분 정체성으로 자신의 전체 정체성을 규정하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면 고립되거나 단절되지 새로운 수평적 연계나 연대로 나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오히려 부분적 정체성을 긍정하고 그것을 전체 정체성과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정체성과 관련해서 소수자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 바로 ‘커밍아웃’이다. 소수자 자신이 자기결정하여 커밍아웃하는 것이야 문제가 되지 않지만 커밍아웃을 강요한다든가 ‘아우팅’으로 나아가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낳을 것이다. 어쨌든 커밍아웃은 자신의 정체성을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 위에서 새롭게 관계를 만들어 가려는 시도로서 소수자운동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조직형태
소수자운동의 조직적 특징은 쉼터나 상담실, 인터넷 카페, 회원단체, 센터 등 다양한 집합체들이 광범위하게 만들어지고 이러한 것들이 연대하여 협의체나 연합체 등을 만드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다른 한편으로는 색다른 삶의 방식들을 실험해 나가기도 한다.
매춘여성운동의 경우 손님이나 포주에게 피해를 입은 여성의 피신처 역할을 하는 쉼터로 출발하여 상담도 하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점차 몇 가지 사업을 벌이는 센터 형태로 발전한다. 이러한 센터들이 여러 지역에 생기면서 어떤 한 가지 주제(매매춘근절)를 의제로 하여 협의체나 연합체가 만들어진다. 물론 이 협의체나 연합체는 각 센터들이나 쉼터들에 대해 명령기능을 갖지 않으며 그야말로 매개자에 머물지 대표자로 둔갑하지는 않는다.
동성애운동의 경우 인터넷을 통한 네트워크 형태의 모임들이 무수히 만들어지고 점차 바나 레스토랑 등이 만들어지면서 지역커뮤니티까지 만들어진다. 물론 억압적인 상황에서 인권운동적인 회원단체들이 일찌감치 등장하는 형국이었다. 이 회원단체들이 협의체나 연대모임을 만들어서 사안별로 대처하거나 대국민 홍보와 정부와의 싸움을 벌인다. 이런 와중에 한 활동가 단체의 장이 독선적이고 ‘대표처럼’ 활동하게 되면 여타 단체들이 반발하고 대표화되지 않는 새로운 연대체를 만들어 가기도 하였다.
장애인운동은 기존의 많은 장애인들이 시설에 수용되어 있기 때문에 시설운용과 관련한 문제들이 쟁점이 되곤 한다. 각종 보호시설들 내외부에서 시설의 운용을 개선하려는 투쟁이 일어나며 그 과정에서 기존 시설 내부에 다양한 자율적인 집합체들이 만들어진다. 또한 다른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공동체들도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집합체들이 이동권과 같은 의제를 중심으로 연대체를 구성하여 활동한다. 그런데 장애인단체의 경우는 이전부터 국가의 비호를 받는 여러 단체들이 구성되어 있었고, 장애인당사자들이 주도하는 단체들이 국가비호를 받는 단체들을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외국인노동자운동의 경우는 다양한 지원단체들의 활동이 먼저 시작되면서 외국인노동자들이 점차 운동에 나서는 형국이다. 지원단체들은 쉼터나 센터로서의 기능을 가지며 각자 독자성을 가지고 각 지역이나 해당 외국인노동자들 공동체와 연계를 갖고 있다. 이런 지원단체들이 외국인노동자들의 문제에 대한 해결사로서 역할하려고 하는 경향도 일부 있다. 또한 지원단체들이 센터로서의 역할을 넘어서 외국인노동자들을 자신들의 틀 안에 묶어두려고 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외국인노동자 당사자들의 공동체나 조직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좋은 조짐인 것 같다.
죄수운동의 경우 감옥 밖에서의 가족이나 지원단체의 운동이 주였다. 죄수운동이라면 의당 양심수운동이었지만 점차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 최근 점차 감옥 내부에 있는 죄수들의 움직임이 드러나고 있다. 또한 출소한 사람들이 감옥환경에 대해서 문제제기하면서 내부의 움직임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소수자운동에서의 이러한 조직화 양상을 볼 때, 소수자들을 보호, 구호한다는 차원에서 시작하는 단체와 집합체들이 많지만, 점차 소수자 당사자들이 밑으로부터 구성해 나가는 측면이 부각되고 있다. 또한 지원단체들이나 센터들은 당 형태나 국가장치들과는 달리 명령-복종 관계에 기반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수자 당사자들의 생활과 조직화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면서 단체들 간에 수평적 연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쟁점사안들에 대해서 연대하거나 협의하여 투쟁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명령-동원 조직이라기보다는 네트워크 형태의 조직화를 만들어 간다.
3) 이념
전통적인 좌파운동은 이념을 내세우고 그 이념을 체현한 지도부의 주도 아래 대중들이 결집하여 현존 국가장치를 파괴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간다는 상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그 특정 이념은 다른 여타의 이념이나 주장들에 대해서 헤게모니를 행사하며 그 이념을 체현한 집단은 다른 집단들을 이끌어나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올바른 이념을 둘러싼 논쟁과 투쟁이 계속된다. 물론 현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두고 논쟁하며 그에 기반하여 어떤 실천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탐색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점도 있다.
그에 비하면 소수자운동에는 그런 헤게모니적인 이론이 들어설 자리는 없는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이념이나 이데올로기 혹은 이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 외삽된 이론이나 이념보다는 당사자들이 구성해내는 자기인식과정과 그 결과를 중시한다고 할 수 있겠다.
소수자운동은 각 소수자집단들에 따라 그 투쟁방식과 구성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모든 소수자운동에 보편적인 이념을 생각하기가 힘들다. 또한 어떤 이념이나 이데올로기가 이론적으로 정립되기 보다는 투쟁과정에서 혹은 그러한 투쟁과 더불어 진행되는 소수자들의 인식과정에서 기본원칙들이 수립되는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최근 소수자운동에서 제기되는 그러한 이념 혹은 이데올로기는 바로 당사자주의라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소수자운동이 바로 다수자나 국가에서 지원하는 혹은 소수자를 동정하는 단체들이나 집합체들에서 시작되면서 소수자들 당사자의 밑으로부터의 구성과정이 억압된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자기결정권이라는 문제설정에서 출발하여 위로부터의 명령을 거부하는 즉, 내부의 위계화, 대표화, 권력화를 막아보려는 시도에서 나온 이념이라 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장애인운동의 경우 장애인당사자들을 보호대상으로 삼으면서 결국은 전문가나 치료사 등이 주도해 나가는 시설운용이나 운동은 장애인당사자들의 정체성이나 생활실험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중증장애인이나 장애여성의 경우도 보호를 받아야 하지만 얼마든지 자기결정에 의해서 해 나갈 수 있는데도 이들이 운동이나 결정과정에서 배제된다는 것이다. 도움을 받되 당사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도움을 받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수자운동에서는 통합의 논리를 강조하는 것에 대한 반감이 있다. 동성애자운동의 경우도 이제 성적 소수자란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데 더 이상 게이, 레즈비언뿐만 아니라 트랜스젠더, 양성애자, 복장도착자, 사도마저히스트 등을 포괄하려고 한다. 그럴 때 성적 소수자 안에서의 연대는 결코 통일성을 강조하는 통합의 논리에 입각해 있지 않다. 오히려 성적 소수자 내부의 다양한 소수자들의 차이들을 서로 인정하고 강조함으로써 성적 소수자 영역을 풍부하게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분리를 강조하면서 차이를 긍정하고 그 위에서 연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장애여성의 경우도 분리의 논리에 입각하여 장애남성과는 독자적인 운동을 벌일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렇게 각 소수자 안에서 차이들을 오히려 강조하고 그 차이들에 따라 독자적인 운동을 해나가면서 해당 소수자운동을 풍부화해 나간다.
4) 제도개선운동과 국가
‘범법자’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으며 온갖 인권적인 침해를 당하고 있는 소수자들은 보통 사람과 동등한 권리들을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최근에는 ‘차별철폐’라는 것으로 정비되는 느낌이다. 우선 소수자들은 ‘범법자’를 벗어나기 위한 운동을 벌인다. 각종 다양한 합법화운동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또한 소수자들은 자신의 부분적인 정체성이 ‘범법자’이지만 다른 정체성부분과 관련된 각종 권리를 요구한다. 그런 과정에서 국가의 각종 정책이나 제도를 개선하려는 운동을 벌인다. 기존 정책을 비판하고 새로운 입법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새롭게 인식하기 위한 각종 논의나 토론 과정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제도개선운동은 여타 시민단체들과 연대해서 벌이는 경우가 많고 각 소수자운동 내부의 연대회의나 협의체들에 의해서 진행된다. 물론 그 배후에서는 각종 센터나 쉼터나 모임들이 지지기반을 이루고 있으며 운동과정의 힘은 바로 이들의 움직임에 달려 있다. 그리고 법률적으로 합법화되지는 않을지라도 일단 제도개선운동은 소수자들의 상황과 차별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올림으로써 다수자적인 시선에 대해서 교정을 해나가는 성과를 올리기도 한다. 또한 제도개선운동 과정에서 정책대안을 창출해 내기도 한다.
문제는 소수자운동의 방향이나 대안이 국가의 다수자적인 상이나 정책과 충돌할 때이다. 특히 소수자의 고유함은 비록 소수자가 단 한사람으로 구성될 때조차, 측정 불가능한 능력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수자처럼 표준에 맞추어 나가는 것, 그럼으로써 측정 가능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욕망의 흐름을 찾아 나섬으로써 측정 불가능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Mille Plateaux, Editions de Minuit, 1980, pp. 586-588.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ꡔ천개의 고원ꡕ, 새물결, 2001, 897-900쪽.
이러한 측면이 표준화를 지향하는 국가가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부분이다.
아무리 국가가 소수자들에게 지역적(지역커뮤니티) 혹은 법적 명목상의 독립(자율성)을 부여하면서 소수자들의 활동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제도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부분적으로 국가장치에 가두어 둔다할지라도, 소수자들은 무한한 여행에 나선다. 특히 소수자운동은 지금까지 표준화되어온 생활방식을 바꾸어 나가는 운동을 벌이게 되는데, 이와 관련하여 점차 국가장치의 각 마디들(지방자치단체나 국가를 내면화한 지역사회나 이웃들)과 충동하는 일이 벌어진다. 여기서 에바다 싸움에서의 해아래집의 경우처럼 이웃(지역)사회와 새롭게 공존해 나가는 방식을 찾아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5) 생체정치적 투쟁(생태투쟁)
소수자운동은 거부와 파괴 투쟁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투쟁도 한다. 기존의 운동이 국가장치를 대체하고 새로운 장치를 만드는 것에 치중했다면, 소수자운동은 특히 소수자들 자신의 생활을 바꾸어가고 자신들의 커뮤니티를 만들어 가면서 주위도 바꾸어가려고 한다.
자연스럽게 다양한 모임들이나 쉼터, 센터들은 자신들의 소식지, 활동지, 생활지……등을 만든다. 또한 연합체 단위의 소식지나 활동지 같은 것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소식지(혹은 활동잡지)는 물론 어떤 주장들이나 이념적 논의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소수자들이 처한 상황과 활동에 대해서 알려준다. 또한 해당 소수자들이나 생활, 활동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연합체나 연대체 단위의 소식지나 활동지는 좀더 포괄적인 내용을 다루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정부정책을 비판한다든지 다른(혹은 외국의) 소수자들의 삶을 소개한다든지 운동의 방향에 대해서 논의한다든지 한다.
소수자운동에서 나타나는 모임이나 쉼터, 센터들은 대부분 상담을 가장 기본적인 활동으로 하고 있다. 소수자들의 경우 사회에 커밍아웃하기 까지는 엄청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가까운 주위(예를 들어 가족)에 자신의 상황을 알릴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집합체들과 접속하여 다양한 상담을 원한다. 이런 집합체들은 상담을 통하여 회원들을 만들기도 하고 소수자들을 도와주기도 한다.
더 나아가 소수자들은 이러한 집합체들을 통해 서로 접속하여 색다른 관계를 만들어 가기도 한다. 특히 소수자들의 자연스러운 삶이 다수자에게는 이상하게 일탈적인 것으로 비추기 때문에 이웃사회와의 갈등이 나타나는 수가 많다. 물론 다수자의 편견이 이미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지만 말이다. 외국인노동자들이 여럿이 모여서 한 집에서 공동생활을 한다든가, 장애인들이 자립생활을 위한 공동체를 만든다든가, 출소자들이 취업을 하려고 하든가, 동성애자들이 이성애적 가족과는 다른 커플이나 집합적 가족을 만드는 경우, 국가의 직접적인 압박이나 억압 보다는 오히려 표준적인 삶 형식을 강요하는 다수자적 분위기와 이웃사회와의 관계를 풀어가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제 소수자운동은 바로 소수자들이 사회 속에서 공존하는 삶의 방식을 만들어 가는 싸움을 해 나간다. 물론 자신들의 생활을 기존의 생활과는 다르게 만들어 가면서 동시에 이웃과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려고 한다. 자신 내부의 생태투쟁 뿐만 아니라 자신 외부의 생태투쟁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태투쟁은 지역커뮤니티를 만들거나 가상공간에서의 커뮤니티를 만들어가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외국인노동자들의 경우 필리핀노동자공동체가 나타나고 그 옆에 다른 나라 공동체들이 나타나서 결국은 한 지역에 여러 외국인 공동체들이 공존하는 외국인타운이 만들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동성애자들의 지역커뮤니티는 이미 상당히 진전되어서 ‘친구사이’에서는 지역커뮤니티 지도까지 만들고 있다. 매춘여성운동의 경우는 이미 형성되어 있는 매춘거리나 매춘구역에서 쉼터를 만들고 그것을 기반으로 필드워크를 한다든지 포주의 자녀까지 포괄하는 어린이놀이방을 개설한다든지 하면서 활동한다.
6) 연대
소수자운동은 각 소수자운동 간의 연대를 추구한다. 그런데 각 소수자운동은 각자의 처한 상황이 상당히 다르다. 소수자라는 입장에서는 공통적이지만 전혀 다른 생활세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과 매춘부의 생활세계, 죄수와 성적 소수자의 생활세계는 상당히 다르다. 물론 개별적으로는 여러 가지 소수자적 부분정체성들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말이다(매춘여성이자 레즈비언이자 장애여성이며 외국인노동자이자 죄수인 경우처럼). 그렇기 때문에 각 소수자 운동이 서로 독립적으로 움직이며 더욱이 각 소수자 운동 안에서도 다양한 선에 따라 독자적인 움직임들이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각 소수자운동의 단일한 공통성을 추구하는 연대운동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 각기 다른 생활세계 속에 있지만 국가나 지배권력과 관련해서는 강요되는 훈육과 명령에 대해서 함께 적대감을 가질 수 있다. 제국시대에 나타나는 다양한 저항운동(예를 들어 사파티스타, 반세계화시위, 파리의 공공부문파업, 한국의 노동법개악반대투쟁, 남미의 무토지농민들의 점유운동 등)은 제국의 훈육에 대항하는 전선에서 함께 할 수 있듯이 말이다.
물론 소수자운동 간의 연대도 있지만, 현재 여타 시민단체들이 소수자운동과 연대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다. 이것은 아직은 소수자운동 자체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수자들의 보편적 인권이 아직 제도적으로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수자운동들 간의 연대이든 다른 부문운동과의 연대이든 어쨌든 소수자운동에서는 헤게모니를 관철시키려는 통일전선 개념의 연대는 없다. 소수자운동은 어떤 이념이나 특정 정파에 따라서 통일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소수자들이 지닌 측정 불가능한 특성들은 어떤 이념이나 표준에 맞춰서 권력화되는 방식과는 다르게 움직인다. 여기서 다양한 연대방식과 결합방식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7) 욕망의 분출과 대안 만들기
소수자들이 측정 불가능한 특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바로 다양한 욕망형태를 실험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욕망을 ‘넘치는 흐름’으로 규정해 보면, 소수자들의 불법성은 정확히 욕망의 흐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것이 사회적으로는 대체로 비도덕적인 것으로, 일탈로, 추한 것으로 규정되지만 말이다. 원래 욕망은 그렇게 드러나면서 점차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것 아닌가? 소수자들의 움직임은 더 이상 파악할 수 없는 선들로 전개된다. 어떤 사이트를 폐쇄하면 즉각 다른 사이트가 나타나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또 다른 것이 나타난다. 어떤 공간을 폐쇄하거나 경찰의 냄새가 나면 즉각 다른 공간이 나타난다.
동성애자운동에서는 많은 모임들이나 인터넷사이트들이 끊임없이 음란성 시비에 말려들고 있다. 아직도 언론은 동성애자라는 말보다는 동성연애자라는 말을 쓰고 있을 정도이다. 거꾸로 장애여성들은 끊임없이 성폭력에 시달린다. 매춘여성들은 기둥서방을 두고 있다. 외국인노동자들은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아 키워도 학교조차 보내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수자운동은 어떤 목표점을 향해 나아가는 운동이 아니라 현 상황 속에 자신들의 욕망에 따른 생활형식들을 탐색하고 구성해 나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소수자들은 자신들의 삶 형식(life-style)을 표준적인 것, 좋은 것이라고 하면서 강요하지 않는다. 정말 자신들의 실험형식들을 하나의 선택지로서 제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선택지가 아니라 전혀 다른 준거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예를 들어 레즈비언 커플이 보여주는 사랑관계(애인기준)는 사회에서의 지위 기준을 횡단하는 측면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경제적 관계나 다른 사회적 관계의 개입 여지가 가장 적은 순수한(?) 사랑 기준을 제시한다. 이러한 기준은 엥겔스적인 의미의 사랑에 훨씬 더 가깝지 않을까? 더욱이 레즈비언 커플들이 모여 살게 되면 기존의 이성애적 가족형식과는 전혀 다른 기준, 준거를 제시하게 된다. 자신의 준거를 제시하여 그것을 선택할 사람에게는 색다른 준거의 존재를 알리는 것, 이것이 자신의 준거를 강요하는 다수자적 실천과는 전혀 다른 것 아닌가?
따라서 소수자는 운동을 통해서 다양한 욕망형태들을 실험할 뿐만 아니라 그와 더불어 색다른 준거들을 제시할 수 있다. 기존 운동에서는 다른 준거를 제시하면서 이중권력의 상황을 만들고 기존 권력을 파괴하고 자신의 권력을 내세워 나갔지만, 소수자운동에서는 색다른 준거를 제시함으로써 색다른 삶의 가능성을 넓히고 그리하여 사회 전체의 지형도를 넓혀나가는 방향으로 간다.
5. 소수자운동의 함의
소수자운동은 각 소수자들의 자율성을 기반으로 해서 발전해 왔다. 자율성을 강조하는 자율주의는 지배권력에 대항해서 인민대중의 창의성과 독자성을 기반으로 한 아래로부터의 사회구성원리를 강조하였다. 기존의 맑스주의도 이러한 대중의 관점을 견지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그 아래가 다시 중심화되고 권력화되는 것이었다. 노동자계급 안에서 순수한 주체를 뽑아내려다가 여타 다양한 주변층들을 배제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노동자계급 안에서 주변성에 착목하는 것이 노동자계급의 자율성을 확보하는데 중요한 고리가 된다는 인식에 이르게 된 것이 자율주의의 주요한 측면이다.
이 주변성을 담아내면서 노동자계급 전체의 자율성을 증대시키려는 것이 자율운동의 출발이었다. 예를 들어 노조운동 안에서 여성이나 비정규직을 배제해 나가면 결국은 노조가 자본(사용자)과의 싸움에서 힘을 잃게 되고 자신의 자율성을 확보해 나갈 수가 없다. 내부의 주변성을 포괄해 나가면서 외부와 횡단적으로 연결될 수 있을 때 자율성은 더욱 확보되는 것이다. 물론 전체적으로 보아서는 노동자계급이 획득해온 자치성(공공영역)을 기반으로 삼으면서 말이다.
소수자운동은 노동자계급 안의 주변층뿐만 아니라 사회의 주변층들에서 나타나는 운동이다. 주변자라는 개념은 중심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심과 주변이라는 이분법에 매여 있다. 그에 대해서 자신의 고유한 측면을 지닌 소수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중심/주변의 이분법 보다는 그 작동방식에 초점을 맞추어 다수자/소수자(들뢰즈·가타리는 몰적/분자적 이라는 구분법을 사용하기도 한다)라는 의미에서 소수자 개념이 더 적절할 것이다. 어쨌든 소수자운동은 주변을 강조하고 중심을 해체함으로써 전체 지형도를 바꾸고 소수자 집단 자체의 자율성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자율성을 확장해 나가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소수자운동은 바로 자율운동과 손을 맞잡고 나간다고 할 수 있다.
소수자권익보호운동이 소수자의 권익을 방어적으로 지키자는 방향에 있고 다수자의 지배를 전제로 한다면, 소수자운동은 다수자의 지배 영역을 축소해 나가기 위해 자신의 색다른 삶의 방식을 개발해 나간다. 당연히 다수자의 지배영역과 충돌할 수 있을 것이다.
시민운동은 정치적 지배에 대해 시민적 자율성 영역을 확장하여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어 간다는 상에 집착한다. 특이성이 무시된 개인들로서 시민에 의거하면서 다수의 공통성을 찾아서 운동화하려고 한다. 국가권력을 부드럽게 만들면서 말이다. 그에 반해 소수자운동은 특정한 사람들 및 집단들의 특성에 기반하면서 그들이 지닌 고유한 특성을 오히려 긍정해 나가려고 한다. 개별자들의 특이성을 표준화하려고 하지 않고 서로의 차이를 극대화하면서도 오히려 소통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방식을 추구한다. 그 과정에서 소수자들을 특정한 틀에 묶으려는 즉 그들을 포획하려는 국가와 충돌한다. 그렇지만 소수자운동의 발전은 시민운동의 영역을 더욱 넓혀 줄 것이라고 생각된다.
소수자운동은 표준화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및 집단들이 자신들의 집합적 정체성을 긍정하고 자신들의 자율성을 지키면서 확장해 나가기 위해서 일정한 공간을 확보해 나가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대안운동과 만나게 된다. 물론 대안운동 가운데는 현재의 지배체제를 거부하지만 과거의 생활이나 더 억압적인 방식으로 되돌아가려는 것도 있다. 기존의 지배적 생활방식을 거부하고 색다른 생활방식을 실험하면서 내부의 자율성을 확보해 나가는 대안운동은 바로 소수자운동의 발전방향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변혁의 상인데, 전에는 특정한 주체(예를 들어 노동자계급)가 주도하여 다른 집단들 및 계급들을 이념적으로 획득(포획?)해 나가면서 기존의 지배권력을 파괴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주도 집단의 특권화였다. 소수자운동은 일단 그러한 헤게모니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곧 권력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몇몇 부문운동이나 영역운동이 주도적으로 운동을 이끌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과도적으로는 다기능적 중심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 중심이 다른 것에 대해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것으로 가서는 안 될 것이다. 주도적 이념이 없으면 오히려 다양한 소수자운동이 각자 자율성을 지니면서 지배권력과의 싸움에서 연대전선을 펼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다양한 수평적 네트워크를 만들어냄으로써 지배권력이 자의적으로 개입해 들어올 수 없게 하면서 국가(제국)의 지배력을 약화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