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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인문과학/노자

道德經1章, 道는 天地의 始原이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by 랭님 2010. 3. 10.

 

道德經1章, 道는 天地의 始原이다.(주석)

노자 도덕경 해설

 

 

[원문]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 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邀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道를 道라고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본래부터 있는 항상 변함없는 참된 道가 아니오.

 

(어떤) 명칭으로 그 존재를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본래부터 항상 변함없이 있는 내면의 참된 존재가 아니오.

 

(나라는 존재의) 이름과 경계가 없으면, 세상은 내면 속에 잠겨 있으며,

 

(나라는 존재의) 명칭과 경계가 나타나면, 만물이 생겨서 성장해가는 것이오. 

 

그러므로,

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는(無欲)

항상 있는 그대로의 바탕인 참나가

깊은 내면의 미묘한 근본 원리를 저절로 지켜 보게 되는 것이며,

 

무엇인가 하려고 애쓸때는(有欲)

항상 있는 그대로의 바탕인 참나는, 

외면의 이름과 경계의 차별상(邀)만 보게 되는 것이요.

 

이두가지는 동일한 것인데

이름만 다르게 나타난 것이오.

 

동일하다는 것은

그 근본이 신묘하게 깊고 무한한 어둠(모름)인 玄을 말하는 것이요.

 

그 신묘한 어둠인 玄(모름)이 끝이 없이 깊어지고, 더욱 더 미묘해지면,

 

이 우주 삼라만상의 온갖 미묘한 작용이 나오는 문이 되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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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붙임글 

 

道可道 非常道;

道를 道를 도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런 도는 항상 변함없는 참된 道가 아니오.

즉, 말이나 생각이나 느낌이나 앎이나 그것이 마음으로 인식된다면 바탕에 있는 실재하는 절대상태가 될 수가 없죠.

진짜 도라고 하면 주객이 없는 일원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일단 마음으로 알수 있거나 말할 수 있거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도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도라는 것이 말이 나오기 이전 상태를 이르는 것이지만,

일단 도라고 지칭하면, 실재의 도가 아니라, 개념적인 도가 되어 버리는 것이죠.

이 나타난 모든 것은 이원적인 상태에서 대상이 되므로 도를 도라고 말하는 순간에, 그도라는 말과 개념적인 생각은 이미 대상화 되므로 마치 실체가 없는 그림자같은 것이 되는 것이죠.

 

여기서 常자가 중심적인 글자인데,

常자는 절대본체를 가리킵니다.

<항상 변함이 없이 그대로 있는 것>이라고 해서 常자로 표시한 것입니다.

따라서 常道는 道의 절대본체를 말합니다. 

 

그다음에 '名可名 非常名'을 보죠.

앞의 구절과 똑 같아서 그대로 名자만 바꾸면 될 것 같읍니다.

"명칭을 말로써 표현할 수 있으면 그것은 절대 불변하는 바탕의 명칭이 아니다"

이것은 앞의 <道可道 非常道>를 더욱 강조하는 문장입니다.

 

이 "名"자는 단순히 일반적인 "이름"이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드러난 전체 현상세계에 대한 개념적인 언어 전체를 의미하는 것 같읍니다.

즉, 이원화적인 의식으로 알려져 있는 모든 개념을 "名"이라는 한글자로 단축한 것 같읍니다.

道는 드러나지 않는 것, 즉 형이하학적인 개념어이고,

名은 드러나 보이는 현상세계, 즉 형이상학적인 개념어를 말하는 것 같읍니다.

따라서 名은 "드러난 것" "알려진 것" "구별되는 것"이란 의미라고 봐야 될 것 같읍니다. 

 

현상적으로 드러난 것은 의식의 이원적인 작용에 의하여 의식 안에서

이세상이 드러난 것이고, 그 의식은 바로 "나"라는 것에서 부터 나왔죠.

물론 "나"라는 것은 드러나지 않은 절대본체로 부터 시작해서 "의식"의 기본인 존재의식이 나타나고, 존재의식이 육체기관에 작용하여 이 현상세계가 드러났지만,

이 현상세계 안에서 가장 기본은 "나의 존재"가 가장 기본적인 원인이므로,

결국 이 현상세계의 대표자인 "나"가 "명"이라는 글자의 속뜻으로 해석 될 수가 있읍니다. 물론 이것은 도덕경 저자의 원뜻과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道"란 비현시상태로서 의식에 드러난 것이 아니고, 일원적인 절대상태이고

"名"이란 드러나서 "이름"을 붙힐 수 있는 무엇인가를 말하는데,이원적이고 가시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이 현상세계에서 드러난 대표적인 기본이 바로 "나"라는 의식입니다.

그 드러난 "名"인 "나"라는 것도 실은 "나"라고 드러나서 명칭을 붙힐 수 있는 것은

항상 존재하는 보편적인 "나"가 될 수가 없다는 것이죠.

이 名이라는 글자는 이원화로 나타난 현상세계를 대표하는 간판 글자라고 보면 되겠읍니다. 그 현상세계가 나타나는 것은 의식에 나타나며, 그 의식이 바로 "나"가 존재하므로서 있는 것이죠.

道는 드러나지 않은 절대바탕 또는 일원적인 절대진아이며,

名은 드러난 현상세계 또는 이원화 된 의식, "나"라고도 볼 수가 있읍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에서 양쪽에 常자가 다같이 들어가 있죠.

이 常은 道와 名의 개념적인 명칭에 상관없는 道의 실재적 절대본체,

즉 진아(참나)를 말하는 것이죠.

항상 변함없이 있는 것이라고 해서 절대 본체 그 자체를 말합니다.

그런데 道可道에서 道는 말이나 생각으로서의 개념적인 道를 의미하고,

실질적인 道의 본체는 常으로 표현한 것 같읍니다.

 

名可名 非常名; 

(어떤) 명칭으로 그 존재를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항상 변함없는 내면의 참된 존재가 아니오.

名이란 절대의 작용측면으로써, 드러난 현상세계 전체를 말합니다.

볼수있고 느낄수 있고, 알려진 것, 숨겨진 것 모두가 현상세계죠.

이 나타난 현상세계는 의식안에서 나타난 것이죠.

의식이 없으면 현상세계는 나타나지 않읍니다.

따라서 이 현상세계 전체는 바로 의식 자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읍니다.

그러면 그 의식이라는 것이 어디서 나왔읍니까?

道는 의식이 나오기 이전의 본바탕이므로,

<道라는 명칭>은 결국 진짜 실재(實在)의 道가 아니라는 것이죠.

道라고 말하는 즉시, 道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름이 없으면 일원화상태이지만,

도라는 이름을 부르자 마자, 이원화되어, 객관적인 개념적 도가 되어 버리므로,

원래 이름이 없었던 일원적인 내면의 도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름 名자를 분해해 보면 저녁 夕자와 입口자가 조합된 것이죠.

저녁 夕자는 초생달이 형상화한 것입니다.

즉, 밤이 되어 어두우면 옛날사람들은 몸이 안보이니까, 입으로 소리질러서 자신의 존재를 다른 사람에게 알렸읍니다.

그래서 어두울 저녁 夕자에 입口자를 붙여서 이름 名자가 된 것이죠.

다시 말하면 어두운 밤에는 보이지 않으므로 입으로 소리질러서 자기의 존재를 알린다는 의미죠.

따라서 자기존재를 소리로서 알리는 어떤 신호 표시의 상징이므로,

그 이름名자를 어떤 "존재"로써 상징하여 쓴 것으로 이해해도 별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

名자는 "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의식, 또한 나타난 전체 현상세계이기도 합니다.

또한 名자는 전체 현상세계라는 <전체존재>를 의미합니다.  

 

無名天地之始; (나라는 존재의) 이름과 경계가 생기기 이전은 이세상이 내면 속에 잠겨서 나타나지 않았고,

名이 '나'이니깐, 無名은 '나 없음'이죠.

또한 名이 현상세계의 경계명칭이라고 한다면, 無名은 현상세계의 경계가 사라진 상태를 말합니다.

'나'란 바로 이 현상세계가 나타나는 의식이죠.

그래서 無名이란 "의식이 없음" "경계없음"을 말합니다.

의식이 그 근원에 합일된 상태입니다.

천지는 시간 공간을 의미합니다.

우주삼라만상이 그려지기 이전에 우선 전제조건은 시간과 공간이 먼저 있어야 되겠죠.

시간과 공간은 의식의 씨앗 속에 잠재해 숨어있읍니다.

의식의 씨앗이란 바로 존재의식이 발현하는 나타나는 핵점(核點)을 말합니다.

이 핵점이전에는 절대진아가 바탕에 있읍니다.

이 핵점이 바로 순수존재의식이며, 절대와 현상계의 중간지대입니다.

그래서 '내가 없음'일 때는 시간과 공간이 거품방울처럼 부풀려 나오기 이전입니다. 이것은 이름과 경계가 없는 곳입니다.

바로 천지, 즉 이 우주삼라만상의 바탕인 시간과 공간이 나오기 이전은 절대상태입니다.

이제 번역해 보겠읍니다.

이름과 경계가 없는 곳(내가 없음)에서 이 세상이 시작된다."

여기서 맨마지막 '始'란 글자는 여인이 아이를 밴 형상이죠.

아직 아이가 밖으로 안 나왔읍니다. 아이가 바로 시공간입니다.

 

有名萬物之母

有名은 "내가 있음'이죠.

萬物은 삼라만상의 모양과 작용인데, 다양한 색갈과 경계가 나타난 상태입니다.

母는 이미 아이를 낳아 기르는 어머니를 말하죠.

그래서,

[이름과 경계가 있는 곳(내가 있음)에서 만물이 생장하며 살아간다.]

마치 공간이나 그릇과 같은 만물의 바탕입니다.

이 "내가 있음"이 바로 존재의식입니다.

이"내가 있다"는 앎이 바로 현상세계의 뿌리를 말합니다.

그리고 <나라는 에고의식>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은 모든 삼라만상을 나타내 현시해 주는 기본의식입니다.

이 "내가 있다"는 것을 알므로서 비로소 세상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내가 있다"존재의식이 육체기관을 통해서 세상을 다양한 경계로써 보여주는 것입니다.

 

常無欲觀其妙 ;

그러므로,

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無欲)

항상 있는 그대로의 바탕인 참나가

깊은 내면의 미묘한 근본 원리를 저절로 지켜 보게 되는 것이며,

또는

"억지로 하고자 함이 없으면, 항상있는 본바탕에서 내면의 미묘함을 관조한다"

常 : 언제나, 항상, 평상심,무심.진아,참나,절대본체

여기서 常자는 항상 변함없이 있는 절대바탕이지만, 의식적인 측면에서 보면

선가에서 쓰는 평상심(平常心)과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읍니다.

평상심이라는 단어는 선불교조사인 조주스님과 남전스님의 대화록에 나오는 선어로써 무심(無心),즉 절대궁극의 바탕을 말하며, 道의 본체를 의식적인 측면으로 표현한 선어(禪語)입니다.

無欲; 欲자는 하고자 하다, 바라다,등의 뜻이 있읍니다.

이 欲자의 바란다, 무엇인가 하려고 한다,는 의미를 보아서,

"의식의 움직임이 없음"즉 의식의 작용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 같읍니다.

이 "無欲"은 바로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이 나타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마치 잔물결조차 움직임이 전혀 없는 고요한 연못표면에 비치는 달그림자가 하늘의 달모양그대로 조금도 어그러지지 않고 뚜렸하게 반사되는 것과 같읍니다.

觀은 본다,는 의미지만, 보여지다, 드러나다라는 수동태도 있읍니다.

妙는 미묘함,미세함,을 뜻하는데, 

항상 바탕에 있는 도(진아)는 내면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의식의 작용을 저절로 관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常有欲觀其徼

"무엇인가 하고자 억지로 애쓴다면, 항상있는 본바탕에서 이름과 경계가 있는 차별상만 보게된다."

이상태는 통상적인 "내가 있다"는 앎을 통해서 모든 차별경계가 나타날 때입니다.

의식이 움직이면 현상세계의 온갖 경계와 모양이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식이 움직이나, 움직이지 않거나 간에 항상, 常(절대바탕)는 가만히 있으면서 모든 것을 관조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有欲"이란 바로 "내가 있다"는 앎이 나타난 상태입니다.

"내가 있다"의 앎이 시작되면서 세상이 나타나고 모든 경계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일상 평범한 속세생활자체도 기본적으로 항상 절대본체가 관조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죠.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重妙之門,

이들 두개(無와 有, 본체와 작용)은 같은 것인데,

이름만 다르게 나왔다.

같은 것이란 신묘하게 깊은 어둠이며,

이 신묘하고 깊은 어둠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면

온갖 미묘한 작용의 입구가 된다.

 

여기서 玄이란 ,깊은 어둠을 말하지만, 달도 별빛도 없는 캄캄한 밤하늘처럼

암청색 무한한 공간같은 느낌을 표현한 말이며,

보통 눈을 감으면 새카만 내면공간과 비슷하지만,

그러한 감각적인 측면보다는 의식적인 측면에서

완전 "모름"의 상태를 말합니다.

자기존재의 느낌이나 육체적 존재감이 모두 사리지고,

자기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완전 모름 상태를 말하는데,

보통 현빈상태라고 하죠. 

이<重妙之門>은 의식이 최초로 생겨나온 지점이며, 존재핵점이라고 부르기도 하고,"나"라는 존재가 절대바탕으로 합일되는 點입니다.

이 點이 의식의 뿌리이기 때문에 공간과 시간이 이원화로 펼쳐지기 직전의 지점이며, 말과 생각이 나오기 이전을 말합니다.

의식이 현상화되기 이전의 순수 의식상태이며, 의식이 나오는 門이라고 해서 重妙之門이라고 부른 것 같읍니다.

이것이 "나라는 존재"가 생겨난 지점이므로, 이 지점을 빠져나가면 "나"라는 에고의식이 사라져서 절대바탕에 안주하므로 해탈이라고 부르고 있읍니다.

소위 말하는 깨달음이란 바로 이 <重妙之門>을 벗어나서 영원한 대자유인이 되는 것을 말하고 있읍니다.

 

도덕경 1장은 원래 가장 오래된 곽점 죽간본에는 없는 문장입니다.

아마도 백서본이 형성되던 시절에 춘추전국 말기의 황노학에 관련된 도인들이

삽입한 것 같고, 후세의 학자들이 도덕경 81장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총괄적 내용으로 판단하여 맨첫장에 배치한 것 같읍니다.

도덕경을 통상적으로 지금까지 해석된 내용과 좀  특출나게 해석했다고 해서

지성적으로 수준이 남보다 높다거나, 도력이 깊은 것은 아니죠.

그러나 보는 관점과 각도를 달리하여 기존의 해석과 주석들을 재조명해 보면서

그동안에 발견되지 않았던 도덕경의 새로운 가치와 숨겨진 메세지를 되 찾아내서

밝혀보는 일도 또한 구도자로서 해 볼만한 일이라고 여겨서 변변찮은 기초실력도 없이 노자 도덕경 해석에 뛰어 들어 보았읍니다.

앞으로 기존에 이미 쓴 문장이라도 수정할 것이 있으면 계속 수정하면서 노자 도덕경 81장까지 가능하면 모두 완역을 해 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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