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임명현 기자의 못다한 이야기] 2009년 용산, 반복과 퇴행
http://bloggernews.media.daum.net/news/2440651
임명현/MBC기자 mediaus@mediaus.co.kr
지금은 2009년이다. 2009년에, 경찰의 농성 철거민 진압 과정에서 6명이 숨지는 사고가 났다. 역사가 점점 전진하는 것이 순리라면, 철거민 진압 뉴스는 언젠가 이렇게 바뀔 수 있을 것이다. 몇 차례 이해당사자 간 협상을 중재했으나 결렬되자 결국 강제 진압, 진압 전 비슷한 건물에서 사전 예행연습, 언론을 통한 사전 예고, 그물망 50개와 매트리스 40개 설치해 추락 대비, 사망자 없음, 경미한 부상자 2명, 아울러 철거민들에게 새총으로 골프공을 쏜 경찰관과 지휘관 징계….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뉴스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역사의 전진을 기대하며 기다려야 하는 뉴스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지금으로부터 3년 6개월 전의 뉴스다. 2005년 6월8일, 오산 세교지구 철거민을 경찰이 강제 진압한 날의 뉴스다. 그래서다. 되물을 수밖에 없다.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또한 역사가 점점 전진하는 것이 순리라면, 2005년 6월8일에 기대하는 2009년의 뉴스는 절대로 오늘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좀 더 기존 주거민들을 배려하는 재개발 정책, 좀 더 세련된 협상과 나아진 보상, 좀더 농성자들의 인권을 배려한 진압 등과 같은 뉴스들이 있어야 이치에 맞다. 그래서 역시 되물을 수밖에 없다.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2가지는 변하지 않았다. 철거민들의 사정과 전국철거민연합의 농성 방식이다. 개발 공고가 나기 전부터 그 지역에 살았다는 걸 법적으로 증명하지 못해 ‘이주택지권’을 받지 못한 2005년 오산 세교지구의 철거민들, 더불어 주변에 평당 1억원을 호가하는 주상복합 건물들이 휙휙 들어서는데 고작 4개월치 집세와 3개월치 휴업 보상비만을 받고 떠나야 했던 2009년 용산4지구의 철거민들. 그들의 사정 말이다. 또한 건물 옥상에 망루를 세우고 복면을 쓴 뒤 화염병을 던지며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극한 저항을 하는 전철연의 방식도 변하지 않았다. 2005년 오산 우성빌라의 망루와 2009년 용산 남일당빌딩의 망루, 그리고 그 안에 있던 이들의 모습은 놀랄 정도로 똑같다.
이들 2가지는 전진하지는 못했지만 후퇴하지도 않았는데, 어찌 2009년의 뉴스는 2005년에 비해 훨씬 후퇴해버린 것일까. 그 이유를 깨닫기 어렵지 않다. 경찰의 변화가 후퇴를 부른 것이다. 이해당사자간 협상 중재 전무(全無), 사전 예행연습 전무(全無), 사전 예고 전무(全無), 사전 상황파악 부실(不實), 그물망과 매트리스 등 안전장치 설치 극부족(極不足) 등으로의 변화 말이다. 전진한 것은 법을 수호하겠다는 의지였을지 모르겠으나, 역설적으로 그들이 지키려 했던 법의 권위는 사건 발생 이전보다 훨씬 추락해버리고 말았다.
▲ 경찰이 20일 새벽 용산구 한강로2가 한강대로변 재개발지역 4층짜리 건물에서 농성중이던 철거민들에 대해 강제진압에 나섰다. 경찰이 컨테이너를 옥상으로 끌어올려 시너통이 가득한 망루를 철거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철거민과 경찰 6명이 사망했다. ⓒ민중의소리
후퇴한 것은 경찰뿐이 아니다. 앞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2005년엔 오산의 철거민들을 향해 경찰이 새총으로 골프공을 쏘고 골프채로 골프공을 날리자 관련 경찰관이 전부 징계를 받았다. 더불어 국가인권위원회가 조사에 나섰다. 그러나 2009년엔 사람이 6명이나 죽었는데도 누구 하나 도의적으로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조용하다. 검찰의 진상 규명을 기다리는 거라고 하겠지만, 검찰은 ‘형사법상’ 문제가 되는 이들만 찾을 뿐이다. 그러나 예행연습을 하지 않고 안전장치를 설치하지 않고 협상 중재 노력을 하지 않고 상황 파악을 못한 것 등은 ‘형사법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잘못은 잘못이므로, 후퇴는 후퇴이므로, ‘상식적으로’ 책임을 물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설 연휴 첫날, 철거민 진압을 주도한 경찰의 무전내용 전체를 입수했다. 이 안에 대형 특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다소 흥분해 무전을 듣기 시작했는데, 점차 마음이 아려왔다. 현장을 지휘했다는 서울경찰청 간부는 몇 차례에 걸쳐 지시했다. “병 하나(화염병) 투척하면 바로 살수를 하세요. 아주 강하게 살수해도 좋아요. 지금 눈에 보이는 물포를 충분히 쏘세요. 모든 물포를 총동원해서 충분히 쏘세요.” 몇 분 뒤 용산서 간부가 보고했다. “물포를 쏘니까 진군(농성자)들이 전혀 저항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울청 간부가 바로 답했다. “그러니까 소방차 물포하고 우리 물포하고 전 물포를 다 가동해요.”
문득, 2007년 여름 뜨거운 햇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취재했던 ‘난곡’이 떠올랐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가 3800세대짜리 고급 아파트로 변모한 지 1년이 지난 뒤였다. 달동네에 살던 사람들 가운데 고급 아파트에 입주한 이들은 5%도 되지 않았다. 그들은 과연 어디로 갔을까. 추적해 보니 대다수가 아파트가 아닌 난곡 근처의 지하방과 옥탑방을 떠돌고 있었다. 달동네는 사라졌지만, 달동네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은 거였다. 그래서다. 그렇게 집을 잃고 이웃을 잃고 희망을 잃어버린 이들이 느낄 삶의 잔인함이 2009년 1월 무전 속에서 오버랩됐다. 망루 속에서 화염병을 든 채 벌벌 떨며 온몸으로 물대포를 맞던 노인들과 함께 말이다. 그들이 진정 무서워하고 아파하고 차갑게 느꼈던 물대포는 경찰이 기선 제압과 불법 응징을 내걸고 쏘던 그 물대포가 아니라, 전혀 ‘전진’하지 않은 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에게 잔인한 삶을 강요하는 그 무언가가 쏘던 물대포일 거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