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자크 루소,《인간 불평등 기원론》- 자연은 왜 법에 굴복했는가
인류의 모든 진보는 인간을 끊임없이 원시 상태에서 멀어지게 하기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지식을 축적할수록 모든 지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획득하는 수단은 상실된다. 인간 사회를 침착하고 냉정한 눈으로 고찰하면 강자의 폭력과 약자의 억압 상태만이 보일 뿐이다. 루소가 본 인류의 두 가지 불평등은 자연적(신체적) 불평등과 정치적 불평등이었다. 자연적 불평등은 자연에 의해 정해지는 것으로, 나이, 건강, 체력의 차이와 정신이나 영혼의 자질 차이로 성립된다. 정치적 불평등은 일종의 사회적 약속에 따른 것으로 사람들의 동의로 정해지거나 용납되는 것이다. 후자는 일부 몇몇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쳐 누리는 갖가지 특권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유하다거나 더 존경을 받는다거나 권력을 더 가지고 있다거나 또는 타인을 복종하게 만든다거나 하는 특권들에 의해 성립된다. 이 논문에서 밝히고자 하는 것은 사물이 진보하는 가운데 폭력에 이어 권리가 생기고 자연이 법에 굴복한 시기를 지적하는 일이다.
의술이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치료법보다 우리가 더 많은 병에 걸려 있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생활에서의 극심한 불평등, 어떤 사람에게는 지루한 여가가 주어지는가 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과중한 노동이 강요되는 것, 부유한 사람들에게 변비를 일으킬 너무도 희귀한 음식들, 그나마 굶주리기 일쑤지만 경우에 따라 과식하게 마련인 가난한 사람들의 형편없는 먹을거리, 그리고 밤샘과 온갖 종류의 무절제, 온갖 정념의 과도한 흥분, 정신의 피로와 소모, 누구나 경험하며 그래서 영원토록 영혼을 좀먹는 무수한 비애와 고통.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당하는 불행의 대부분이 우리 자신의 탓이며 따라서 자연이 명령한 소박하고 일정하며 고독한 생활 양식을 간직했더라면 피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되는 고약한 증거들이다. 인간의 질병사는 문명 사회의 역사를 더듬어봄으로써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동물은 자기에게 정해진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기에게 아무리 유리해도 그렇게 할 수 없으나 인간은 자기에게 해로워도 종종 그 규칙을 벗어나 행동한다. 자연은 모든 동물에게 명령하고 동물은 이에 따른다. 인간도 같은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인간은 복종하느냐 저항하느냐의 선택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움을 인식한다. 미개인은 자연 상태에서 생활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본능 속에 갖고 있었으며, 사회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것은 훈련된 이성 속에 갖고 있었다. 우선 이런 상태에 있는 인간들은 서로간에 도덕적인 관계도, 분명한 의무도 갖고 있지 않아서 선인일 수도 악인일 수도 없었으며, 악덕도 미덕도 가지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런 말을 물리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개인의 자기 보존에 해가 되는 성질의 것을 악덕이라고 부르고 자기 보존에 도움이 되는 것을 미덕이라고 부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홉스는 자연법에 관한 근대의 모든 정의에 담겨 있는 결함을 대단히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정의에서 도출해낸 결과는 그 자신도 그것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는 자기가 정한 원리들에 대해 추론할 때, 자연 상태란 우리의 자기 보존을 위한 노력이 타인의 보존에 가장 해를 끼치지 않는 상태이므로 이와 같은 상태는 결과적으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데 가장 적합하며 인류에게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했어야 했다.
홉스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원리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 인간의 강렬한 자기애가 크게 완화되도록 인류에게 주어진 원리다. 이 원리로 말미암아 인간은 동포의 괴로움을 보고 싶지 않다는 선천적인 감정으로 자기 행복에 대한 욕구를 완화하게 된다. 연민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은 우리처럼 약하고 온갖 불행에 빠지기 쉬운 존재들에게 걸맞은 성향이다. 연민은 인간의 반성하는 모든 습관에 앞서는 것이므로 더욱 보편적이고 인간에게 유익한 미덕이며, 대단히 자연스러운 것으로서 때로는 동물들도 뚜렷한 징후를 보이곤 하는 미덕이다. 어떤 사람이 고통받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 아니겠는가? 동정심이란 우리를 고통받는 자의 입장에 놓는 감정일 뿐이다. 자존심을 낳는 것은 이성이며, 그것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은 반성이다. 이 반성에 의해 인간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를 방해하고 괴롭히는 모든 것에서 벗어난다. 연민은 자연 상태에서 법과 풍속을 대신하며, 아무도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저항할 시도를 하지 않는다는 이점을 누린다. 남보다 유리한 상황에서 자신의 먹이를 다른 곳에서 발견할 가능성이 있는 한, 건장한 미개인이 약한 어린아이나 불구의 노인이 힘겹게 획득한 먹이를 빼앗지 않도록 하는 것이 연민이다. “타인의 불행을 되도록 적게 하여 너의 행복을 이룩하라”를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품게 하는 것이 연민이다. 요컨대 교육에 관한 여러 가지 원칙과는 별 관계가 없더라도 인간이 악을 행했을 때 느끼는 혐오감의 원인은 교묘한 논거 속보다 오히려 자연의 감정 속에서 찾아야 한다. 자연 상태에서는 누구나 속박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우며 강자의 법칙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어떤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 땅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리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말을 믿을 만큼 단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최초의 인간이 문명 사회의 실질적인 창시자다. 말뚝을 뽑아버리고 토지의 경계로 파놓은 도랑을 메우면서 동류의 인간들을 향해 “저런 사기꾼의 말을 듣지 마시오. 과일은 모두의 소유이고 땅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는다면 당산들은 파멸할 것이오”라고 외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얼마나 많은 죄악과 싸움과 살인, 얼마나 많은 비참과 공포에서 인류를 구제해주었을 것인가?
그러나 이미 그 무렵에 사태는 더 이상 이전의 모습을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이러한 소유 관념은 순차적으로 발생한 그 이전의 많은 관념들에 의존하는 것으로, 인간의 정신 속에 한순간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안락의 추구가 인간 행동의 유일한 동력임을 경험으로 배웠다. 이제 그는 공통의 이해 관계 때문에 동포들의 도움에 의지해야 하는 드문 경우와, 경쟁을 위해 그들을 경계해야 하는 더 드문 경우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전자의 경우, 그는 무리를 지어 그들과 함께 하거나 고작해야 아무도 구속하지 않고 일시적인 요구가 있을 경우에만 존속하는 일종의 자유로운 협력 형태로 결합했다. 후자의 경우, 각자는 만일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되면 폭력을 사용하기도 했고 또는 자기가 약하다고 느끼면 재주나 계책을 써서 이득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상호간의 약속과 그로 인한 이득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현재 눈앞에 보이는 이득이 그것을 요구하는 경우에만 국한되었다.
독립된 생활을 하고 그러한 생활을 충족시키기 위해 발명한 도구를 가진 사람들은 많은 여가를 즐길 수 있었고, 그들의 선조들이 알지 못했던 편리함을 얻기 위해 이 여가를 활용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꿈꾸지 않았음에도 스스로에게 부과한 최초의 멍에였고, 그들의 자손에게는 불행의 단초였다. 이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육체와 정신을 유약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편리함은 습관이 되자 매력을 상실하고 그들의 실제적 욕구로 변질되어버렸다. 따라서 그것이 없는 고통은 그것이 있을 때 즐거웠던 만큼이나 극심한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편리함을 누려도 행복하지 않은 반면에 그것을 잃으면 몹시 불행해지게 되었다. 연애와 여가의 진정한 소산이라 할 수 있는 노래와 춤이 한가한 남녀들의 심심풀이라기보다는 매일매일의 일과가 되었다. 그리하여 저마다 남을 주목하고 자신도 남에게 주목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하나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이것이 불평등을 향한, 그리고 동시에 악덕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이러한 최초의 선호(選好)에서 한편으로는 허영심과 경멸이 태어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치심과 부러움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효모에서 생긴 효소가 마침내 행복과 무구에 치명적인 화합물을 생성시켰다.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을 평가하기 시작하여 존경이라는 관념이 마음속에 형성되자, 누구나 자기가 존경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 순간부터, 그리고 혼자서 두 사람 몫의 양식을 차지하는 것이 유리함을 알아차리게 되자마자, 평등은 사라지고 소유가 도입되고 노동이 필요하게 되었다. 광대한 숲은 인간의 땀으로 적셔야 할 들판으로 변했으며, 머지않아 그 들판에서는 수확과 다불어 예속과 비참이 싹트고 증가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인류가 농업 기술에 전념할 수 있게 되기전까지는 다른 여러가지 기술의 발명이 필요했다. 철을 녹이고 벼리기 위해 사람의 손이 필요하게 되자, 곧 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또 다른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다. 노동자의 수가 증가할수록 공동의 먹을거리를 공급하기 위한 일손은 점점 적어지는 반면 그것을 소비하는 입은 늘어만 갔다. 토지의 경작은 필연적으로 토지의 분배라는 문제를 낳았으며 일단 소유가 인정되자 정의에 관한 최초의 규칙이 생겼다. 각자의 소유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일단 각자가 무엇인가를 소유할 수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미래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모두들 장차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재산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자기가 남에게 끼칠지도 모르는 피해가 바로 자기에게도 일어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게 되었다. 토지의 점유가 반복되면서 그것은 점차 소유로 전환되었다. 마침내 인간은 탐욕스러운 야심이나 진정한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재산을 늘려 남보다 우위에 서려는 열망 때문에 서로를 해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경쟁과 대항이,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利害)의 대립이 있게 되는데 이 모두가 남을 희생시켜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숨겨진 욕망일 뿐이다. 이 모든 악은 소유가 낳은 최초의 결과이며 이제 자라나기 시작한 불평등과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동반자다. 부유한 자들은 남을 지배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자 다른 모든 쾌락을 무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자들은 새로운 노예를 얻기 위해 기존의 노예를 부려 이웃 사람들을 정복하고 예속시키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가장 강한 자 또는 가장 궁핍한 자가 그의 힘이나 욕구를 타인의 재산에 대한 일종의 권리로 생각함에 따라 평등은 깨지고 뒤이어 가장 끔찍한 무질서가 초래되었다. 가장 강한 자의 권리와 최초의 점유자의 권리 사이에는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났으며, 그것은 투쟁과 살인에 의해 종식될 수밖에 없었다. 부자는 만인의 적이 되어 홀로 맞서게 되었다. 부자는 절박한 필요에 따라 인간의 정신 속에 일찍이 스며든 적이 없는 가장 교묘한 계획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의 세력 자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사용하고, 자신의 적대자들을 자신의 방어자들로 만들고, 그 적대자들에게 다른 준칙을 불어넣어 자연법이 자신에게 불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유리한 다른 제도들을 그들에게 부여하는 것이었다.
“약자를 억압에서 보호하고 야심가를 제지하며 각자에게 소유를 보장해주기 위해 단결합시다. 정의와 평화를 가져다주는 규칙을 정합시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지켜야 하며, 어느 쪽도 차별하지 않고 강자와 약자를 평등하게 서로의 의무에 따르게 하는, 말하자면 운명의 변덕을 보상하려는 규칙입니다. 요컨대 우리의 힘을 우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돌리지 말고 하나의 최고 권력에 집중시킵시다. 현명한 법률에 따라 우리를 다스리고, 사회의 모든 성원을 보호하고 방위하며, 공동의 적을 물리치고, 영원히 우리를 단합시키는 권력에 집중시킵시다!”
누구나 자신의 자유를 확보할 심산으로 자신의 쇠사슬을 향해 달려갔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치 제도의 이점을 느낄 만한 이성은 갖고 있었지만 거기에 따르는 위험을 내다볼 정도로 충분한 경험을 갖고 있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위험을 가장 잘 예감하고 있었던 자들은 바로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었다. 사회와 법률의 기원은 이러하거나 이러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 사회와 법률은 약자에게는 새로운 구속을 부여하고 부자에게는 새로운 힘을 부여해 자연적 자유를 영원히 파괴해버리는가 하면, 소유와 불평등의 법률을 영구히 고정시키고 교활한 횡령을 당연한 권리로 확립시켜 그 후 온 인류를 몇몇 야심가들의 이익을 위해 노동과 예속과 비참에 복종시킨 것이다. 따라서 자연적 동정심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행사하고 있던 모든 힘이 사회와 사회 사이에서는 거의 상실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자연적 동점심은 이미 여러 민족을 갈라놓고 있는 상상적 장벽을 초월하여, 그들을 창조한 지고의 존재를 본받아 인류 전체를 박애를 통해 끌어안으려는 몇몇 위대한 세계 시민적인 인간의 영혼 속에서만 존재할 따름이었다.
사물은 그것으로 인해 손해를 입는 사람들보다는 덕을 보는 사람들에 의해 발생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불편과 무질서가 계속해서 증가하게 되자 사람들은 드디어 위험하게도 법을 집행하는 권력을 몇몇 개인에게 위임하고 국민의 의결 사항을 지키게 하는 일을 행정관들에게 맡겼다. 플리니우스는 트라야뉴스에게 “제가 군주를 섬기는 것은 주인을 갖게 될까 두려워서입니다.”라고 말했다. 야만인은 문명인이 별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멍에를 향해 결코 목을 내밀지 않는다. 그리고 평온한 굴종보다는 파란만장한 자유를 택한다. 노예가 된 인민은 쇠사슬에 매인 채 누리고 있는 평화와 안식을 끊임없이 찬양하며 비참하기 그지없는 예속을 평화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자연법에 따르면, 아버지는 그의 도움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동안만 그들의 주인이며 이 기간이 지나면 양자는 평등해진다. 그때 자식은 아버지에게서 완전히 독립하며, 아버지를 존경할 의무는 있어도 아버지에게 복종할 의무는 없다. 그렇지만 백성들은 전제 군주에게 이와 비슷한 은혜를 기대할 수 있기는커녕 분명 자기 재산임에도 군주가 적선하듯 주는 것을 은혜인 양 받아들여야 할 입장이다. 군주가 백성의 재산을 약탈하는 것이 정의를 행하는 것이며, 백성을 살려두는 것이 은총을 베푸는 것이 되었다.
인민은 이미 종속과 휴식과 생활의 안락에 길들여져 쇠사슬을 끊을 만한 힘도 없었으므로 자기들의 평안을 유지하기 위해 그 예속 상태를 강화하는 데 동의했다. 애당초 국가의 관리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이제 스스로를 국가의 소유자라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졌다. 그리하여 동포 시민들을 노예라 부르고 그들을 가축처럼 자기 소유물로 생각하며 신과 동등한 존재, 즉 ‘왕 중 왕’으로 자처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이러한 모든 변천 가운데서 불평등의 진행을 따라가보면, 법과 소유권의 설정이 제1단계이고 행정 권력의 제도화가 제2단계이며 합법적인 권력에서 독단적인 권력으로 변화하는 것이 제3단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부자와 빈자의 상태는 첫 번째 시대에 의해, 강자와 약자의 상태는 두 번째 시대에 의해, 주인과 노예의 상태는 세 번째 시대에 의해 성립되었다. 이러한 진전의 필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체가 설립된 동기보다는 오히려 실행 과정에서 취하는 형태와 그것이 나중에 일으키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측면들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인간으로 하여금 사회 제도를 필요로 하게 만드는 악덕은 사회 제도의 남용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악덕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상의 차별은 필연적으로 시민들 간의 차별을 가져온다. 신분과 재산의 극심한 불평등, 정념과 재능의 차이, 무익한 기술과 해로운 기술, 하찮은 학문에서, 이성과 행복과 미덕에 위배되는 무수한 편견이 생겨날 것이다. 사회인은 언제나 자기 밖에 존재하며 타인의 의견 속에서만 살아간다. 말하자면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타인의 판단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철학이나 인간애나 예절이나 고상한 격언에 둘어싸여 있으면서도 언제나 ‘우리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타인에게는 던지되 스스로에게는 묻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기만적이고 경박한 외관, 즉 미덕 없는 명예, 지혜 없는 이성, 행복 없는 쾌락만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따지는 것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불평등은 자연 상태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므로 인간 능력의 발달과 정신의 진보에 따라 성장하고 강화되며 소유권과 법률의 제정에 따라 안정되고 합법화된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자연법을 어떻게 규정하든, 어린애가 노인에게 명령하고 바보가 현명한 사람을 이끌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마저 갖추지 못하는 판국인데 한줌의 사람들에게서는 사치품이 넘쳐난다는 것은 명백히 자연의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 요약 / 장 자크 루소(지음), 주경복 외(옮김),《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