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가장 큰 적은 거짓이 아니라 신화다
-존 F 케네디
[남북전쟁 발생배경]
남북전쟁은 본질적으로 북쪽의 상공업 경영자와 남쪽의 농장 경영자라는
두 개의 경제집단이 자기중심적 이해관계에 입각하여 정치적 지배를 위해
일으킨 싸움이다.
(남부와 북부의 낮은 임금노동자(노예) 노동력 확보에 따른 갈등문제)
■ 흑인 노예문제
1619년 아프리카 흑인이 Virginia에 처음으로 수입된 이후 노예의 수는
중가하였으나 18세기말에는 노예의 필요가 줄어들어 노예해방의 기운이
남부자체에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1793년 조면기의 발명을 계기로 면생산이 증가함으로 노예노동은 남부의
대농장제에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되었다.
■ 보호무역
산업적인 북부는 성장하는 상공업을 위해서는 보호관세가 필요하였고
농업적인 남부는 원료생산의 입장에서 자유무역을 찬성하였다.
간단히 말해 북부가 수입물품에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결국 남부가 경제적으로
피해를 입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북부 산업가들사이에 중론은
남부에서 유럽의 값싼 물품을 수입하는것을 막기위해 수입품에 관세를 부
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북부 산업가들은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가 그 의견을 정책에 반영하여 수출에 큰 타격을 입게 되자
유럽은 보복정책으로 미국 남부에서의 목화수입을 전면 중단하였다....
그 결과 남부에서는 수입품의 가격인상에 따라 물가는 상승한 반면 목화의
수출로가 막혀 수입은 줄게 되었다.
■ 정치적인 문제
정치적으로도 남북간에 견해의 차이가 있었다.
북부의 관점에서는 강력한 중앙정부가 국내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필요하였다.
이에 반하여 남부는 지방이 각기 독자적인 제도를 갖고 있었다,
즉 중앙의 지방정부의 힘을 최소한의 것으로 줄이기를 희망하였다.
■ 사상의 차이
노예제에 관한 남북의 대립에는 사상면의 차이도 많았다.
북부에서는 자연법과 理性의 기초위에 만인 평등을 주장한 Jefferson이 1775년
노예 반대선언을 하였다.
그리고, 노예제에 대한 맹렬한 비난은 노예감독들의 비인도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개개인은 자유로와야 한다는 기본적인 권리가 침범되고 인간을 노예화하는
야만적인 행위와 압박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하여 집중되었다.
남부의 사상은 노예폐지론자들의 공격에 대한 방어로서 출발하여 북부의 노동자
계급의 빈곤을 신랄하게 공격함으로써 체계를 확립하였다.
북부노동자의 처참성은 남부에서 볼때 남부의 노예제도보다 더욱 도덕적인
죄악이라고 보았다.
남부에서 농사를 담당하던 흑인 노예들이 대거 북부로 탈출하였다.
그리고 18만5000여 명의 흑인이 북군에 입대해 전쟁에 참여하였다,
이 수는 북군 병력의 6%에 해당한다.
결국 흑인노동력 부족으로 인해 남부의 경제기반이 큰 타격을 입혔고 ,
군사적으로도 열세에 몰리는 계기가 되었다.
[링컨의 노예해방]
링컨의 가장 큰 업적은 노예 해방 그 자체가 아니라, 남북 전쟁의 승리에 따라,
노예 해방이라는 명분하에 남부에서 농업 노동력으로 종사하던 흑인들을 공장
노동력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공업 대국 미국이라는 발판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북부 출신의 링컨이 신경 쓴 것은 걸음마 단계였던 북부
공장들의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요약>
<노예 제도는 인간이 할 짓이 아니므로 폐지하자>라고 하며 노예제 폐지를
주장했지만 주된 목적은 값싸게 일을 시킬 수 있는 노동자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링컨의 노예 해방은 결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실행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링컨은 남부경제가 노예의 노동력에 의존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노예제도를 폐지할 의사는 전혀 없었다.
이러한 과정을 뒷받침할 중요한 증거는 그가 ‘뉴욕 트리뷴’지에 보낸 편지에서도
찾을 수 있다.
편지에는 “이 투쟁에서 나의 최고의 목표는 연방(미국)을 구하는 것이지,
노예 제도를 존속시키거나 파괴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노예를
해방시키지 않고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또한 일부를 해방시키고, 일부의 노예를 남겨둠으로써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그의 편지는 노예 해방의 진짜 의미가 ‘연방의 유지’임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노예 해방은 수단이었을 뿐 목적자체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링컨은 대통령 취임연설때 나는 현재 노예제도를 인정하고 있는 주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관여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법적 근거도 없고
나 또한 그럴 의사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이미 전쟁이 시작된 후에도 링컨은 노예문제가 전쟁의
이유가 아니라고 역설하였다..
이처럼 노예 제도의 폐지는 농업에 종사하던 흑인 노예들을 산업 사회에
적합한 공장 노동력으로 전환하는 역할을 했다.
남북 전쟁의 결과 법적으로는 흑인의 평등과 권리가 보장되었으나, 흑인의
지위가 실질적으로는 그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결국 노예 해방은 이루어졌으나 공장 노동자로서의 종속된 삶은 계속되었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은 오늘날까지 사회 전반에 걸쳐 완전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고 있으며, 아직까지도 흑인의 권리 보호를 위한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링컨의 암살 음모론]
그는 1864년 재 당선되어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지 41일만에 1865년 4월 14일
저녁 극장에서 저격당해 사망한다
.
맥기어는 5월2일자 [선]에서 링컨이 노예해방문제 때문에 살해된 것이 아니라
국제금융가들 즉 금융가들의 공작에 의해 살해 된것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이어 그는 5월 4일자 신문에서 링컨의 암살범인 부스의 공판에 대한 비밀자료도
입수 했다고 밝혔다. 그 자료에 의하면 청부살인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부스가
금융가들에게 고용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맥기어는 국제금융가들이 세계 모든 나라의 중앙은행을 차지하는 것뿐 아니라
금본위의 금태환 제도를 복원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링컨은 정반대로 신용본위로 액수를 지정하는 지폐발행을 고집했기 때문에
제가가 되었다
금융가들은 방해자인 링컨을없애고 은을 기준으로 하는 제도로 폐지함으로써
중앙은행을 차지하였다
미국의 화폐제도는 1875년의 금태환법령의 재정으로 변화 되었다.
이 법령은 그린백이란 지폐를 금으로 바꾸어 주는 것으로 1879년 1월 1일부터
그린백을 갖고 가면 은행에서 금으로 교환할수 있는 것이다.
그 후 1971년 8월 15일 닉슨 대통령이 중지시킬때 까지 그 법령은 계속
시행되었다.
로스차일드 가문과 국제 금융가 세력들은 계속하여 미국을 공격하여
1866년 4월 12일 통화 수축법을 의회에 통과 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통화 수축법이란 재무장관이 통화량을 움직일수 있는 권한을 말한다.
이 법을 통과 시키고 1913년 끝내 로스차일드 가문과 금융가는
연방지급준비제도란 것을 만들고..중앙은행을 그들이 의도하는 데로
개인 사설 중앙은행을 설립하고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 로스차일드 가문은?
증권시장을 교란해 거액을 벌어들인 '작전세력', 강력한 자금력으로 정치권을
움직이는 전문 로비스트 집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