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원본]
(곽점본)
學者日益
학자일익
爲道者日損
위도자일손
損之或損 以至亡爲也
손지혹손 이지망위야
亡爲而亡不爲
망위이망불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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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서본)
將欲取天下也
장욕취천하야
恒無事
항무사
及其有事也
급기유사야
又不足以取天下矣
우부족이취천하의
[한글 해석]
학문을 배운다는 것은
날마다 (앎을) 보태는 것이지만,
道를 닦는다는 것은
날마다 (앎을) 덜어내는 것이오.
(앎을) 덜어내고 또 덜어내면,
無爲에 이르를 수 있나니,
無爲는 하지(알지) 못하는 것이 없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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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천하를 취하고자 한다면
늘 아무 일도 없어야 하오.
할 일이 있으면 그것과 더불어
또한 천하를 얻는다는 것은 더욱 어렵소이다.
[해 설]
본 48장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졌는데, 상단부 문장은 원래 곽점본,백서본,왕필본에 공통으로 있는 문장이지만, 하단부는 곽점본에는 없고, 백서본 이후에 나타난 문장입니다.
이 하단부 문단은 아마도 백서본 형성시기에 황노학에 관계된 학자가 슬쩍 꼬리글로 삽입된 것이 어쩌다 대대로 전송되어 내려온 것 같읍니다.
물론 왕필본이나 기타 판본들에는 이 하단부에 있는 문장들이 들어 있읍니다.
상단부 내용은
학문을 배우면 배울 수록 더 앎이 보태지지만,
도를 닦는 것은 앎을 점점 더 덜어내는 것이며,
완전히 앎을 덜어내면 무위가 되고,
무위가 되면 모든 것이 되어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하단부는
천하를 지배하고자 한다면 무위의 덕이 있어야 하며,
유위적인 행위는 천하를 지배할 수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읍니다.
學者日益; (학문을) 배운다는 것은 날마다 (앎을) 더 보태는 것이지만,
學;배우다.학문, 者; 것,사람, 益;더하다,많아지다.쌓다,보태다.
<學者>는 "배우는 사람" 또는 "학문하는 사람"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사람>보다는 <배우는 행위자체>를 말하므로 <배운다는 것>으로 번역했읍니다.
학문을 배운다는 것은 날마다 (무엇인가를) 보탠다는 것인데,
그 보태는 것이 바로 앎 또는 지식이며,
각종 개념과 경계를 가려내서 식별하고 분석하는 <분별력>인 것입니다.
그런 지식이나 분별력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는 개념들을 주입하고 숙달시키는 훈련인데, 이것은 집단적 또는 인의적으로 사람들의 두뇌에 특정정보를 주입시키는 것이며, 두뇌작용을 그 사회 분위기에 맞게 특정패턴으로 정형화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읍니다.
모든 학문적 지식과 분별적 지성은 결국은 에고적인 자기정체성을 강화하는 일이기 때문에 여기서 날마다 보태진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보태지는 것은 온갖 지식정보와 개념, 그리고 개별화 경계로 구분하는 분별력의 앎이 보태지는 것이죠.
이런 것에 부수적으로 딸려서 개인적인 욕망과 대상에 대한 집착심,의지력등이 더욱 강화됩니다.
학문을 배우는 것, 지성의 단련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이고 이원적인 의식 안에 있는 의식의 일부분 작용에 지나지 않으며, 전체적인 앎을 얻을 수가 없읍니다.
오히려 지성이라고 부르는 앎의 작용을 넘어서야지 전체적인 지혜를 얻을 수가 있는 것이죠.
한 사람이 태어나서 2~3년까지의 간난아기 때에는 거의 무지하고 순수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점점 세월이 갈수록 "나"라는 정체성을 알게 되고, 그 순수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의 무지바탕 위에 앎의 껍질이 점점 두꺼워지면서, 어른이 될 동안 각종 교육과 주변환경과의 교류로 그 자기 앎이 두텁게 쌓입니다.
동시에 "나"라는 에고성도 더욱 두텁게 쌓여서 완전히 어른이 되면 독립된 개체로써 확고해집니다.
이 어른의 독립적인 상태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무지바탕에서 완전히 격리되다싶히 두꺼운 지성의 껍질로 덮혀 있는 것이고, 순수의식이 완전히 이 지성의 껍질에 의하여 감추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지성적인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많은 개념과 지식때문에 갈등과 고뇌에 부딪칠 기회가 많고, 항상 지적인 욕구에 매달려 있어서 스스로 자기 지성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읍니다.
반면에 앎을 벗어나서 모든 앎을 포기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항상 충만감속에서 스스로 만족하며 편안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물론 현대인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삶에 필수적인 지성을 익히는 것은 생존을 위해서 당연한 삶의 의무입니다만,
구도수행자에게는 학문적 지식과 개념적 이론은 내버려야 할 불필요한 장애물입니다.
爲道者日損; 도를 닦는다는 것은 날마다 (앎을) 덜어내는 것이다.
爲道; 도를 닦다. 損;덜어내다,줄어들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날마다 덜어내고 비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덜어내고 비운다는 것은 무엇을 덜어내고 비운다는 것일까요?
개인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욕망과 집착심을 없앤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욕망과 집착심은 단순히 나무 잎파리나 잔가지일 뿐이고, 그 본줄기나 뿌리는 더 깊은 곳에 있어서 행위나 의도적인 수행으로는 거의 건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그 본줄기가 <육체가 나라는 생각>의 앎이고, 그 뿌리는 바로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인데,날마다 덜어낸다는 것은 바로 이 에고적인 <육체가 나라는 생각>을 덜어내서, 그 존재의식의 뿌리인 <나라는 생각이 나온 원인체>를 없애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일상적으로 마음의 때인 욕망과 집착심등의 습을 일차적으로 깨끗히 닦는 수행을 하는 것이죠.
일반적으로 알려진 가장 기초적인 것은 처음에는 마음이 여기저기 헤메지 않게 한 군데에 매어두고 고요하고 얌전하게 머물러 있도록 마음을 다잡아주는 수행이 필요하지만,그런 집중수행은 가장 초보적인 과정일 뿐입니다.
그러나 사실 엄밀히 말해서 마음이 마음자체를 닦는 것인데, 웃으운 것은 마음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있지도 않은 허황된 것이라는 겁니다.
그 마음이라는 것은 원래 없었던 것이지만,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므로써, 마음이 나타났다고 여기는 것인데, 이 육체 동일시된 마음으로 그 마음을 넘어가려고 애쓰니, 보통 정신 수행이라는 것이 마음 안에서 다람쥐 체바퀴 도는 것처럼 거기서 거기로 돌아가는 실속없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자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런 끈질긴 수행행위에서 어느 지점(원인체 뿌리의식)까지는 마음수행행위로 고요한 마음상태가 되기만 하면 수행행위를 그만 그쳐야 되는데, 그것을 지성적으로 이해하면서도 계속 수행 습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이죠.
즉 이원적인 마음으로 수행을 하면서도, 스스로 그 결과를 이원적인 마음의 모니터를 통해서 확인하려고 하므로서, 스스로 마음수준의 수행행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일 "본다는 것, 안다는 것"이라는 마음수준의 모니터행위를 과감하게 치워버린다면, 그것이 바로 지성 또는 앎을 즉시로 벗어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덜어버린다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고 이론이며,
실천적으로는 즉각 마음 넘어로 바로 넘어가 버리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경전이나 이론적으로 많이 아는 지성적인 사람은 먼저 자기가 지금까지 아는 모든 지식을 포기하고,마음 넘어의 내면 깊은 곳에 고요하게 안주하여야 되는데,
마치 태어나서 얼마 안되는 간난아기시절의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무지상태로써 고요하게 머물러 있어야 되는 것이죠.
그렇게 하기 이전에 간난아이의 순수한 무지바탕 위에 두껍게 덮힌 지성적 앎의 두터운 껍질을 뚫고 내면으로 들어가야 하므로, 그 지성적 앎들을 무시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의 본문에서 매일 덜어버리는 것은 바로 "지성적인 앎"을 벗어 버리는 것을 말하며, 마음 넘어 앎의 뿌리인"모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은 나중에는 그 모름 넘어로 초월하여 전체의 주시자가 되는 것이죠.
損之或損 以至亡爲也; (앎을)덜어내고 또 덜어내면, 無爲에 이르를수 있다.
或; 또, 至;이르다. 以;~때문에,이므로,될수있다~써.
亡爲; 無爲와 같은 말,(의도성이 없는 자연적인 행위)
損之或損; 덜어내고 또 덜어내면
以至亡爲也; 무위에 이르게 되므로
마음의 욕망과 집착,학식을 덜어내고 또 덜어내면, 결국은 무위에 도달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無爲란 바로 "내가 없음"이며 "無我"와 동일한 말입니다.
버리고 버려서 가장 최종적으로 버려야 할 앎은 바로 "내가 있다"고 알고 있는 존재앎입니다.
이 존재앎을 최종적으로 벗어나면 "내가 없음"이 되는 것이죠.
"내가 없음"의 상태에서 저절로 나타나는 행위가 바로 無爲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이 우주삼라만상인 전체자연의 움직임은 바로 "나라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무위적인 작용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나가 없는 무위"는 바로 자연과 하나가 된 상태입니다.
이렇게 無爲自然이 된 상태가 바로 궁극의 道를 이룬 道人이라고 합니다.
亡爲而亡不爲 ; 무위는 하지(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
亡不爲; 無不爲, 하지못하는 것이 없다. 불가능한 것이 없다.
亡爲는 無爲라는 말이며,
무위란 모든 우주삼라만상이 나타나기 이전의 원초적인 절대본체의 바탕이 되는 것이므로 모든 것이 나온 그 근원이 되면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절대근원자체가 되면, 하찮은 개별적인 경계와는 상관없는 전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전체가 되면 무엇을 하든 전체가 하는 것이며, 개별적인 행위자란 없으며, 모두가 전체의 일부분으로 되므로 된다,안된다,라는 생각조차 없읍니다.
개별성이 없이 전체적으로 완벽하게 저절로 작용이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전체로써 모든 것을 저절로 하고, 모든 것을 저절로 아는 것이 바로 無爲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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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欲取天下也 恒無事;
만약 천하를 취하려 한다면, 늘 아무 할일도 없어야 한다.
將欲取天下也; 만약 천하를 취하려고 한다면
恒無事; 항상 아무 할일도 없어야 한다.일 삼지 않아야 한다.
將; 만약, 欲; ~하고자한다.바라다. 取; 얻다,가지다. 恒;늘,항상,
이 부분이하 문장들은 원래 곽점본에는 없는 문장인데,
백서본 형성시기에 도를 공부하는 누군가가 위의 곽점본 문장을 보고, 참고적으로 밑에다 착어하거나 꼬리글로 낙서한 문장이 그대로 전해 내려온 것 같읍니다.
<만약 천하를 취하려고 한다면 늘 할일이 없어야 한다.>에서 천하를 취한다는 것은 전체세상과 하나가 되려고 한다는 말 같읍니다.
여기서 <無事>,즉 "일이없다"는 것은 일원적인 절대상태를 다른 표현으로 쓴 것 같읍니다.
즉 도를 완성하려면 억지로 의도적으로 일을 만들지 말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은 노자의 무위자연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의미적으로 좀 애매모호하고 어색하게 표현된 문장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천하를 취하려고 욕심을 부린다는 구절은 無爲의 관점에서 어긋나는 문장이고,
할일이 없다는 無事도 천하를 취한다는 앞구절과 전혀 조화가 맞지 않읍니다.
따라서 아직 성숙하게 도를 배우지 않은 수행자가 노자 본문 밑에 참고적으로 낙서를 한 것이 그대로 전해 내려온 것이거나,
아니면, 백서본 시기는 황노학이 성행하던 시기이므로 아마도 노자의 도덕적 관점에서 나라를 지배하는 지방군주나 왕의 행실을 은근히 무위적으로 교육시키려고 의도적으로 삽입한 문장인 것같이 여겨집니다.
及其有事也 又不足以取天下矣
及其有事也; 할일이 있으면, 그일과 더불어서는
又不足以取天下矣; 또한 천하를 얻기가 어렵다네.그려.
及;함께, 더불어. 又; 또한, 矣; 어조사
일을 의도적으로 만들어서 하면, 그일 때문에 천하와 하나가 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도의 측면에서 보자면 무엇인가 해야 된다는 일이 있으면 전체와 하나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무엇인가 일을 하려고 한다면 도를 완성하지 못한다는 말 같읍니다.
여기서<有事>,즉 "일이 있다"는 것은 "주객 이원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 같읍니다.
이원적인 상태에서는 전체와 하나가 되지 않고 개체화되어 주체와 대상이 나눠진 상태를 말합니다.
無爲道를 완성한 聖人이 아니고, 보통 범부(凡夫)人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문장도 백서본시기의 황노학의 학자들이 삽입한 문장인 것 같으며,
지방군주나 왕이 무위에서 벗어나면 나라를 장악하기 어렵다는 투로 노자의 도덕적 관점에서 지배자의 행동이 무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삽입한 문장인 것 같읍니다.
이렇게 초기 곽점본 문장이외에 백서본 시기에 새로 삽입된 문장들을 관찰해 보면, 황노학이라는 왕의 통치철학을 노자도덕경을 통해서 제어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삽입된 문장들이 간혹 보이는데, 이러한 문장들의 특징은 보편적인 상식에서 좀 벗어나서, 그 시대입장의 좀 특별한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며, 따라서 원래 노자의 도에 비추어서 보편적 상식으로 해석하기가 좀 애매한 내용으로 해석이 됩니다.
이런 점을 지금 우리 후세대들이 다시 관찰해 보자면,
그 시대에 노자도덕경을 가장 중요한 통치철학으로 내세우는 일은 어쩌다 저절로 시대가 그렇게 된 것이겠지만, 그 노자 도덕경이라는 고전명서를 도구로 이용해서 더욱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개인적인 견해나 내용을 덧붙혀 놓으므로서 오히려 그 후세대에게 대대로 잘못 전달되어져서, 그 덧붙혀 수정된 내용들이 마치 원래 노자도덕경 내용인 것처럼 후세들이 대대로 착각하게 만드는 문장들이 간혹 섞여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노자도덕경의 해석작업은 원래 노자도덕경의 수숭한 의미를 쉽게 해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중간에 잘못 삽입되거나 의도적으로 수정된 글자들을 세밀하게 찾아내어 옳바른 뜻을 다시 재검토해 보는 것도 중요한 작업이라고 여겨집니다.
지금까지 본인(무한진인)이 번역 해설한 본 노자도덕경해설에서 이와같이 중간에 잘못 삽입되거나 수정된 문장들과 지금까지 잘못 해석해온 문장들을 여러군데 지적한 바 있으며, 기존의 다른 해석서에서 언급하지 않은 부분도 많으므로 노자도덕경의 연구에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