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책을 후불로 구입했다.
다음달 12일에 돈이 빠져 나가는 신용카드를 긁어 구입했으니 후불은 후불이다.
우리의 결혼도 후불제라 해야 마땅할 것 같다.
내가 아내에게 해줘야 할 것들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결혼 초기의 생활들은 어떤 식으로든 댓가나 보복을 당해봐야 할 것 같다. ^^;;
스스로를 지식소매상이라 포장한 독설가 유시민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후불제라고 정의했다. 1948년7월17일, 제헌의회가 대한민국을 규정할 때 민주공화국이라고 명확하게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헌법전문이 정통성을 보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헌법이 규정한 민주주의의 댓가를 확실히 치르지 않은 외상 민주주의를 이야기한다. 좀 더 듣기 좋게 후불제 민주주의라고 이야기 한다. 아, 내 몸 안에 아직 남아 숨쉬는 노예근성이 막 반발하고 싶어지는 부분이지만 냉정히 생각해 보면 반박하는 순간 명박스러운 현실이 나를 초라하게 한다. 유시민은 나와 같은 평범한 시민들의 단순무식함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유시민의 목소리, 유시민의 표정...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맞다.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생리적인 거부감일 뿐이다.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 나는 유시민이 현실 정치에 나서지 않고, 그냥 책이나 쓰면서 지냈더라면 어땠을까도 생각해 봤다. 오래 전에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통해 그에게 너무도 반했던 기억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시민은 글도 참 재미있게 쓰고, 평론가로서 경제학자로서 충분한 인기와 명예를 추구할 수도 있었을텐데, 왜 하필 복마전이라 불리는 정치판에 뛰어 들어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노출하고 스스로 무덤을 팠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을 아니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을 본격적으로 읽으면서 그가 현실 정치에 입문했던 것이 자신의 지난 날이 결코 불행이 아닌 행복의 경험이었노라 고백하는 것을 접했다. 매우 흥미로웠다. 그는 40대에 국회의원을 두 번이나 했고, 장관까지 경험한 행운아 중에 행운아였던 것이다. 그가 만약 5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그가 만약 아프리카 오지에서 태어났었더라면 어땠겠느냐고 자문했을 때 옳거니 옳거니 우리 국민들은 왜 그토록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생각할까 하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었다.
한국 국민들은 가장 오래 일한다. 산업재해로 죽거나 다칠 확률이 제일 높다. 생산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 중에 실제로 경제 활동에 참가하는 비율이 제일 낮다. 일하는 사람 중에 비정규직인 사람의 비율은 제일 높다.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이 아주 낮고 일하는 여성 대부분은 비정규직이며 소득은 남자보다 훨씬 적다. 고용주와 노동자들이 서로를 믿지 않는다. 국가가 일을 하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의 소득 지원을 거의 하지 않으며, 병든 국민들을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시키는데 쓰는 돈도 제일 적다. 절대 빈곤 인구와 상대적 빈곤 인구 비율이 높으며 소득 격차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노인이나 중증장애인과 같이 노동능력이 없는 국민들을 위한 소득지원도 매우 빈약하다. 그래서인지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국민들의 비율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낮다. (98쪽)
우리는 국민행복지수 최하위권(10위권 경제대국이면서도 만족도는 100위권 밖이다)의 국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 매체를 통해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행복해 지기를 주저한다. 이에 대해 유시민은 너무 혹독한 결핍이 좌절의 근원일 수는 있지만 적당한 결핍이 창조적 에너지를 일으킨다는 지식소매상으로서 자신의 현실을 자위하고 있다. 나는 그의 말에 반박할만한 뚜렷한 근거를 찾을 자신이 없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대한민국의 헌법을 다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직을 생각하면서 헌법10조를 읽었고, 헌법 21조를 가슴에 아로새겼으며 헌법69조를 낭독했던 한 가증스러운 인간에 대해 고민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대한민국 헌법10조)
① 대한민국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②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 (대한민국 헌법21조)
대통령 취임에 즈음하여 다음의 선서를 한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헌법 제69조)
위의 세 가지 헌법 내용과 이명박 정부 1년을 비교해 보아도 우리가 얼마나 톡톡히 후불제 민주주의의 댓가를 지불하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다. 이 정부들어 법을 집행하는 엘리트들은 유시민식 표현에 따라 양복입은 침팬지이다. 유신헌법도 양복 입은 침팬지들의 작품임은 두말 할 것도 없다는 지적이 따른다.
이 책은 유시민식 헌법 에세이다.
이 책의 절반은 헌법의 당위성을 이야기 하고, 후반부는 '권력의 실재'라는 주제로 권력의 민주성이 당위와 반비례한 현실을 이야기 한다. 최장집이나 장하준에 대한 평가 글로 이 나라의 현실을 고민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글이다.
대한민국에는 부족한 게 많지만 무엇보다도 도서관이 부족하다. 재능이 입증된 소수의 과학자들에게 연구비를 듬뿍 준다고 해서 노벨상을 타는 과학자가 나오는 게 아니다. 지적 호기심이 충만한 아이들이 걸어서 갈 수 있는 작은 도서관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공공도서관이 가뭄에 콩 나듯 있을 뿐이다. 그나마 값비싼 건축자재를 써서 겉은 화려하게 지었지만 서가와 장서는 형편없이 부족하다. 건물을 짓는 데는 아낌없이 돈을 쓰면서 도서 구입비는 쥐꼬리만큼 책정한다. 그래서 공공도서관들까지도 왕왕 출판사에 편지를 보내 양서를 기증해달라고 요청한다. 이처럼 도서관이 빈약한 나라에서 노벨상을 받는 과학자가 나온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동네의 작은 공공도서관을 만드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영화감독 이창동이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있었을 때 나는 그런 정책을 제안하고 문화부 공무원들과 실무 협의를 하기도 했다. 아파트 단지나 주택가에 작은 도서관을 만드는 사업이었다. 건물을 새로 지을 필요 없이 넓은 개인 주택이나 아파트를 구입해서, 또는 임대해서 그곳을 도서관으로 꾸미는 것이다. 공공도서관이 분원으로 지정해 운영 시스템을 넣고 학부모와 주민 자원봉사를 받아 운영하면 크게 돈이 들어갈 일도 없다. 이창동 감독이 장관을 너무 일찍 그만두는 바람에 이 기획이 결실을 맺지 못했는데, 두고두고 생각해도 아깝기 짝이 없다. (295쪽)
이와 같은 글은 얼핏보면 정책 홍보적이고, 선거운동에 적합한 듯한 글로 비춰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명확하게 입장을 전달하려는 저자의 노력으로 읽게 되었다. 독설가 유시민의 글에는 수많은 실명과 실재 했던 이야기들이 거침없이 거론된다. 그만의 자신감일 것이다.
지난 17대 국회 때, 내가 잠깐 모셨던 한나라당 소속 모 국회의원 의원실 양옆에는 아주 대비되는 동갑내기 두 국회의원이 머물고 있었다. 우리 의원실을 들어설 때 우측에는 전여옥, 좌측에는 바로 이 책 저자의 집무실이었다. 우연인지 몰라도 내가 출입하는 동안 우측방은 늘 한가롭고 조용 했으며, 좌측방은 보좌관들이 매우 분주하게 일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일하는 국회의원과 노는 국회의원의 차이인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내가 본 현상이 그랬다는 것이다. 유시민의 방은 늘 분주한 곳이란 기억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스스로 우파라는 우측 사람이 내내 놀다가 표절 시비에나 놀아나는 동안 내 눈엔 결코 좌파로 보이지 않는 좌측 인사가 늘 그렇게 분주했던 만큼 좋은 창작물을 내지 않았나 생각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법률이 명시적으로 금지하지 않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
권위주의 사회에서는 "법률이 명시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모든 것이 금지된다."
독재 국가에서는 "법률이 명시적으로 금지한 것은 금지되며 법률이 허용한 것도 금지된다."
2009년 우리나라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민주주의?? 권위주의?? 독재국가??
에필로그에서 언급한 니묄러의 인용문은 유시민의 친절한 배경 설명과 무관하게 호소력이 짙다. 유시민의 글 또한 호소력 있게 읽혀졌다. 앞으로도 매력적인 독설가 유시민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오랜만에 정치판 굴러 가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게 한 유익한 독서(독설?)였다.
From 한 네티즌의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