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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이런사람↑

슈퍼 마리오와 젤다의 전설을 만든 게임의 신 미야모토 시게루

by 랭님 2009. 5. 20.

게임을 만드는 사람이 즐겁지 않으면 그들의 게임을 재미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미야모토 시게루-

미야모토는 게임을 만들었지만 사실 그것은 세상을 창조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스타크래프트 기획자 빌로퍼-


신기록 제조기 미야모토 시게루


세계 최초로 그래픽 기술을 이용해서 상용 컴퓨터 게임을 만든 사람은 1962년 스페이스 워를 개발한 스티븐 러셀(Stephen Russell)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게임의 아버지로 스티븐 러셀이 아니라 미야모토 시게루를 첫 손에 뽑는다.
이는 그의 놀라운 창의력과 아이디어로 게임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게임 산업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대중화된 게임에 대한 개념은 바로 그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게임산업에 끼친 위대한 공로들을 증명하기 위한 방법은 너무나 많다.

그가 만든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판매된 게임으로 전세계적으로 무려 1억 7천 만개를 팔아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서 게임으로도 부자가 될 수 있음을 그는 증명해주었다.
 게임이 단순히 유희의 수단이 아니라 소설이나 영화처럼 예술 작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은 게임 역사상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젤다의 전설이 시초다. 동화처럼 뛰어난 스토리와 게임의 결합은 전세계 게임산업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제 게임도 새로운 예술분야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에 설득력을 더해 넣어주었다.
일본 최고의 게임 전문 잡지인 패미통은 게임 평가점수에서 그 동안 불문율처럼 여겼던 만점의 벽을 1986년 창간 이후 12년 만에 처음으로 젤다의 전설: 시간의 오카리나에게 선사하면서 게임의 작품성에 경의를 표하였다.
이렇듯 그는 게임을 하나의 산업으로 당당하게 인정받게 하였고 게임을 하나의 예술의 영역으로 승화시킨 사람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그의 뛰어난 작품들은 많은 후배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그가 게임산업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 중에 하나이다.

마리오의 판매량에 도전하고 싶어서 포케몬을 개발한 타지리씨와 마리오와 최대한 똑같이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코맨더킨의 기획자이자 나중에 둠으로 유명해지는 존 로메오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열혈 마니아들이다.
퀘이크의 크리에이터 존카멕과 메탈기어 솔리드의 코지마 히데오는 자신의 게임은 그의 게임이 있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었다고 스스럼 없이 말한다. 게임 크리에이터에게 가장 존경받는 그로 인해서 후배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때도 있다. 소닉더 헤지혹의 나카 유지와 바이오 하자드의 미카미 신지는 소속 회사가 수익성을 이유로 극렬하게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닌텐도에 소속된 미야모토 시게루와 함께 일하고 싶어서 게임큐브로 게임을 개발했던 적이 있다.

게임큐브가 상대적으로 보급이 되지 않은 관계로 시장에 발매된 두 게임의 판매량은 저조했다. 하지만 나카 유지와 미카미 신지는 일말의 후회(?)도 없이 앞으로도 힘이 닿는 한 그를 돕고 싶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의 인기(?)는 실로 일반 사람이 생각하는 그 이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그를 존경하는 사람은 게임 개발자들만이 아니다. 세계적인 유명 스타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비틀즈의 멤버 폴 메카트니는 일본을 방문해서 제일 먼저 강력하게 요청한 것이 미야모토 시게루와의 만남을 주선해달라고 하였다. 폴 매카트니는 그와 저녁식사를 하며 사인을 받고 자랑스러워 했다고 한다. 또한 닌텐도가 있는 교토에는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방문하는데 이중에는 미야모토 시게루가 있는 곳을 게임의 성지로 여겨서 순례 여행을 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된 세계적인 게임 크리에이터 윌 라이트의 딸은 성지를 방문하듯 일본을 방문해서 미야모토 시게루를 만나고 큰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그는 영화로 치면 스티븐 스필버그이고 음악으로 치면 비틀즈와 같은 절대적인 위치의 슈퍼스타이다. 그가 영국 버진 메가스토어에서 공개 사인회를 했을 때는 브리트니 스피어스 보다 두 배가 넘는 천명의 사람이 그를 보기 위해서 모였다. 한번은 미국의 뉴욕에서도 공개 사인회를 열었는데 역시 15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에게 열광하기도 하였다.
그는 게임 크리에이터도 락스타처럼 대중을 열광시켰음을 증명한 최초의 개발자이기도 하다. 컴퓨터 게임의 그랜드 마스터 미야모토 시게루는 왜 그렇게 대단한 것일까? 우리 한번 그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자.

유년시절의 추억이 게임으로 부활하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1952년 11월 16일 일본 교토 외곽에 위치한 작은 전원마을인 소노베에서 태어난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농촌마을인 소노베는 그의 게임 작품 전반에 걸쳐서 많은 영향을 준 곳으로 그에게는 매우 소중한 곳이다. 비디오 게임의 아버지로 불리우고 있지만 그는 정작 유년시절에는 집안에 텔레비전조차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집안에 있는 시간보다는 매일 친구들과 밖에서 해가 질 때까지 뛰어 놀곤 하였다. 이렇게 친구들과 함께했던 추억들은 나중에 커서 게임을 개발하는데 있어서 크나큰 영감을 제공해준다. 
집 근처의 보리산에 올라서 연못가의 징검다리를 뛰어 놀던 기억들은 점프의 상쾌함을 강조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에 고스란히 녹아 들어갔다. 그리고 친구들과 탐정놀이를 하며 마을과 산 전체를 탐험했던 추억은 젤다의 전설로 부활했다.

특히 2001년 일본 디지털 미디어 우수상을 받은 피크민의 경우는 게임의 배경 자체가 소노베의 보리산일 정도이다. 이렇듯 그의 즐거웠던 유년시절의 추억은 오늘날 그가 즐겁고 유쾌한 게임을 창조해내는데 있어서 최고의 일등 공신이 된다.
일본에서는 최근 게임 비평이라는 잡지에서 왜 그와 같은 명물 크리에이터가 나오지 않느냐고 한탄하는 기사를 낸 적이 있다. 그 기사에서 내린 결론 중에 하나는 미야모토 시게루의 어린 시절처럼 아름다운 자연환경에서 마음껏 뛰어 놀았던 게임 크리에이터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삭막한 도시에서 마음껏 뛰어 놀지 못하고 집안구석에서 텔레비전이나 보면서 시간을 보낸 요즘 일본의 전문세대에게서 그와 같은 천재 크리에이터가 나오기는 힘들 것이라는 탄식이 이어졌다.

그가 게임 기획자중에 가장 위대한 스토리 텔러가 된 것도 친구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매일 이야기를 만들면서 생긴 재능이라고 하니 그의 어린 시절은 비록 물질적으로 부족하였을지 몰라도 세계적인 게임 크리에이터가 되기 위한 삶에서는 최고의 축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시골마을의 순진했던 소년인 그는 칭찬에는 매우 약한 단순한 면도 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그림을 잘 그린다는 칭찬 한마디를 해주자 그림으로 세상을 감동 시켜주겠다며 만화가를 자신의 장래 희망 1 순위에 올려 놓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덕분에 그는 많은 그림 연습을 할 수 있었고 이 역시 나중에 그가 세계적인 게임 크리에이터가 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아톰을 그린 테츠카 오사무처럼 최고의 만화가가 되겠노라고 큰소리 쳤지만 막상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자신의 한계를 절감한다. 결국 자신의 그림 실력으로는 절대 일류 만화가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그는 만화가에 대한 꿈을 접고야 만다.
대신 그 동안 소홀했던 학교 공부에 더욱 매진하기로 결심한다. 덕분에 대학에 갈수 있는 정도의 성적을 받게 된다. 그는 특히 공학계통의 수학성적이 좋았는데 대학진학을 앞두게 된 그는 자신의 예술적인 관심과 공학적인 재능을 동시에 발휘할 수 있는 학과가 무엇인지 고민을 거듭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미술 공예학과야 말로 최고의 선택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카나자와 시립대학의 미술 공예학과에 합격한 그는 정들었던 소노베를 떠나서 대학을 다니게 된다.

미야모토 시게루 유급을 당하다.

그의 대학 생활은 여유와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그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학업보다는 다양한 활동에 열성적이었다. 학교 밖의 친구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가능한 많은 것들을 경험하려고 하였다. 특히 그는 음악에 심취하였다. 그는 밴드에 들어가서 기타를 치면서 열정적으로 활동하였다. 밴드 가입은 단순한 취미의 일환이 아니었다. 프로 음악가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쳤던 것이다. 덕분에 그는 자연스럽게 학업에 소홀해져만 갔다.
결국 수업의 반도 출석을 못한 그는 결국 유급까지 당하고 만다. 그가 유급으로 인해서 고향에 돌아가자 부모님들은 그를 심하게 질책하였다. 부모님의 꾸중에 정신이 번쩍 들게 된 그는 결국 음악을 포기하고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서 공부에 전념하여 졸업장을 받게 된다.

5년 만에 대학 졸업장을 받은 그였지만 정작 자신의 직업으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를 몰랐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평범하게 매일 하루하루가 반복되는 지겨운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 그는 자신이 어린 시절 즐겁게 봤던 인형극의 연출가가 될 것을 결심한다. 하지만 이 때는 일본에서 인형극의 인기가 하락했던 시점으로 인형극 관련 업에 종사해서는 생계까지도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결국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장난감 완구 업체에서 프라모델이나 만드는 것이 자신의 적성에 맞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침 아버지의 친구 중에 마을에서 영향력이 있는 구 의원이 있었다. 이 구 의원은 닌텐도의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취업을 알선해준다. 그 덕분에 서류전형 없이 바로 회사관계자와 면접을 보게 된다.

그는 소개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면접에 응했다가 정말 혼쭐이 났었다고 말한다. 면접 날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담은 인형과 어린이용 옷걸이 등을 포트폴리오로 가져 갔는데 사장은 무척 냉정하고 차가웠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사장의 속마음은 미야모토 시게루가 실제로 마음에 들었다. 사장은 소개가 아니라 진짜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뽑았다는 것을 각인시켜주려고 일부러 냉정하게 대했던 것이다.
전격적으로 닌텐도의 기획부 직원으로 채용된 그는 그림까지 그릴 수 있는 기획부 직원이라는 미명하에 많은 직원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다. 여기저기서 다른 부서의 직원들이 업무와 관련된 그림을 부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가지 일이 아니라 다양한 잡무를 처리해야 했다. 그래서 초기 입사 때만해도 그는 카드에 글씨를 써넣거나 홍보 인쇄물을 디자인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게임의 표지 디자인까지 하는 만능 플레이어로 활동하게 된다.

미스터 닌텐도 미야모토

지금 현재 닌텐도는 세계적인 게임회사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과거에는 화투와 트럼프를 만드는 회사였다. 야마우치 히로시는 닌텐도의 3세대 경영인으로 오늘날의 닌텐도 신화를 이룩해낸 인물이다. 하지만 미야모토 시게루를 만나기 전까지는 큰 실패만을 거듭하고 있었다.
와세다 대학을 재학중이던 22살의 젊은 나이에 경영을 물려 받은 야마우치 히로시는 회사에 안정적인 수익을 주는 카드 사업 외에 다양한 사업 전개를 하기 위해서 여러 업종에 뛰어든다. 이런 사업 다각화의 일환으로 숙박업, 운수업, 식품업 등의 사업을 연속적으로 진출하지만 대대적으로 실패하여 900엔에 이르던 닌텐도의 주식 가격은 60엔으로 폭락하고야 만다.

결국 야마우치 히로시는 오랜 고심 끝에 최후의 사업으로 완구업을 시작한다. 자신들은 트럼프나 화투 같은 게임도구를 만드는 회사이기 때문에 엔터테인먼트에 분야에 강점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그의 말대로 닌텐도는 보드게임, 모형자동차, 미니게임기, 광선총 등이 대히트하며 큰 성공을 거두며 재기한다.
하지만 전세계적인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일본도 예외가 아니었다. 결국 70년대 중반 이후 닌텐도는 언제 회사가 무너질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에 까지 이르고 만다. 야마우치 히로시는 이런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 해외시장을 개척할 것을 결심한다. 그는 사위인 아라카와를 미국에 특파하여 시장 조사를 하도록 한다. 아라카와는 미국에서 아케이드 게임 시장이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면서 게임기판을 팔면 충분히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에게 보고한다.
보고를 받은 야마우치 히로시는1980년에 닌텐도의 미국 현지 법인을 뉴욕 맨하탄에 설립하도록 지시한다. 미국 현지사장에 임명된 아라카와는 각종 시장 조사 끝에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아류 슈팅게임인 레이더 스코프라면 충분히 시장에서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아라카와의 시장 보고서를 받아본 야마우치 히로시는 4개월 동안 아케이드 게임기로 레이더 스코프를 3천 개를 만들어 미국으로 보낸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무척이나 냉담하였다. 레이더 스코프의 기판은 고작 천장도 판매하지 못하는 고전을 겪게 된 것이다. 2천여 장의 재고 문제로 골머리를 앓게 된 아라카와는 고육지책으로 아케이드 게임기의 본체는 그대로 두고 롬 안에 저장된 게임 내용만 바꿔서 판매하자고 본사에 요청한다.
그런데 마침 회사의 모든 엔지니어들은 다른 일로 바빴다. 이 때 미야모토 시게루의 회사상사이자 정신적인 지주인 요코이 군페이가 닌텐도의 사장인 야마우치 히로시에게 한가지 제안을 한다. 그 동안 회사에서 만드는 게임은 엔지니어가 만들어서 독창성이 없으니 프로그래머가 아닌 다른 미적 감각이 있는 그래픽 디자이너출신들에게 게임 기획을 맡기자는 것이었다.

휴대용 게임기인 게임 &워치를 개발해서 회사의 어려운 재정상태를 벗어나는데 큰 공헌을 한 요코이 군페이의 조언에 야마우치 히로시는 오케이 사인을 보낸다.
요코이 군페이는 회사의 디자이너들을 상대로 게임 기획 공모전을 연다. 이미 게임 & 워치로 개발했던 뽀빠이를 소재로 아케이드 게임을 제안하라는 것이었다. 사내 공모전을 통해서 미야모토 시게루가 새로운 게임의 기획자로 선택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야마우치 히로시는 회사의 예산이 부족했기 때문에 기존의 레이더 스코프를 보완하고 수정하는 정도의 게임을 원했다.
하지만 미야모토 시게루가 제안한 네 가지의 아이디가 모두 마음에 들었고 요코이 군페이와 상의하여 동키콩을 개발하도록 하였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자신의 인생에 아주 가치 있고 중요한 일이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놀기 좋아하던 27살의 청년 미야마토 시게루는 친구들에게 석 달 동안은 회사일로 바쁠 테니 석 달 동안은 모임이 있어도 부르지 말라고 전격 선언을 하고 동키콩 개발에 전념을 다하기 시작한다.

미야모토 시게루의 첫번째 기획작품 – 동키콩


동키콩은 미야모토 시게루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게임을 물어볼 때마다 항상 지목할 정도로 가장 애착을 가지는 작품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자신의 첫 번째 작품은 기억에 오래 남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동키콩은 미야모토 시게루 개인 뿐만 아니라 닌텐도에게도 가장 중요한 게임이기도 했다. 물론 많은 회사에 커다란 이익을 안겨준 이유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오늘날의 닌텐도 신화를 가능하게 한 공식 마스코트인 마리오가 처음 등장한 게임이기 때문이다.
이미 얘기했듯이 1980년대 초반만해도 게임 기획자의 개념자체가 없다. 프로그래머가 게임의 아이디어와 구조를 생각해낸 후 직접 프로그래밍 했던 시대이다.

그때 까지만 해도 게임 기획이라고 하면 완성된 게임을 플레이 해보고서 단점을 끄집어 내고 수정사항을 적어내는 베타테스터 요원들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게임 기획자라고 하면 대학생 아르바이트생을 연상할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의 제작과정에서 프로그래머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졌고 다른 파트의 사람들은 일방적인 지시를 듣는 상명하복의 관계였다.
그 역시 입사 초기에는 프로그래머의 지시에 의해서 요구하는 그림을 그려주기만 하는 단순한 일꾼에 불과했다. 남의 것을 베끼는 것에 심한 모멸감까지 느끼는 그였지만 회사 프로그래머가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베낀 스페이스 파이어버드에 그래픽을 요구할 때면 군소리 없이 그림을 그려줘야 했다.
그랬던 그가 이제 프로그래머에게 지시를 내리는 기획자가 된 것이었다. 이로 인해서 그는 텃세 아닌 텃세를 맛봐야 했다. 게임 기획과 관련되어 뭔가 아이디어를 얘기할 때면 매번 프로그래머는 하드웨어의 한계를 이유로 거절했던 것이다. 결국 직접 하드웨어 공부까지 해가면서 그는 게임 개발을 진행해 나가야만 했다.
혼자서 고군 분투하며 결국 게임을 완성하긴 했지만 다른 사원들의 반응은 영 신통치 않았다. 미야모토 시게루 조차 이 때의 반응에 아찔했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때 오직 한 사람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그의 게임을 마음에 들어 했다. 많은 사원들이 반대를 하였지만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단호하게 미야모토 시게루의 손을 들어 줬다.

게임을 본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미국지사장인 아라카에게 본사를 시애틀로 옮겨서 동키콩 게임을 서해항구에서 받으라고 지시를 내린다.
처음 물건을 받아 본 아라카와 역시 닌텐도의 일반 직원처럼 게임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아라카와는 사장의 지시에 마지 못해서 근처의 오락실에 동키콩을 하나 설치하고 반응을 살펴본다.
하지만 게임의 반응은 정말 즉각적이고 폭발적으로 다가왔다. 순식간에 미국 전역에서 주문이 폭주하면서 동키콩은 아케이드 게임기로써는 경이로운 판매량인 65000장을 기록한다. 10년 후의 스트리트 파이터2가 아케이드 게임 기판으로 50000장을 팔았음을 생각해보면 실로 놀라운 기록이었다.
동키콩은 수익만해도 1억 달러를 기록하며 닌텐도의 효자 상품이 된다.  그의 첫번째 게임으로 기록되는 동키콩(Donkeykong)이라는 이름은 얼간이라는 뜻을 가진 동키(donkey)와 킹콩(king kong)에서의 콩(kong)이 합쳐진 합성어 이다. 동키콩의 게임 방식은 무척 간단하다.
킹콩처럼 생긴 거대한 악당 고릴리가 남자주인공의 애인을 납치한다. 철창 속에서 울부짖는 여자친구를 구하기 위해서 남자주인공은 고릴라가 던지는 드럼통과 같은 각종 장애물을 피해서 화면 위의 목표지점까지 올라가야 한다. 킹콩은 계속해서 드럼통을 일정 간격으로 던지는데 타이밍에 맞춰서 점프를 하는 것이 이 게임의 핵심 포인트이다.

그는 이 게임의 아이디어를 자신이 즐겨 봤던 뽀빠이로부터 얻어왔다고 말한다. 뽀빠이의 애인 올리버를 플로토가 납치하면 다시 뽀빠이가 구출하는 시나리오 구성에서 동키콩이라는 게임을 착안한 것이었다. 사실 원래 그는 뽀빠이의 캐릭터를 이용해서 게임을 개발하려 했다.
 닌텐도의 사장 야마우치는 미국에서 게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미국에서 친숙한 캐릭터를 사용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뽀빠이의 판권을 사기 위해서 접촉하였으나 거절당하고 만다. 이로 인해서 그가 직접 디자인한 캐릭터가 바로 마리오였다. 만약에 그 때 뽀빠이의 캐릭터 사용권을 계획대로 구매할 수 있었다면 지금의 닌텐도는 아마 없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당시 상황에서는 야마우치 사장의 의도했던 데로 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판권계약을 못한 것은 미야모토 시게루에게는 엄청난 행운이었다.
한편 그는 동키콩 개발에서 프로그래밍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직접 제작하며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뽐내었다. 캐릭터 디자인에서부터 에니 메이션과 배경작업까지 해낸 그는 대학시절의 밴드생활덕분에 직접 키보드를 치며 음악을 작곡까지 하였다. 특히 캐릭터 작업에서 그의 진면목을 발휘하였다. 마리오를 디자인 할 때의 80년대 초반만 해도 게임 그래픽상의 제약이 많았다. 특히 캐릭터의 해상도가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적은 도트로 개성 넘치는 캐릭터를 창조해내기란 것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캐릭터 디자인을 하면서 우선 먼저 두 가지 결단을 내린다. 사람들이 알기 쉽도록 겉모습의 특징을 수염과 모자에 포인트를 두기로 한 것이었다. 사실 모자는 헤어스타일을 그릴 자신이 없던 그의 고육지책이기도 하였다. 영화속 영웅들과는 차별화된 외모를 넣기 위해서 평범한 작업복을 입힌 그는 캐릭터의 체형에 통통함을 추가하여 지금의 마리오 캐릭터를 만들어갔다.

실제 화면상에 움직이는 마리오의 움직임에 박진감이 느껴지지 않자 이번에는 손을 큰 장갑으로 덧칠하여 캐릭터를 완성시킨다. 처음 그는 동키콩의 주인공 캐릭터 이름을 따로 지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냥 플레이어의 캐릭터는 이동과 함께 오직 점프만 할 수 있다고 해서 단순한 생각으로 점프맨이라고 불렀다.
유럽판의 동키콩에서는 점프맨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직업도 배관공이 아니라 목수였다.  하지만 미국 지사장인 아라카와는 주인공 캐릭터에게 그럴싸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마케팅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이라카와 미국 지사장이 머물던 빌딩의 주인은 통통한 몸매에 이탈리아계로 이름이 마리오 세갈리(Mario Segali) 였다.
어느 날 아라카와가 직원들과 같이 동키콩을 플레이 할 때 마침 빌딩 주인 마리오가 임대료를 받기 위해서 들어왔ㄷ. 그 모습을 본 거기있던 사람들은 망설임 없이 동키콩의의 점프맨에게 마리오라는 이름을 지어주기로 결정하였다.
 이 얘기를 전해 들은 미야모토 시게루는 이탈리아인의 이미지를 참고로 한 자신의 게임 캐릭터와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그 이름에 동의한다. 마리오는 그 후 닌텐도의 마스코트가 되어 닌텐도 신화의 주역이 된다. 90년대에 가장 유명한 캐릭터로도 뽑힌 마리오는 디즈니의 미키마우스와 매년 최고 유명 캐릭터 순위에서 엎치락 뒤치락 하며 일등을 나누어 갔을 정도로 성장한다. 동키콩이 일종의 신드롬으로까지 번지며 전세계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되자 닌텐도는 동키콩 주니어, 크레이지 콩, 동키콩 클래식, 슈퍼 동키콩, 동키콩 랜드의 후속작을 내놓으며 닌텐도의 프렌차이즈 게임으로 키우게 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게임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동키콩 시리즈의 성공 덕분에 미야모토 시게루는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의 눈에 띄게 된다. 그래서 승진도 하게 되지만 회사에서 아직 탄탄한 기반을 가진 상태는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오는데 그것은 닌텐도가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었다.
 야마우치 히로시는 당시 엔지니어 총책임자인 요코이 군페이에게 가격은 최대한 저렴하고 다른 회사가 1년 이상 따라올 수 없는 성능을 갖춘 게임콘솔을 개발하도록 지시한다. 그리고 미야모토 시게루에게는 가정용 게임기에 들어갈 게임 소프트웨어 개발을 책임지고 개발하라고 말한다. 이 덕분에 그는 1984년부터 게임 엔터테인먼트 전담부서를 닌텐도 내에 조직하고 책임자가 된다. 이 팀은 나중에 마리오와 젤다를 탄생시키는 전설적인 게임 개발팀으로 거듭나는 닌텐도 내의 드림팀이었다.

그가 마리오를 이용해서 새로운 게임을 개발하려고 하자 개발팀의 엔지니어들은 또 마리오냐면서 반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이 게임 속에서 직접 움직여보고 싶은 캐릭터로 마리오가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우선 그는 게임화면상에서 마리오가 점프하는 것을 더욱 극대화 시키려 하였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들이 게임 속에서 마리오가 점프할 때 플레이어 자신도 일체감을 느껴서 점프하는 기분이 느끼면 반드시 성공한 게임이 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점프하는 즐거움! 그것이 바로 슈퍼 마리오의 첫번째 핵심 컨셉이었다. 그리고 실재감을 느끼게 하기 위한 고심 끝에 몇 가지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우선 배경을 넣는 것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게임에서 모든 배경은 검은 색이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게임에 파란 하늘 배경을 넣었다. 그 다음에는 마리오의 이동에 따라서 배경이 변하게 하였다. 이것은 세계최초로 횡스크롤 액션게임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게임 제작 초기에는 단순 4방향과 점프로 이루어진 이 게임에 대해서 프로그래머들이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미야모토 시게루는 실제 게임이 구현되고 나면 다른 사람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달리고 점프하는 것을 좋아하듯이 게임에서도 그런 느낌을 구현 할 수만 있다면 슈퍼마리오는 반드시 성공 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점프하는 즐거움이 느껴지는 게임을 만들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리고 그렇게 각고의 노력 끝에 잉태한 슈퍼 마리오는 간단해 보이지만 질리지 않고 여러 번 할 수 있는 게임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특히 미야모토 시게루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슈퍼마리오 브라더스에 적용해서 게임에 새로운 재미를 불어 넣었다. 앨리스가 거울 속을 통해서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듯이 슈퍼 마리오 속에는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수많은 숨겨진 비밀방 들이 있었다.
또한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과 다양한 아이템들은 게임의 재미를 더해주었다. 너무 어렵지도 않고 쉽지도 않아 보이는 게임의 난이도는 도트의 움직임 하나까지 잡아내면서 만들어낸 집념의 결과물 이었다. 단순하지만 쉽게 질리지 않는 게임!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바로 직접 게임 패드를 잡고서 플레이 할 수 있는 게임! 한번 엔딩을 봐도 다시 플레이 해보고 싶은 게임이 되게 하기 위해서 그는 휴일도 잊은 체 엄청난 테스트 플레이를 반복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막상 게임이 발매되려고 할 때 그는 약간 겁이 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게임롬을 찍어내는 공장에서 그는 성공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된다.
40~50대의 작업인부들이 공장에서 사람들이 일은 하지 않고 슈퍼 마리오에 열중해서 누가 오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미야모토 시게루를 보며 작업인부들은 일하지 않은 자신들이 들킨 것에 화들짝 놀랐지만 오히려 그는 흐뭇했다. 게임의 성공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역시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1986년 발매된 슈퍼마리오 브라더스는 천 만장이 넘게 판매되고 전체 시리즈는 무려 1억 7천만 개나 팔리며 컴퓨터 역사상 최고의 판매량을 기록하는 영광을 얻게 된 것이다. 동키콩은 뛰어난 베스트 셀러였다면 슈퍼마리오 브라더스는 게임의 혁명이었고 전설이 되었다.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의 성공 신화 덕분에 어느덧 미야모토 시게루도 게임의 신으로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역사상 가장 완벽한 게임 젤다의 전설

미야모토 시게루는 슈퍼마리오를 제작하는 동안 다른 한편으로는 젤다의 전설을 개발중이었다. 그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뭔가 감동적인 스토리가 포함된 게임을 개발하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봤다. 소노베에서 친구들과 같이 장난감 칼을 들고서 산에 올라가 동굴과 숲에서 탐험과 모험을 즐겼던 추억들을 게임 속에서 표현하고 싶었다.
우선 게임의 제목인 젤다의 전설에서 젤다라는 이름은 미야모토 시게루가 좋아하는 유명한 소설가인 피츠제럴드의 부인이름에서 따왔다. 젤다라는 어감이 왠지 모르게 멋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주인공 링크는 영원히 늙지 않는 소년 피터팬의 이미지에서 착안하였다. 젤다의 전설은 여러 가지로 획기적인 게임이었다. 우선 액션 롤플레잉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신선한 퀘스트 시스템이다. 전체적인 중심 줄거리 외에 게임 내용과는 다르게 플레이할 수 있는 부가적인 퀘스트 역시 젤다의 전설이 최초였다. 이런 다양한 퀘스트는 게임의 엔딩을 봐도 다시 한번 게임을 플레이하도록 하는 동기를 제공하였다. 셋째로는 바로 세이브 시스템이었다. 디스크를 이용해서 게임 내용을 저장함으로써 언제든지 원하는 곳에서 게임을 그만두고 원하는 부분에서 게임을 플레이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역시 세계 최초의 시도로 일반 게임 유저들이 게임을 개발하는데 있어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젤다의 전설은 시리즈가 계속될수록 진보하는 타이틀이다. 동키콩과 슈퍼마리오가 기존의 게임 방식을 답습하며 정체 상태였을 때 젤다의 전설은 더 다양한 이야기와 신선한 게임방식을 선보이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젤다의 전설: 시간의 오카리나’는 패미통이 창간된 지 12년만에 최초로 게임 평가에서 만점을 받는 기염을 토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젤다의 전설: 시간의 오카리나’가 발매된 1998년도에는 일본 영상문화제에서 디지털 부분 대상을 수상하면서 그 진가를 다시 한번 확인 하기도 하였다.
또한 후속편인 ‘젤다의 전설: 바람의 텍트’도 역시 패미통에서 만점을 받으며 역시 최강의 작품성을 인정받는다. 동키콩이 미야모토 시게루의 창의성을 보여준다면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는 미야모토 시게루의 뛰어난 게임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젤다의 전설은 미야모토 시게루의 작품성을 보여준 명작이라고 할 수 있다.

미야모토 시게루의 삶과 게임관

미야모토 시게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다. 닌텐도에서 사내 연애를 통해서 결혼한 그는 항상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이 그의 인생의 중심임을 항상 강조한다. 기자들이 그에게 5년 후에 혹은 10년 후에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가족과 관련된 자신의 모습을 말한다.
현재 고등학생이 된 딸이 대학에 갔을 때 어떻게 그들과 지내야 행복할 수 있는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사원들에게 주말에는 절대로 일을 시키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게임은 게임이고 주말은 가족을 위해서 보내라는 것이다. 그는 가족과 함께 하는 게임이 최고로 좋은 게임이라고 한다. 그는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도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도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이것은 바로 온 가족이 모여서 함께 하는 게임을 만들고자 하는 그의 열망을 대변하는 말이다.
그의 취미는 모두 가족과 관련된 것이다. 아이들이 좋은 자연 환경에서 자라도록 정원을 가꾸었고 아이들과 함께 취미생활을 하기 위해서 개를 같이 키웠다. 이런 그의 삶에서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이런 소중한 가족과의 체험이 게임으로 승화되었다는 것이다. 정원을 가꿨던 체험은 피크민이라는 게임으로 승화되었고 개를 키웠던 경험은 닌텐독스라는 게임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모두 상업적인면에서 100만개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하며 대 히트하였다.

행복한 가족생활과 치열한 게임 개발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그의 삶은 게임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직장인에게 좋은 모범이 된다. 그는 게임이 집에서 처박혀서 혼자서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미야모토 시게루는 그 스스로가 집에 처박혀 있기 보다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즐겁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즐겁지 않으면 자신의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이 재미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게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독창성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어떤 게임을 흉내내면 절대 그 게임을 따라잡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게임이 재미있다는 것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인데 남의 게임을 닮아서는 절대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지금 현재가 게임계의 최대 위기라고 진단하고 있다. 게임의 내용은 그대로이고 그래픽만 달라지는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게임을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의 경우는 더 심각해서 이제 게임을 졸업하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나면서 긴 불황의 터널 속으로 들어섰다. 이에 미야모토 시게루는 닌텐도의 차세대 게임기 레볼루션이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특히 레볼루션은 기존의 게임 패드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게임은 하는 사람만 하지만 텔레비전의 리모콘은 집안의 누구나 쉽게 만지고 조작 한다는데서 착안한 레볼루션의 게임패드는 벌써부터 전세계의 게임개발자로부터 극찬을 듣고 있다.
그리고 그 레볼루션 프로젝트의 핵심에는 역시 미스터 닌텐도 미야모토 시게루가 있다.
사실 레볼루션의 성공유무는 앞으로 닌텐도라는 회사의 운명이 걸린 절체절명의 프로젝트이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미야모토 시게루는 큰 압박감을 느낄만하지만 그는 아직까지 여유를 잃지 않고 있다. 게임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겠다는 그의 장담대로 이제 게임에서 새로운 재미를 창출 해낼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아하!>
세계 최초의 게임

스티븐 러셀이 개발한 스페이스 워는 그래픽 기반의 상용 컴퓨터 게임으로 기록된다. 그러면 누가 처음 컴퓨터 게임을 개발 했을까? 그것은 바로 1958년 윌리암 하긴보임(William Higinbotham)이 개발한 테니스 포 투(Tennis for two)이다. 테니스 포투는 나중에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퐁의 모태가 되어서 다시 한번 세상에 알려진다.


<아하!>
– 게임 크리에이터는 수학을 잘해야 한다?
디자인 계열을 전공한 미야모토 시게루는 수학을 못할 줄 알았는데 정작 그가 가장 좋아하고 잘했던 과목은 바로 수학이다. 성악을 전공한 빌로퍼도 수학을 잘했고 그것이 게임개발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윌라이트는 일찍이 기획자는 자신의 생각을 수치화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학교자체가 싫었던 피터몰리뉴 조차도 자신이 가장 싫어하지 않았던 과목은 수학이 유일했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과학자인 리차드 게리엇 역시 수학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고 한다. 만약에 여러분이 유능한 게임기획자가 되고 싶다면 당장 수학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것이다.


<아하!>  제목 게임 & 워치란
게임&워치는 닌텐도 사장인 야마우치 히로시가 길거리에서 전자계산기로 게임을 하는 샐러리맨들을 보고서 착안한 휴대용 게임기이다. 게임&워치는 게임보이와 다르게 하나의 게임전용으로 나온 휴대용 액정게임으로 생각하면 좋다.
 


<아하>
미야모토 시게루의 대표 게임 시리즈별 판매량
동킹콩 시리즈
휴대용 7타이틀 1500만개
가정용 10타이틀 2800만개
합계 4300만개

슈퍼 마리오 시리즈
휴대용 9타이틀 5400만개
가정용 10타이틀 1억2000만개
합계 1억7400만개

젤다의 전설 시리즈
휴대용 5타이틀 1200만개
가정용 7타이틀 3000만개
합계 4200만개


<아하!>  너무 어려웠던 게임 젤다의 전설
미국에서 처음 젤다의 전설이 발매됐을 때만 해도 이 게임은 무척 어려운 게임으로 인식되었다. 기존에 없는 새로운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의 닌텐도 지부에서는 젤다의 전설 판매에 무척 비관적이었다. 그들은 우선 나중에 고객들이 게임에 대한 난해함 때문에 문의를 많이 할 것으로 예상하고 전화상담센터를 연다. 그리고 처음에 10명에 불과했던 상담원은 나중에 100명으로 늘어날 정도로 젤다의 전설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아하!> 마리오 시리즈 판매량 베스트 파이브(일본판매기준)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FC/1275만)
슈퍼 마리오 랜드 (GB/590만)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3 (FC/490만)
슈퍼 마리오 월드 (SFC/355만)
슈퍼 마리오 64  (N64/229만개)  


주요 대표작

2005년 Nintendogs
2002년 젤다의 전설 : 바람의 택트
2001년 피크민
1998년 젤다의 전설 : 시간의 오카리나
1996년 슈퍼마리오 64
1990년 슈퍼마리오 월드
1986년 젤다의 전설
1985년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1981년 동키콩

주요 수상 경력

미국 인터랙티브 아츠앤 사이언스 학회 명예의 전당 헌액(AIAS)
일본 소프트웨어 올해의 인물 대상
일본 디지털 미디어 대상 (젤다의 전설 시간의 오카리나)
영국 골든 조이스틱 명예의 전당 1호
게임의 거리 헌액

출처 : http://knol.google.co.kr/k/-/-/1g0l9jjo3f9xf/11#   김정남