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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인문과학/노자

道德經 二章, 聖人은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다

by 랭님 2010. 3. 10.

道德經 二章, 聖人은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다.(주석)

 

 

[원 문]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오이

 

皆知善知爲善  斯不善已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故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고 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교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시이성인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만물작언이불사  생이불유  위이불시  공성이불거

 

夫唯不居, 是以不去

부유불거  시이불거

 

[해 석]

 

세상사람들은 겉모습이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것(爲美)을 아름다움(美)이라고 알고들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惡)일 뿐이오.

 

모든 사람들은 착하게 보이는 행위(爲善)를 선(善)이라고 알고들 있는데,

이것은 전혀 선(善)일 수가 없소(不善).

 

왜냐하면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상대적으로 일어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상대적으로 이루어지며,

길고 짧음은 서로 상대적으로 비교가 된 것이며,

높고 낮음은 서로 상대적인 높이로 보이는 것이고,

나오는 소리와 들리는 소리는 서로 어울려서 울리는 것이며,

앞과 뒤는 서로 상대적으로 붙어 다니는 것이오.

 

이리하여 성인은 있는그대로 자연스럽게(無爲) 일을 하면서도,

말없는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오.

 

자연의 온갖 작용이 어떻게 운행되고 있는지는 설명될 수가 없소.

자연은 온갖 만물을 낳으면서도 그것을 소유하지 않소.

자연은 온갖 만물을 보살펴 주면서도 그 베픈결과에 보상을 바라지 않소.

자연은 결실(功)을 이룩하더라도 그공(功)의 결과에 머무르지를 않소이다.

 

이렇듯 자연의 무위적인 흐름처럼(夫) 

성인은 어디에든 머물지 않기 때문에(唯不居)

 

그래서 무엇인가를 거두어 들일 것도 없소이다.(不去)

 

 

[ 해 설 ]

 

2장에서는 노자도인이 도의 작용,즉 의식에 대해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

天下:세상,  皆 ;다,모두,  知 ;안다. 美 ;아름다움, 좋음,  爲 ;하다,행하다,가장하다,

斯;이, 惡; 나쁘다,악하다,미워하다, 헐듣다,욕하다,잘못되다. 已 ;~ 뿐,이미.

 

세상사람들은 모두가 마음의 느낌으로 드러난 겉모습을 아름다움(美)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惡)이다.

 

이 첫문장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爲美라는 단어와 뒤에 惡이라는 단어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해설서들이 이 爲자를 "아름답게 여긴다"로 번역을 했읍니다.

그중 한두책에서는 "꾸며진 아름다움"이라고 해석해서, 약간 의미적으로 접근을 한 것 같았읍니다.

그러나 의도적인 행위로서 "꾸며진 아름다움"이라기 보다는, 마음표면에 드러나서 나타난 마음의 작용인 "아름답게 느끼는 느낌"으로 보았읍니다.

 

그리고 뒤에 이것은 惡이다, 하는 구절을 대부분 전체의 해설서들이 거의 동일하게 앞구절의 美에 대한 상대적인 반대어인 "醜惡"으로 번역을 했는데,

제가 보기에는 잘못된 번역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이 첫문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모든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마음표면에 나타난 마음의 대상적인 이미지만 가지고 그것이 진짜 아름다움이라고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의 이원화적인 의식구조 또는 마음의 자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해 주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이것이 惡이다, 라는 말뜻은 앞의 "아름다움"에 대한 반대적인 의미로 쓴 것이 아니라, 앞문장 전체에 대한 부정으로 쓴 것이며 사람들이 잘못알고 있는 전도된 이원화의 상대적인 분별의식구조가 잘못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저는 번역을, 이것은 잘못된 것일 뿐이오. 하고 번역했읍니다.

 

다음, 皆知善之爲善, 斯不善而,

노자도인께서 표면적으로만 보이는 아름다움을 惡이라고 말씀하셨으니,

다음에는, -그럼- 善이란 무엇인가?-하고 善이 대해서 다시 말씀하셨읍니다.

 

-모든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는 선한 행위, 즉 착한 짓하는 것을 善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것은 不善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여기서도 爲善은 겉으로 드러나 착한 행위라고 번역을 했읍니다.

이것은 "꾸며진 선"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 마음으로 느끼는 착하다고 여기는 마음자세를 말하는데, 상대적인 분별의식으로 좋은 쪽을 선호하는 결과는 나쁘다고 말한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善하다,惡하다 하고 이원적인 관념으로, 상대적으로 분별하는 결과인 善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옳바른 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위의 두문장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첫문장은 사람의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마음의 움직임 중에서 가장 최상이라는 "美"의 인식을 대표적으로 선택해서, 그런 표면적인 이원화 마음의 나타남은 거짓이라는 것을 가리켜 준 것이죠.

두번째 문장은 사람의 행위 중에서 가장 최상이라는 "善行"에 대해서도 그것이 표면에 나타난 행위로써 상대적인 의식의 움직임으로 그런 것도 "善"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첫번째는 마음의 움직임, 두번째는 행위의 움직임을 대표적으로 선택한 겁니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 惡은 지적을 하였는데 "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않했죠.

바로 여기서 이 제2장의 첫째와 두째 대목이 제1장의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의 형식과 거의 유사하게 말없는 표현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읍니다.

즉, 善이란 말로 善이라고 한다면 善이 아니고, 善을 마음으로 느낀다면 진짜 善이 아니라는 진리를 아무 말없이 가르쳐 주고 있읍니다.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이것이 모든 깨달음 체제에서 스승들이 강조하는 것이죠.

말하자면 의식에 나타난 현상세계와 마음의 움직임은 주객 이원화의 상태에서

객관적 대상으로서 드러난 현상이므로 옳바른 善이나 美가 아니라는 겁니다.

 

완전히 절대상태에 도달한 도인들은 이러한 이원화 현상세계에서의 모든 의식의 움직임과 삼라만상 그리고 마음에 그려진 개념들 모두가 惡이라고 규정합니다.

반면에 善이란 오직 일체가 하나가 되는 깨달음의 절대상태만이 善이라고 규정하죠.

그래서 노자도인께서는 "善"이란 무엇이가?에 대해서 아무 말도 없이 "그런 마음의 표면상에 나타나는 느낌이나 이미지, 그리고 착하게 보이는 행위등은 모두 나쁜 것이다, 라고 부정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런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最上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나쁜 것이냐?

여기에 대해서 다음에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줄 한문원문은 생략하겠읍니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상대적으로 나타나며,

어려움과 쉬움은 상대적으로 만들어지고

길고 잛은 것은 상대적으로 비교되는 것이며,

높고 낮은 것은 상대적으로 높낮이가 보이는 것이고,

목구멍에서 나오는 소리와 귀로 듣는 소리는 서로 감응하는 것이고,

앞과 뒤는 서로 따라 나오는 것이다.

 

즉, 맨 위의 두문장을 그대로 대입해 보면

(이원적인 마음으로 느끼는) 아름다움은 상대적으로 醜함이 딸려 있고,

(표면에 드러난) 착한 행위는 상대적으로 나쁜 행위가 붙어있다.

이런 식으로 모든 의식표면에 나타난 현상은 그것이 보는 자와 보는 대상으로 분리된 상대적인 객관적 상태이므로, 항상 이원화적인 쌍대성이 숨어 잇읍니다.

 

바나나가 길게 보이는 것은 대부분의 과일이 동그랗게 생겨서 유달리 바나나는 길게 보이죠.

기차가 빠르게 간다고 여기는 사람은 걸어가는 사람이 그렇게 느끼죠.

만일 기차 보다 빠르게 달리는 승용차에 탄 사람은 기차는 느리게 가는 것처럼 보이죠.

잠시 후에 승용차가 밀려서 속도를 늦추면 기차가 빨리 달리는 것 같이 느껴지죠.

이세상 모든 것은 상대성일 뿐이고, 이원화 된 마음의 허무한 움직임일 뿐이죠.

이렇게 모든 감각활동과 마음의 움직임은 모두 불확실한 의식의 움직임이며,상대적이어서 도의 세계에서는 나타난 현상세계와 마음을 환상이라고 합니다.

 

이래서 노자 도인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이러한 상대성의 마음의 움직임 세계에서 벗어나서

일체가 하나인 무위적인 입장에서 일을 하고, 말없는 행동으로 가르침을 펼친다.라고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無爲"라는 단어죠.

앞에서 "爲"라는 단어가 행한다, 위한다, 여긴다,꾸민다 등 여러가지 뜻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읍니다.

따라서 無爲는 '꾸밈이 없다' 또는 '있는 그대로' 등 여러가지로 표현되는 말을 볼수 있읍니다.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댄다는 뜻이 아니라, 이세상 만사를 살아가는데, 어떤 장애도 없이, 의도적인 꾸밈이 없이, 항상 일체가 된 상태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죠.

 

그러나 사실 엄밀히 말해서 "無爲"말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는 없죠.

마치 道를 道라고 말하면 道가 아니듯이, 無爲도 어떤 것이다,라고 묘사를 해버리면 이미 무위에서 벗어나는 것이죠.

이 제2장은 "무위"에 대한 말없는 설명을 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위에서 예문을 들은 것이죠.

다시 번역을 해 보면,-이리하여 성인은 있는 그대로 무위로 일을 하고, 말없이 가르침을 베픈다- 이렇게 번역이 됩니다.

 

그러면 성인이 무위적으로 일을 하고, 말없는 행동으로 가르침을 펼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이어서 노자도인께서 자연의 무위적인 작용을 예를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노자님은 성인의 무위적인 행위를 자연의 무위적인 작용을  예를 들어가며 비유적으로 말씀하셨는데,

대부분의 책들은 성인이 직접 자연을 다루는 것처럼 해석을 해 놓았읍니디.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예를 들어 맨 앞구절을 해석해 논 것을 보면 "성인은 만물이 일어날지라도 간섭함이 없고,잘 생성되도록 도와 주지만, 그 공을 소유하지 않고, 잘 되어가도록 하면서도 그것에 기대지 않으며, 공이 이루어져도  그것에 머물지 않는다."

이렇게 대부분의 해석서들이 주어가 자연에서 성인으로 바뀐 엉뚱한 내용으로 해석을 해 놓았읍니다.

 

그래서 萬物作焉 而不辭-라는 구절은 바로 노자가 말없이 가르침을 대행해 주는 자연의 작용에 대한 설명이죠,

노자님은 성인이 어떻게 무위적인 생활을 하는 가를 자연을 통해서

비유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무위자연에 대하여 성인이 억지로 자연의 만물을 만들고, 생성을 시키고, 잘 되어 가도록 한다는 행위가 어떻게 앞 뒤 논리구조가 맞겠읍니까?

 

이제 번역 해 보겠읍니다.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萬物은 삼라만상을 말하죠. 자연의 모든 현상을 말합니다.

作은 '짓는다, 만든다, 일어난다,'등의 듯이 있으니, 만물이 생주이멸 움직임을 말하는 것이죠.

焉은 '어찌', 또는 조사로 쓰죠.

辭는 '말하다, 설명하다' 이런 뜻입니다.

 

이제 번역을 해 보면, - 삼라만상(자연)이 어찌 작용하는지 설명할 수가 없다- 이런 뜻이죠.

좀 문장을 세련되게 다듬어서-자연의 작용이 어떻게 운행되는지는 말로 설명 할 수 없다-

이렇게 다듬었읍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슨 말인가요?

자연의 그 무궁무진한 변화현상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불가사의하기 대문에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한 일반 상식이죠.

 

그런데 백서본과 왕필본을 자세히 대조해 본 결과 서로 다른 글자가 무척 많은데,

이2장에서 해당되는 것은 바로 위의 <萬物作焉而不辭 , 生而不有> 두문장이랍니다.

백서본에는 <萬物作而 不始也>, 로 되어있고, 뒤의 <生而 不有>가 빠져 있더랍니다.

즉 노자도덕경이 왕필본으로부터 약 500년 전에는 <만물이 일어나는 것에는 시작이 없다>

대략 이런 식으로 쓰여있고, 그 뒤문장인 <만물은 온갖 것을 낳으면서도 소유하지 아니한다>

라는 문구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냐 하면, 왕필본은 중간에 어떤 사람이 그 문장을 일부 개조했다는 것이지요. 자기가 직접 필사한 것이니깐 자기가 아는 언어로 스스로 부분적인 수정도 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다음에, 生而不有도 성인이 주어가 아니라, 만물이 주어로써 생략된 것이죠.

그래서" 자연은 온갖 만물을 낳는데도 그것을 소유하지 않는다"이렇게 번역이 되었읍니다.

 

그다음 爲而不恃는 역시 만물이 주어로써 생략되어 있읍니다.

그래서 번역하면 <자연은 만물에 온갖 베품(爲)을 주는데, 그 베품에 의지를 하지 않는다>

온갖 만물이 자연의 작용에 의하여 저절로 자라게 해주는데, 그런 자연작용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도 안둔다, 이거죠.

그래서 문장을 좀 가다듬었읍니다.

<자연은 만물에 온갖 작용으로 베풀어 주는데도 그 베품의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즉 자연의 무심하고 무위적인 작용에 대하여 표현한 것이죠.

 

그다음, 功成而不居,는 역시 만물이 주어로써 <자연은 결실을 맺어도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거기에 머물지 않는다>라는 의미죠.

즉 공을 이룩해도 관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자연의 無爲작용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래서 문장을 담듬어서 <자연은 결실을 이룩하더라도 그 결실의 결과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렇게 번역이 되었읍니다.

 

그다음, 夫唯不居 是而不去, 이부분도 말썽많은 부분입니다.

다른 책들은 대부분, -대저 성인은 오직 머물지 않음으로써 그 공이 없었지지 않는다-

대략은 모든 번역서들이 엇비슷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뜯어 보면 정확한 해석은 아닌 것 같읍니다.

 

여기서, 夫는 원래 "남자,사내, 대장부, 대저(대체로 보자면--)라는 뜻도 있고. 단순히

이, 저, 등의 대명사로도 쓰입니다.

따라서 맨처음에 성인의 무위행과 말없는 가르침에 대해서 언급하고는,

계속 자연 삼라만상의 무위적인 작용에 대해서 설명을 했읍니다.

이제 자연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자연의 무위작용은 이와 같으니-

성인은 어떻어떻 하다, 라고 설명해야 되겠지요.

 

그래서 夫는 "대체로 이와같이-,라는 '대저'로써 쓰일 수도 있고.

아니면 성인을 가르키는 대명사, <이 >나 <저>, 등으로 쓰여도 해석하는데는 별로 지장이 없읍니다.

喩는 여기서는 '오직' 또는 '때문에'로 쓸수가 있읍니다.

居는 '살다, 거주하다,머무르다'의 뜻이 있는데, 집착하여 눌러 앉아 있다,는 의미죠.

여기서는 '머므른다'는 말로 썻읍니다.

 

따라서 번역을 해 보면 < 위와같이 자연의 무위적인 흐름 처럼(夫, 대체로 위의 자연작용을 보자면) 성인은 어디든 간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하고 좀 의역을 많이 집어 넣었읍니다. 

그다음 是而不去- <그래서 무엇인가를 거두어 들일 것도 없다>

이렇게 번역을 했읍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