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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인문과학

칸트의 도덕철학의 논리적 구성과 들뢰즈․가따리의 비판적 계승

by 랭님 2009. 11. 30.

- 정언, 가언, 선언 논리적 구도와 오이디푸스 삼각형의 구성을 중심으로


2007년 1월 10일

동국대학원 박사과정 신 승철 

서론 

 

1. 칸트의 도덕철학의 논리적 구성

  1) 정언 명법, 가언명법, 선언명법의 논리적 구성론

  2) 홉스와 칸트의 정언명법의 차이

  3) 자유와 자연의 이분법에서 정언명법과 가언명법의 구성

  4) 선언명법의 발견과 삼분법으로의 전화 

 

2. 들뢰즈․가따리의 칸트 도덕철학의 <안티오이디푸스>에서의 계승발전 

  1) 선언명법에서 생산의 연결적 종합으로

  2) 가언명법에서 등록의 이접적 종합으로 

  3) 정언명법에서 소비의 연접적 종합으로  

  4) 세 종합, 오이디푸스 삼각형에 대한 거부에 따른 논리적 구도의 변경

 

3. 들뢰즈․가따리의 칸트 도덕철학의 <천개의 고원>에서의 계승발전

  1) 선언명법에서 기관 없는 신체(자율적 신체)로

  2) 가언명법에서 암적 신체(파시즘)로 

  3) 정언명법에서 텅 빈 신체(전체주의)로 

   결어 : 도덕철학의 논리구성의 사회 구성적 고도화

[요약문]

 

칸트는 <도덕철학>에서 정언명제와 가언명제를 제시했으며, 선언명제는 숨은 전제였다. 그래서 칸트철학은 이원론으로 오해되었다. 칸트의 선언명제는 들뢰즈/가따리의 이접과는 다르며, 무엇보다도 그것은 들뢰즈/가따리의 접속이라는 개념과 닮아 있다. 그 개념은 지구적 민주주의를 구성할 이성의 능력에 상응하는 것이다. 칸트의 삼단논법의 의미는 들뢰즈/가따리에 의해서 '아버지-어머니-아이'라는 오이디푸스 삼각형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안티 외디푸스>는 칸트의 삼단논법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욕망의 생산, 등록, 소비라는 리비도 경제학적 원리로 변형시킨다. <천개의 고원>은 칸트의 삼단논법을 계승하여, 사회적 신체들인 이른바 기관 없는 신체, 암적 신체, 텅 빈 신체로 변형시킨다.    

 

 

[핵심어] 

  서론 

 


칸트의 철학에서 도덕철학이 가지고 있는 위상은 칸트의 가치론적이고, 실천적이며, 윤리적인 영역에 대한 입장이 '이성비판'을 경유하면서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볼 수 있는 중요한 지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어져야 한다. 칸트는 도덕철학 속에서 공리주의와 홉스, 그리고 욕구론 등과 팽팽한 긴장을 가지면서 논리를 전개시켜나간다. 그가 자신의 실천철학을 국가, 권리, 교환활동, 노동 등에 대한 개념에 적용하는 것은 만인의 욕구의 본성을 동질화시키거나, 만인을 투쟁 상태로 빠뜨리는 두 가지 경향을 극복하고 이성의 능력에 의해서 실천에 있어서의 입법적-구성적- 행위를 구체화하기 위해서였다. 칸트의 도덕철학에서 목적론이나 본성론은 수반될 수 없는데, 그것은 이성의 합법적 사용을 통해서 스스로의 입법능력에 따라 요청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통해 '이성비판'의 자신의 작업이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대립모형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이성능력'의 테제임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바로 '주관의 입법자'로 변신한 이성능력의 소유자인 인간의 인식주관으로 돌아가라는 선언이었다는데 의미가 있다.1) 이제 이성의 실천적인 도덕적, 윤리적 요청은 주관의 의무사항이 된다. 이러한 능력은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이라는 칸트의 3분절 구도로 편입되어 인식능력, 느낌, 욕구라는 층위의 능력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로 나아가게 된다.

능력의 테제는 초월적인 의미에서 신비화되던 이성의 지위를 선험적인 영역으로 변모시켰고, 이성에 대한 철학적 논의의 지도를 뒤바꾸어 놓았다. '주관적 입법능력'의 소유자인 인간의 국가, 시민사회, 법, 세계시민국가에서의 활동은 실천이성의 요청에 의하여 하나의 지향점을 갖는 목적론이 아닌가 하는 혐의를 둘 수 있는데, 그것은 '선의지와 공통감각'이라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존재의 합리적인 이성 활동의 윤리적 요청이 나아가야 할 바를 의미할 뿐이다. 물론 선의지와 공통감각이라는 설정 속에서는 그것의 기준이 임의적이라는 비판도 감내해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의지와 공통감각은 주관의 입법적 활동의 구성주의적인 가능성의 기반이 된다. 주관과 대상, 존재와 당위의 이원론적 설정 속에서 주관은 자연의 본성과 달리, 자유의지의 영역이기 때문에 오히려 의무와 당위의 설정을 갖추어야 할 윤리적 실천명제가 된다.

자연을 정립하면서도 자연의 외부에서 가치론적 역할을 하는 '칸트가 증명한 이성능력은 오류추리로 구성되어 있지 않는가?'라는 문제설정은 대상에 대한 주관의 인식능력 속에서 관철되는 논리적 구성에 대한 질문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다. 물론 '무근거의 전제'나 '동일성의 원리'로 향하고자 했던 헤겔철학의 유혹과는 전혀 다른 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들뢰즈/가따리 철학은 칸트철학의 논리적 구성을 계승한다. 이 두 사람의 비변증법적인 차이와 연결접속의 철학이 칸트철학의 논리적 구도의 계승을 통해서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는데, 칸트로부터 들뢰즈/가따리 철학으로 돌아가는 역추적을 통해서도 그 논리적 구도가 드러나므로, 시원적 논리에 대한 접근을 통해 과정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본론 


1. 칸트의 도덕철학의 논리적 구성

 


  1) 정언 명법, 가언명법, 선언명법의 논리적 구성론

 


칸트의 도덕철학의 논리적 구성을 삼분절적인 트라이앵글로 구성되어 있다. 보통 사람들은 칸트의 도덕철학이 존재와 당위의 분리라는 두 개의 분절로 구성되어 있지 않은가? 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칸트는 정언명법의 스스로의 도덕명제에 합당한 행위를 할 것을 명령하는 수행자와 가언명법의 조건적인 행위를 통해 선택하는 수행자와 더불어 선언명법의 ‘~그리고~그리고’로 수평적으로 연결접속되며 병렬되는 명제를 제시한다. 많은 사람들이 칸트를 이분법적인 관점에서 보면서 칸트의 도덕철학이 내재하고 있는 삼분절의 의미를 왜곡시켜 왔던 것이 사실이며, 칸트 자신도 논리구도를 제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갖는 의미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볼 때, 정언명법은 도덕적으로 행위 할 것을 명령하는 ‘아버지’의 존재라고 할 수 있으며, 가언명법은 도덕의 행위를 조건적이고 선택적인 형태로 받아들이는 어머니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선언명법은 아버지와 어머니와 관계할 수밖에 없지만 서로 각각에 대해서 병렬적이고, 수평적으로 연결되는 아이의 존재이다. 이것은 오이디푸스 삼각형을 형성하는 논리적인 구도이다.

그런데 왜 칸트는 이분법으로 오해되어 온 것일까? 많은 학자들은 존재/당위의 구도가 칸트의 도덕철학의 논리적 구도에서도 관철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자연의 영역과 자유의 영역, 대상의 영역과 주관의 영역에 분리라는 이분법적인 설정은 사실은 실천이성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이론이성의 영역으로 설정할 수 있다. 도덕과 가치와 실천의 영역에 있어서는 오이디푸스의 삼각형이라는 삼분법이 존재하며, 그것을 독해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특히 이론이성에 익숙했던 사람이라면, 대상/주관이라는 설정에서 주관의 인식, 즉, 이성, 감성, 지성의 능력의 문제로 패러다임을 전화시킨 칸트의 철학적인 변화에 멈추기 쉽다. 그러나 거기서 칸트의 사고는 중지되지 않으며, 실천이성에서 매우 복잡한 삼각 논리구도를 구성하게 된다.

일단 정언명법과 가언명법만이 칸트에 의해서 언급되며, 선언명법은 논리적 전제로 숨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언, 가언의 두 가지 설정과 주관/대상의 이분법을 쉽게 동일시하는 습성이 있다. 그러나 실천적이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영역에서 삼분법의 구도를 파악한 순간 칸트의 비밀의 베일이 벗겨지고, 매우 정교한 심리적, 정신분석학적, 실천적인 가능성이라는 새로운 지평과 만나게 된다. 칸트가 선언명법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정언명법과 가언명법의 숨은 전제였으며, 역사적 전제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학적으로 보았을 때, 정언명법은 명령자, 입법자로서의 국가라고 할 수 있다면, 가언명법은 주권질서에 의해서 권리와 의무를 선택하여야 하는 신민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 선언명법인 숨은 전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민주주의’라는 숨은 내재적인 동학이며, 역사적인 설정이다. 칸트는 국가와 신민의 설정에서 민주주의의 '숨은 전제'를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매우 역동적인 '구성적 역량'이 선언명법인 민주주의라는 설정에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지만, 언급하지 않는다. 정신분석학적인 의미에서의 정언명법의 명령하는 아버지라는 실천이성의 명령적 기능만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어떤 명령이 어떻게 입법적으로 구성되는지에 대해서는 역사적 숨은 전제로 남겨놓는다. 

사실상 ‘민주주의’라는 제헌적이고 입법적인 능력이 대중에게 내재하고 있다는 내재적인 역량에 대한 스피노자적 신뢰가 칸트에게는 없었던 것은 아닌가라는 사람들의 오해는 사실상 시대적 한계에서 칸트가 숨은 전제로 다룰 수밖에 없었던 것을 간과하는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이성의 공통감각과 선의지라는 표면적인 합리주의로 귀결되는 실천적인 논의의 배후에는 이론이성에서 이미 주장했던 주관의 구성적이고, 입법적인 능력에 대한 신뢰와 그것을 바로 이성능력을 갖고 있는 대중의 민주주의가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이 있다는 것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2)

칸트는 이제 무의식의 차원에서 오이디푸스 삼각형을 제시하는 근대의 정신분석학자가 된다. ‘아버지-어머니-나’라는 오이디푸스 삼각형에서 아버지의 권위, 이성의 권위를 말하는 칸트에서 아버지-이성의 도덕적 명령이 없다하더라도 민주주의를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무의식이 고아인 사람들을 근대인의 형상으로 그린다. 그래서 전근대적이고, 초월적인 ‘신’이라는 아버지를 극복하며, 새로운 이성의 아버지는 민주주의에 의해서 구성되어지는 명령자이며, 입법자라는 사실을 암암리에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의 준-혁명적인 도덕철학의 문건들은 증후적으로 독해되는 것이 아니라, 액면 그대로 독해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실지 도덕교과서에서는 ‘정언명법’을 마치 새로운 초월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인 국가이성인 양 언급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칸트의 트라이앵글 논리는 그러한 논리적인 전개과정과 무관하며, 칸트의 전반적인 구도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전혀 반대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칸트는 제국의 국가이성을 옹호하는 국가주의철학자가 아니라 신민을 넘어선 새로운 민주주의적 이성능력을 가진 대중의 시대를 예감하는 철학자였던 것이다.   

 

 

 

  2) 홉스와 칸트의 정언명법의 차이

 


칸트의 도덕철학은 홉스가 구성한 리바이어던이라는 인공두뇌로 작동되는 괴물 즉, ‘초월적 국가질서’의 설정과는 거리가 있다. 홉스에 따르면 주권자인 군주는 인민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상태'를 종식시킬 수 있는 계산이성의 잣대를 가진 주체로서 등장한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이라는 새로운 계산이성의 군주는 '민주주의'를 수행할 수 없는 신민들에 대한 주권질서가 영구평화를 약속한다는 설정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칸트는 '세계시민국가'라는 설정으로 홉스를 뛰어넘어 주권자인 리바이어던이 없는 다국적인 민주주의의 가능성으로 지평을 확대시킨다. 이러한 지평의 확대는 유래 없는 정치사상의 지형을 만드는데, 그것은 칸트 자신이 주권의 질서마저도 뛰어넘을 이성의 입법적 능력을 대중이 가지고 있다는 이성능력에 대한 무한한 신뢰감의 반증이다. 홉스가 생각했던 주권질서 내부에서의 초월적인 명령자이자 입법자 자신인 리바이어던이라는 새로운 '초월적 군주'의 설정은, 민주주의의 내재적인 입법적인 이성능력에 대한 불신을 의미하면서, 또한 근본적으로 세계평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국가이성의 문제설정을 정당화하는 이론이었다. 그러나 칸트는 새로운 명령자를 '국제적인 민주주의'의 설정 속에서 세계시민들이 구성할 새로운 국가의 상으로 논의의 차원을 '지구'라는 차원으로 뒤바꾸어 놓는다.

칸트의 정언명법의 구축주의적인 의미를 간과한 혹자의 해석자들은 홉스의 계산이성의 '정언명법'처럼 칸트가 정당성 없는 실천의 의무적 당위를 주장한다고 치부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론이성에서 전제된 자기 구성적 이성의 활동, 상상의 작용, 감성의 감응 등은 스피노자적인 민주주의적 이성의 구성적 능력에 기반 한 주관의 대상에 대한 구성능력에 대한 신뢰를 의미하는 것이다. 선험적 능력은 잠재성의 차원에서 민주주의의 구도를 설정하며, 그것은 '선언명제'로서 잠복하다가 정치철학에 있어서 장대한 세계적 차원의 민주주의의 수행능력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칸트가 홉스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자신의 이론을 다른 부분으로 정위하고 있는 것은, 칸트의 목표가 계산 가능한 이성의 지평만이 아니라 계산 불가능한 지평에 있는 물자체의 영역에서 잠재하고 있는 대상의 잠재적인 능력을 응시하고 있었으며, '자연'을 주관 활동인 자유의 구성능력에 의해서 제거하려는 경험주의적 시도에 대해서도 팽팽한 긴장상태 속에서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는 자연이라는 경외로운 대상을 '물자체'의 영역으로 승인함으로서 겸허하게도 '계산이성'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를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측정불가능하고, 계산 불가능한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는 실천이성의 도덕준칙이나 판단력의 숭고의 이미지로 변모하면서 재현되지만, 그 점을 항상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그 전제의 결과로서 도출되었던 것이었다. 홉스의 계량적 질서에 대한 승인에 의한 합의적 평화체제에 대해서 칸트가 쉽게 동의할 수 없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도 있겠지만, 그 중에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숨은 전제'로서 존재하는 수평적인 시민사회가 만들어내는 민주주의에 대한 가능성을 의미하는 '선언명제'에 대한 염두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홉스야 말로 이분법에 사로잡힌 이론가였다면, 칸트는 삼분법의 설정으로 새로운 모델을 구성하려고 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홉스가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야누스였다면, 칸트는 수천의 머리를 가진 히드라의 세 갈래 머리였던 것이다.     

 

 

 

  3) 자유와 자연의 이분법에서 정언명법과 가언명법의 구성

 


칸트의 대상/주관의 이분법과 정언명법과 가언명법을 동일시하는 것은 매우 일반화 되어 있는 오류에 해당한다. 즉, 자연은 조건적이며, 선택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며, 이성적 주체는 그것을 구성하고 정립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명령자로서 존재한다는 사고방식이 그러하다. 이러한 설정은 매우 반 생태적인 사유방식으로서 비난되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사유의 틀이 마치 칸트에게서 유래되는 것처럼 보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칸트의 사유체제를 따라 가다보면 매우 자연의 영역에 대해서 겸손하면서도 이성의 능력에 대해서도 존중하고 있는 칸트를 발견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보면, 대상과 주관의 팽팽한 긴장상태에 위치한 칸트를 발견할 수도 있다.

칸트에게 있어서 주관과 대상간의 관계는 자유/자연의 이원론적인 설정이 아니라, 표현과 내용간의 이분법적인 설정으로 사고된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실체는 표현이라는 영역으로도 나타나고, 내용이라는 영역으로도 사고될 수 있는 이분법적 이중분절로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와 칸트를 동일시하는 매우 우려스러운 이원론적 독해와는 달리 데카르트의 '코기토'에 의해서 독단적으로 설정된 이성적 주체와는 완전히 다른 '이중집게를 가진 가게'를 칸트는 등장시킨다. 즉, 주관은 대상의 표현영역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대상에 대한 파악을 할 수 있지만 한계를 가지고 있는 그물망과도 같은 인식의 표현 작용인 것이며, 대상은 인식주관과는 달리 내용의 영역으로서 실체를 드러낼 수 있는 영역인 것이다.

칸트에게 있어서 '이론이성'의 과제는 이 이분법을 완성함으로서 선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실천이성'과 도덕철학에 있어서는 이분법의 설정과는 완전히 무관한 삼각형 구도를 형성함으로서 문제를 다차원적이고, 다원적으로 구성한다. 이분법과 삼분법은 혼동되어서는 안 되며, 고도의 사회구성 상태에서 이성이 작동하는 바를 정교하게 드러내는 오이디푸스 삼각형이 마니교적인 이분법의 대상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이 두 개의 논리구도의 차이점이 후대의 철학에서 많은 혼란을 던져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분법의 전개과정에서 n차원으로 진입하는 가교로서 삼분법의 전개가 있다고 하더라도 문제의 형식적이고, 잠재적인 충돌은 봉합되는 것이 아니다.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은 잠재적으로 충돌하고 있으며, 형식적인 전개는 내재적인 모순에 처하고 있다. 그것은 선언명제가 삼분법도 넘어서는 다차원적 공간을 구성하기 때문이지만, 형식적 구도를 설정할 때 이분법의 내용이 삼분법의 형식과 잠재적으로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론이 이것을 정위시키고, 이분법과 삼분법의 잠재적인 충돌을 체계화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칸트의 철학적인 논의는 잠재적인 충돌가능성을 가진 텍스트로만 존재하게 된다. 정언명법과 가언명법을 자유/자연의 명제로 동일시하는데서 오는 안정감은 사라지고, 선언명법의 도입은 칸트의 전반적인 텍스트를 카오스 혼돈의 상태로 빠뜨린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의 관점에서 이분법을 전개시키려는 순박한 철학적 해석의 시도는 좌절된다. 그 과정에서 칸트가 갖고 있는 근대인의 무의식인 오이디푸스 삼각형의 구도는 정언-가언-선언의 명제로 제기되지만, 그 또한 카오스 혼돈 속에서만 존재하게 된다. 이분법에서 삼분법으로 전화된 것에 머물지 않고, n차원으로 돌입하게 된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 칸트의 실천이성이 그리는 지도는 또 한 번 전복된다. 그렇다면 어떤 방향으로 그것이 전개될 수 있을 것인가가 이후 철학의 문제설정이 될 수 있다. 

 

 

 

4) 선언명법의 발견과 삼분법으로의 전화 

 


정언명법과 가언명법의 행간에 숨어 있던 선언명법이 오이디푸스 삼각형의 무의식의 실체를 보여주는 순간, 삼각구도 속에서 완결성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삼각구도는 근대의 신경증적 무의식인 '아버지-어머니-나'라는 형상을 만들어주지만, 무의식이 고아인 나의 수평적 연결접속의 형식인 선언명법이 제기되는 순간, 칸트의 모든 저작은 카오스 혼돈의 상황으로 빠져든다. 칸트가 만들었던 이분법-삼분법은 다분법 혹은 다가적 증식의 n-1의 공간이 된다. 정언명법이 제거된 선언명법의 전개, 아버지의 명령이 제거된 무의식이 고아인 아이들의 연결접속의 증식이 바로 n-1의 공간이라고 할 때, 문제의 차원은 칸트가 봉합하고자 했던 실천이성의 준-안정적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오이디푸스 삼각구도의 완결된 체계 속에서 세계를 그리고 있는 프로이드박사의 정신분석학이 칸트의 의도와 공명하는 바가 크지만, 칸트는 실지로는 프로이드박사의 오이디푸스를 넘어서는 구도를 잠재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근대의 가족과 가족에 의해서 구성된 근대주체를 넘어선 새로운 자아의 형성을 보여주는 근대인은 모든 예속에서 벗어난 자유인들이다. 그들은 가족의 구성이 보여주는 명령지배적인 세포적인 형태를 거부한다. 그들은 가족을 넘어서 실천의 영역을 구성하고 있는 새로운 연결접속과 삶의 지반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래서 들뢰즈․가따리에게 있어서 이성의 이원론적 설정은 '이성의 오류추리'로 간주되며, 오이디푸스 삼각형은 넘어서야 할 새로운 지반이 된다.

들뢰즈․가따리의 '이성의 오류추리'는 근대에 와서 홉스로 변모된 칸트를 겨냥한 것으로 '초월자'로 규정되면서 자연을 정립하려는 이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칸트의 선험론적 명제와 물자체의 영역을 변형하여 이원론으로 만들어버리는 모든 시도에 대한 거부를 의미한다. 앞서서 칸트가 이원론자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했지만, 칸트의 전반적인 맥락은 넘어서야 할 근대의 방법론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칸트를 이원론으로 독해했던 이론이성의 영역의 독해 즉, 구성적이고 입법적이면서도 초월적인 이성이라는 설정은 오류추리로 간주된다. 정언-가언-선언 명제가 만들어내는 삼분법은 계승되지만, 이론이성의 이분법은 오류추리로 간주되면서, 오이디푸스 삼각형을 넘어서기 위한 새로운 지반을 요청한다. 삼분법은 오이디푸스 삼각형이 아니라, 욕망의 생산과 등록과 소비의 과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오이디푸스에 대한 거부는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려는 초월적 시도와 '부친살해'의 본능적 시도를 넘어선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된다. 그것은 오이디푸스 삼각형으로 한계 지워질 수 없는 다면적인 자유인의 접속양식과 삶과 사유의 양식을 의미하며, 애초부터 무의식에는 초월적이고 명령적인 아버지도 순응적이고 선택적인 어머니도 없었던 것이라는 전제에서부터 출발한다. 즉, 근대의 가족 무의식의 주체구성양식과는 달리, 그러한 역할게임에 머물 것이 아니라, '기관 없는 신체'라는 초월자의 작용과는 무관하고, 아버지의 명령이라는 기표작용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무의식이 고아인 아이들의 접속양식인 탈근대가 제기되는 것이다.    

이제 탈근대의 설정은 가족을 아버지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병든 신체의 공간이 아니라, 자유인들의 연합과 공동체의 방식으로 전화하라고 요구한다. 공동체-가족이라는 설정은 사회구성에 있어서의 생물학적, 유전적, 혈통적 의미에서의 가족을 제거하며, 성 역할에 따른 분업 구조를 파괴한 새로운 자유인의 삶의 양식을 의미한다. 이러한 새로운 접속양식이 갖는 의미는 새로운 욕망양식 즉, 삶의 양식의 구성과 긴밀한 관련을 갖는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지점은 칸트의 이분법의 구도 중에서 근대의 이원론적 설정은 철저히 오류추리로 간주되지만, 욕망의 두 개의 양축을 형성하는 벡터장의 극한으로 설정되어 리비도경제학을 구성한다는 점이다. 즉, <앙띠 외디푸스>에 있어서  '기관 없는 신체'와 '욕망하는 기계'라는 두 가지 극한적인 지점이 그러하다.

욕망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고요한 강렬도=0의 상태인 신체인 '기관 없는 신체'라는 설정은 맨 몸뚱아리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무기체와 유기체적 자연의 설정이 되며, 욕망으로 가득 찬 가상기계라는 설정인 '욕망하는 기계'는 기계라는 메카닉한 설정으로 욕망의 기계적인 피드백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축이 된다. 이제 <앙띠 오이디푸스>에서 처음 제안된 두 설정의 이분법은 욕망의 생산, 등록, 소비의 과정에서 이성의 오류추리를 대신할 새로운 이분법의 실체가 된다.

 

 

 

2. 들뢰즈․가따리의 칸트 도덕철학의 <안티오이디푸스>에서의 계승발전 

 


1) 선언명법에서 생산의 연결적 종합으로   

 


선언명법은 '그리고, 그리고'로 연결되는 수평적인 접속의 유형이지만, <앙띠외디푸스>에서는 들뢰즈․가따리에 의해서 '이접'의 유형으로 간주된다. 분명 선언명법은 ~또는 ~이라는 형태의 논리는 이접으로 머무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유산을 가지고 있지만, 칸트는 선언명법을 정언명법으로 통합하지 않고 숨은 전제로서의 민주주의의 원리로 발전시키고 있다는 증후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잠정적인 체제의 형성에 있어서 선언명법이 욕망 생산의 연결접속적인 종합의 유형으로, 가언명법이 이접의 유형으로 위치 지워져야 할 것이다.3) 선언명법의 접속유형은 리비도경제학에서 욕망의 생산적인 영역을 구체화하고 있는데, 그것은 욕망이 생산되기 위해서는 수평적인 연결접속을 통해서 생성되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것은 수직적인 위계질서의 사회에서 일종의 해방적 분열을 의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지만, 욕망이 생성되기 위해서 필요한 사회적 배치를 의미한다. 물론 침실에서 어머니에게 굴종하는 가부장제적인 권위를 가진 아버지라는 설정이라는 위선적 타협이 이러한 수평적인 연결접속을 대신할 수 없다.

오히려 욕망이 생산되기 위해서는 혁명적인 리비도와 에로스를 요구한다. 그것은 러시아혁명 시기에 노동자소비에트가 소년소녀 소비에트의 문란한 성행위에 대한 권위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으로 드러났던 혁명적인 에너지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혁명>이라는 책에서 밝힌 문명적인 에로스 에너지인 신체적인 삶-충동의 폭발적인 증가의 양상으로 드러난다. 마르쿠제의 에로스효과는 욕망해방운동이었던 68혁명의 전 세계적 차원의 리비도 에너지 전파과정을 보여주는 하나의 메커니즘이다.4)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욕망 생산의 과정에서 가학-피학적인 관계설정이 기묘하게도 쾌락적 유형으로 변모되든지 피해자들이 에로틱한 변모를 하면서 매우 낭만적이면서도 혁신적인 생체 에너지를 형성한다는 점이다. 68년 3세계 베트남 전쟁과 혁명의 에로스 에너지는 1 세계 미국의 반전 학생운동에 전달되어 그 힘이 폭발적으로 드러나는 과정을 보더라도 그렇다.

욕망 생산의 과정은 사회구성에 대한 혁신과 사회적 배치에 대한 변모의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드러날 수도 있으며, 어떤 정치적이거나 문화적인 충격에 의해서 사람들을 결집시키기도 한다. 욕망은 기득권 중심적인 질서가 아닌 분자적 수준에서 욕망을 전달시켜낼 수 있는 새로운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그 네트워크는 욕망의 무리들을 움직여 기존 사회에 대한 반역과 새로운 생체 에너지의 흐름과 생성의 순간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것은 보통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이 목소리를 내고 있었던 비탄에 빠지고, 절규에 가득 찬 피해자의식의 편집증적 파라노이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에로틱하고, 밑바닥에 존재들의 엉뚱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분열적인 스키조프레니아를 보여준다.

리비도 경제학의 특징적인 부문은 이러한 생산의 연결접속적 종합인 선언명제가 매우 강렬한 역사적 순간에만 드러나며, 실재로도 잠재적인 역량으로서만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점은 칸트가 선언명법을 숨은 전제로 다루었던 것과 일치하는 점이다. 리비도 경제학의 생체 에너지론은 잠재되어 있던 에너지를 끌어올리고, 가상의 기계적인 피드백으로 바꾸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역량을 부르주아에게 전달했던 현실 경제학의 착취의 문제를 생체에너지 전달과정으로 뒤바꾼다. 그것은 잠재성을 실재성으로 만들기 위해서 가상적 신체를 만드는 과정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목숨을 건 도약'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기존 맑스주의는 노동력의 상품화과정과 잉여가치의 생산과정을 단순히 이상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 과정은 모험적인 과정으로 뒤바뀌게 되며, 벤쳐적인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이 가상신체의 기계적 피드백에 대한 활성화전략이 신자유주의의 화폐의 정치로서 구체화되는 부분이다.

    

 


2) 가언명법에서 등록의 이접적 종합으로 

 


이접은 ~인가?~인가?라는 선택적인 가언명제를 보여준다. 이 선택적 가언은 생산된 욕망들을 추려내고, 선택하여 코드를 등록한다. 이것은 '~이면 ~이다'라는 가언명제의 코드화의 작용을 의미한다. 이 코드의 등록과정은 생산된 욕망에 대한 점유와 점취의 문제로 다가갈 수밖에 없다. 코드의 등록과정에서 '분리차별'의 이접의 방식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앙띠 외디푸스>에서는 리비도경제학에 집중하여, <천개의 고원>의 파시즘의 암적 신체라는 설정과는 달리, 코드화 과정으로서 바라본다. 코드화과정은 일단 생산된 욕망의 흐름과 생산물에 대한 소유권과 점취권에 대한 식별작업으로 초코드화되기 쉽다. 여기서 권력이 작동하는데, 대중의 일반지성에 대한 지적재산권의 문제와 매우 흡사하다. 대중의 일반지성이 발명가에게 창조물이나 생산물을 만들도록 영감을 부여해 줄때 지적재산권은 그것에 대한 권리를 코드화시켜서 누구의 발명품이라고 꼬리표를 붙인다. 그러나 권력적 초코드에 의해서 권리적 코드는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코드화과정에 대한 분석은 리비도경제학에 있어서 욕망의 등록과정을 의미하며, 하나의 순환적인 코드화, 탈코드화, 재코드화의 과정으로 존재하게 된다. 베블런의 유명한 저작 <부재소유>에서 자본가가 생산물에 대해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하여 깽판 놓기sabotage를 하는 과정은 이러한 코드화의 과정을 분명히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5) 욕망의 영토에 코드가 아로새겨질 때 이제 생산된 욕망은 누구의 소유인지에 대한 문제로 뒤바뀌게 된다. 그 때 초월적 권력이 작동하며, 초코드가 코드의 식별과정에 개입하게 된다. 동업조합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를 성장시켰을 때, 누구의 부이며, 누구의 소유물인지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깽판 놓기와 코드화의 과정이 동반되었던 점을 기억해 볼 때 자본주의의 욕망등록의 과정은 이미 분리차별을 전제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앙띠 외디푸스>는 이접에 과정에서 개입되는 초코드의 욕망의 편집증적 응집의 반동적 과정에 대해서 맞선다. 그것은 아버지의 아버지로서의 권력이 욕망의 분배의 문제에 개입하는 것이며, 소유권을 할당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욕망의 분열적인 흐름을 응고시키는 편집증적인 힘의 역학이라고 간주된다. 혁명적 에너지는 반동적 에너지로 전화되며, 탈영토화 이후에 재구조화라는 매우 반동적인 역사적 반진동이 형성된다고 바라본다. <앙띠 외디푸스>에서 들뢰즈․가따리는 초코드인 기표독재체제를 그 초월적 권력의 심장부로 지목을 한다. 말과 글의 이중분절이 만들었던 소통과 정보, 영토와 코드의 이분법은 기표에 의해서 언명되고 코드로 변모되어 욕망이 기록되는 과정에서 응고되는 반동화과정을 지적한다. 그러나 기표독재체제의 초월적 권력에 맞선 내재적이고 미시적인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은 삶의 영토가 갖고 있는 욕망의 생산능력이며, 리비도에너지라는 삶의 활력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코드를 배제한 영토, 정보를 배제한 소통의 의미일 수는 없다. 그것은 사법적인 심판의 잣대를 부여하는 거대 근대이성의 기표독재체제를 거부하는 것이지, 코드화일반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즉, 구술문명의 소서사가 만들어내는 영토의 역능에 대한 긍정이기는 하나, 그것이 글이나 정보로 코드화될 것이라는 것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글로 포착된 사법적 의미의 눈-이성의 설정은 구술문명의 소통영토의 의미인 귀-신체라는 설정으로 뒤바뀌게 된다. <앙띠 외디푸스>는 오이디푸스 삼각형이라는 초월적인 근대의 코드를 거부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탈근대인의 형상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3) 정언명법에서 소비의 연접적 종합으로


정언명법은 '그러므로 나는 ~이다'라는 분명한 정체성의 확립을 통해 응고된 욕망이 소비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리비도경제학에서 생산된 욕망은 코드가 등록되고, 결국에 가서 코드를 소비하는 것이 된다. 소비는 삶에서 생성되는 욕망이 응고되어 코드화되고 결정된 상태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결국 욕망에 의해서 생산된 산물에 대한 코드화가 이루어지면, 즉 예를 들어 동업조합에 의해서 생산된 부에 대한 재산권의 여부가 결정되면 이제 '자신은 노동자이다', '자신은 자본가이다'라는 정체성의 확립이 이루어지고 그것은 욕망에 대한 소비의 진실인 것이다. 물론 코드에 대한 소비는 이러한 자본주의 계급적 정체성에 한정되는 부분은 아니다. 코드에 대한 소비는 포괄적인 이미지, 가상지위, 사법적인 언술, 글 등에 대한 소비 일반을 포괄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인간의 삶의 영역에서 코드화된 부분을 소비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삶의 영역에 대한 상품물신주의의 출현으로 한정시킬 수만은 없다. 물신주의라는 도착의 의미는 맑스주의가 지적했던 자본주의체제의 근본적인 원리라고도 할 수 있지만, 욕망하는 기계의 차원에서 욕망소비는 기계적 피드백이 이루어지는 욕망소비의 충족과정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리비도 생체에너지는 기계적 피드백으로 결정되어 코드화되고 소비된다. 예를 들어 TV가 다양한 삶의 욕망을 이미지로 코드화시켜 그것을 시청자와의 기계적 피드백의 과정으로 결정시켜내는 것을 보더라도 그러하다. 이제 전도된 현실은 '도구적인 이성'으로 치부되던 현실적인 물신주의의 재등장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부분충동으로 응고되어 소비되는 도착적 기계적 욕망의 수준을 의미한다. 생체에너지의 활력은 상품화된 코드의 소비과정에 의해서 2차적 욕망으로 전화된다. 즉, '나는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은 위대한 사람이 착용했던 장신구를 쓰는 것이라는 상품소비의 2차적 욕망으로 전화된다. 

욕망의 생산, 등록, 소비의 과정에서 소비의 2차적 욕망도 사실은 욕망생산의 새로운 과정을 의미한다. 소비 없이는 욕망생산의 새로운 순환의 고리도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비에 의해서 재 활성화된 2차적 욕망이 삶의 생성된 에너지에 다시 재 전달되기 때문이다.6) 욕망소비에 있어서 금욕과 탐욕의 이분법은 사실 올바른 정식으로 볼 수 없다. 소비는 생산적 소비이며, 생산의 기초이므로 욕망생산의 새로운 계기로서 간주되어야 하며, 활성화되어야 할 부분이 된다. 현실 경제에 있어서도 경기 불황에서 내수경기침제에 도달했을 때, 욕망을 활성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는 것 이면에는 리비도경제학의 요청이 있기 때문이다. 소비는 삶-욕망을 활성화시키고, 그것을 긍정할 수 있는 계기를 준다. 그렇기 때문에 리비도경제학의 의미에서 욕망소비의 과정은 매우 긍정적인 부분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으며, 국민경제의 차원에서 사회보장소득을 통해서 소비를 유도하는 것이 매우 욕망경제에서 긍정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맑스주의자들은 2차적 욕망에 대한 긍정의 의미를 도착적인 상품물신주의의 탐욕으로 바라보곤 했다.7) 그러나 매우 추상적이고, 비물질적인 욕망경제의 생산물에 대한 소비는 억압되고 물신화된 2차적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져야 할 것이 아니라, 욕망의 재활성화의 측면에서 긍정되어야 할 부분이다. 그것이 정언명법과도 같이 실천적인 수준에서 요청되는 잠정적인 주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 가부장제 의해서 유지되는 경제 외부의 소수자의 삶과 욕망경제에 대해서 매우 면밀한 검토가 필요한 것이다. '노동가치설'에 입각한 부르주아적 근대정치는 사실 탈근대 상황에서 실효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삶의 욕망을 보장하고, 그것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욕망가치'라는 삶-욕망에 대한 포괄적인 긍정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4) 세 종합, 오이디푸스 삼각형에 대한 거부에 따른 논리적 구도의 변경

 


칸트의 선언, 정언, 가언이라는 오이디푸스적인 설정은 <앙띠외디푸스>에서 격렬하게 거부되어야 할 명제로 간주된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의 지형은 초월적인 코드인 권력의 작동에 대한 거부와 욕망의 리비도경제에 있어서 그것을 배제하고, 욕망 자신에게 욕망의 공장을 운영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을 요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초월적 권력의 정신분석학적 명제인 오이디푸스 삼각형은 오류추리라고 간주되어졌다. 그리고 오류추리의 내면에는 초월성에 대한 승인이 있으며, 그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삶의 욕망의 긍정에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는 요청이 있는 것이다. 리비도 경제학의 도입은 분열적인 욕망의 생산을 극한적으로 밀어붙여서 종국에 가서 욕망의 코드화라는 응고의 과정을 물리칠 것이라는 이론적인 설정이 있다. 그것은 반동적 편집증에 맞선 혁명적 분열증이라는 설정을 의미한다.

68년 혁명과정에서 칸트의 명제는 매우 혁명적으로 도입되어 사용되어지며, 또한 비판적으로 계승된다. 그것은 새로운 들뢰즈․가따리 방식의 삼분법의 도입을 의미하며, 리비도경제에 도입된 칸트라는 이상한 설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학문적인 이종결합을 통해서 칸트의 명제들은 매우 현대적인 이론으로 변모하게 된다. 그러나 들뢰즈․가따리는 리비도경제라는 설정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68년 혁명의 좌절과 신자유주의적인 반동화 과정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한다는 시대적인 요청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칸트의 오이디푸스 삼각형을 이원론적인 오류추리의 설정으로 보면서 이분법과 삼분법의 대립양상으로 보았던 것에서 이분법을 내용과 표현으로 정위시키면서도 삼분법의 리비도경제학을 더 구체적인 사회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사회구성적인 설명력을 부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과정의 결과물로 <천개의 고원>이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는데, 그것은 이론적 균형감을 갖추고 매우 정교해진 칸트의 삼분법과 이분법을 등장시켜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삼분법에 맞선 이분법이라는 <앙띠 외디푸스>에서의 설정은 매우 축소되며, 오히려 다분법적인 프랙탈 n-1차원이 중심에 서게 된다. 이러한 <천개의 고원>의 설정이 반동기에 쓰여 졌다는 것과 칸트가 제시한 구도를 새로운 방식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은 매우 특이한 점이며, 그것이 보여주는 논리구도는 <앙띠외디푸스>와는 매우 색다른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천개의 고원>도 '자본주의 정신분열증'이라는 기획의 일부로서 쓰였으며, 이 기획의 연장선 하에서 바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정신분열증'이라는 기획에서도 미묘한 변화를 거치게 되는데, 예를 들어 임상적 의미의 분열증을 혁명적 에너지의 증가로 보지 않고, 협착되어진 에너지의 산물로 보는 점이 그러하다. 가따리에 의해서 주도된 '정신질환자 공동체'와 같은 실험들이 보여주었던 여러 가지 연구 성과물들이 보여주었던 획기적인 패러다임이 중심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구성체 자체를 분석하려는 기획이 중심에 놓이게 되며, 리비도 경제학은 욕망 미시정치라는 새로운 미시정치학의 구도 속에서 철학적으로 배치되게 된다.

<앙띠 외디푸스>에서 초월적인 코드로 지목했던 오이디푸스 삼각형에 대한 공세적인 비판도 많이 축소되는데, 그것은 68년 혁명의 사생아였던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의 공세적인 개혁의 원심력으로 가족을 분쇄시켰기 때문이다. 이제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는데 있어 욕망의 미시정치가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가 문제의 핵심으로 드러난 상황에서 <천개의 고원>은 다시 칸트의 정언, 가언, 선언의 삼각형을 도입하여 그것을 새롭게 재배치해 낸다. 이제 자치적이고, 자율적인 사회적 신체의 새로운 민주주의는 현실에 존재하는 내재적인 관계로 다루어진다.     

 

 

 

3. 들뢰즈․가따리의 칸트 도덕철학의 <천개의 고원>에서의 계승발전


1) 선언명법에서 기관 없는 신체(자율적 신체)로

 
칸트의 선언명제는 숨은 전제로 다루어지다가 민주주의의 수평적 연결접속의 실천적 의미로 다루어졌다. 이제 선언명제는 '리좀'이라는 새로운 연결접속의 유형으로 간주된다. 리좀은 매개 없는 직접적인 접속의 유형으로 중앙 집중주의적인 권력의 유형에 조종되지 않는 공동체의 소통유형을 의미한다. 리좀의 유형은 나무의 유형과 대비되면서, 구근식물이나 덩이식물의 땅 밑 망상조직의 형성으로 구체화되는데, 감자나 고구마의 땅 밑의 번식작용과 인터넷 네트워크의 중앙제어장치 없는 복잡계 구조가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리좀의 유형은 나무의 유형인 지층화되고 위계화된 사회적 배치에 맞서는 것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의 인식유형을 포괄하는 일반화된 지성의 네트워크로 광범위한 포괄적인 존재를 드러낸다고 설정된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성숙이 권위주의적 메커니즘마저도 낡은 것이자, 내적인 하나의 계기로만 만드는 수평적 연결접속의 소통구성의 양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나무는 점으로 리좀은 선으로 존재하며, 점은 계기로서 유동하는 선에 접착되어 있지만, 선의 흐름을 제어할 수는 없다. 이제 수평적 민주주의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도도한 흐름이 된 것이다. 선언명제의 민주주의는 이제 역사의 가장 큰 물줄기가 되는 셈이며, 칸트가 사고했던 세계시민사회는 일국의 주권질서라는 나무들을 통합하는 전 지구적 네트워크 망으로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가따리의 수평적 연결접속인 리좀이 사고하는 민주주의는 매우 독특한 역사적 지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국가주의적인 매개에 의한 연결과 소통을 배제하면서 '기관 없는 신체'라는 맨몸뚱아리의 존재들이 직접적으로 자치를 수행하고, 직접적으로 소통하면서 합성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앙띠외디푸스>에서 기관 없는 신체는 강렬도 = 0의 자폐적이지만 욕망을 근원적으로 발생시키는 신체로 간주되면서 '욕망하는 기계'와의 연결을 통해 생산이 이루어진다고 간주되었던 것을 다시 생각해 본다면, '기관 없는 신체'의 의미는 새로운 각도에서 접근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기관없는 신체는 분열자의 신체, 편집증자의 신체, 마조히스트의 신체, 요가나 크리쉬나의 신체, 마약을 한 신체에서도 발생되지만, 욕망 생산의 근원으로서 강렬도가 내재적으로 역동하고 있는 심원한 욕망이 강렬하게 들끓고 있는 알과 같은 덩어리라고 밝혀진다. 어떤 사회적 구속이나 개입에서도 벗어나 이제 맨 몸뚱아리로서 벌거벗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소수자들에게 '기관 없는 신체'는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폭풍의 눈과 같은 존재가 자율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삶의 배치를 바꾸는 삶의 내재적인 미시정치를 수행할 수 있다는 생성의 알과 같은 존재인 것만은 분명하다.

들뢰즈․가따리는 기관 없는 신체의 수평적 연결접속으로 자율주의의 새로운 맥락을 형성하게 된다. 그것은 소수자의 내재적인 삶의 혁신과 삶-정치를 의미하며, 사회적 주류인 다수자의 논리에 의해서 억압되어 왔던 소수자들의 삶의 내재적인 변화과정만이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소수자의 민주주의는 들꽃처럼 살아가는 소수자들의 삶의 양태를 혁신시키는 것이며, 들꽃들이 무리를 형성할 때 지하에 뿌리의 망상조직을 만들어 소통하고, 네트워킹하면서 자신의 존재의 안전감과 생존자체를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을 형상화시킨 것이다. 리좀은 매우 밑바닥에 도달 한 새로운 대중들인 소수자들의 연합과 연대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칸트의 선언명제가 가지고 있었던 숨은 전제로서의 세계적 차원의 민주주의는 국제적 차원의 이종결합이 만들어 낸 이주민들, 외국인 노동자들이라는 소수집단의 연대와 망상조직으로 합성되어지는 그들의 낮은 목소리들로 바뀌게 된다. 그것은 대의제적인 세계정부차원의 다국적 정부의 구성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인 수준에서 문명과 문화적 이질감을 극복할 수 있는 삶-정치의 수준의 문제가 된다. 또한 소수자의 노선은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실업자, 동성애자, 장애인, 노인, 어린아이라는 새로운 주체성의 모습을 역사에 등장시켜 그들의 목소리를 철학적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기존의 남성-성인-정상인-자국민-정규직 노동자에 착목했던 모든 기성세대의 이론은 낡은 것이 되었으며, 철학적 논의의 중심은 이동되어졌다. 

 리좀의 수평적 연결접속은 매끄러운 연결접속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며, 소수자들의 삶의 무의식의 매끄러운 지반을 보여줌으로서 가학-피학적인 홈페인 공간의 의미로부터 벗어나는 소수자들의 욕망의 은둔, 잠행, 탈주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 노마디즘이라는 설정은 역사의 비주류인 소수자들이 68년 혁명 시기 자신의 생명 에너지를 보여주었을 때, 구체화될 수 있었던 개념이었는데, 그것은 주류의 언어와 대의제 정치행위에 대해서 판단을 정지하고 매우 다른 사고방식으로 기성 질서를 벗어났던 데에 연유한다. 그들은 역사의 피해자들이 보여주었던 권력집중적인 편집증의 양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상상력과 수평적 연대능력에 기반 하는 분열증적 문화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무의식은 상처인 홈으로 가득한 것이 아니라, 매우 매끄럽게 상처를 봉합하거나 회피하고 에로스적인 생체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는 것이었다.

 '리좀'이라는 중심 없는 주변부의 민주주의와 탈주체적이고, 탈중심적인 민주주의는 탈근대시대의 민주주의가 소수자의 삶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정서적, 문화적, 사회안전환경과 사회안전망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그것의 의미는 사회민주주의적인 배치와는 매우 다른 소수자 욕망의 미시정치에 기반 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칸트의 선언적 명제는 대의제에서 벗어나 매우 미세한 삶의 영역의 문제로 접근되어지며, 소수자의 삶의 실질적인 민주주의에 기반 하여야 한다는 시대적인 요청에 의해서 변형되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의미와 함축을 완전히 뒤바꾸는 것으로 사회적 자유와 안전, 해방과 민주주의, 공동부commonwealth와 공동선commongood을 연결하는 중요한 도덕철학의 개념이 되는 것이다.  

 

 

 

2) 가언명법에서 암적 신체(파시즘)로 

 


칸트의 가언명법의 배타 택일적 선택의 명제는 분리차별이라는 명제로 구체화되어 그것이 실현된 사회체를 파시즘이라고 보게 된다. 파시즘은 증오와 차별이라는 명제 속에 욕망을 투사시키며, 국가, 민족, 세계, 태양계, 우주를 망상하게 만든다. 나찌의 위대한 게르만에 대한 욕망은 태양계에서 영원한 게르만족에 대한 망상을 죽음충동과 결합시켜, 그 영원함에 목숨을 던지고 희생하는 돌격대적 의식을 만들었다. 칸트의 가언명법에서 관용적인 의미가 사라질 때, 차이는 차별로 바뀌고, 이질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이질성을 배척하는 증오로 바뀐다. 들뢰즈․가따리는 '암적 신체'라는 개념으로 이 분리차별과 증오의 체제를 설명한다.

암적 신체는 기존의 신체의 무한한 생명에너지를 빨아들여 자기 증식하는 죽음-충동의 블랙홀이라고 할 수 있다. 암적 신체는 동성애자, 주변 보헤미안, 외국인 등의 소수자들을 공격하며, 그들이 자신의 일자리를 뺏어갔다는 사고를 퍼뜨린다. 그리고 암적 신체는 독점 자본주의 이후로 형성된 거대한 산업예비군과 퇴역예비군들에서 형성되었다. 암적 신체는 남성적 활력, 피, 영원성에 대한 투사, 생활세계의 강렬함 등을 특징으로 한다. 나찌는 대중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대중의 자발성에 의해서 스스로 자신에게 목숨을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친위부대를 만들 수 있었다. 이러한 자발성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기관 없는 신체의 우익 프롤레타리아트운동의 신체에 암과 같이 급속히 퍼져나간다.

들뢰즈․가따리는 신자유주의의 화폐의 정치가 소수자의 생활세계를 재편함과 동시에 미시적인 삶-세계의 증오와 차별을 형성하여 미시파시즘의 발호를 만든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그 두 사람은 암적 신체가 욕망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것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배치를 변화시키는 진지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진단한다. 이 욕망의 재배치의 전략은 소수자의 미시정치에서 중요한 지반을 형성한다. 탈주의 전략은 텅 빈 신체 하에서의 전략이었다면, 재배치의 전략은 암적 신체 하에서의 전략이다. 그러나 탈주의 전략이 신자유주의의 화폐의 정치가 만들어내는 암적 신체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잘못 오인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탈주의 전략은 밑바닥에 도달한 기관 없는 신체로서의 소수자의 삶을 재배치하지 않고, 탈주하는 것은 그들의 삶-세계를 와해시킬 위험이 있는 것으로 경고될 수 있다.8)

암적 신체가 자살충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자살충동은 외부에 대한 증오의 내면적인 도덕적 숭고화의 결과물이며, 자살충동의 벡터장이 커졌다는 것은 그 만큼 사회적 환경에 기인한 증오와 분리차별의 극단적 현실에 대중이 노출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파시즘'이라는 설정은 소수자를 공격하는 다수자라는 설정으로 인식되고 경각심을 갖게 만든 측면이 있으나, 그 공격성이 자살충동으로 전화되어 내면적 살해를 저지른다는 사실을 바라보지 못한 측면이 있다. 프로이드의 삶-충동과 자살충동에 대한 이분화는 나찌 독일의 가미가제적 돌격대의 희생제의를 바라보며 파시즘의 위대한 사업이 벌이고 있는 죽음충동의 위험성을 개념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가따리는 신자유주의 상황이 텅 빈 신체의 상황이 아니라, 암적 신체를 극단적으로 증가시키리라고 예상한 것으로 판단된다. 양극화, 실업, 빈곤, 매우 열악한 안전환경과 낙후된 사회안전망이 사회적 증오와 차별을 극단적으로 형성할 것은 분명하며, 그것에 대해서 방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사회적 위선에 대항하여 소수자들의 저항과 새로운 민주주의가 만들어내야 할 과제들을 염두에 둔 듯하다. 들뢰즈가 마지막으로 예감한 '맑스의 위대성'이라는 맑스주의 혁신의 정치테제는 들뢰즈 자신의 자살로 하나의 역사적 숙제로 남겨 졌지만, 기성의 맑스주의와는 매우 다른 새로운 맑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소수자의 욕망의 미시정치에 기반한 새로운 맑스는 텅 빈 신체와 암적 신체에 맞선 기관 없는 신체로서 존재하는 소수자들의 새로운 연결접속의 민주주의를 구체화하는 것으로 예상된다. 

 

 

3) 정언명법에서 텅 빈 신체(전체주의)로 

 


칸트의 정언명법이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에 대해서 들뢰즈․가따리는 다중성multiplicity의 사회적 배치로 대응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하지만 정언명법이 형성하는 실천적 명제가 정체성주의적인 도덕철학의 윤리가 된 사회구성체는 어떤 사회일까? 이 점에 대해서 들뢰즈․가따리는 유리처럼 텅 빈 신체라는 형상을 제시한다. 텅 빈 신체는 중앙 집중제적인 명령체제가 삶의 욕망을 화석화시키는 권위와 권력으로 통제하는 모델을 의미한다. 국가사회주의가 보여주었던 통제모델은 단조로운 사상학습과 시스템화된 사회적 배치 속에서 욕망의 실존을 제거하고자 했던 모델임을 보여준다. 비록 소련의 경우에조차도 거대한 암시장이 생필품과 욕망과 관련된 상품들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할지라도 표면적인 사회정치적 배치 속에서는 사람들은 욕망을 억압할 수밖에 없었다.

유리처럼 텅 빈 신체는 감시질서에 의해서 유지되는 정치체제를 구성하는데, 이 감시질서는 은밀한 삶의 욕망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 없는 판옵티콘 모델을 의미한다. 푸코의 판옵티콘 모델은 눈-이성이 가지고 있는 따뜻한 관심을 빙자한 날카롭고 엄밀한 감시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것으로, 실질적으로 바라보는 눈앞에서 화석화되어 얼어붙는 욕망을 지향한다. 일단 독재 모델은 사회적인 힘을 집중시켜, 경제개발의 원동력으로 전화시켜내며, 근대성의 희망을 슬로건으로 대중을 동원하려는 시스템이지만, 대중의 욕망은 더 은밀해지고 비밀스럽게 변화한다.

들뢰즈․가따리에 의하면 소련 국가사회주의는 가장 칸트적 의미의 정언명법을 도덕철학으로 도입한 사회체인 셈이 된다. 하지만 그 질서는 매우 삶의 생체-에너지와 삶-욕망에 부정적인 작용을 하는 셈이다. 들뢰즈․가따리는 이 텅 빈 신체에 맞서는 욕망의 은밀한 운동의 모델을 '탈주'라는 개념으로 구체화한다. 동독의 몰락이 실질적으로 텅 빈 신체의 사회구성을 텅 비게 만드는 욕망의 전략에 의해서 대중들의 집단적인 탈주행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되는 셈이다.  

텅 빈 신체의 모델은 정체성을 부과하는 전체주의 모델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적 배치에서 발생할 수 있다. 학교, 공장, 감옥, 군대, 병원이라는 사회체 속에서 텅 빈 신체라는 관료제적 모델이 발생할 수 있으며, 이것은 무료하고 따분한 관료제를 형성한다.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관료제에 대한 개혁주의모델을 제시하며, 화폐를 통한 정치와 경쟁시스템 등을 부과하려고 하지만 정체성주의 모델 일반을 공격하는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가 대상으로 하는 적은 화폐적 평등과 자유를 위반하는 도덕적 나태와 타락이라는 또 하나의 욕망의 흐름에 대한 공격을 의미한다.

사회적 폐쇄 환경은 내부에서만 공명하고 외부와 소통할 수 없는 텅 빈 신체를 구성하며, 그것에 대한 관리방식과 통제양식은 전체주의를 답습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폐쇄 환경은 소수자들에 대한 통제양식과 긴밀한 연관관계를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병원이나 시설에서 탈주하여 공동체를 형성하며, 자조그룹을 만들고 있는 소수자들의 욕망의 자발적인 행위는 텅 빈 신체에 맞선 기관 없는 신체의 전략을 분명히 보여준다. 기관 없는 신체의 새로운 민주주의의 원리인 자치, 자율, 자기결정, 자발성, 상상력 등은 텅 빈 신체의 전체주의로부터 탈주하여 자유의 새로운 공간을 구성하기를 원한다.  

칸트의 정언명법이 주었던 메시지는 소수자의 정치에서는 명령 지배의 전체주의와 동일시될 수밖에 없다. 정신질환자들은 이성적 존재로서 간주되지 않으며, 이성적 인식능력을 가진 근대적 주체의 외부에 있다. 장애인은 정상성의 범주에서 근대적 주체의 행위능력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노인과 어린이들은 발언권을 원하지만 배제되며, 이주노동자나 혼혈아들은 주권질서로부터 배척당한다. 이러한 탈근대적인 상황에서의 정언명법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텅 빈 신체의 도덕률로 돌아가라는 근대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들뢰즈․가따리는 그렇다고 이 정체성 일반을 부정하고, 정언명법 일반을 부정하는 지적 테러리즘적 방안을 제출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늘 기관 없는 신체는 삶-욕망의 공동체로서 소수자의 미시정치에 있지만, 정체성주의적인 배치 내부로 들어가 있다가 자치의 공동체로 그것을 뒤집어서 존재하게 만들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학교라는 폐쇄 환경은 대중의 일반지성의 공동체로서 존재하며, 소수자에게 열린 공간이 되어야겠지만, '정체성'일반을 부정한다기보다는 다중적인 삶의 양태의 일부로서 정체성도 교육을 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전체주의적인 텅 빈 신체에서는 이러한 공동체와 정체성의 경계를 넘나들며, 가로지르는 행위는 불가능하며, 탈주의 명제만이 더 분명해 질 것이다. 탈근대의 주체성은 근대적인 정체성주의라는 봉합적 의미에서의 배치를 포괄하여 다중성의 일부로 배치한다. 물론 이러한 삶의 미시적인 정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은둔이나 잠행을 시도하겠지만 말이다.

 

 

결론 

 도덕철학의 논리구조의 사회 구성적 고도화

 


<천개의 고원>에서 칸트의 도덕철학의 명제인 이분법은 들뢰즈․가따리에 의해서 엘름슬레우의 내용, 표현의 이중분절로 구체화되며, 선언, 가언, 정언명제의 삼분법과 대립하는 설정에서 벗어난다.9) <천개의 고원>을 읽어 본 사람들의 대부분은 <앙띠 외디푸스>와의 연속지점을 보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론적으로는 매우 다른 스펙트럼을 만들어낸 것이 분명하다. <천개의 고원>은 도덕철학적 실천명제를 세 개의 사회체로 구체화시키면서 탈근대 자본주의의 상황에서 소수자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명제에 대해서 전략적이고, 포괄적으로 대답하고 있다. 칸트가 살았던 근세 시기에서는 아직 선언명제도 숨은 전제로 다룰 정도로 민주주의의 실질적 의미는 구체화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탈근대의 상황에서 칸트의 도덕철학의 의미와 체계는 매우 적극적으로 선두에 배치되고, 칸트가 제시한 명제들은 다시 질문되어졌다.

들뢰즈는 한 인터뷰에서 <앙띠 외디푸스>와 <천개의 고원>의 저작과 칸트와의 관련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느 날 나는 칸트에게 다가가서 계간을 했다. 그리고 그것에 의한 사생아들이다."10) 그러한 표현은 칸트와 불륜의 관계였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매우 칸트의 체제에 빚지고 있음이 많음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칸트가 사유했던 이분법과 삼분법은 들뢰즈․가따리에 의해서 전혀 다른 의미로 복원되며, 배치되지만, 그것은 매우 적극적으로 의미에서 탈근대 자본주의의 사회구성체를 설명하는데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들뢰즈․가따리는 나폴리 혁명가 스피노자의 전통에서 수줍고 겸양한 칸트를 전선에 나가자고 하는 꼴의 기이한 철학의 구도를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들뢰즈․가따리에 의해서 최전선에 배치된 칸트는 매우 전위적이고, 공세적으로 시대를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입증할 수 있었다. 들뢰즈․가따리는 68혁명이라는 공세적 상황에서 칸트를 불러내서 <앙띠 외디푸스>라는 최전선에 배치하는가 하면, 신자유주의라는 수세적 상황에서 칸트를 불러내서 <천개의 고원>이라는 최전선에 배치했다. 칸트의 도덕철학적 구도는 매우 전위적인 예술작품처럼 변모하는가 하면, 매우 혁신적인 전략으로 변모하기도 했다.

이로서 칸트의 도덕철학은 탈근대 자본주의를 설명하는 새로운 질서와 체제로 변모되었고, 칸트 본인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탈근대 철학의 최전선에 나선 용장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앙띠 외디푸스>에서 '리비도경제학'과 결합되어 욕망을 말하고 있는 칸트를 본다면 무덤 속의 칸트는 실소를 머금지 못하겠지만, 삶-욕망의 생산-등록-소비라는 새로운 욕망시스템에 칸트의 논리학과 도덕철학이 적용된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천개의 고원>에서 텅 빈 신체, 암적 신체, 기관 없는 신체라는 세 신체로 등장하는 칸트의 삼분법은 칸트가 의도했던 방향과 전혀 다른 소수자의 정치와 소수자 민주주의를 말하고 있지만, 칸트가 최전선으로 투입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들뢰즈․가따리는 탈근대 자본주의를 분석하고 소수자의 민주주의라는 삶-정치의 지평을 보여주고 위해서 칸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리고 칸트에 대한 새로운 독해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철학의 새로운 방향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칸트를 비롯한 철학을 어떻게 혁신적으로 탈근대의 상황에 도입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하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가따리는 이단적이지만 칸트의 비판적 계승자임에 분명하며, 칸트가 없이는 등장할 수 없었던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가따리가 만들어낸 칸트가 기괴한 이종결합체인 괴물이라고 하더라도 칸트의 위대성을 새롭게 복원하는 혁신적인 철학자의 시도인 것만은 분명하다.

 

 

참고 문헌 

 


Gilles Deleuze/Felix Guatt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