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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인문과학

판옵티콘vs시놉티콘

by 랭님 2010. 1. 11.

미셀 푸코의 베스트셀러 '감시와 처벌' 에서는 만인이 한 사람의 왕과 같은 권력자를 우러러 보는 근대이전의 사회를 '스펙터클의 사회'로, 한 사람의 권력자가 만인을 감시하는 근대사회를 '감시사회'라고 했습니다. 감시사회는 조지오웰의 소설 '1984년'에 잘 나타납니다. 빅브라더는 시민들이 일할 때는 물론 심지어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 감시하죠.

영국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설정한 판옵티콘이란 원형감옥은 완벽한 감시사회를 나타냅니다. 그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원형으로 지어진 감옥에는 감방마다 원의 내부로 향하는 창이 있습니다. 그리고 원의 중심에 감시탑을 설치됩니다. 감시탑에는 간수의 방이 있는데 안을 어둡게 해서 밖에서 안을 볼 수 없습니다. 반면 감방들은 불을 환하게 켜 감시탑에서 안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구조 때문에 죄수들은 항상 감시받고 있지만 간수를 볼 수 없기때문에 언제 감시를 당하고 있는지도 심지어 감시를 당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게 됩니다. 여기서 감시는 정보를 캐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제어나 통제까지 의미가 확장됩니다.

현대사회는 이미 세계를 감시할 수 있는 많은 인공위성과 도감청이 가능한 수많은 기술과 장비들이 개발된 상황이므로 완벽한 감시체계가 등장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회가 판옵티콘화 될수록 그만큼 프라이버시나 여타 권리들은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권리보장의 문제는 감시나 통제를 없애는 소극적 방법이 아닌 다수 또한 소수의 감시자를 마찬가지로 감시하는 역 파놉티콘 내지 시놉티콘이란 적극적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과거처럼 소수만이 권력과 언론을 독점하고 다수의 일반시민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시민들도 자신을 감시하는 통제자를 역으로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입니다.

헌데 먼 미래나 유토피아에서만 가능할 것이라고 여겨지던 시놉티콘이 이미 인터넷을 통해 어느정도 현실화 되고 있습니다. 과거 일방적으로 듣고 보기만 했던 일반시민도 인터넷을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공유함으로써 권력을 독점한 소수가 일반적인 규범을 깨뜨리거나 자신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에대해 미약하나마 견제를 가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런 현상은 인터넷문화가 활성화된 한국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과거 비리를 저지르거나 잘못된 정책을 만드는 정치인, 혹은 타락한 연예스타들은 거의 처벌받지도 않았으며 가재는 게편인 언론도 이들의 문제를 덮어두기 십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을 통해 의견의 공유가 가능해지자 일반시민이 이런 문제들에 대해 비판을 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인터넷의 익명성은 판옵티콘이 시놉티콘으로 바뀌기위한 전제조건 중 하나입니다. 감시자에 대한 통제가 가능하려면 간수의 방이 어둠으로 가려있듯이 간수를 감시할 수 있게 해주는 죄수들의 창도 가려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서로의 힘이 균형을 이룰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터넷실명제는 인터넷의 시놉티콘적 기능을 크게 약화시키고 현대사회를 더욱더 판옵티콘화 할 것입니다. 그 결과 일반시민들의 권리는 더욱더 쉽게 침해될 것입니다. 반면 판옵티콘의 기능을 하는 사회제도에서 감시자의 방은 여전히 어둠으로 가려져있습니다. 여론을 대표한다는 언론기관이 오히려 편향된 정보를 퍼뜨려서 왜곡된 여론을 조성하는 경우가 많지만 일반시민은 대부분 이를 통제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요즘 여론화되고있는 인터넷실명제의 경우를 보면 소수의 악용사례를 마치 전체의 문제처럼 크게 보도하면서 인터넷실명제를 꼭 필요한 제도처럼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의 단점들보다 더 큰 폐해가 있는 언론들에 대한 제어장치는 없거나 유명무실한게 현실입니다.

따라서 인터넷실명제는 판옵티콘이란 근대사회에서 시놉티콘이란 탈근대사회로의 발전에 역행하는 제도가 될 것 입니다.
(출처 : '인터넷 실명제의 문제점' - 네이버 지식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